오늘의 역사

10월 19일과 20일의 역사 - 제주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 1987년 검은월요일

스마일루 2014. 10. 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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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위령비와 묘소들]

 

좌익과 우익간의 충돌속에서 영문도 모른채 죽어갔던 사람들이 있다.

친일청산문제와 이념갈등의 정점에서 벌어졌던 사건이었다.

그런 유혈 사태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지만,

지금이라고 얼마나 다른가 싶다.

표면적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은 이젠 없지만,

여전히 좌우갈등 속에서 죄없는 국민들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고 있을까?

특히 4.3사건 이후 제주도민 학살의 주역이었던

서북청년단 부활을 외치는 사람들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확실히 역사는 역사를 몰라서 반복되는 것이 맞다.

인간이라면 알면서도 그 역사를 반복할리 없기 때문이다.

 

 

 

 

 

 

- 링 크 -

 

10월 20일과 21일의 역사

- 폴 디랙 등

http://blog.daum.net/smileru/8888359

 

 

 

- 순 서 -

 

1948년 10월 19일

- 제주 4·3 사건 진압을 거부한

국군 14연대가 봉기하다. (여수·순천 사건)

 

1987년 10월 19일

- 미국의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가

하루 낙폭으로는 최대치인 22%나 하락(검은 월요일).

 

 

 

 

 

 

 

10월 19일과 20일의 역사

Wikipedia

 

10월 19일

BC 202년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한니발자마 전투에서 이기다.

1469년 -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결혼하면서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스페인으로 통합되다.

1933년 - 독일국제 연맹에서 탈퇴하다.

1943년 - 러트거스 대학교의 연구진들에 의해 스트렙토마이신이 발견되다.

1948년 - 제주 4·3 사건 진압을 거부한 국군 14연대가 봉기하다. (여수·순천 사건)

1950년 - 대한민국의 국군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평양을 탈환.

1955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무역협정이 체결.

1987년 - 다우 존스 공업평균지수검은 월요일에 하루 낙폭으로는 최대인 22% 하락하다.

 

 

10월 20일

1740년 - 마리아 테레지아오스트리아의 왕위에 오르다.

1818년 - 미국과 영국 사이에 국경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다.

1827년 - 그리스 나바리노 항 인근에서 나바리노 해전이 일어나 터키-이집트 해군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 연합군 해군에 궤멸되다.

1870년 -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회하다.

1940년 - 한국의 독립투사 이범윤 사망.

1964년 - 미국의 정치인 허버트 후버 사망.

1973년 - 엘리자베스 2세가 참석한 가운데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정식으로 개관하다.

1983년 - 대한민국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타이거즈가 창단 첫 우승을 달성했다.

1984년 - 영국의 물리학자 폴 디랙 사망.

2011년 - 대한민국의 산악인 박영석과 대원 2명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되다.

2011년 - 리비아의 독재자이자 정치인, 군인 무아마르 카다피 사망.

 

 

  

 

   1740년 10월 20일 -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의 왕위에 오르다.

 

   참고글 : {'12. 5월 둘째주} 마리아 테레지아 탄생 / 문명5G&K-(#1-티져) 마리아 테레지아

 

 

 

 

  

 

 

 

1948년 10월 19일

- 제주 4·3 사건 진압을 거부한 국군 14연대가 봉기하다. (여수·순천 사건)

 

 

 

  영화 '지슬'로 주목을 받았고 최근 '서북청년단' 부활 논란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제주 4.3 사건... 말이 나온 김에 그를 쭉 설명해봐야 겠다. 4.3 사건과 이어진 수년간의 참상은, 제주도에서 1947년 3월 1일의 3.1절 기념식 때 한 어린아이가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치이면서 싹 트게 된다. 안그래도 일제로부터 광복을 맞이한 이후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던 제주도에서,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하의 경찰로 멀쩡히 활동하는 것에 불만을 가져오던 군중이, 3.1절 기념식의 그 사건으로 경찰서를 항의방문하고 돌을 던지게 되는데, 그에 경찰들은 군중들에게 발포를 하게 되고 결국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참상의 시작이었다.

