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9월 21일과 22일의 역사 - 1948반민특위와 2014세월호특위, 아부심벨신전, 호빗, 중앙일보 등

스마일루 2014. 9. 20.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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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어 끌려가는 친일파들. 그러나 결국 모두 석방되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반민특위는 거침없이 친일파들을 쓸어 담았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삼권분립 침해'와 종북론을 내세우며 반민특위를 공격했고,

끝내 반민특위는 폭력과 폭압으로 무력화 되면서 친일파들은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게 되었다.

:

그리고 60여년이 지난 오늘, 세월호특위 또는 세월호특검은 구성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친일파처럼 나라와 국민을 대놓고 팔아먹은 정도는 되야 두려워했던 특별위원회를,

지금의 청와대와 정부관료들은 또다시 '삼권분립'을 운운하면서까지 왜 그렇게도 두려워 하는 것일까?

 

민생을 운운하며 국회를 압박하는 지금의 정부는

반민특위를 힘으로 무력화시켰던 이승만과 같은길을 가려는 것인가?

 

 

 

 

 

 

- 링 크 -

 

9월 21일 또는 22일이 포함된

지난 '오늘의 역사' 없음.

 

 

 

- 순 서 -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 최고 목판본 중국서 발견
대한민국의 4대 일간지 중앙일보 창간
이집트에서 아부 심벨 신전의 이전 공사가 완료되다.
반지의 제왕의 전편, 톨킨의 ‘호빗’이 처음으로 간행되다.


66년전, 1948년 9월 21일

- 대한민국 친일파 단죄를 위한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65년전, 1949년 9월 21일

- 대한민국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 폐지법안 가결.

 

 

 

 

 

 

 

 

 

 

 

 

9월 21일과 22일의 역사

Wikipedia

 

 

9월 21일: 몰타, 벨리즈, 아르메니아독립기념일

454년 - 로마 황제발렌티니아누스 3세라벤나에서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를 죽이다.

1745년 - 재커바이트의 반란: 찰리 에드워드 스튜어트에 의해 지도된 재커바이트 부대가 프래스톤팬스, 동 로디언, 스코틀랜드에 있는 하노버군을 격파했다.

1792년 - 프랑스 혁명: 프랑스, 왕정 폐지하고 공화제 선포

1866년 - 영국의 소설가 허버트 조지 웰스 탄생.

1898년 - 청나라서태후광서제를 유폐하고 섭정을 실시하면서 무술변법이 좌절되다.

1902년 - 이란의 회교 혁명가 루홀라 호메이니 탄생.

1937년 - 《반지의 제왕》의 전신인 존 로널드 루엘 톨킨의 《호빗》이 처음으로 출판되다.

1953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군 군인인 노금석(사진)미그 15를 타고 대한민국으로 망명하다.

1954년 - 일본의 총리 아베 신조 탄생.

1965년 - 베트남 전쟁: 대한민국 최초의 월남파견 전투부대인 청룡부대 결단식 포항서 열림

1985년 - 서울평양에서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다.

1990년 - 고려대학교 이호왕 박사 팀과 녹십자사가 세계 최초로 유행성출혈열예방 백신을 개발하다.

1994년 - 지존파가 체포되다.

1999년 -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 최고 목판본 중국서 발견

2001년 - 대우자동차 채권단, 미국 제너럴 모터스사와 매각 양해각서 체결

2003년 - 갈릴레오 우주선목성에 충돌하며 임무를 마침

2006년 - 정남규가 사형판결을 받았다.

 

 

9월 22일: 불가리아, 말리독립기념일

1792년 - 프랑스 대혁명: 국민공회가 공화정을 폐지하기로 투표한지 하루 뒤에 프랑스 제1공화국이 설립되다.

1862년 -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 '노예해방 예비선언’ 발표.

1937년 - 중국 국민당공산당 사이에 제2차 국공 합작이 성립되다.

1944년 - 제2차 세계 대전: 핀란드일본과의 국교를 단절하다.

1948년 - 대한민국 친일파 단죄를 위한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1949년 - 대한민국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 폐지법안 가결.

