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5월 25일과 26일의 역사 - 부산정치파동과 이승만, 덕혜옹주 탄생

스마일루 2014. 5. 24.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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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계엄령으로 인해, 야당 국회의원 40명이 탄 버스가 통채로 끌려가는 사진]

 

이승만은 독립을 전후로 해외에서 활동한탓인지,

스스로 친일 행각을 벌이긴 했지만 한반도 문제에서 일본을 배척해야할 필요성을 알았고,

미국의 정치-군사적 움직임의 의미를 잘 읽고 정전협정에 반대하는 등,

국제정세를 잘 읽어왔던 것은 분명하지만,

 

국내 정치에 있어서는 이승만 이후 한국 역사 속 두번의 군사정권의

큰 스승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최악의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1952년 한국전쟁 중 이뤄진 부산정치파동은

1987년 직선제 개헌이 이뤄질 때까지 35년간 한국 정치를 제자리에 머물러 있게 한

독재를 위한 개헌과 정권 유지를 위한 정치 폭력의 시작이자 선례였으며,

 

그 잔재는 아직도 남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 링 크 -

 

5월 26일과 27일의 역사

표트르1세&상트페테르부르크,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종료 등

http://blog.daum.net/smileru/8888273

 

 

 

- 순 서 -

 

102년전, 1912년 5월 25일

대한제국의 황녀 덕혜옹주 탄생.

 

62년전, 1952년 5월 26일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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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5일과 26일의 역사

Wikipedia

 

5월 25일

1592년 - 동래성 전투 발발.(임진왜란)

1659년 - 리처드 크롬웰이 잉글랜드 호국경을 사임하다.

1895년 - 타이완 민주국 정부가 수립되다.

1912년 - 대한제국의 황녀 덕혜옹주 탄생.

1935년 - 베이브 루스가 현역 생활에 있어서의 마지막이자 통산 714번째 홈런을 기록했다.

1952년 - 부산,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에 계엄령이 발효되었다.

1954년 - 헝가리계 유태인, 미국인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 사망.

1961년 - 아폴로 계획: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미 하원에 1960년대가 끝날 때까지 “인간을 달에 보낼” 계획을 세우라는 특별 교서를 발표하다.

1981년 - 문화방송에서 왕영은이 뽀미 언니를 맡은 어린이 프로그램 《뽀뽀뽀》가 처음으로 방영되다.

2007년 - 대한민국의 영문학자 작가 피천득 사망.

2009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2차 핵실험을 강행.

 

 

5월 26일: 가이아나그루지야독립기념일

1828년 - 정체불명의 소년 카스파 하우저뉘른베르크의 거리에 나타나다.

1927년 - 포드 모델 T의 생산이 종료되다.

1952년 - 동독이 내독국경 폐쇄

1952년 - 독일조약(본 협정) 서명(서독, 영국, 프랑스, 미국) - 이 조약으로 서독은 점령지위에서 탈피. 일정한 조건하에 서독의 주권 회복 허용. 서독이 주권국가로 EDC 조약 체결을 허용하기 위해 취해진 협정이나 EDC 좌절로 실효되지 못함

1952년 - 부산정치파동(釜山政治波動)〔개헌파동(改憲波動)〕이 일어나다.

1971년 - 오스트리아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하다.

1972년 - 미국린든 존슨 대통령과 소비에트 연방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탄도탄요격미사일 조약을 체결하다. 이 조약은 후에 SALT-1으로 발전한다.

1976년 -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사망.

1999년 - 과학실험위성 우리별 3호인도 샤르 기지에서 발사되다.

2002년 -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이 제55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다.

 

 

 

   1592년 - 동래성 전투 발발.(임진왜란)

   참고글 : 문명5-(#2-2) 일본군의 북진, http://blog.daum.net/smileru/8887952

 

   1828년 - 정체불명의 소년 카스파 하우저가 뉘른베르크의 거리에 나타나다.

   참고글 : 12월 16일과 17일의 역사 - 미스테리 소년 카스파 하우저, http://blog.daum.net/smileru/8888163

 

   1961년 - 아폴로 계획: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미 하원에 1960년대가 끝날 때까지 “인간을 달에 보낼” 계획을 세우라는 특별 교서를 발표하다.

   참고글 : 3월 3일과 4일의 역사 - 아폴로 계획, http://blog.daum.net/smileru/8888222

 

 

 

 

 

 

 

1912년 5월 25일

대한제국의 황녀 덕혜옹주 탄생.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소설로도 나와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뮤지컬도 나온다고 하던데?

