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8월 3일과 4일의 역사 - 에볼라바이러스, 이스라엘-팔레스타인과 아라파트, 고노 담화 등

스마일루 2014. 8. 2.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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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자치와 이스라엘 군의 철수, 그리고 평화협정을 포함하는 '오슬로 협정'에 서명한

이스라엘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

 

1994년 그렇게 중동에는 평화가 찾아왔지만,

이듬해에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암살당했고,

'하마스'는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이어 2004년 야세르 아라파트가 세상을 떠나면서

양국의 관계는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는 상황이다.

누가 이를 막을 수 있을까?

 

 

 

 

 

 

- 링 크 -

 

8월 4일과 5일의 역사

넬슨만델라 수감 시작, 에볼라바이러스, 라울 발렌베리

http://blog.daum.net/smileru/8888314

 

 

 

- 순 서 -

 

85년전, 1929년 8월 4일

팔레스타인 정치인 야세르 아라파트 탄생.

 

21년전, 1993년 8월 4일

일본의 내각관방장관인 고노 요헤이가 위안부에 대해 사과하는 담화를 발표하다. (고노 담화)

 

15년전, 1999년 8월 4일

치사율 80% 에볼라 바이러스 독일에서 첫 발견.

(지난 글 다시 올림)

 

 

 

 

 

 

 

8월 3일과 4일의 역사

Wikipedia

 

 

8월 3일: 니제르독립기념일, 베네수엘라국기의 날

435년 - 비잔티움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네스토리우스이집트로 추방하다.

1492년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스페인팔로스 항구를 출발하다.

1914년 - 독일프랑스에 선전포고하다.

1929년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그를 지지하기 위해 설립된 동방의 별의 교단의 해산을 발표해 신지학 운동에 큰 충격을 주다.

1940년 - 제2차 세계 대전: 이탈리아영국령 소말릴란드 점령을 시작하다.

1953년 - 유엔 중립국 감시위원회, 판문점군사정전위원회 본부를 설치하다.

1958년 - 미국의 핵잠수함 노틸러스 호가 처음으로 북극점을 통과하다.

1962년 - 태풍 노라호전라남도 지역 큰 피해.(310명 사상, 농경지 82만정보 유실)

1972년 - 박정희 대통령,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 한 긴급명령 제 15호'(8·3 조치)를 발표하다.

1983년 - 삼성반도체, 64KD램 개발에 성공하다.

1993년 -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시설 임시사찰 위해 평양에 도착하다.

2000년 - 수하르토인도네시아 대통령 부패혐의로 공식 기소하다.

2002년 - 중국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진입했던 탈북자 11명 대한민국으로 입국하다.

2009년 - 구본홍YTN 대표이사 사장직에서 물러나다.

 

 

8월 4일

1875년 - 덴마크 동화작가 안데르센 사망.

1896년 - 조선이 행정 구역을 13도로 개편하다.

1912년 - 제2차 세계 대전 때 수만 명의 유대인 생명을 구한 스웨덴의 외교관인 라울 발렌베리가 태어나다.

1929년 - 팔레스타인 정치인 야세르 아라파트 탄생.

1936년 - 그리스의 총리 요안니스 메탁사스그리스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시켜 8월 4일 체제를 세우다.

1944년 - 《안네의 일기》 저자 안네 프랑크 가족, 독일군에 체포.

1961년 - 미국의 제 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 탄생.

1988년 - MBC 본사에서 도청장치 방송사고 발생.

1993년 - 일본의 내각관방장관고노 요헤이위안부에 대해 사과하는 담화를 발표하다.

1999년 - 치사율 80% 에볼라 바이러스 독일에서 첫 발견.

2001년 - 모스크바에서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정상회담

2002년 - 남북실무접촉 대표, 남북장관급회담(제7차) 재개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선수단의 아시안게임 참가 논의.

2003년 -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투신 자살하다.

2008년 -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향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하다.

 

 

 

 

 

 

 

 

 

1929년 8월 4일

팔레스타인 정치인 야세르 아라파트 탄생.

