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0월 5일과 6일의 역사 - 백마고지전투, 사다트대통령 암살과 이집트, 007 첫개봉

스마일루 2014. 10. 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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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부근에서 참호를 파는 국군]

 

참 말로 들어서는 와닿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공감이 안된다', '말도 안된다'는건 아니고,

충분히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충분히 잘 알지 못할 것이 분명한 것,

즉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그 느낌과 감정을 비교해볼 어떤 것도 없어서

내가 와 닿는다고 느끼는 것 그 이상일 것이 확실한 것, 그런 것들 말이다.

내가 볼 때는 전쟁, 전투가 그렇다.

 

 

 

 

 

 

- 링 크 -

 

10월 5일 또는 6일이 포함된

지난 '오늘의 역사' 없음.

 

 

 

- 순 서 -

 

62년전, 1952년 10월 6일

한국 전쟁: 철원 서북방 395 고지에서 백마고지 전투가 시작되다.

 

52년전, 1962년 10월 5일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첫 작품인 《007 살인번호》가 개봉하다.

 

33년전, 1981년 10월 6일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4차 중동전쟁 8주년 기념식장서 회교 극단주의 군인들에게 피살.

 

 

 

 

 

 

 

 

10월 5일과 6일의 역사

WIkipedia

 

 

10월 5일: 포르투갈공화국의 날

200년 - 백제, 신라정벌. 이에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은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를 보내 금은·비단 등을 조공함. 고구려·백제가 서번(西蕃)이라 칭하고 조공할 것을 맹세함.

1688년 - 오렌지공 윌리엄브리섬에 상륙하며 명예 혁명이 시작되다.

1831년 - 미국의 노예 지도자 내트 터너가 사형을 선고받다.

1908년 - 페르디난드 1세오스만 제국의 건국 이후 첫 번째 차르가 되다.

1913년 - 영국이 키프로스를 합병하면서 프랑스와 함께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다.

1935년 - 파커 형제가 보드 게임 모노폴리를 공개하다.

1947년 - 소비에트 연방 등 동구 9개 공산국, 공산당 정보기관인 코민포름 결성.

1958년 - 진먼 포격전이 끝났다.

1962년 -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첫 작품인 《007 살인번호》가 개봉하다.

1989년 - 티베트14대 달라이 라마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다.

2000년 - 유고슬라비아 연방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에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가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일어나다.

2001년 - 미국에서 탄저병 감염으로 사망자 발생

2006년 - 전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반인륜범죄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다.

2011년 - 애플의 창립자 중 한 명인 스티브 잡스가 사망하다.

 

 

10월 6일

404년 - 비잔티움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아내인 아일리아 에우독시아가 아이를 낳던 도중 사망하다.

1582년 - 그레고리력의 전면 시행 때문에, 이 날은 이탈리아, 폴란드, 포르투갈, 스페인의 달력에서 삭제되었다.

1806년 -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이 성립되다.

1946년 - 대한민국의 일간지 경향신문 창간

1952년 - 한국 전쟁: 철원 서북방 395 고지에서 백마고지 전투가 시작되다.

1976년 - 중화인민공화국화궈펑 총리가 장칭·왕훙원·장춘차오·야오원위안사인방 체포를 지시하다.

1981년 -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4차 중동전쟁 8주년 기념식장서 회교 극단주의 군인들에게 피살.

1995년 - 《네이처》 지에 페가수스자리 51을 도는 행성 발견에 대한 기사가 실리다.

2000년 - 대한민국 의료계 4차 총파업(~ 10월 10일).

2010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김정은김정일의 정식 후계자로 확정되었다.

 

 

 

 

 

 

 

 

1952년 10월 6일

- 한국 전쟁: 철원 서북방 395 고지에서 백마고지 전투가 시작되다.

 

 

   백마고지 전투, 대단한 전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내용을 몰라 한번 찾아봤다. 일단 1952년 10월의 상황은 이미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이 밀려 내려와 오늘날의 휴전선 부근에서 고지전을 벌이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1951년 7월에 이미 휴전 회담이 시작된 상황이었으니, 1년도 넘게 지난 1952년 10월이라면 잠잠해질법도 하지 않았나 싶지만 그런건 없었다. 조금이라도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되면 휴전회담이 끝나는 순간 그 땅은 자신들의 땅이 될 예정이었으니...