1949년 - 소비에트 연방,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원폭실험에 성공.

1965년 - 대한민국의 4대 일간지 중앙일보 창간

1966년 - 정기국회 때 국회의원 김두한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한 항의로 정일권 국무총리 이하 국무위원들에게 오물을 투척한 이른바 국회 오물투척사건이 터짐.

1968년 - 이집트에서 아부 심벨 신전의 이전 공사가 완료되다.

1975년 - 대한민국, 민방위대 창설.

1983년 - 대구 미국문화원 폭발 사건 발생.

1980년 - 이라크이란을 침공해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다.

2008년 - 여주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1792년 9월 21일 - 프랑스 혁명: 프랑스, 왕정 폐지하고 공화제 선포 

 

   참고글 : 7월 14일과 15일의 역사 - 프랑스혁명 정리

 

 

 

   ◆ 1999년 9월 21일 -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 최고 목판본 중국서 발견

 

   아니, 이거 고등학교때인가 '금오신화'라는게 있다고 배웠던것 같은데, 그게 1999년에서야 발견된 것에 놀랐다. 그게 바로 교과서에? 찾아보니 애초에 일본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목판본이 있었고 그것은 1927년에 소개되었는데, 1999년에는 16세기 조선시대의 문신 '윤춘년'이 직접 옮긴 필사본이 발견된 것이더라. 즉 내용은 오래전부터 일본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지만, 한국인이 만든 실물이자 가장 오래된 것이 처음 발견된 것이다. 하지만 위키에는 '목판본'이 발견되어 있다고 하는데, 위키 내용이 좀 뒤죽박죽인 듯 하다. 수정하고 싶지만 나도 정확히 몰라 일단 넘어가야 할 듯 하다.

 

 

 

  ◆ 1965년 9월 22일 - 대한민국의 4대 일간지 중앙일보 창간 

 

   중앙일보는 다른 주요 신문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늦은 1965년 9월 22일에 삼성그룹의 창립자인 이병철에 의해서 창간되었다. 1966년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 당시 다른 언론과 다르게 삼성을 옹호하는 보도를 해서 논란이 일었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왜곡보도가 심하다며 재벌의 언론 소유를 금지해야 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이 일로 이병철 회장은 삼성 계열사인 한국 비료를 국가에 바친다. 1994년 민영화 된다. 오늘날의 '삼성정밀화학') 아무튼 1999년 삼성에서 분리되었지만 이건희의 부인 홍라희의 동생 홍석현이 중앙일보 사장으로 있어 삼성과의 연관성은 아무래도 땔래야 땔 수가 없다. 하지만 최근에는 진보쪽까지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보수쪽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손석희의 JTBC뉴스가 아니어도 말이다. 앞으로가 궁금해지는데...

 

 

 

 

   ◆ 1968년 9월 22일 - 이집트에서 아부 심벨 신전의 이전 공사가 완료되다.

 

   신전을 옮겼다고 해서 뭔가하고 봤더니 이건 어마어마하더라. 바위산속에 지어진 신전이고, 입구에 산을 그대로 깎아 만든 석상이 압권인 유적이다. 이 위대한 유적이 1960년초에 아스완댐의 건설로 수위가 높아져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유네스코'와 공학자들의 노력으로 1963년부터 1966년까지 4년에 걸쳐 신전을 70m위로 그대로 이전했다고 한다. '이걸 어떻게 옮겼을까' 하는 생각에 사진들을 찾아보니 잘라서 옮겼더라. 뒤에 돌산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하긴 수장되는 것 보단 낫겠지? 원래 멋있으라고 나일강 주변 돌산에 지은 듯 한데 아쉽긴 하다.

 

 

옮기기 전

 

 

옮겨서 재건하는 과정

 

 

현재

(사진이 좌우반전된듯? 아니면 옮기기 전 사진이?)

 

 

  

  ◆ 1937년 9월 21일 - 반지의 제왕의 전편, 톨킨의 ‘호빗’이 처음으로 간행되다. 