 

 

   오늘은 최근 뉴스에서 많이 등장하고 있는 이슈와 관련된 역사들을 전하게 될 듯 하다. 우선 팔레스타인...

 

   야세르 아라파트, 본명은 '모하메드 압델-라우프 아라파트 알쿠드와 알후세이니'로 매우 길다. 아무튼 부유한 상인의 일곱 아들 중 한명으로 태어났는데, 출신지가 예루살렘이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크고 자랐는데, 1948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땅이 되고 만다. (오른쪽 사진은 1940년대에 찍은 사진)

 

   이집트로 옮겨가 카이로대학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하던 그는, 학생시절부터 '이슬람형제단'과 '팔레스타인 학생연합'의 회장을 지내다 1950년대부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반대하는 게릴라 그룹 '파타'를 결성하는데 참여하였고, 제2차 중동전쟁(1956~1957)에 참전하기도 했다.

 

   한편 이스라엘의 건국과 이어진 1, 2차 중동전쟁... 이는 아랍 국가 지도자들을 분노케 했고, 결국 1964년 카이로 아랍 연맹 정상회담에서는 '무장 투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을 이룬다'는 것에 결의하여 그 유명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설립하게 된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일종의 임시정부와 비슷한 조직이었는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내에서의 '여당'은 바로 야세르 아라파트가 결성을 도운 게릴라 그룹 '파타'였고(계속 1당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외에 아랍 각국을 기반으로 팔레스타인을 위해 활동하는 무장-비무장 조직들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파타를 기반으로 한 야세르 아라파트는 1969년부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무려 2004년까지(꽤 최근이지?) 1964년부터 40년간 의장을 역임했다. 1964년부터 1969년사이에 의장이 두명 있었던것에 비하면 장기집권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동안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갔다.

 

   특히 그는 '나름' 온건파에 속하는 편이었다. 물론 초반에는 무장 투쟁활동을 했던 것이 맞지만, 곧바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고, '온건파 게릴라'로서 1974년 UN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으며, 그 결과 그 해에 팔레스타인이 1974년에 UN의 참관국이 되기도 했으며, 부족하나마 독립을 선언하기도 했다. 1982년에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기지가 있는 레바논을 침공하였는데, 그 결과 야세르 아라파트와 지지자들은 튀니지로 기지를 옮겨야 했지만, 무장투쟁과 동시에 평화적 해결방법을 지속적으로 모색해왔다. (사실 무장투쟁을 더 많이 한 것이 맞긴 하다.)

 

  그러던 와중 1991년의 걸프전쟁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지원하던 이라크에 큰 타격을 줬고, 동시에 이스라엘의 당시 여론은 팔레스타인 전체를 중동에서 드러내지 않는 이상 로켓포와 미사일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결국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이스라엘이 중동 평화협상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고, 애초에 교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후 급속도로 협상이 진행, 1994년 10월에 오슬로 협정을 통해 평화협정이 이뤄진다. 이를 통해 야세르 아라파트와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자치권을 얻게 되었으며, 이스라엘 군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드디어 팔레스타인 땅에 입성하여 '임시정부'가 아닌 진정한 '자치정부'로 거듭나게 되었으며, 야세르 아라파트 역시 팔레스타인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27년간 주변국을 떠돌던 생활을 끝내게 되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평화는 그렇게 오는 듯 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사진을 찍고 있는 야세르 아라파트,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하지만 다음해인 1995년 11월, 이스라엘 극우파에 의해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암살당한다. 그리고 1996년부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내의 강경정파 '하마스'가 폭탄테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활동을 시작, 중동지역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원치 않는 자들의 폭력적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었다.

 

참고글 : 11월 4일과 5일의 역사 - 이츠하크라빈 암살

 

   결국 2000년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간의 평화협정은 깨지게 되었고 폭력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다시 군을 투입시키기 보다는 콘크리트 벽으로 '가자지구'를 감싸버리기로 결정했고(2002~), 이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을 경제적으로 어렵게 하는 등 다방면으로 불편하게 만들면서 큰 불만을 낳았다.