 

   한일강제병합 2년 뒤인 1912년 5월 25일, 고종황제와 궁녀였던 귀인 양씨 사이에서 덕혜옹주가 태어난다. 왕족들과 궁궐사람들이 매우 기뻐했다고 하는데, 기록에 따르면 왕녀가 태어나 그 정도로 환영을 받은 적이 없을 정도로 수 많은 궁 내 사람들이 덕혜옹주의 탄생을 환영했다고 한다.

 

   이어 고종황제는 덕혜옹주를 곧바로 일본황족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왕공족'의 신분으로 올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궁녀 양씨는 후궁이 아니었기에 고종황제와 정식 부부관계가 아니었고, 그것은 우리가 사극에서 많이 봐 왔던 것처럼 본래 조선에선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일본은 그를 문제 삼아 덕혜옹주의 황족 대우를 거절했다.

 

   그러자 고종황제는 덕혜옹주의 백일잔치(돌잔치라는 설도 있다)를 아주 성대하게 계획하여, 조선총독부의 관리들과 일본 본토의 귀족들을 대거 초청해 덕혜옹주가 자신의 딸임을 선언한다. 일본에서 온 귀족들까지 이 장면을 봤기 때문에, 더 이상 조선총독부선에서는 덕혜옹주의 왕공족 신분 부여를 막을 수 없었다. 결국 1917년 6월에 덕혜옹주는 왕공족의 신분을 인정 받았는데, 이후 고종황제는 덕혜옹주가 영친왕처럼 일본에 볼모로 보내지거나 정략 결혼을 할 것을 우려하여 비밀리에 다른 사람과의 약혼을 준비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결국 고종의 우려는 현실이 된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1925년, 조선총독부의 조선 왕족 담당 부처인 '이왕직'의 차관 '고쿠분 쇼타로'는 순종에게 덕혜옹주의 일본 유학이 결정되었음을 통보한다. 고종황제가 우려했던 일이었다. 그리하여 1925년 3월에 덕혜옹주는 일본으로 가게 되는데, 이후 1926년에는 순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일제의 거부로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1929년에는 어머니 귀인 양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귀인 양씨는 왕공족이 아니기 때문에 왕공족인 덕혜옹주가 상을 치뤄서는 안된다하여 상을 치르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1930년에는 덕혜옹주와 일본 귀족인 '소 다케유키'와의 정략결혼이 결정되게 되고 일본 쇼와 천황의 허가가 떨어진다. 한편 덕혜옹주가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도 1930년인데, 영친왕 자택과 별장에서 요양을 한 끝에 1931년이 되어 증세가 호전된다. 결혼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긴건 아닌 듯 하다.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의 사이는 매우 좋았다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과, 고국에 대한 향수병 등이 그 시작으로 추정된다한다.

 

   여튼 '소 다케유키'와 일본식으로 결혼한 덕혜옹주는 1932년에 딸 '소 마사에'를 낳는데, 이후 기존의 정신분열 증상이 이후 악화되기 시작하고, 조선이 광복된 1945년이 지나 결국 1946년에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만다. 그런데 엎친데덮친격으로 패전한 일본에서 헌법이 새로 정립되며 방대한 황족 중 상당수가 정리되는데(신적강하), 이에 조선왕실 고종과 순종의 가족도 포함되면서 덕혜옹주는 평민 신분으로 강등되었고, 그에 따라 지원금이 끊기며 금전적으로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 역시 평민이 된 영친왕이 치료비를 부담하게 되지만, 1955년(1951?)에는 남편 '소 다케유키'가 영친왕과의 논의 끝에 덕혜옹주와 이혼하게 되고, 1956년에는 딸 '소 마사에'가 결혼에 실패하자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산 속에서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실제 자살한 것으로 추정됨)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61년...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 김을한씨는 덕혜옹주의 귀국을 추진하게 되는데,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그를 약속하게 되고, 1962년에 혼수상태였던 영친왕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곧바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고, 국가로부터 치료비지원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다. 1967년에는 병원에서 퇴원한 덕혜옹주를 만나기 위해 '소 다케유키'가 창덕궁으로 찾아왔지만, 관계자들이 만남을 막으면서 그는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시간이 흘러 1983년, 노환으로 한강성심병원에 입원한 덕혜옹주는, 1989년 4월 21일 오전 11시에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난다.

 

 

   참 뭐랄까... 굴곡진 인생이라기보다는 우울했던 인생이 아닐까 싶다. 영친왕도 그러했지만 일제시대 때 불운했던 대한제국의 왕족들을 보면 참 지금도 서글플 정도다. 물론 일반 국민들이 겪었던 고통에 비할바 있겠냐만...

 

관련글 : 4월 28일과 29일의 역사 - [일본특집] 영친왕

 

  

 

 

 

 

 

1952년 5월 26일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다.

 

   이게 또 참 충격적인 역사다. '시대적 미성숙'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어처구니가 없는데...

