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4월 13일과 14일의 역사 - 전두환 4.13호헌조치와 기초선거무공천, 타이거우즈 최연소우승

스마일루 2014. 4. 10.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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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는 전두환 대통령.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에 의원 내각제로 대항하다 먹히지 않자

개헌논의를 중단시킨 뒤 쌩뚱맞게 지방자치제를 제안했는데,

그나마도 결국 후계자 '노태우'가 고쳤던 법을 다시 고쳐 지방자치제의 시행을 연기했었다.

 

오늘날, 팽팽한 여야 대립속에 정당들이 각종 정치혁신 공약들을 쏟아내다

선거가 끝나고 국민들의 관심이 사라지자 '기초선거무공천' 공약이 도루묵이 되고 있는 상황과 똑같다.

이래서 항상 여야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긴장감이 유지되어야 정치가 발전하는 것인데...

 

여하튼, '소모적 정치논쟁을 피하자'면서

개헌이나 지방자치&민주주의의 확대를 피하려 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또한 그를 약속해놓고 번복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똑똑히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런 자들이 줄곧 역사 속에서 악역을 맡아 왔으니 말이다.

 

 

 

 

 

 

 

- 링 크 -

 

4월 14일과 15일의 역사

멘체스터 다리 붕괴, 타이타닉호 침몰,

천하장사대회 개최, 차베스 복귀

http://blog.daum.net/smileru/8888248

 

 

 

- 순 서 -

 

27년전, 1987년 4월 13일

대한민국 정부가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다.

 

17년전, 1997년 4월 13일

타이거 우즈가 마스터스 골프대회 최연소 우승을 달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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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과 14일의 역사

Wikipedia

 

4월 13일

1204년 - 제4차 십자군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다.

1598년 - 프랑스앙리 4세낭트 칙령을 발표하다.

1743년 -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탄생.

1849년 - 헝가리가 공화국이 되다.

1919년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선포되다.

1941년 - 소비에트 연방일본 사이에 불가침 조약이 맺어지다.

1970년 - 아폴로 13호에서 산소탱크가 파손되는 사고가 일어나다.

1987년 - 대한민국 정부가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다.

1997년 - 타이거 우즈가 마스터스 골프대회 최연소 우승을 달성하다.

2008년 -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 주 총독인 쿠엔틴 브라이스마이클 제프리의 뒤를 이어 최초의 여성 총독으로 임명되다.

2009년 -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광명성 2호 발사를 비난하는 내용의 의장 성명안을 채택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에 반발하여 6자 회담의 불참을 선언하고 국제 원자력 기구(IAEA)의 사찰요원을 추방하다.

4월 14일

1759년 - 작곡가 조지 프리드릭 핸델 사망.

1831년 - 영국 맨체스터에서 군인들이 다리 위를 행진하다 이로 인해 다리가 붕괴되다.

1865년 - 존 윌크스 부스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을 암살하다.

1894년 - 토머스 에디슨영사기 발명을 발표하다.

1912년 - 타이타닉 호빙산에 충돌하여 이튿날 침몰하다.

1956년 - 비디오 테이프가 시카고에서 처음 선보이다.

1981년 - 우주왕복선 콜롬비아 호가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귀환하다.

1983년 - 장충체육관에서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가 열리다.

2003년 - 인간 게놈 프로젝트 - 99.99%의 정확도로 인간 유전자 해독을 99% 완료하다.

2009년 - 마이크로소프트윈도 XP 서비스팩 1의 지원을 중단하다.

 

 

 

 

 

 

 

 

 

 

1987년 - 대한민국 정부가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1979년 12월 12일에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1980년 5월 18일의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한 뒤, 박정희 대통령과 비슷하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비상기구로 권력을 장악, 1980년에 기존의 간접선거 방식으로 11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1981년에는 7년 임기를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12대 대통령 선거에서 역시 당선된다. 마찬가지로 간접선거 방식이었고, 그 결과 90%에 달하는 득표를 얻을 수 있었다.