 

   그래도 그나마 중동 평화의 마지막 희망이자 팔레스타인인들의 구심점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는, 2004년 고령의 나이로 감기, 뇌출혈등이 겹치며 사망하고 말았다. 향년 75세였다. (폴로늄이 사용된 독살, 에이즈 감염 등이 사망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진실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일단 폴로늄 중독이 유력해 보인다. 오른쪽 사진은 아라파트의 장례식)

 

   안 그래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평화협정이 깨진 상황에서 정신적 지주인 야세르 아라파트까지 세상을 떠나자 중동은 더욱 혼돈에 빠지기 시작했다. 한편 이스라엘은 평화협상이 깨지면서 팔레스타인의 로켓포의 위협이 다시 대두되자, 야세르 아라파트의 사망 직후 큰 충돌을 예감한 것인지 2005년부터 '아이언돔'이라는 방어시스템 개발을 시작, 끝내 완성하여 배치(2011~)하는 것으로 해결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보면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사망한 이후부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이 완전히 강경노선으로 돌아섰다고 보면 될 듯 하다. 완벽한 방어를 바탕으로 적을 공격한다는 개념이랄까? 야세르 아라파트를 독살한 의혹도 받고 있고...

 

   한편 야세르 아라파트의 사망 이후 처음 치뤄진 2006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선거에서는 강경 무장 정파인 '하마스'가 압승을 거두게 되었다. 평화협정도 깨졌고 야세르 아라파트까지 떠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을 갈수록 탄압하고 있었으며, 결국 팔레스타인인들은 강경파인 하마스를 선택한 것이었다. (왼쪽은 하마스의 로고)

 

   그렇게 야세르 아라파트가 세상을 떠난 뒤 모든 것은 변해버렸다. 물론 꼭 그가 세상을 떠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시절 유일하게 평화의 기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왠지 지금은 그 때가 마지막 기회였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1993년 8월 4일

일본의 내각관방장관인 고노 요헤이가 위안부에 대해 사과하는 담화를 발표하다.

 

 

 

   고노 요헤이... 그의 아버지는 현재의 일본 여당이기도 한 자유민주당(자민당)의 정치인이었던 '고노 이치로'였다. 그의 장남 역시 자민당 정치인이라고. 일본의 이런 대를 잇는 정치문화는 참 대단(?)한 것 같다.

 

   아참, 이게 하려는 이야기가 아니고... 고노 요헤이는 중의원 의원, 중의원 의장, 부총리, 외부 대신, 내각관방장관, 과학기술청 장관, 자민당 총재 등을 역임했으며, 일본 헌정 사상 가장 오랫동안 중의원 의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알려져있다시피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한 '고노 담화'로 유명한데, 그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가 일본 총리 시절에 그런 담화를 발표했다고 알고 있는 것 같더라. 사실 그게 합리적인 추측이긴 할 것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발표를 할 수 있는 건 총리밖에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다. 그는 내각관방장관 시절 그를 발표했으며, 애초에 총리가 된 적도 없었다. 일단 고노 담화의 전문을 보자.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정부는 재작년 12월부터 조사를 진행해 왔으나, 이번에 그 결과가 정리되었으므로 발표하기로 하였다.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에, 또한 광범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되어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영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하였다.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 경우에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이 있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명확하게 되었다. 또한, 위안서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 하에서의 참혹한 것이었다.
 
   또한, 전장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는, 일본을 제외하면 조선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당시의 조선반도는 일본의 통치 하에 있어,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하여졌다.
 
   결국, 본건은 당시 군의 관여 하에서,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준 문제이다. 정부는 이 기회에, 다시금 그 출신지의 여하를 묻지 않고,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허다한 고통을 경험당하고, 심신에 걸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 또한, 그런 마음을 우리 나라로서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에 대해서는, 유식자의 의견 등도 구하면서, 앞으로도 진지하게 검토해아 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역사의 사실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역사의 교훈으로서 직시해 가고 싶다. 우리는, 역사 연구, 역사 교육을 통해, 이런 문제를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며, 같은 과오를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금 표명한다.
 