 

   1950년 5월 30일,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린다. 제1대 국회의원선거, 즉 제헌의회 선거는 미군정하에서 실시된 선거였기 때문에 제2대 총선은 우리가 만든 선거법에 따라 이뤄지고 대한민국이 주관했던 첫 선거였다.

 

   하지만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이 선거를 연기시키고 싶어했다. 선거 패배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고, 그것은 자신의 대통령 재선도 어렵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승만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당시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선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선거는 간접선거로 이뤄졌었다.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해 출석의원 중 3분의 2의 득표를 얻으면 당선되는 것이었다.

 

    그러한 대통령 투표권을 가진 국회의원들을 뽑는 제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국회 200석 중에 무려 85석이 무소속 의원들의 차지였고 이승만의 정당이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비공식 정당)는 55석만을 차지했는데, 그럼에도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91.8%를 득표해 김구를 누르고 승리했었다. 그 이유는 애초에 제1대 총선에 남북공동정부를 요구하거나 남북협상을 주장한 좌파와 중도세력이 불참했었기 때문이었다. 우파들로 국회가 채워졌고, 김구는 당선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제2대 총선에서는 불참했던 좌파, 중도세력이 대거 참가하게 되면서 국회를 이승만 지지세력으로 채우기 어려워졌다. 결국 간접선거로 이뤄지는 제2대 대선에서 이기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선거를 6개월 연기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의 군사-경제원조 중단을 내세운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고 결국 제2대 총선이 진행된다.

 

   결과는 예상대로 충격적이었다. 제1당은 현대 민주당의 모태인 민주국민당이었으며,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대한청년당'은 제3, 4당에 그치고 말았다. 더 충격적인 것은 210명으로 늘어난 국회의석에서 제1당인 민주국민당의 의석수가 24석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무소속 의원이 126명이 당선되었고, 이것은 이승만에겐 재앙이었다. (왼쪽 위키 캡쳐가 선거 결과)

 

   하지만 이승만이 아닌 민족에게 재앙이 닥치니,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6월 19일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6일만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국회는 부산으로 이동해야 했다.

 

   민족적 재앙이었던 한국전쟁이 끔찍한 결과를 낳았지만 그것도 1951년 여름부터 정전회담이 시작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사실 '소강상태'라는 말을 쓰기가 좀 그런게, 휴전선부근에서는 끔찍한 고지전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은 한민족에 대한 사형선고라 생각해 단독으로라도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그런 결연한 의지와 함께 자신의 권력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 역시 보여주었는데, 바로 1951년 11월 30일에 국회에 제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었다. 다가오는 1952년 제2대 대선에서 간접선거로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보니 직접선거로 개헌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격렬한 정치공방이 시작되었다. 1952년 1월 18일에는 국회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부결시켜버린다. 찬성 19명, 반대 143명의 압도적 반대 결과였다. 국회는 역공에 나섰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한 것이었다. 내각책임제는 아시다시피 다수당에서 대통령, 또는 수상, 또는 총리가 나오는 형태다.

 

   역공을 당한 이승만은 결국 국회를 해산시켜버리기로 결정한다. 일단 5월 14일에 직선제와 내각책임제를 절충한 '발췌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한 다음, 5월 25일에 무장공비소탕을 명분으로 경상도와 전라도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리고 다음날 부산에서 야당 국회의원 40명이 타고 있는 버스를 헌병대 중장비로 강제로 끌고간 뒤 11명을 공산당 관련 혐의로 체포해버리니, 이것이 바로 5월 26일 부산 정치 파동이다.

 

   시작된 갈등은 끝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승만편이던 부통령 김성수는 5월 29일에 부산 정치 파동을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위'로 규정하고 이승만 탄핵안을 제출한 뒤 사임한다. 이어 버스가 통채로 끌려가는 사진이 공개되고 국제적으로도 이슈가 되고 미국 트루먼 대통령도 이를 문제삼자 이승만 대통령은 6월 4일에 국회 해산을 보류한다고 발표하지만, 6월 20일에는 전 부통령 김성수를 비롯한 야권 인사들이 '입법부 수호 및 반독재 호헌 구국선언'을 발표하는 자리에 폭력배들이 난입하여 유혈사태가 일어나기에 이른다. 6월 25일에는 6.25 전쟁관련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한 사람이 튀어나와 총을 쏘려했다. 하지만 탄환이 불발되며 발사에는 실패했다. 6월 30일에는 역시 폭력배들이 80여명의 국회의원이 있는 국회를 포위하는 일도 일어난다. (오늘날 이승만에 의해 조직된 정치깡패, '백골단'의 소행으로 확인되고 있다. 앞선 부통령 유혈사태도 마찬가지.)

