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6월 8일과 9일의 역사 - 코소보 전쟁 종결과 그 배경, PHP발표, 프랜시스 크릭 등

스마일루 2014. 6. 6.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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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 난민촌에서 뛰노는 아이들]

 

코소보 사태...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많은 사람들은 1차세계대전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당장 세계대전이 일어날 상황은 아니었지만

같은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는 것에 우려할 수 밖에 없었을테고 말이다.

 

그래도 서방의 개입과 당사국간의 노력으로

코소보의 갈등에는 끝이 보이고 있는 상황...

 

이젠 뭔가 다들 포기하고 머릿속에서도 지워버린 듯한

'세계평화'라는 이상을 다시 한번 꿈꿔보게 된다.

 

 

 

 

 

 

- 링 크 -

 

6월 9일과 10일의 역사

라마 9세, 6.10만세운동-6월항쟁-촛불집회 등

 

 

 

- 순 서 -

 

19년전, 1995년 6월 8일

스크립트 언어인 PHP의 첫 번째 버전이 발표되다.

 

98년전, 1916년 6월 8일

영국의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 탄생.

 

1999년 6월 9일

코소보 전쟁: 유고슬라비아와 NATO가 평화 협정을 맺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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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과 9일의 역사

Wikipedia

 

6월 8일

632년 -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하다.

651년 - 일본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사망하다.

1809년 -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페인 사망.

1810년 - 독일의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 탄생.

1845년 -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이 사망하다.

1861년 - 테네시 주남부연합에 가담했다.

1862년 - 미국 남북전쟁, 셰넌도어 계곡 전역 북군의 프레몬트군이 크로스키스(Corss Keys)의 남군 이월 사단을 공격했다.

1867년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성립되다.

1916년 - 영국의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 탄생.

1990년 - 1990년 FIFA 월드컵이 개막했다.

1995년 - 스크립트 언어PHP의 첫 번째 버전이 발표되다.

 

6월 9일

68년 - 네로로마 원로원에 의해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후 자살하다.

1672년 - 러시아의 황제 표트르 1세 탄생.

1781년 - 영국의 발명가 조지 스티븐슨 탄생.

1934년 - 도날드 덕이 영화를 통해 첫 등장하다.

1942년 - 체코슬로바키아의 리데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파괴되다. 이 마을은 전후에 다시 재건되었다.

1946년 - 현존하는 국가 원수 중 가장 오랜 기간동안 재임중인 라마 9세타이의 국왕이 되다.

1987년 - 연세대학교 학생인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사건이 발생하다. 이 사건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991년 -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했다.

1999년 - 코소보 전쟁: 유고슬라비아NATO가 평화 협정을 맺다.

2007년 - 삼성 라이온즈양준혁 선수가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2000안타를 달성하다.

 

 

 

   1867년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성립되다.

   참고글 : 문명5BNW-(#1-10) 1차세계대전 : (1) 발발 : 민족주의

 

   1672년 - 러시아의 황제 표트르 1세 탄생.

   참고글 : 5월 26일과 27일의 역사 - 표트르1세&상트페테르부르크

 

 

 

 

 

 

 

 

 

 

1995년 6월 8일

스크립트 언어인 PHP의 첫 번째 버전이 발표되다.

 

   나는 '아주 초보적인 수준'으로 웹언어인 HTML과 PHP를 사용해봤는데, 그 중에서도 PHP는 확실히 신세계였다. 글쎄, 이걸 어떻게 비유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언어의 특성을 떠나 해당 언어의 결과를 뭔가에 비유하자면, HTML은 한번 그리면 그걸로 끝인 '유화'였고, PHP는... '카드섹션'? 과 같은 느낌이었다. 지시와 상황에 따라 모양을 바꾸는 것 말이다.

 

   쉬운 이야기를 너무 어렵게 말한 것 같다. 부족한 지식으로나마 최대한 설명해보자면, 결국 '정적'이냐 '동적'이냐의 차이이다. '동적'이라는 것에도 모양이 자유롭게 변화하는 것과 내용이 자유롭게 변화하는 것이 있을텐데, PHP는 내용을 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HTML5가 모양을 동적으로 바꿔줄 수 있는 언어라고나 할까?)