   또한, 본 문제에 대해서는, 본국에서 소송이 제기되어 있으며, 또한 국제적으로도 관심이 모여 있으며, 정부로서도, 앞으로도, 민간의 연구를 포함해, 충분히 관심을 기울여 가고 싶다.

 

 

   굉장한 담화가 아닐 수 없다. 중요한건 이게 단순한 '말뿐인 인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첫 문장에 나오는 것 처럼, 이는 일본 정부차원의 위안부 진위여부 조사 결과에 따라 발표된 것이며, 이것은 당시 총리였던 '미야자와 기이치'의 의중이 크게 반영된 결과였다.(오른쪽 사진이 미야자와 기이치)

 

   그 의중이라는 것이 '위안부 진위여부에 대한 주관적 판단'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사과에 대한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당시 총리였던 미야자와 기이치는 2차 세계대전에 대해 일본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로, 정계 은퇴이후에도 평화 헌법 개정에 강력하게 반대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런 총리 아래에서 일본 정부 차원의 위안부 재조사가 이뤄진 것이고, 그것의 전체적인 결론을 고노 장관이 발언했을 뿐이다. 일본 아베 총리가 최근 '고노 담화를 재검증하겠다'라고 나온 것은, '당시의 조사가 옳았느냐'를 다시 보겠다는 뜻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고노 담화 이후 90년대에는 일본의 총리들이 2차세계대전과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왔었다. 부족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때부터 독도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급변하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일본은 바뀌지 않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유일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정설이 바로 90년대에 시작된 일본버블경제의 붕괴다. 그 때부터 국가적 자존감의 회복을 군국주의, 즉 과거 강성했던 일본제국에서 찾기 시작하면서 우익이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국민들도 불황속에서 전체적으로 실용을 외치며 현실주의로 빠져들면서 사회 전반의 보수화가 이뤄졌고 말이다. 글쎄... 어쩌면 우리도? 

 

   고노 담화에서 시작해 왠 정치이야기까지 왔는데, 아무튼 이미 우경화 궤도를 탄 상황에서 일본이 경제가 살아나 국가적 자존감을 다른 곳에서 회복해도, 우경화 움직임은 쉽게 멈추지 않을 듯 하다. 도움은 되겠지만 말이다. 결국 내부의 자성론, 경제를 위한 주변국과의 절실한 관계회복 필요성, 또는 어떤 '결정적 사건'등이 있지 않는 이상 지금의 추세를 막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한쪽으로 사상이 쏠리기 시작한다는 것이...

 

 

 

 

 

 

 

1999년 8월 4일

치사율 80% 에볼라 바이러스 독일에서 첫 발견.

(하지만 후에 음성판정?)

 

 

참고글 : 8월 4일과 5일의 역사 - 넬슨만델라 수감 시작, 에볼라바이러스, 라울 발렌베리

 

 

   요즘 에볼라바이러스가 이슈더라. '다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인데, 발병지역이 아프리카를 벗어나는 듯한 모습도 보이고 있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까 또 아프리카 중부에서 북서부쪽으로 이동한 모양새더라. 유럽으로 가까워지고 있는데...

 

   아무튼 그래서 오늘은 사상 처음으로 지난 글을 그대로 가져와 볼까 한다. 당시의 글에서 다뤘던대로 에볼라 바이러스는 처음 등장한지 수십년은 지난 바이러스다. 하지만 지금은 역대 최악의 수준으로 피해가 커지고 있는 상황... 참으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오랜기간 에볼라 바이러스를 연구한 연구팀이 침팬지를 상대로 한 치료제나마 개발했다고 하니, 이것이 효과가 있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아무튼 아래는 1년전 글이다.

 

 

 

원문 : http://blog.daum.net/smileru/8888314, 2013.8.1

 

  찾아보니 위키피디아 내에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자가 1999년 독일에 첫 출현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단 1999년 8월에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독일로 돌아온 한 독일인이 눈과 귀에서 피를 흘리는 에볼라 출혈열 증상을 보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다른 질병인지 조사가 진행중이라는 이야기는 보이지만 확진판정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위키에 있는 이야기는 이 이야기인듯? 아무튼, 이렇게 된 김에 에볼라 바이러스 이야기로...  