참고글 : [어제의 오늘]1952년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 경향신문

 

   결국 그와 같은 극한 대립속에서 7월 4일, 군인과 경찰이 국회를 포위한 상태로 '발췌 개헌안'에 대한 표결이 시작된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방식(단순 손들기?)으로 투표가 진행되는 공개표결이었고, 결국 재적인원 166명 중 찬성 163표로 발췌 개헌안이 통과된다.

 

   발췌 개헌안은 직선제와 내각책임제에서 일부를 발췌해 만든 절충안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대통령 직선제가 핵심이었다.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의 형태로 양원제를 도입하게 했지만, 참의원 선거는 이뤄지지도 못했다.

 

 

   그렇게 7월 4일, 결국 이승만은 원하던 것을 달성했다. 대통령 후보 등록은 7월 26일까지였다. 선거운동기간은 10일에 불과했다. 8월 5일 대통령 선거가 치뤄졌고, 이승만 대통령은 74.6%의 득표율로 당선된다.

 

   가만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결국은 직접선거에서 74.6%의 득표를 했으니,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은 명백해도 '될 사람이 됐다', '정당성이 생겼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치탄압속에서 대항 후보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일정이 빠듯한 상황에서, 또 정말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공포정치의 상황속에서, 유력한 야권후보들은 줄줄이 출마를 포기했다. 정치라는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간 적이 없는 시대... 전쟁 중이던 국가의 초대 대통령을 선거에서 이길 정치인은 안 그래도 부족했다. 특히 계속된 전쟁으로 좌파 진영에 대한 국민들의 무조건적인 불신은 큰 상황이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우파 진영의 색깔론 공세에는 거침이 없었다.

 

   결국 다른 사람의 출마를 권유하고 다니던 국회의원 조봉암이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11%의 득표를 얻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많은 것이 준비되어있고 기술적으로도 발전되어있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10일간의 선거운동 기간으로는 사실상 선거운동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보면 됐다. 경찰은 선거운동을 방해하기까지 했으니, 조봉암 의원을 포함한 이승만 외의 후보들이 25%의 득표를 한 것이 기적적일 정도였다.

 

   발췌 개헌... 그것은 대한민국 헌법의 첫번째 개헌이었다. 두번째 개헌은 역시 이승만의 정권연장을 위한 개헌이었던 3선연임개헌, 일명 '사사오입'개헌이었다. 또 그렇게 개헌과 함께 시작된 1956년 제3대 대선에서 야당 신익희 후보가 선거운동 도중 뇌일혈로 사망하자 무소속 조봉암 후보와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맞붙게 되었는데, 국민들은 신익희 후보를 추모하며 20%의 무효표를 던졌고, 이승만 대통령은 무효표를 포함했을 때 55%의 지지로 3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부정선거 사례가 곳곳에서 튀어나와 큰 논란이 일었었다.

 

   이후 1960년 제4대 대선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한번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가 4.19 혁명으로 물러나게 된다. 허나 이미 조봉암은 제3대 대선 이후 간첩과 접선하고 북한으로부터 선거자금을 지원받은 혐의(진보당 사건)로 1959년 7월 31일에 사형당한 이후였다. 이것은 미국이 이승만 정권을 포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고 4.19혁명때 이승만의 하야를 권하게 된다. 결국 조봉암은 죽음으로 이승만에게 최후의 일격을 하게 된 셈... 그리고 2011년, 조봉암은 국가변란과 간첩혐의에 대해 52년만에 무죄 선고를 받게 되며 유족들은 24억원의 배상금을 받게 된다.

 

 

   뭐 혹자는 당시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승만 같은 사람이 계속 지도자를 맡았어야 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았다면 공산화되었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의 근거가 부족함은 물론, 일전에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가 5.16 쿠데타에 대해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했을 때도 한번 말한 것처럼, 그런식의 주관적인 가정이 민주주의 시스템을 깨버리는데 적용되기 시작하면 '체제'라는 것은 유지될 수가 없다. 멋대로 스스로의 쿠데타와 독재를 합리화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이승만이 깨끗하게 물러나고 전란중에서도 정상적인 민주주의 시스템이 정착했다면 대한민국이 어떤 장밋빛 미래를 맞이하게 되었을지는 역시 또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전란중에도 권력을 위해 폭력을 서슴치 않았던 이 역사는 참으로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뭐 지금이라고 다르겠나? 어떤 대재난이 일어나도 누군가는 정치적 이해득실과 면피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은가?

 

참고글 : {'12. 7월 넷째주} 박근혜5.16, http://blog.daum.net/smileru/8888077

 

 

 

 

 

 

 

5월 25일과 26일의 역사

 

- fin -

 

 

 

 

 

현재까지 수정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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