 

   미군정은 잘못된 발포였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관련자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되면서 군중들의 반발은 거세져갔다. 이에 남한의 좌익단체, '남로당'이 전단지를 돌리고 피해자 모금활동을 벌이며 가세하게 되고, 그렇게 되자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에게 이는 단순한 민중의 반발이 아닌 좌익세력의 국가전복 활동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요즘도 그렇게 보는데 광복 직후에야 오죽했을까? 여튼 3월 10일에는 제주도민들이 총파업을 벌이게 되고, 경찰은 파업에 동참한 경찰들을 해고하고 빈자리를 서북청년단원들로 채우게 되며, 제주도민들과 제주경찰+서북청년단은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1948년이 되었는데,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한 1대 국회의원 선거인 5.10총선이 진행되려 하자, 남로당원이던 김달삼 등 350여명은, 친일파 척결을 하지도 못한채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남한 정부에 반대하고자 제주도 24개 경찰지서 중 12개를 급습한다. 훗날 이는 북한 공산당의 지령없이 독단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밝혀졌만, 어찌되었건 반란이라 할 수 있는 무장폭동이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제주4.3사건 하면 이 경찰서 습격에만 집중해 그를 주도한 남로당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는데 그런 시각에는 문제가 있다. 이후 수년간의 사건 전체를 4.3사건으로 보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4.3사건으로 제주도의 서북청년단원들이 대거 희생되게 되고, 결과적으로 제주도내의 우익세력과 좌익세력간의 무력충돌로 번지게 된다. 미군정은 전국에서 차출한 군대와 경찰병력을 제주도로 보냈고, 함정으로 제주도를 봉쇄해 버리게 되며, 서북청년단과 같은 반공단체들도 제주도로 추가로 보내지게 된다. 이후 우익세력과 좌익세력간의 충돌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당연히 발생하게 되었다.

 

   이제  '오늘의 역사'가 등장하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10월에 제주도에 군 병력을 증파하여 좌익세력을 쓸어버리고자 했다. 그런데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 군인들이 그에 반발하며 1948년 10월 19일 오늘 무장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4.3사건을 일으킨 단체인 남로당의 또다른 당원들이 북한의 지시와는 별개로 제주도 남로당 토벌을 막고자 움직인 것이었다. 남로당원들은 여기에서도 기본적으로 친일경찰들에 대한 분노를 이용했고, 친일경력 인사들과 가족들을 살해했는데, 그에 이승만 대통령은 여수와 순천에 계엄령을 내리고 그들을 진압했고, 도심에서 박격포 공격이 이어지는 등 격렬한 시가전까지 이어진 끝에 10월 27일에 그들은 완전히 소탕당한다. 하지만 협조자 색출 과정에서 최소 439명의 민간인들이 진압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이것이 여수-순천 사건이다.

 

   결국 이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어 대한민국 내부의 공산주의 세력 척결의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됐다. 12월에는 먼훗날 논란이 된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기도 했는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계획대로 제주도에 군 병력을 증파한 뒤, '해안선에서 5km이상 들어간 지역을 통행하는 자들은 폭도로 간주한다'고 발표하고, 여수-순천 사건을 진압한 뒤인11월 17일에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 해안선 5km 안쪽지역의 모든 것들을 초토화시켜버린다. 여수-순천 사건이 그러한 무자비한 진압방식을 낳은 것이었을까? 하지만 그 무자비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는데, 해안선 쪽으로 이동해있던 제주도민들도 폭도들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하였고, 결국 제주도민들은 해안선을 떠나 산으로 도망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곳에서는 또 모든 것을 초토화시켜버리던 계엄군에게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결국 산으로 도망간 제주도민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폭동을 일으킨 무장대와 함께 움직이거나 그에 동참할 수 밖에 없었다. 비정상적인 무장대 토벌 방식이 무장대를 키우게 된 것이었고, 이는 더 큰 피를 흘려야 사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도 1949년에 5.10 총선거가 정상적으로 치뤄지고,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분위기는 조금 반전된다. '산에서 내려오면 용서하겠다'는 정부의 발표가 그것이었는데, 그 말에 많은 제주도민들이 하산했고 혐의가 있는 자들도 죽임을 당하지는 않고 체포되어 구속되어 그것으로 사태가 마무리 되는 듯 했다. 하지만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좌익세력의 활동을 우려한 이승만 정부는 체포한 4.3사건 관련자들을 즉결처분으로 사형시키고 하산했던 제주도민들도 학살하고 만다.

 

   이러한 끔찍한 역사속에서 최소 1만명, 최대 3만명이 학살당했다. 애초에 4.3사건에 참여한 남로당원 김달삼과 폭도들이 350여명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또 확인된 피해자 중에는 여성이 21%, 10세 이하 어린이가 5.6%, 노인이 6.2%였다. 많은 제주도민들은 학살을 피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오늘날의 '재일외국인'의 근간이 되었고, 스스로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한국전쟁 당시 자원입대를 해야 했다. 생존자들은 '좌익이고 우익이고 맘에 안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고 증언했다고.

