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하는 시대의 한복판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인물들은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위대한 지성인이자 위대한 '행동하는 양심' 그 자체였다.
- 링 크 -
8월 18일과 19일의 역사
- 김대중과 햇볕정책, 범유럽 피크닉, 코코 샤넬, 칭기즈 칸, T-4 작전 등
http://blog.daum.net/smileru/8888324
- 순 서 -
1970년 8월 17일 - 소비에트 연방의 탐사선, 베네라 7호가 최초의 금성 표면 착륙에 성공함.
1807년 8월 17일 - 미국 발명가 로버트 풀턴, 허드슨 강에서 최초의 증기선 클레몬트 호 시운전 성공.
1901년 8월 17일 - 대한제국, 한성전기주식회사, 한양성(서울)내 첫 전등 점등식 거행.
42년전, 1975년 8월 17일
- 《사상계》 발행인이던 장준하가 사망하다.
8월 17일과 18일의 역사
Wikipedia
1601년 -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 탄생.
1807년 - 미국 발명가 로버트 풀턴, 허드슨 강에서 최초의 증기선 클레몬트 호 시운전 성공.
1897년 - 대한제국이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로 바꾸다.
1901년 - 대한제국, 한성전기주식회사, 한양성(서울)내 첫 전등 점등식 거행.
1926년 - 중국 공산당의 제3대 주석 장쩌민이 태어나다.
1962년 - 대한민국의 장면 총리가 반혁명음모 관련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다.
1970년 - 소비에트 연방의 탐사선, 베네라 7호가 최초의 금성 표면 착륙에 성공함. 지구 이외의 행성 착륙에 성공한 첫 번째 탐사선으로 기록됨.
1975년 - 《사상계》 발행인이던 장준하가 사망하다.
1998년 -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모니카 르윈스키와 섹스 스캔들 관련해 대국민 사과성명
1999년 - 터키 이즈미트에서 규모 7.4의 지진이 일어나 17,000명 이상이 사망하다.
1868년 - 피에르 장센이 일식중인 태양의 채층을 분석하던 도중 헬륨을 발견하다.
1906년 - 한말 의병장 최익현, 일본군에 잡혀 쓰시마 섬으로 유배.
1934년 - 독일, 국민투표 통해 아돌프 히틀러를 총통으로 선출.
1941년 - 나치 독일의 장애인 안락사 계획인 T-4 작전이 비판을 받아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
1949년 - 죽령터널 열차 사고가 일어났다.
1950년 - 한국 전쟁: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기다.
1976년 - 판문점에 있는 미루나무를 자르던 유엔군·한국군과 조선인민군의 병사들이 실랑이 끝에 인민군 병사가 유엔군 병사 두 명을 도끼로 살해하다.
2008년 - 파키스탄의 대통령인 페르베즈 무샤라프가 사임을 표명했다.
2009년 -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사망.
1934년 8월 17일 - 독일, 국민투표 통해 아돌프 히틀러를 총통으로 선출.
참고글 : 8월 11일과 12일의 역사 - 바이마르 헌법과 독재 사이, http://blog.daum.net/smileru/8888319
1945년 8월 18일 -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선언하다.
참고글 : 문명4BTS-(#8-3) 말레이제도 국가들의 역사 : (1) 인도네시아, http://blog.daum.net/smileru/8888038
짧은 글들이 있어 일단 쭉 다뤄보고자 한다. 요런건 또 간만인 듯?
1970년 8월 17일 - 소비에트 연방의 탐사선, 베네라 7호가 최초의 금성 표면 착륙에 성공함. 지구 이외의 행성 착륙에 성공한 첫 번째 탐사선으로 기록됨.
베네라 1, 2호는 금성에 접근하기만 했고, 3호는 착륙과정 중 교신이 끊겼다. (어쨌든 최초로 지구 외의 행성에 충돌) 4, 5, 6호도 마찬가지였다가 7호가 착륙에 성공했는데, 35분만에 교신이 두절됐다. 400도 이상의 금성 온도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지구 이외의 행성에 처음으로 착륙한 탐사선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1807년 8월 17일 - 미국 발명가 로버트 풀턴, 허드슨 강에서 최초의 증기선 클레몬트 호 시운전 성공.
발명가 로버트 풀턴은 원래 화가였다고 한다. 그러다 영국에서 증기기관으로 돌아가는 장비들을 보고 그에 빠졌는데, 증기선 제작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 외에 대리석을 자를 톱, 운하 파는 기계, 베틀(직기)을 발명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아 최초의 실용적 잠수함인 '노틸러스'를 설계하기도 했다고.
1901년 8월 17일 - 대한제국, 한성전기주식회사, 한양성(서울)내 첫 전등 점등식 거행.
1887년 경복궁 건청궁에 대한민국 최초로 전기가 들어오면서 전구가 점등되고, 이듬해인 1888년 한성전기주식회사가 설립된다. 이 때의 한성전기주식회사가 지금의 '한국전력'이다. 한국전력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1961년이었는데, 1982년에 국유화되었으며, 1989년에는 주식 일부를 거래소에 상장했다. 짧은 글 끝!