 

   그런 가운데 백마고지는 철원지역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중공군의 관심 대상이었다. 옆 지도에서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백마고지(White Horse Hill) 동쪽으로는 철원계곡(The Ch'orwon Valley), 철원평야가 훤히 내려다 보였고, 이 지역 자체는 서울에서 전방으로 뻗어나가는 보급로의 중심지였기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역을 차지한다면 공방전이 계속되던 주변의 고지전에서 손쉽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말그대로 '요충지'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2년 10월 6일 새벽부터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말그대로 '인해전술'로 공격을 해왔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 뿐만은 아니었는데, 주변 호수의 제방을 폭파시켜 국군의 증원병력을 늦춘다음 공격을 개시한 것이었다. 이에 한미연합군은 미공군의 지원과 주변 포병전력을 총동원하여 대항했다. 그래도 일단 고지를 지키는 것은 사람, 우리 국군이었다. 수적으로 매우 열세였는데, 당시 9사단장인 김종오 당시 소장은 백마고지 병력을 빠르게 교대시켜가며 부상당하고 지친병력들을 보완해갔다. 찾아보니 월권을 행해 주변 부대를 동원하기도 했다는데, 나중에 문제가 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백마고지 전공으로 쭉쭉 진급하게 되었으니... (10년뒤 대장으로 별을 4개나 달게 된다)

 

   결과적으로 백마고지를 우리 국군은 지켜냈지만, 이 '백마고지 전투'가 진행된 10월 15일까지 10일동안 24번이나 바뀌었다고 한다. 치열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래도 우리 국군이 백마고지에서 완전히 밀려나는 않았다고 하니, 말 그대로 열흘동안 줄다리기를 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국군은 3428명의 사상자가 났고(중국 추산으로는 9400명), 중공군은 6700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한다. (우리 추측으로는 14322명) 뭔가 말로는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중 하나였던 백마고지 전투에 대한 설명이 금방 끝나버렸지만, 생각해보면 참 이런게 상상하기가 어렵다. 전쟁영화를 좋아해 그를 많이 보기도 했고 그래서 끔찍하다는 것을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잘 인식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어디 이런 정도만으로 '조금은 느껴진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수천명의 사람들이 눈 앞에서 죽고 죽이는 광경이 상상되지 않는다. 어느나라에서든 참전용사들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말하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행위 중에 전쟁만큼 경험하지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을까? 다시는 반복되서는 안될 역사이지 않을까 싶다.

 

  

 

 

 

 

 

1962년 10월 5일

-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첫 작품인 《007 살인번호》가 개봉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찾아보다가 '007 시리즈'가 원래 소설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영국 작가 '이안 랭커스터 플레밍'이 쓴 소설이라고 한다. 기자에 주식 중개인도 하다가 2차세계대전때 영국 해군 정보부에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특공대를 파견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했다고 하는데, 그 때 007 시리즈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전쟁 이후 외신부장이 되어 자메이카에 갔을때 소설을 완성해 출간했다고. (자메이카에 '이언 플레밍 국제공항'도 있다!)

 

   소설과 영화의 순서도 흥미롭다. 영화로는 거의 최신작인 '카지노 로얄'이 소설로는 처음 출시된 것이더라. 또 영화가 소설보다 많다. 이제는 원작 소설에 없는 내용이 나오는 상황이라고 봐야겠지? 또 오늘의 역사에 해당되는 '007 살인번호'의 경우에는 영어 원제가 'Dr. No'로 '노 박사' 정도인데, '007'이라는 제목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인지 No를 '번호'로 고쳐번역하여 '007 살인번호'가 되었다.

 

   아무튼 어린시절 007 시리즈를 정말 재미있게 봤던 것 같다. 그런 영화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후에 '미션임파서블'시리즈도 나오고,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도 나오면서 첩보물들이 빠르게 늘었지만, 007은 여전히 그 특유의 소재와 스케일이 흥미로운 시리즈인 듯 하다. 오히려 요즘에는 너무 현실적이 되서 그 느낌이 퇴색한 것 같기도?

 

   아래는 위키에 정리되어 있는 소설과 영화의 순서다. 한번 보시길.

 


 

- 소설 순서 -

 

 

 

 

날짜 순 제목 원어제목
1953년 카지노 로얄 Casino Royale
1954년 《죽느냐 사느냐》 Live and Let Die
1955년 《문레이커》 Moonraker
1956년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Diamonds Are Forever
1957년 《위기일발》 From Russia, with Love
1958년 《살인번호》 Dr. No
1959년 《골드핑거》 Goldfinger
1960년 《포 유어 아이즈 온리》 For Your Eyes only
1961년 《썬더볼》 Thunderball
1962년 《나를 사랑한 스파이》 The Spy Who Loved Me
1963년 《여왕 폐하 대작전》 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
1964년 《두 번 산다》 You only Live Twice
1965년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The Man with the Golden Gun
1966년 《옥토퍼시와 리빙 데이라이트》 Octopussy and The Living Daylights

 

 