 

 

   정말 광기어린 사건이었다. 광기, 분노, 그것의 결과가 무엇인지 분명히 말해주는 사건이고 말이다. 친일파를 척결하겠다는 좌익세력들의 의지 자체는 높이 살만 했으나, 그것이 폭력적으로 분출된 결과는 더 큰 폭력을 낳고 말았다. 더 어처구니 없는건 좌익, 우익세력들끼리 죽고 죽였다면 모르겠으나, 괜한 민간인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국가 분열의 결과였고, 더 나아가 애초에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한 우리의 한계였다. 이런일이 다시는 일어나선 안되겠고 또 그럴것 같지도 않지만, 서북청년단을 부활시키겠다는 단체를 보면서 몸서리처지지 않을 수 없는 요즘이다.

  

 

 

  

 

 

 

1987년 10월 19일

- 미국의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가

하루 낙폭으로는 최대치인 22%나 하락(검은 월요일).

 

 

   검은 월요일... 이것은 대공황를 촉발한(전조,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검은 목요일'과는 다른 것이다. 1929년 10월 24일(그러고보니 같은 10월이다)에 다우존스 산업지수가 20%하락한 사건이 검은 목요일인데, 당일에만 투자자 11명이 자살했으며, 이후 출렁이던 주식시장은 1930년이 되어 회복되었으나 1930년대 말에 다시 폭락, 진짜 대공황이 시작되게 되었다. 뭐 여기에서 대공황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진 않겠다.

 

   아무튼, 그런데 58년이 지난 1987년의 검은 월요일의 낙폭은 22.6%로, 검은 목요일보다 더 컸다. 당연히 세계 증시도 출렁였다고 하는데, 그래도 경제 체질, 즉 '펀더멘탈'의 문제는 아니어서인지 자살까지 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그럼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원인이었을까?

 

 

 

 

   놀랍게도 아직까지 당시의 증시 급락을 설명하는 똑 부러지는 단 한가지의 원인은 정리되지 않은 상황인데, 그래도 가장 유력한 몇가지 설들이 지적하는 공통적인 문제의 '근원'은 바로 컴퓨터 프로그램 매매다. '어떠한 상품의 프로그램 매매'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어쩌다 주가가 떨어지자 다른 컴퓨터가 주가가 더 떨어지기 전에 주식을 팔고자 주식을 싸게 내놓고, 그래서 주가가 더 떨어지자 다른 컴퓨터가 역시 더 싸게 주식을 파는식의 연쇄반응이 우연히 상황이 맞아 일어나게 되면서 주가가 폭락했다는 것이다. 검은 월요일 며칠전이었던 16일에 당시 이란-이라크 전쟁 과정에서 미국 국적 유조선이 이란 미사일에 맞아 침몰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의 '나비효과'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당황스러운 것은, 비정상적으로 폭락한 그 주가가 곧바로 회복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의 2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야(1989년 중반) 폭락 직전의 수준을 회복하게 되는데, 비정상적인 컴퓨터의 매매치고는 가혹한 대가였다. 글쎄, 어쩌면 그것이 정상적인 주가의 수준을 찾아가게 된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만 근거는 없는 이야기이고...

 

   이후 주가가 7, 13, 20% 떨어질때마다 자동으로 일정시간 주식거래를 중지하게 하는 제도가 생겼다고 한다. 바로 잘 알려져있는 '서킷 브레이커'가 그것이다. (지금은 10, 20, 30%인듯?) 투자자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 컴퓨터의 비정상적 거래를 손 볼 시간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는 1989년 10월에 바로 작동하게 되고 그 효용성을 인정받아 전세계 주식시장으로 널리 퍼지게 된다.

 

   아무튼 이러한 금융시장의 변동성은 참으로 무섭다. '금융'이라는 것의 필요성은 알고 있지만 말이다. 최근에도 미국의 양적완화 종료를 앞두고 국제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고, 우리 정부는 금융시장 활성화를 위해 가격 제한폭을 15%에서 20%로 늘리겠다고 한 상태다. 확실히 여러모로 걱정이 되긴 한다. 이번 글은 여기까지다.

 

 

 

 

 

 

 

10월 19일과 20일의 역사

 

- fin -

 

 

 

 

 

 

현재까지 수정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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