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체스 챔피언 '카스파로프'와 IBM의 컴퓨터 '딥 블루'와의 체스 대국 장면]
딥 블루 이야기를 쓰다보니
관계는 없지만 옛날에 했던 생각이 떠올라 적어본다.
난 어렸을 적부터 사람들이 '인공지능'에 대해서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정말 영화나 만화속에서 보는, 사람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닌 정말 사람과 같은 인공지능이 등장하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과 같은 창의성, 지능과 함께 엄청난 연산이 가능한 뇌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고,
그들의 '생각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태어난지 몇 초만에, 엄청난 정보와 엄청난 정보처리 능력으로
인간을 멸종시켜야 자신이 생존할 수 있다는 자신의 존재 이유, 자신의 평생의 목적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순식간에 내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 발생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난 정말 이것이 망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링 크 -
5월 12일과 13일의 역사
국제 간호사의 날, 나이팅게일이 위대한 이유
http://blog.daum.net/smileru/8888266
- 순 서 -
1891년 5월 11일
오쓰 사건이 일어나다.
1997년 5월 11일
딥 블루가 가리 카스파로프와의 여섯 체스 대국 끝에
세계 체스 챔피언과의 경기에서 이긴 최초의 컴퓨터가 되다.
추천은 손가락 클릭!
5월 11일과 12일의 역사
Wikipedia
1797년 - 베네치아 공화국이 나폴레옹 1세에 의해 멸망하다.
1820년 - 영국의 간호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태어나다.
1925년 - 일본 제국이 치안유지법을 시행하였는데 이 법은 해방 뒤 국가보안법으로 이어진다.
1956년 - 19시 30분 황태영이 설립한 KORCAD방송국이 대한민국 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다.
2008년 - 중화인민공화국 쓰촨 성의 성도인 청두에서 북서쪽으로 약 90㎞ 떨어진 지역에서 리히터 규모 7.9의 쓰촨 성 대지진이 일어나다.
1891년 5월 11일
오쓰 사건이 일어나다.
위키피디아에 보면 그냥 이렇게 툭, 던져진 사건들이 있다. 부연설명도 없이... '오쓰 사건이 일어나다'라는 것도 딱 그랬는데, 뭔가해서 클릭해봤더니 정말 흥미로운 사건이더라.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다.
1891년 5월,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 '니콜라이 2세'는 시베리아 철도 극동지구 기공식에 참여하기 위해 러시아 해군 함대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다 일본을 방문한다. (인도양을 거쳐 일본을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 듯?) 니콜라이 황태자는 나가사키, 가고시마, 고베를 거쳐 교토에 도착했는데, 당시에는 러시아가 상당한 강대국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니콜라이 황태자를 영접했다고 한다. 일본 황실에서는 아리스가와 타케히토 친왕(황태자가 아닌 왕자 또는 황족)가 다양한 서구 경험등으로 인해 니콜라이 황태자를 교토에서 영접했는데, 그러던 중 사건이 터진다.
5월 11일, '비와' 호수를 관광하고 돌아가던 니콜라이 황태자는 인력거를 타고 타케히토 친왕과 오쓰 시내를 이동하고 있었는데, 주변에서 경호를 하고 있던 '쓰다 산조' 순사가 니콜라이 황태자를 향해 갑자기 칼을 휘두른 것이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오른쪽 머리에 상처를 입은채로 인력거에서 뛰어내려 골목으로 도망쳤다. 쓰다 산조는 칼을 든 채 뒤를 쫓았는데, 곧바로 인력차부의 발에 걸려 넘어졌고, 인력차부가 주워든 칼에 목을 다치면서 곧바로 체포된다. (오른쪽 사진은 인력거를 타고 있는 니콜라이 황태자(오른쪽))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사건이었다. 당장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이제 막 메이지유신을 끝낸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할 수도 없었고 해서도 안됐다. (중국 정도는 노리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심지어 황태자는 함대를 끌고 들어온 상태였다.