- 영화 순서 -

작품명 제작년도 감독 주연
Dr.No (살인번호) 1962년 테런스 영 숀 코너리
From Russia With Love (위기일발) 1963년
Goldfinger (골드핑거) 1964년 가이 해밀턴
Thunderball (썬더볼 작전) 1965년 테런스 영
You only Live Twice (두번 산다) 1967년 루이스 길버트
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 (여왕폐하 대작전) 1969년 피터 헌트 조지 라젠비
Diamond Are Forever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1971년 가이 해밀턴 숀 코너리
Live and Let Die (죽느냐 사느냐) 1973년 로저 무어
The Man With The Golden Gun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1974년
The Spy Who Loved Me (나를 사랑한 스파이) 1977년 루이스 길버트
Moonraker (문레이커) 1979년
For Your Eyes only (유어 아이즈 온리) 1981년 존 글렌
Octopussy (옥토퍼시) 1983년
A View To A Kill (뷰 투 어 킬) 1985년
The Living Daylights (리빙 데이라이트) 1987년 티머시 돌턴
License To Kill (살인면허) 1989년
Golden Eye (골든아이) 1995년 마틴 캠벨 피어스 브로스넌
Tomorrow Never Dies (네버다이) 1997년 로저 스포티우드
The World Is Not Enough (언리미티드) 1999년 마이클 앱티드
Die Another Day (어나더데이) 2002년 리 타마호리
Casino Royale (카지노 로얄) 2006년 마틴 캠벨 대니얼 크레이그
Quantum of Solace (퀀텀 오브 솔러스) 2008년 마크 포스터
Skyfall (스카이폴) 2012년 샘 멘데스
Devil May Care (데블 메이 케어) 2015년
Casino Royal (카지노 로얄)[7] 1967년 발 게스트 외 데이비드 니븐
Never say never again(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6] 1983년 케빈 매콜리 외 숀 코너리
아래 두개는 정식 시리즈가 아님.

 

 

 

 

 

 

 

1981년 10월 6일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4차 중동전쟁 8주년 기념식장서 회교 극단주의 군인들에게 피살.

 

 

    안와르 사다트는 이집트인 아버지와 수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38년 이집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2차세계대전중에 독일쪽인 추축국의 도움을 받아 영국을 이집트에서 몰아내려하다 영국당국에 체포되었지만 감옥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가말 압델 나세르'의 '자유장교단'에 가입해 1952년 이집트의 무하마드 알리 왕조를 전복시킨 군사 쿠데타에 적극 가담했고,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 고위직을 지내다, 2~4대 대통령을 지낸 나세르가 심장발작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후임으로 1970년에 제5대, 세번째 이집트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대통령 자리에 올랐을 때 이집트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일단 그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이었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적국 이스라엘이 기습공격으로 성과를 거둬 6일만에 중동국가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영토를 크게 늘린 상황이었고 그 중 상당수는 이집트의 영토였기 때문이다(6일전쟁). 반면 이집트는 전쟁으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만 집중한 나머지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았었다. 그에 대통령이 된 사다트는 일단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정상화 시켜 안정적으로 경제를 성장시킬 생각을 했는데, 사실 그것은 기만이었다.

 

   사다트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침공하고자 했다. 우선 이스라엘과의 불안한 정세를 어느정도 해결한 사다트는 아랍 국가간의 결속을 강화시켰다. 특히 1971년에 시리아, 리비아와 함께 '아랍 연방 공화국'을 건설한 것은 굉장히 큰 사건으로, 아랍권의 통일을 위한 첫 발걸음이었다. 그리고 소련 군사고문단을 받아들이고 최신병기를 구입하여 국방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한편 이스라엘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유대인 학살로 인한 '세계대전의 피해자'라는 동정을 받고 있던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은 침략전쟁이었던 3차중동전쟁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고, 그로 인해 미국도 대놓고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어려워졌으며, 무엇보다 6일만에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을 보면서 서양국가들은 이스라엘이 중동의 패권국가로 떠오르게 될까 우려하면서 이스라엘 지원을 주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영국은 이스라엘에 무기 판매를 중단하기도 했는데, 결국 중동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되길 원하는, 즉 분열된 상태로 두길 원하는 서양국가들의 중동 대전략의 결과였다.

 

   그는 확실히 사다트의 이집트 침공계획에 도움이 되었다. 결국 1973년 10월, 이집트와 시리아군은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휴일인 '욤 키푸르'날에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하기에 이른다. (4차 중동전쟁, 욤 키푸르 전쟁)여러 아랍국가들이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했고, 소련 역시 그들을 지원했다. 결국 이스라엘은 기습공격에 당해 3차 중동전쟁으로 차지한 영토를 전쟁 초기 상당수 내어주고 극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이후 미국의 도움으로 반격에 성공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수도 근처까지 진격하게 되고 수에즈 운하도 넘게 되는데, 이에 소련이 직접 움직이려 하자 미국이 평화협상을 추진하게 되고, 결국 아랍연맹, 소련, 미국이 각각 수십억달러씩 쏟아부은 전쟁은 일단락되고 만다. 이집트는 그래도 3차 중동전쟁으로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는데 성공한다.