1975년 8월 17일
- 《사상계》 발행인이던 장준하가 사망하다.
장준하 선생의 사인을 놓고 근래까지도 말이 참 많았다. 앞으로도 논란은 계속되지 않을까 싶고... 아무튼 오늘은 장준하 선생에 대해서 다뤄보고자 한다. 위키 내용이 박근혜 대통령 정도로 상당한데, 최대한 간략하게 다뤄보도록 하겠다. 그러구선 항상 길어지긴 한다만...
1918년 8월 27일에 태어난 장준하는 당시 기독교인이자 학문이 뛰어난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래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1920년에 아버지 '장석인'이 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으면서 이사를 하긴 했지만, 그곳에서 아버지가 교육자로 활동한 학교에서 배우며 성장했다. 이후 아버지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교직에서 쫓겨나 목사가 되자 장준하도 목사가 되려했지만, 입학하려던 숭실전문학교 역시 신사참배거부로 폐쇄되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됐고, 그곳에서 김희숙과 결혼하였다. 김희숙의 부친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김희숙이 일제의 위협을 받게 되자 일본 유학생인 그가 서둘러 결혼한 것이었다.
그리고 1944년 1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그 때 장준하는 일본군에 자원입대를 한다. 그는 자신의 일본군 자원입대 이유를 자서전 '돌베개'에서 밝혔는데, 아버지의 독립운동과 신사참배 거부로 집안이 감시와 탄압 대상이 되어 부인도 위안부에 끌려갈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원입대로 그를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중국으로 파견되면 그곳에서 탈영하여 중국군에 동참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장준하는 이를 '환상'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학도병으로 입대해 훈련을 받은 그는 1월 20일에 중국으로 가게 됐는데, 7월에 탈영을 감행한다. 이후 밖에서 만난 탈영한 조선인들 수십명과 함께 걸어서 이동하게 되었고,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의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 들어가게 된다. 후에는 광복군 장교가 되었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광복 이후 장준하는 김구의 비서역할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9월에 장준하는 운명의 인물, '박정희'를 만난다. 우리가 아닌 유신독재의 그 박정희 말이다. 아래는 장준하가 박정희를 처음봤을 때의 에피소드다. (언론인 조갑제와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 등은 장준하가 박정희를 만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고 있긴한데, 그가 한국군에 있는 일본군 출신들이나 그를 기용하려는 시도에 격렬하게 반대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후에 박정희와 대립각을 세운 것은 그가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1945년 9월에 만났든 만나지 않았든...)
'박정희는 전형적인 일본식 군대 방침을 독립군에게 강요했어요. 이에 장준하 선생이 ‘너 뭐야’하고는 반말로 욕을 했대요. 그랬더니 이 사람이 나와서는 경례를 딱 붙이더랍니다. 하도 화가 나서 아무 생각없이 모자를 휙 벗겨서 땅에다 밟고는 ‘너는 독립군 모자를 쓸 자격이 없어, 독립군 훈련을 일본식으로 해?’ 하고 야단을 쳤답니다. 그랬더니 고개를 푹 꺾고서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일본말로 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더 감짝 놀라서 상부에 보고를 했답니다. 일본 군대 출신들이 피난민 대열에 끼어 있다가 광복군에 들어왔는데, 이 사람들이 일본군의 밀정일지 모르니 전부 제거하자는 안을 내놓았습니다. ... 장준하 선생이 그 사람이 박정희였다는 것을 어떻게 기억하냐면, 잘못했다는 말을 일본말로 했다는 것, 딱 한가지예요.'
— 백기완, 《한국현대사의 라이벌》(역사비평사, 1991) 211~212페이지
김구와 함께 했던 장준하는 1946년부터 남북 공동 정부를 구성을 위해 남한 단일 정부를 구성하려는 이승만 측 인사들을 접촉해 설득에 애썼는데, 김구와 대립각을 세우던 장덕수가 암살되자 김구도 멀리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승만과 김구의 합작이 실패하여 남한 단일 정부 구성이 진행되자, 결국 이렇게 된 이상 북한을 이기려면 남한이 사상적, 이념적으로 정당성을 갖추고 우월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국민 계몽을 위한 칼럼, 강연 활동등을 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그는 언론인, 출판인이 되었고, 1949년에는 '도서출판 한길사'를 세워 '사상계'라는 월간지를 출판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지성인으로 목소리를 높여갔다. 이승만 정부에서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이 되는 등 관료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후에 이승만이 개헌과 부정선거로 독재를 시작하려 하자 '사상계'와 여타 칼럼등을 통해 이승만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몰락하고 1961년...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킨다. 이 때 장준하 선생은 '사상계'를 통해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여 훗날 논란이 된다. 다음과 같다.