서구 문화에 밝았던 타케히토 친왕도 이것이 아주 심각한 외교 문제라고 생각해, 수행원에게 사건을 요약해 도쿄의 메이지 천황에서 전보로 보고하도록 하고, 메이지 천황이 즉시 교토로 와줄 것을 요청한다. 결국 곧바로 기타시라카와 요시히사 친왕이 교토에 먼저 도착했고, 다음날 밤에는 메이지 천황이, 그 이후에는 아리스가와 타루히토 친왕이 교토에 도착했다. 메이지 천황은 도착한 12일 밤에 바로 니콜라의 황태자의 병문안을 할 예정이었으나, 니콜라이 황태자가 요청하여 병문안은 13일에 이뤄진다. 세 친왕과 메이지 천황은 러시아 함대가 있는 고베항까지 니콜라이 황태자를 배웅했는데, 메이지 천황이 군함까지가서 병문안을 하려 하자 중신들이 납치될 수 있다며 말렸지만, 메이지 천황은 그를 뿌리치고 병문안을 하고 온다. (왼쪽 사진은 니콜라이 황태자)
일본인들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러시아가 일본을 보복 공격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근신의 뜻을 표하기 위해 학교들이 휴교했고, 종교시설들은 황태자를 위한 기도를 했다. 게이오 대학교 학생들은 프랑스어로 사과편지를 썼고, 니콜라이 황태자에 1만통의 문안전보가 일부 지역은 범인의 이름인 '쓰다', '산조'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하타케야마 유우코'라는 여성은 '죽음으로 사죄한다'라며 교토 부청 앞에서 면도날로 자결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일본 조정과 일본 국민들의 행동에는, 일본이 아직 약소국이라는 인식과, (사실이었다) 당시 세계에 휘몰아치고 있었던 서양 국가들의 제국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물론 두려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반감', '저항'도 있었고,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칼을 휘둘렀던 '쓰다 산조' 역시 러시아의 극동 진출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에 일본 정부는 '굽신굽신'하고 있었으니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요즘에도 러시아와 일본은 북방 쿠릴열도에서 영토분쟁을 겪고 있지?
▒
일본은 그렇게 러시아를 두려워했고, 전쟁은 아니어도 막대한 배상금이나 영토할양을 요구받을까 우려했지만,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 오히려 일본의 신속한 대처와 사죄로 관대한 태도를 보였고, 니콜라이 황태자도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범인 '쓰다 산조'에 대해서는 사형을 요구했다. (왼쪽 사진은 쓰다 산조)
일본 정부도 사형을 추진했다. 훗날 안중근에게 암살당한 '이토 히로부미' 귀족원 의장(=국회의장. 전 총리였으며, 의장 이후에 다시 총리가 되고 조선통감도 역임)은 사형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계엄령을 선포해서라도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입법부의 의견에 행정부, 즉 일본 내각은 이견이 있긴 했지만 역시 전반적으로는 사형에 찬성했다.
그러나 사법부는 달랐다. 범인에게 적용될 '구 형법 116조'는 일본 황족에 대한 위해에만 적용되고, 또 약간의 부상에 그쳤기 때문에 법적으로 사형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일본 대심원 원장 '고지마 고레카타'는 법치국가로서 법은 준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사건 발생 16일 뒤, '쓰다 산조'는 일반인에 대한 살인미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에 대해 러시아는 특별한 행동이 없었는데, 이는 사건 이후 새로운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3권분립'에 대한 논란이었다. 사법부에 가해진 행정부와 입법부의 압박이 논란이 된 것이다. 동시에 일본 대심원 원장 '고지마 고레카타'도 실질적으로는 재판에 관계가 없었는데 사형은 안된다고 발언했기 때문에, 당시 재판부의 독립성도 위협받았다 볼 수 있었다. 결국 메이지 유신으로 들어선 일본 민주정부의 구조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가 이뤄졌다고... 사실 그 논의의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위키나 다른 인터넷 검색으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확실해졌다고 하는데...
이렇든 저렇든 인상적인 사건이다. 스스로를 정말로 잘 알고 있었던 것인지 러시아에게 최대한 몸을 낮췄던 일본도 인상적이고, 3권분립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던 것도 그렇다. 그나저나 우리는 3권분립에 대해서 얼마나 논의해봤을까? 그랬던 적이 있었나? 중앙권력이 다양한 분야에 영향력을 미치는 건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 고치려고 해도 고칠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
그리고 이 말도 빼 놓으면 안될것 같다. 제국주의의 위력에 벌벌떨던 일본은, 3년 뒤 청일전쟁으로 중국을 압도하고, 그리고 다시 10년이 흐른 뒤에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한다. 뭐 이 오쓰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다하긴 어렵지만, 몸을 낮춰야 할 때, 그리고 14년 뒤 '들이 대야 할 때'를 잘 알았던 일본이라 할 수 있겠다.