 

  우선 HTML로 만든 홈페이지는 단순한 '책'과 같아 정해진 내용을 정해진 배치로만 보여줄 수 있었고, 사용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링크'를 클릭하여 페이지를 넘나드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PHP는 동적인 웹페이지를 언어적으로도 손쉽게 구현할 수 있게 해주었고 HTML과 함께 사용할 수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몇가지 기능들과 결합하여 '게시판'을 구현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클릭하면 내용을 불러와 펼치고, 댓글을 달고, 글을 검색하면 검색결과를 모아 보여주고... 그것이 몇개의 파일안에서 PHP언어에 따라 '내용이 춤추며' 표시되었다. 물론 더욱 복잡한 기능들도 가능했으며, PHP는 개인서버에서 지원하기도 편하여, 내가 알기로는 현재 다른 동적 웹페이지를 구현하는 언어들에 비해 훨씬 널리퍼져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유용한 웹언어인 PHP의 발명자는 '라스무스 러도프'라는 그린란드 태생 프로그래머다. 대학에서 시스템 설계 공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에 PHP를 만들고 그것을 오픈소스로 대중에게 공개하게 되는데, 이것이 몇몇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Personal Home Page Tools'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후 개선을 거듭하게 되면서 그 '동적'인 활용도가 높아지게 되고, 정식명칭도 'Personal Hypertext Preprocessor'로 바뀌게 된다. '인터넷에 표시되는 글들'(Hypertext)을 미리(pre-) 처리하는 언어(processor)라는 뜻으로, 사용자가 클릭을 하거나 키보드를 치면, 그로 인해 보여져야할 웹페이지를 알맞게 처리해 보여준다는 PHP의 동적인 역할을 명칭에 잘 넣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여튼 요즘 PHP는 웹기반 경영지원 프로그램 같은 것으로 영역을 확대해가며 그 활용도를 크게 확대해가고 있고, 발명자인 라스무스 러도프는 2003년에 'MIT Technology Review'가 선정한 35세 이하 혁신가(innovator) 100인 중 1명으로 선정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오픈 소스 관련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한다.

   그러고보니 프로그래밍 쪽에서는 오픈 소스 활동이 정말 활발하게 잘 이뤄지고 있는 듯 하더라. 애초에 '오픈 소스'라는 개념 자체가 프로그래밍쪽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그러한 공유정신 자체는, 기업 소속이 아닌 매니아틱한 개인 개발자가 각종 소스와 언어를 개발, 발명해서는 아닐까? 이제 3D프린터가 확산되어 하드웨어도 개인이 개발부터 실적용까지 할 수 있게 되면, 그 쪽에서도 다양한 물건의 설계도가 오픈 소스로 풀리게 되겠지?

 

   소프트웨어든 하드웨어든 이러한 혁신적인 발명품들과 그를 만들어낸 발명가들... 정말 세상은 그 사람들이 만들어가고 바꿔가는 듯 하다.

  

 

 

 

 

 

 

 

 

1916년 6월 8일

영국의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 탄생.

 

 

   그러고보니 여기에서 다룰 '프랜시스 크릭'도, 맥락은 다르지만 PHP를 발명한 '라스무스 러도프'와 같은 혁신가에 속하지 않나 싶다.

   일단 '프랜시스 크릭'은 '제임스 왓슨'과 함께 1953년에 DNA 이중 나선 구조를 밝혀낸 것으로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1962년에는 노벨상을 타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오른쪽 사진에서 오른쪽 인물이 크릭)

 

   크릭은 애초에 물리학을 전공했다가 2차세계대전 후에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이었는데, 이후 왓슨을 만나 DNA를 발견 하고 노벨상을 받은 뒤, 분자생물학 분야를 떠나 신경해부학을 독학하고 신경과학과 관련된 여러가지 분야를 공부한다. 비슷한 분야이긴 해도 또 다시 전공을 바꾼 것인데, 노벨상 탄 그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알고 싶어했던 것은 바로 '인간의 의식'이었다.

 

   크릭은 분자생물학을 공부하며 물질의 단위인 원자, 그것이 모여 만들어내는 분자가 생명체의 모든 생명활동의 시작, 근본이라고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은 DNA에 대한 연구를 통해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그래서 크릭은 '인간의 의식'과 같은 알 수 없는 현상도 결국은 세포, 분자로 이뤄져있을 뇌에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분명히 과학적 이해가 가능하다고 봤다.

 