   에볼라 바이러스는 1976년 수단과 자이르(오늘날의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국제보건기구(WHO)의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숙주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과일박쥐'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여기에서 이야기 해 봐야 할 것이, '진화'라는 것은 결국 오랫동안 번영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는 사실 진화에는 불리하다는 것이다. 감염시켜버린 '숙주'가 금방 죽어버려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썩어버리면 전파가 잘 안되니까... 그래서 보통 '숙주'에 충분히 적응한 바이러스는 그리 치사율이 높지 않다. 조류독감 바이러스도 정작 새에게는 큰 해를 끼치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바이러스가 다른 '종'으로 옮겨가게 되면, 바이러스 또는 새로운 숙주의 면역체계가 기존 숙주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 바이러스 때문에, 또는 새로운 숙주의 과민 면역반응때문에 치사율이 급격하게 높아지곤 한다.

 

   에볼라 바이러스가 대표적인 바이러스라 할 수 있겠다. 숙주가 정말 과일박쥐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일박쥐 입장에서는 감기였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였을 그 바이러스가, 1976년 인간에게 전염되면서(돌연변이로 인해서?) 88%의 치사율을 보이게 된다. 이는 엄청난 치사율이다. 과거에는 치사율이 매우 높았지만 요즘엔 치사율이 20%대로 떨어진 HIV 바이러스(에이즈를 일으킨다) 보다도 심각한 최악의 바이러스였다.

 

   전염성도 높았다. 광견병 바이러스는 감염되면 거의 100% 사망하는, 에볼라 바이러스보다 치사율이 높은 유일한 바이러스인데, 타액이나 혈액으로 감염되기 때문에 보통 동물에게 물리는 식으로 전염되어 그 속도가 매우 느렸다. 사실 에볼라 바이러스도 체액으로 전염되긴 한다. 하지만 구토, 혈변, 출혈 등의 증상을 일으켜 전염을 쉽게 했고, 땀을 통해서도 전파되었다.


   결국 그 전염성과 치사율로 인해 1976년 첫 발생한 에볼라 바이러스는 지역 주민과 의료진 280명을 순식간에 몰살시켰다. (318명중 280명 사망, 치사율 88%) 모든 사망자들은 1주일내에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고, 모두 14일내에 사망했다. 만약 전염성과 치사율을 유지한 채 감염자들이 아프고 죽어가는 속도만 좀 더 느렸다면, 감염자들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심각한 사태를 일으켰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런 에볼라 바이러스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앞서 언급한 1976년 한 마을을 휩쓴 에볼라 바이러스가 '에볼라 자이르형'으로 가장 치사율이 높다. 장기가 전체적으로 손상되면서 코, 입으로 피를 흘리며 죽게 된다. 비슷한 것이 '에볼라 수단형'인데, 역시 1976년에 발생했지만 치사율은 60%내외로 조금 낮다. 1989년에 발견된 '에볼라 레스턴형'은 공기전염(!)이 가능한 형태였는데, 침팬지 같은 영장류에게는 치명적이었지만 인간에게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에볼라 아이보리 코스트형'은 역시 영장류에게 치명적이어서 영장류의 심장을 거의 파괴해 버렸다. 부검을 하던 과학자가 감염되었는데, 다행히 생존했다. 그리고 2007년에는 '에볼라 분디부교형'이 발견되었는데, 현재까지 이로 인해 200여명이 사망했고 치사율은 평균 60%에 달하는 상황이다.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등에서는 가끔 이렇게 에볼라 바이러스가 발병하고 있다고... 2012년에도 51명이 사망했다한다.

 

   이렇게 치명적인 에볼라 바이러스... 치료제는 없을까? 없다. 끝.

 

 

 

 

 

 

 

8월 3일과 4일의 역사

 

- fin -

 

 

 

 

 

 

현재까지 수정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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