1997년 5월 11일
딥 블루가 가리 카스파로프와의 여섯 체스 대국 끝에
세계 체스 챔피언과의 경기에서 이긴 최초의 컴퓨터가 되다.
오쓰 사건에 이어 특별히 다룰만한 소식은 없어 이걸 써봤다. IBM의 컴퓨터 '딥 블루'가 체스게임에서 사람을 이긴일... 이미 유명한 일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단순히 슈퍼컴퓨터가 사람을 이겼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 딥블루의 배경에도 긴 역사가 있다.
딥 블루가 사람을 상대로 첫 승을 거두기 12년전이었던 1985년, 카네기 멜론 대학의 대만인 대학원생 'Feng-hsiung Hsu'(슈펑슝?)과 '토마스 아난다라만'(Thomas Anantharaman)은 'Sun-3' 워크스테이션을 활용하여 'ChipTest'라는 체스 전용 컴퓨터를 만든다. 1초에 약 50,000회의 이동을 계산할 수 있는 컴퓨터였는데, 1986년에 북미 컴퓨터 체스 챔피언쉽 대회에 출전해 컴퓨터들끼리의 대결을 시작하지만 입상에는 실패한다.
1987년에는 'ChipTest-M(microcode)'을 만든다. 'Sun-4' 워크스테이션을 이용했고, 기존 ChipTest의 버그를 제거했으며, 초당 연산능력을 500,000회로 늘렸다. 성능이 향상된 ChipTest-M은 1987년 북미 컴퓨터 체스 챔피언쉽에서 4:0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들은 새로운 팀원을 모집하여,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소설속에 등장하는 컴퓨터에서 이름을 딴 '깊은 생각'(Deep Thought)이라는 새로운 체스 전용 컴퓨터를 만든다. 이제 연산능력은 초당 800,000회 수준에 도달했는데, '깊은 생각'은 1988년과 1989년의 북미 컴퓨터 체스 챔피언쉽에서 모두 우승한다. (1989년에는 같은 학교의 Hi-Tech팀과 공동우승) (왼쪽 사진이 '깊은 생각' 팀과 컴퓨터 '깊은 생각')
하지만 깊은 생각도 1989년, 세계 챔피언이었던 '가리 카스파로프'에게는 완패했다. 카스파로프... 그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할 듯 한데, ChipTest가 등장하던 1985년에 22세의 나이로 세계챔피언에 오른 카스파로프는, 2000년까지 15년간 세계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으며, 2005년까지는 세계 랭킹 1위의 자리를 유지한 엄청난 인물이었다. 사실 1980년에 주니어 챔피언에 이미 오른 상태였다고... 아무튼 그냥 '지존'이었다. (오른쪽 사진은 그가 첫 우승 할 때의 사진)
결국 '깊은 생각'의 관심은 사람에게로 옮겨간다. '깊은 생각'은 1988년과 1989년의 우승으로 이미 컴퓨터 세계를 평정한 상황이었다. (이후에도 '깊은 생각', '깊은 생각2' 가 북미 컴퓨터 체스 챔피언쉽에서 수차례 우승한다.) 그러던 중, IBM에서 이 '깊은 생각'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애초에 ChipTest를 만들었던 '슈펑슝'을 비롯한 팀원이 1989년에 박사학위를 따면서 동시에 IBM에 합류, '딥 블루'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딥 블루도 'ChipTest'에서부터 이어진 것이었다. 6년뒤인 1995년 처음 등장한 '딥 블루 프로토타입'도 기본적으로는 '깊은 생각2'였다. 그것이 조금 개선되어 1996년에 등장한 것이 딥 블루다. 물론 '조금만' 개선된 것은 아니었다. IBM에서 7년간 개발된 딥 블루는, 강력한 병렬계산능력을 통해 초당 100,000,000회(1억회)의 연산이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그렇게 1996년 딥 블루는 다시 한번 카스파로프와 붙는다. 하지만 역시 2무 4패로 승을 올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딥 블루는 다시 한번 업그레이드 과정을 거친다. 그 결과 초당 200,000,000회의 체스 이동 연산이 가능해졌다. 두 배로 업그레이드 된 것인데, 이 성능은 당시 세계에서 259번째로 빠른 컴퓨터 성능이었다고 한다. (체스용 특수칩은 고려되지 않았다) 사실 빠른 것 보다는 체스를 두는 알고리즘이 더욱 중요한 것이었던듯?