   하지만 그가 신경과학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을때, 신경과학의 다양한 연구분야와 주제들이 통일되어있지 않다는 것과, '뇌'라는 것에 대한 무관심과 '의식'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애초에 논하는 것을 금하는 분위기 등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연구 분야 융합의 필요성과 다양한 신경현상의 근본적 원인을 파헤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현대 과학에서는 당연한 접근법이 당시에는 갖춰져 있지 않았던 것인데, 그렇게 시대를 앞서 생각했던 크릭은 그는 자신이 그러한 것을 타파하기로 결심하고 뜻이 통하는 과학자와 심지어 철학자들까지 함께하며 연구를 진행했고 논문을 써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크릭은 인간 의식의 비밀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그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1994년의 저서 '놀라운 가설'에서, 영혼-마음-의식과 같은 것을 비물질적이고 비과학적인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그것은 신경과학분야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대, 그대의 기쁨과 그대의 슬픔, 그대의 기억과 그대의 야망, 그대의 주체성과 자유의지는 사실 신경세포와 그 관련 분자들의 거대한 집합체의 행태에 지나지 않는다." / "사람의 정신활동은 신경세포, 신경아교질세포, 그리고 이것들을 구성하고 영향을 미치는 원자와 이온과 분자의 행태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 "20세기의 과학적 뇌 연구는 의식과 자유의지와 영혼이 과학적 탐구 대상임을 인정하게 만든다." - '놀라운 가설'의 내용 

 

   이것은 마치 종교 또는 비과학적 주장과 싸우는 일부 과학자들처럼, 인간의 의식을 마냥 신비롭게만 생각하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노력, 어쩌면 투쟁, 그 자체였다.

 

   그 결과인지는 몰라도 이제 최소한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크릭이 신경과학 연구 초기 한탄했던 뇌에 대한 무관심과 의식을 논하는 걸 금기시하던 분위기는 완전히 타파되었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얼마전 올렸던 TED 강의 리뷰에서처럼 뇌에 대한 과학적 이해도 상당히 깊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고 말이다. 훗날 우리 인간이 '뇌'라는 여전히 신비로운 기관에 대한 비밀을 완전히 밝혀내고 그 역사를 되돌아 볼때, 프랜시스 크릭이 단연 그 시작에 있지 않을까?

  

 

  

 

 

 

 

 

 

1999년 6월 9일

코소보 전쟁: 유고슬라비아와 NATO가 평화 협정을 맺다.

 

 

   코소보 사태... 학생시절 한 때 뉴스에서 참으로 많이 들었던 사건이었다. 그 때 난 그것을 마치 중동과 같은 어떤 분쟁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 정도로 생각했었고 실제 맥락 상 그렇게 보는 것이 맞기도 했으나, 당시의 내가 지금과 같은 지식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사태를 엄청나게 엄중하게 봤을 듯 하다. 코소보는 바로 1차세계대전을 촉발시킨 '사라예보' 바로 근처로, 코소보 사태는 1차세계대전 직전의 갈등양상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의 세계에 3차 세계대전의 공포가 불어닥치고 있었다고나 할까?

 

 

 

 

   코소보 지역은 고대, 중세의 여러 국가들을 거쳐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1차세계대전으로 오스만제국이 몰락하면서 코소보 지역은 원래 주인이었던 세르비아로 돌아가는, 독립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 민족의 발원지이자 남쪽에서부터 침입해온 오스만제국에 대항했던 성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에 의해 500여년간 지배를 받는 동안 코소보 지역은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가장 큰 변화는, 세르비아 전체가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세르비아 남부 쪽에 속하던 코소보 지역에서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북부로 이주했고 심지어 세르비아 밖으로 벗어나기도 했는데, 그 자리를 오스만제국의 장려로 이주해온 이슬람계 알바니아인들이 차지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코소보가 1차세계대전 이후 세르비아 주도의 신생국가인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에 흡수되자, 세르비아인들이 알바니아인들을 몰아내고자 탄압하기 시작했고, 반대로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인들의 성지였지만 이젠 알바니아인들로 채워진 코소보를 별도로 독립시켜 자신들이 살아갈 곳을 마련하길 원했다. 그것이 갈등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갈등은 계속 심화되어갔다. 1차세계대전 후 코소보 갈등이 시작 된 뒤 알바니아인들과 세르비아인들간의 유혈충돌이 반복되었고,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살인적인 강경진압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그래도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을 거치며 알바니아인들은 코소보의 자치권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는데, 1989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대통령이 되면서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강력히 주장하자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이 크게 반발하며 들고 일어났고, 이에 세르비아 정부는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공공기관과 언론을 폐쇄시키는 것으로 대항하면서 이것이 코소보 사태로 알려지며 국제적 이슈가 되었다.

 

   동시에 전 세계인들은 큰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이 1차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갈등양상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1차세계대전 직전을 살펴보면, 힘이 약해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세르비아 왕국은 범슬라브족 민족국가를 세우길 원했는데, 슬라브족 국가인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넘어가자 분노했고, 그 결과가 세르비아인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쏜 사라예보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대전을 유발했고 말이다. 결국 코소보를 놓고 벌어지는 갈등은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로 넘어갔던 상황과 유사했고, 그 과정에서 세르비아가 제2의 사라예보 사건과 같은 '이벤트'를 발생시킬 것이라는 우려는 당연한 것이었다. (심지어 코소보는 사라예보 근처다.)