 

   영화로는 '반지의 제왕'이 세편 나온 다음 '프리퀄'(앞선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형태로 '호빗 : 뜻밖의 여정'(2012)이 개봉되었지만, 원작자 J.R.R.돌킨은 1937년에 '호빗'을 가장 먼저 집필했다. 원래 돌킨은 '호빗'을 집필할 때 '반지의 제왕'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후속작을 구상하다 '반지의 제왕'을 생각하게 되면서 소설 '호빗'은 초판본과 이후 판본이 다소 다르다고 한다. 그렇긴 해도 기본적인 틀에는 큰 변화가 없어 '절대반지'를 다루고 있는데, 생각해보면 호빗과 골룸등의 작고 아기자기한('반지의 제왕'에 비해) 보물찾기 이야기였던 '호빗'이 엄청난 스케일의 '반지의 제왕'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1948년 9월 21일

- 대한민국 친일파 단죄를 위한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 

1949년 9월 21일

- 대한민국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 폐지법안 가결.

 

 

   앞서 간만에 너무 캐주얼한(?) 오늘의 역사를 다룬 것 같은데, 물론 이런 역사도 빼 놓지는 않았다. 사실 이게 우리가 진정으로 잊지 말아야 할 역사가 아닐까 싶다. 요즘 정세와도 관련이 깊고 말이다.

 

   1948년 9월 7일, 광복 이후의 제헌국회는 일제를 도와 국권강탈에 협력하고, 독립운동가나 가족들을 탄압하거나 살해한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다. 그렇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탄생했다. 요즘 정치에 빗대어 표현해보자면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위원회였는데, 기존 경찰조직외에 '특별경찰대'를 동원해 친일파들을 빠르게 체포해낼 수 있었다. 순식간에 조사대상 692명 중 악질기업가로 유명했던 박흥식을 첫번째로 하여 559명을 체포하는데 성공했고, 반민특위는 그들을 곧바로 재판으로 넘기게 된다. (오른쪽 사진은 박흥식)

 

   하지만 이승만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선 반민특위가 '삼권분립' 정신을 해친다고 주장하며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했는데, 반민특위가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를 체포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의 석방을 지시한 것에도 모자라 해당 반민특위 관계자들을 처벌하라고 까지 지시했다.

 

   이승만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노덕술 등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기 위해 정부관계자들을 암살하려고까지 시도했지만 내부자의 자수로 실패했고, 반민특위 위원 일부를 간첩으로 몰아 구속하기도 했다.

 

   제헌국회는 이승만 대통령과 기득권 친일파들의 이런 행태에 분노하여 체포한 의원들을 석방하라는 결의안을 의결했지만, 갑자기 4백여명의 군중들(동원된 '프락치'들이었다)이 반민특위 사무실에 몰려와 '공산당 숙청'을 외치며 몰려들어왔고, 반민특위 위원들이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그들을 돕지 않았으며, 결국 반민특위내의 특별경찰대에 의해 그들은 겨우 구출될 수 있었다. 이를 '국회프락치사건'이라고 한다. (1949년 6월)

 

   이것은 사실상 대한민국 제헌국회와 친일파 행정부간의 전쟁 그 자체였다. 봉변을 당한 제헌국회는 굴하지 않고 다시 친일 경찰 최운하등을 체포했는데, 다시 경찰은 반민특위 특별경찰대를 습격하여 특별경찰대원들을 폭행한 뒤 경찰서에 감금했고, 서울시 경찰들은 반민특위와 특별경찰대의 해체를 요구하며 사표를 제출하고 일부는 총사퇴하겠다며 정부를 압박하기까지 했다.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1949년) 친일 행위를 했던 경찰들이 반민특위 특별경찰대에 의해 체포당하자 집단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반민특위와 국회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정부에 요구했지만 될 리가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AP통신과의 기자회견에서 반민특위 습격은 자신이 지시한 것이라고 밝히기까지 했고, 6월 11일에는 반민특위 활동으로 민심이 소요되어 특별경찰대를 해산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이어 경찰들이 반민특위와 특별경찰대 간부들의 자택을 압수수색하기까지 했는데, 결국 국회의원 전체를 잡아들일 듯한 움직임에 제헌국회는 굴복하고 말았다. 7월에 결국 반민특위 활동 기한을 줄이는 반민특위법 개정안이 침묵속에 국회를 통과했고, 특별경찰대의 상실로 '수사권'과 '기소권'을 집행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 반민특위 위원, 특별경찰대 간부들이 사퇴하고 이후 친일파로 반민특위가 구성되면서 반민특위의 활동은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1949년 9월 21일, 반민특위법이 공포된지 꼭 1년만에 반민특위 폐지법안이 가결되면서 반민특위는 법적으로도 사라지고 만다. (실질적 폐지는 1951년?)