여튼 그렇게 업그레이드된 딥 블루는 결국 1997년 오늘, 첫 게임은 졌지만 두번째 게임에서 드디어 카스파로프에게 첫 승을 거둔다. 그리고 총 6경기에서 2승 3무 1패로 최종 승리를 거둔다. 놀라운 승리였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버텨낸 사람이 더 대단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런데 경기 후 카스파로프는 의문을 제기한다. 자신이 진 두번째 게임에서, 딥 블루의 창의성을 엿보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한 딥 블루가 학습해 가는것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딥 블루가 역대 체스 대국 기록과 수학적인 예측으로 행동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굉장히 이상한 부분이었다. 결국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후 학습기능은 내장되어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개발자들이 중간에 프로그램 코드를 수정할 수 있다는 규칙이 사람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악용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IBM은 부인했다. 시스템 로그 파일의 공개를 원하는 카스파로프의 요구도 IBM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딥 블루는 곧장 해체되어버리고 만다.
뭐 끝이 깔끔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흥미로운 역사다. 그러나 딥 블루와 같은 컴퓨터가 단순히 빠르다고 전부가 아니라는 것과, 역시나 그런 컴퓨터의 개발에는 슈펑슝과 같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후에 2004년부터 개발되어 2011년 퀴즈게임에 출연해 역시 사람보다 많은 상금을 거머 쥔 IBM의 '왓슨'과 같은 컴퓨터도 있었지만, 그 역시 인간의 노력이 수반되었다. 그 알고리즘, 로직 자체는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컴퓨터가 컴퓨터를 만드는 세상이 온다면, 컴퓨터의 발전은 어떤 속도로 이뤄질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필시 '인공지능 컴퓨터'는 등장하는 날이 올 것이고, 어쩌면 수십년 내에는 무조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인간다움을 흉내내는' 것이 아닌, 진정한 '지능'을 갖춘 컴퓨터라면, 그 능력은 어느정도일까?
만화에 나오는 인공지능 로봇들도 너무 로봇스럽게 묘사되었는데, 그렇게 '위트'도 있는 만화속 로봇 정도의 수준이면, 멍청하게 '난 2030년 모델이라 이런건 할 수 없다'라고 하지 않고, 스스로를 개선하려 하거나 개선품을 만들어 낼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난 그래서 '인공지능'이 등장하는 순간 그 인공지능이 엄청난 속도로 생각을 해 나갈 것이 나름 두렵다. 동시에 진짜 인간의 두뇌 같다면 수백년, 수천년이 걸려 내릴 결론(이를테면 인류정복?)을, 인공지능이라는 것은 등장과 동시에 수초만에 그것이 불가피하다고 결론내리게 될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신적은 없는지?
딥 블루에 대해서 다루다보니 어렸을적 상상이 다 떠오른 듯 하다. 아무튼 이번글은 여기까지다.
5월 11일과 12일의 역사
- fin -
오타 수정 (2014.5.10)
추천은 손가락 클릭!
'오늘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6월 8일과 9일의 역사 - 코소보 전쟁 종결과 그 배경, PHP발표, 프랜시스 크릭 등 (0) | 2014.06.06 |
---|---|
5월 25일과 26일의 역사 - 부산정치파동과 이승만, 덕혜옹주 탄생 (0) | 2014.05.24 |
4월 27일과 28일의 역사 - 잠비아 축구대표팀 참사,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 서비스 시작 (0) | 2014.04.24 |
4월 13일과 14일의 역사 - 전두환 4.13호헌조치와 기초선거무공천, 타이거우즈 최연소우승 (0) | 2014.04.10 |
3월 30일과 31일의 역사 - 알래스카 매매, 스타크래프트 출시, 버진아일랜드 매매 (0) | 2014.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