 

 참고글 : 문명5BNW-(#1-10) 1차세계대전 : (1) 발발 : 민족주의

 

   그러나 사태는 더욱 심화되어 갔다. 너무도 강경해진 세르비아 민족주의로 인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와의 연대를 포기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는 가운데(1991.06), 같은해에 알바니아인들은 코소보의 독립을 놓고 투표를 시작했다. 당연히 독립 찬성의견이 많았고 알바니아 자치의회는 독립을 선언한다. 당연히 세르비아는 그것을 불법으로 봤고 독립을 인정해주지 않았는데, 그에 알바니아인들은 무장투쟁을 하기로 하고 '코소보 해방군'(KLA)을 결성(1997)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고조되어가던 갈등은 폭발하였으며 세르비아-알바니아인들 상호간의 유혈 충돌과 함께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코소보에 군대를 투입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상황이 그 지경이 되었지만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없는게 맞겠다. 코소보에서 갈등이 시작되기 전부터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 지역에 많아진 상태였고, 1차세계대전 이후 1990년대까지 수십년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코소보지역의 세르비아인들은 더더욱 줄어든 상태였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성지였던 코소보는 이젠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성지가 되어버렸으며 그는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결국 국제사회가 개입하기로 결정한다. 모두가 만족할 해결책은 없지만 상호간의 충돌과 인종학살은 막아야 했다. 처음엔 외교적으로 대통령 밀로셰비치를 압박했지만 잘 먹히지 않자 무력으로 개입하기로 결정, 1999년 3월 23일부터 토마호크 미사일이 불을 뿜으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NATO군이 세르비아의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요즘에도 그렇듯 러시아 등의 국가들이 이러한 결정에 반발했고(세르비아(당시 유고슬라비아)가 공산권이기도 했다) 러시아가 군대를 세르비아 지역으로 움직이기까지 하면서 긴장감이 크게 고조되기도 했는데, 결국은 세르비아는 물론 각국이 군대를 코소보에서 철수 시키고 UN 평화유지군이 코소보에 주둔하는 것으로 사태는 15년전 오늘인 6월 10일에 마무리된다. (오른쪽 사진은 코소보 전쟁 당시 독일 기갑부대)

 

   하지만 그건 '코소보 전쟁'과 1990년대의 '코소보 사태'가 마무리 된 것일뿐, 아직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2008년에는 코소보가 다시 한번 독립을 선언하고 민주공화국이 될 것을 선포했는데, 미국이나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그를 환영했지만, 당연히 세르비아는 반대하고 있고, 그 외에 러시아, 중국 역시 반대, 그리고 그 근처 그리스와 루마니아 역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2014년 현재 한국을 포함한 108개국이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고 있지만 미승인국가인 상황...  

 

 

 

 

   최근 이 코소보 사태는 다시한번 주목을 받고 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때문이다. 크림 자치구 역시 스스로 독립을 투표한 뒤 독립을 선언했고 우크라이나가 그에 반발하여 코소보와 똑같은 모습을 보였는데, 러시아는 코소보의 독립은 안된다고 말하면서도 크림 자치구의 독립은 승인하고 병합까지 해버렸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지금 '우리가 반대하긴 했지만 결국 2008년 코소보의 독립을 국제사회가 승인하지 않았냐' 라는 입장을 보이면서 크림 자치구의 독립을 합리화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국제 사회는 코소보의 경우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기에 보호차원의 UN평화유지군 투입과 독립 허용이 있었던 것이고 따라서 크림 공화국의 상황과는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무튼 이것은 재미있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싶다. 러시아가 크림 자치구의 독립을 승인했기 때문에, 코소보의 독립을 거부할 명분이 크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최근 코소보와 세르비아간의 관계 정상화 협상도 진행되고 있다하니, 코소보에도 평화가 찾아오는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발칸반도도 전체적으로 안정화 될 것이고, 이것은 국제사회의 개입과 당사자간의 협의로 민족 분쟁이 해결된 멋진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쪽도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새삼 국제 평화를 기원해보게 된다. (물론 코소보 사태에 대한 서방개입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많다)

 

   아참, 참고로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해 코소보 사태를 촉발시켰던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코소보 사태 종결 이후 2000년에 민중봉기로 실각했고,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학살등의 전쟁범죄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수감 중이던 2006년에 감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권선징악 그 자체였다. 

 

참고글 : 세르비아 "코소보 관계 정상화 협상 격상 필요" - 연합뉴스, 2013.12

 

 

 

 

 

 

 

 

6월 8일과 9일의 역사

 

- fin -

 

 

 

 

 

 

   현재까지 수정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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