 

 

   끝내 친일파 중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이런일이 일어나고 만 것일까? 이승만은 친일파였던 것인가? 사실 이승만은 훗날 한국전쟁 발발시 일본의 참전을 격렬히 반대할 정도로 일본이 대한민국에게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철저한 현실타협주의자 이기도 했다. 광복 직후 친일파들이 일단은 기득권층을 차지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김구 등과 다르게 국외에서 독립활동을 하느라 지지기반이 없었던 그가, 귀국하여 권력을 잡고자 '바람앞의 등불' 신세가 된 친일파들과 결탁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다. 동시에 그는 북한 공산당도 매우 싫어했고, 따라서 경찰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친일파들이 제거당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할 수 있다고 보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그는 광복직후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보다 친일파를 지켜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이 광복 직후의 프레임! 이게 수십년을 가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정말 지금 그대로가 아닐 수 없다. 권력과 권력을 위한 자금, 최근에는 권력을 위한 언론이나 각종 기득권들을 놓지 않기 위해 친일파를 옹호하는 모습, 반공을 내세워 반대파를 탄압하는 모습,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특별위원회를 '삼권분립'을 해친다며 비판하는 대통령의 모습, 그리고 국회를 윽박지르는 대통령의 모습...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오늘날, '세월호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특별경찰대' 같은 것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특검'들이 그랬듯 기존의 검찰과 경찰력을 활용할테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현재의 기득권' 입장에선 더 우려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반민특위때는 반민특위와 친일파가 주류였던 경찰간의 대립구도가 형성될 수 있었고 결국 입법부 국회의 반민특위와 행정부의 경찰이 격렬히 대립했었다. 서로 무력을 가진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특위와 행정부는 그러한 대립구도가 형성될 것이 없는 상황에서 세월호특위는 검찰과 경찰력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처럼 무력으로 사무실을 습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전국민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세월호특위에 의해 공격당할 것을 우려하고 있는 청와대 입장에서는 당연히 세월호특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지않으려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정상적이거나 불공평한 것이 아니다. 행정부가 행정부를 수사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많이 봐왔지 않나? 더불어 기본적으로 당연히 죄가 있는 사람은 조사를 받아 처벌을 당하는게 순서다. 혐의가 있는 자는 방어를 법으로 하는 것이고 말이다. 과잉 수사를 당할 수 있다는 현 집권층의 우려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 행정부 관료들에 대한 조사가 필요한 것 자체도 사실 아닌가? 원칙적으로 본다면 눈꼽만큼도 수사를 당하지 않으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세월호특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이명박 내곡동 특검때처럼 특검추천위원 선정권만 야당에 줘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Weekly Voice에서 밝힌바 있다. 유가족측도 그 정도라면 수용할 의사가 있음을 일전에 내비치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여당은 그것 조차 반대하고 있다. 결국 여당과 청와대... 그냥 한마디로 말하면 '무서운거다'. 역사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반민특위의 거침없었던 모습을 잘 알고 있나보다. 그런 그들을 위해서라도 세월호특위, 세월호특검이 활동하게 되는 날이 오기를 빈다.

 

 

 

 

 

 

 

9월 21일과 22일의 역사

 

- fin -

 

  

 

 

 

 

오타수정 (201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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