절정에 달한 국정의 문란, 고질화한 부패, 마비 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 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군사혁명이다. 4·19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開花)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 1961년 6월 '사상계' 권두언(=책 첫머리의 요약글)
이것은 훗날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의 쿠데타를 지지했었다는 근거로 사용되곤 하는데, 그는 군인들까지 행동에 나섰다는 것에 주목하였던 것이고, 그들이 국가의 '혼란만' 바로 잡기를 기대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박정희가 '잠시만' 군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 대통령이 되려하자 곧바로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61년 6월의 사상계 권두언을 쓴지 몇달 되지 않아 탄압을 당하기 시작한다. 군인들에게 연행되어 김종필로부터 정권을 비판한 글을 쓴 이유를 추궁받기도 했고, 수차례 불려가 군인들로부터 심문을 받았다. 결국 부패언론인으로 낙인찍혔고 '정치활동정화법'에 따라 정치활동도 금지당했다. 그는 정치인이 아니었지만, 그러한 조치는 그의 월간지 '사상계'의 독자들을 떠나게 만들었다.
이후 장준하는 박정희를 강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 배후에 박정희가 있다고 주장해 한달간 수감되기도 했고, 1967년 정치에 진출해 국회의원이 되고나서는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였다고 비난했다가 국가원수모독죄로 세달간 수감되었다. 이후에는 윤보선과 함께 신민당을 탈당해 국민당을 창당했지만 박정희의 10월 유신으로 강제해산당한다. 1974년에는 10월 유신과 긴급조치를 비난하며 서명운동을 벌이다가 '헌법개정을 빙자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 불안을 조성했다'는 이유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 악화로 8개월만에 형집행정지로 출소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결국 장준하는 결심한다. 1975년 광복절 30주년을 맞이하여 거사를 계획한 것이다. 훗날 아들 장호권에 따르면, 당시 장준하가 "박정희를 깨는 것은 민중의 힘으로 역부족이니 게릴라전으로라도 박을 제거해야 한다. 군부 쪽에도 상당한 연계가 되어 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러가지 증언으로 봤을 때 그가 박정희를 '암살'하려는 거사를 계획했다는 것은 분명해보이며, 8월 20일로 계획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계곡을 등반하던 장준하는 절벽 아래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하지만 다들 알고 계시다시피, 추락했음에도 몸에 상처가 없고 단지 두개골 함몰 골절상밖에 없다는 점에서, 둔기로 머리를 가격당해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손에 있는 상처는 추락과정에서 나무를 잡다가 상처가 난 것이라며 추락사의 증거로 정부에 의해 제시되었지만, 이는 사망 며칠전 벌초 과정에서 생긴 상처인 것이 확인되었다. 아들 장호권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장준하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지만 진실은 끝내 진실은 밝혀지지 못한 상황이다.
아무튼 장준하가 세상을 떠나자 남은 가족들을 돌본 이가 있었다. 장준하와 국회의원 시절 인연이 있었던 당시 2군단장이자 훗날의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그였다. 1976년 4월에 주한 미 대사 하비브가 찾아와 "당신 아버지가 이루고자 했던 일이 이뤄질 터이니 몸조심하고 기다려라"라고 말한데에 이어, 1979년 7월에는 김재규가 아들 장호권에게 "미국에 나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라고 말해 장호권은 미국으로 출국한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박정희를 총으로 쏴 암살하였다. 훗날 장호권은 1975년 장준하의 계획에 있어 군내 동조세력에 김재규 등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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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좋으면서 잘팔리는 잡지'인 사상계의 출간인이자 (영문학자 여석기의 말)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잡지를 만들어 언론과 민주주의의 발전에 힘쓴 인물이었다. (언론학자 정진석의 말) 하지만 그는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던 것은 좋았지만 군사정변을 잠시나마 옹호했고 정치활동에 힘썼다는 점에서 지성인의 '순수성'에 있어서는 의심을 받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이렇다. 그는 합리주의적 진보주의자, 민족주의자가 아니었을까? 당대의 문제를 인식하여 군사정변을 일시적으로 옹호했지만, 그들이 순수성을 잃자 거칠게 비난했고 결국 그들로 부터 큰 탄압을 받았다. 정치활동 역시 바뀌지 않는 세상을 스스로 바꾸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속물'이라기 보다는 '행동하는 양심'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겠고 말이다. 일부 이상적 진보주의 보다는 현실적 진보주의를 채택했다고나 할까?
글쎄, 요즘에는 이런 인물이 누가 있을까? 유시민과 같은 인물이 떠오르긴 하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는 장준하와 비교하기엔 많이 부족하고 앞으로도 그럴 듯 하며, 문재인은 '장준하에 비해 너무도 조용한' 정치인이며, 안철수는 합리주의면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역시나 모든 면에서 한참 부족하다. 결국 노무현 같은 사람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글쎄, 진정한 진보 지도자의 표본은 장준하, 노무현 등에게 있는 것일까? 그런 사람들을 진보주의자들은 언제, 다시 만나게 될까? 결국 길어져서 오늘 글은 여기까지다.
8월 17일과 18일의 역사
- fin -
오타 수정 (2014.8.17)
오타 수정 (2014.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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