 

   중요한건 여기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영토를 되찾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적지않은 피해를 입은 이집트의 사다트가, 그동안의 강경노선에서 평화노선으로 완전히 옮겨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글쎄, 어떤 깨달음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의 중재 때문이었을까? 1977년 이스라엘의 정권이 교체되자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접촉을 시작했고, 그 해 11월에는 아랍 지도자 중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고 12월에는 정상회담까지 진행하게 된다. 중동 평화협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금은 축출된 리비아의 '카다피'를 비롯한 아랍세계의 지도자들이 그를 거칠게 비난했다. 성공하진 못했지만 4차 중동전쟁으로 존재감을 보여준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반영구적인 평화협상을 진행한다는 것을 중동 국가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끝내 1978년 9월에 미국은 캠프데이비드로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와 이집트 사다트를 초정해 평화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두 정상은 그 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사진 왼쪽부터 베긴, 카터, 사다트)

 

   하지만 아랍세계를 비롯한 이집트 내부의 불만은 폭발하기 시작했다. 이에 사다트는 반론을 펼치기도 했지만 상황이 심각해지자 결국 권력의 힘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군사쿠데타로 세워진 정권이 이어져오고 있었던 것이지만,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고 불법사찰을 금지하는 등 독재이미지를 벗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사다트였는데, 평화협정 이후 급변하기 시작하여 1500여명의 반정부 인사들을 체포하고 앞으로 15000명을 더 체포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심지어 국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치뤄 자신을 지지하는 정당이 다수당이 되도록 했으며, 국민투표를 조작해 선거제도를 바꿔 영구집권을 시도했다.

 

   그러니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특히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애초에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여 소정의 성과를 거둔 사다트를 지지했던 그들이었지만 이젠 완전히 돌아서게 된 것이었다. 결국 암살의 우려가 커지기 시작했는데, 사다트는 암살에 철저히 대비하면서 그들과의 대결을 계속해 왔다.

 

   그러던 1981년 10월 6일이었다. 4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군이 수에즈운하를 건넌 것을 기념하는 대 이스라엘 전승 8주년 기념식에서 병사들의 퍼레이드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트럭이 대열에서 멈추더니 뒤에서 장교 한명이 내려 사다트가 있는 연단으로 수류탄을 던진 뒤 AK소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 군인은 사격 교관이었는데, 첫발이 바로 사다트의 심장을 관통해버렸다. (조금 의문이긴 하다) 이어 트럭에서 총을 쏘던 두명이 내려 연단으로 달려가 공격을 계속했고, 결국 사다트는 한발의 수류탄과 37발의 AK소총 실탄의 피해를 입고 사망했다. 물론 첫 발만으로도 죽기에 충분했지만.

 

   사다트를 포함해 11명이 죽었다. 이후 사다트의 장례식에서는 많은 서방 지도자들이 참석했다고 하는데, 아랍 지도자들은 한명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 대통령의 서거로 이집트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헌법에 따라 부통령을 대통령에 추대하게 된다. 그는 사다트의 장례식 이후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으로 정식 임명되었는데, 그가 바로 '호스니 무바라크'였다. 그는 사다트에 이어 7, 8, 9, 10, 11대 대통령을 지내며 30년간 이집트에서 독재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지난 2011년 '아랍의 봄' 열풍 때 축출당했는데, 그래도 무바라크는 독재를 하는 동안 사다트의 이스라엘 평화노선을 이어갔다고 한다. 

 

 

사다트 암살 당일 행사장 자리에서 찍힌 부통령 무바라크와 사다트.

어떻게 무바라크는 옆자리에서 멀쩡히 살아남았다.

 

 

 

   결국 사다트의 평화노선을 놓고 벌어진 갈등과 이어진 사다트의 강압적 행보에 대한 불만 그리고 암살은, 결과적으로 이집트가 대 이스라엘 강경노선으로 가게 하지도 못했고 이집트에 독재 권력이 들어서는 것도 막지도 못한 셈이 됐다.

 

   이 일련의 역사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집권 초부터 전쟁을 준비했던 권력가, 그리고 전쟁, 이후 선택한 평화노선, 그를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평화를 위한 억압, 그리고 암살과 등장한 독재권력...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그가 죽었어야 했는지 아닌지 등등, 참 생각할 거리가 많다. 꼬이고 꼬이는 역사의 예 그 자체인 듯 하고 말이다. 그러고보니 중동 역사들이 늘 그랬던것 같기도? 이번 글은 여기까지다.

 

 

 

 

 

 

10월 5일과 6일의 역사

 

- fin -

 

  

  

 

 

 

오타수정 (201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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