 

   아, 4.13 호헌 조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살짝 해보자. 해본적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잘못한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쿠데타 그 자체와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은 물론, (북한군이 개입되었다는 주장이 근래에 갑자기 나오고 있으나 말도 안되는 소리다) 미국으로부터 정권을 인정 받기 위한 미사일 사거리 180km 제한 조약에 서명한 것과 진행되고 있던 핵개발을 포기한 것 역시 비난을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 외에 각종 인권유린은 말할 것도 없다. 최근 추징당하고 있는 비자금도 당시 경제상황을 생각해보면 참 어마어마한 액수이며, 정권에 비협조적인 기업들을 해체시켜 버리는 등 제멋대로 휘두른 것도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은 절대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잘했다고 평가받는 것이 프로야구, 프로축구의 시작과 아시안게임 및 올림픽의 개최인데, 정치에 관심을 돌리기 위한 방안(3S정책) 중 하나였다는 것이야 이제 전국민이 아는 사실이다. 그래도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잘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일각에서 나오더라. 거 참... 농담이 아니고 아무나 대통령 앉혀봐라. 결과적으로 잘한 것 몇개는 그냥 나온다. 정말 그렇다. 또한 국가 지도자는 집단의 지속성을 추구하여 정치, 경제, 사회 측면의 국가 시스템 발전으로 지속가능성을 도모해가야하는데, 단발성 이벤트 몇개만이 '업적'이라는게 참... 박정희는 긍정평가와 부정평가를 놓고 논쟁이라도 벌일 수 있겠다만, 전두환에 대한 긍정평가를 하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다. 제발 전두환의 '전'자도 안 꺼냈으면 좋겠다. 감정이 더 격해질 것 같아 이쯤에서 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그만하기로 하고...

 

   그렇게 정권 말기에 접어들던 1987년, 서울대학교의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이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박종철군이 1월 14일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도 안되는 정부 발표는, 안 그래도 민주화에 대한 지속적인 시위가 계속되던 차에 국민들, 특히 학생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참고글 : 1월 13일과 14일의 역사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그리하여 나오게 된 것이 4.13 호헌 조치다. 1985년부터 계속되던 대통령 직선제(현행 방식) 개헌 요구에 전두환 대통령과 여당은 '의원 내각제' 카드로 대항해왔는데,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터지면서 여론이 더욱 악화되자 대통령 직선제로 여론이 더더욱 쏠릴 것을 우려, 4월 13일에 헌법을 지키겠다(?)는 '호헌 조치'를 단행한 것이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발표문은 다음과 같다.

 

 

   "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임기와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본인의 이 결단은 오늘의 망국을 타계하고 국가 목표를 수행하는 데 현실적으로 최선의 길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서 국민 여러분께서 전폭적인 도움과 신뢰를 보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자 합니다. 2가지의 국가 대사를 완성한 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개헌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좋은 방안이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제 우리의 정치도 나라와 사회 성장발전에 부응하는 선진 정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에서 본인은 남은 기간 동안 민주발전의 기반을 더욱 넓히고 사회 안정과 국민 화합을 다지기 위한 조치들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본인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지방자치제를 강제적으로 실시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 문제가 조속히 매듭지어져서 본인의 임기 내에 지방 자치가 시작된다면 민주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튼튼한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우리의 정치도 시대의 변천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꾸준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인물에게 발전하는 나라의 장래를 의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전환기의 정치를 이끌어나갈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 신진들을 광범위하게 포용하고 육성하는 정당의 노력은 매우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끝)

 

 

   결국 지방자치제라는 뚱딴지같은 소리와 함께, 개헌 논의를 중단하고 기존의 헌법을 유지하여, 간접선거 방식으로 다음 대통령을 뽑겠다는 선언이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을 문제삼지 않을 사람을 다음 대통령에 앉히고자 간접선거를 유지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속지 않았다. 그 '꼼수'에 국민들은 반발했으며, 최근까지도 뉴스에 자주 나왔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군이 고문으로 사망했고 그것을 경찰이 은폐, 축소하였음을 폭로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이것은 대규모의 국민들이 집회에 나선 1987년의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끝내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게 되었다. 물론 그 결과가 전두환이 원했던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이긴 했지만...

 

 

 

 

 

   여기에서 내가 추가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전두환 대통령이 4.13 호헌조치를 내리며 한 말들이다. 이 때의 내용들이 최근 정치권에서 계속되고 있는 기초선거무공천 논란과 여러면에서 겹쳐 보이더라. 위에 이미 쓴 그의 발표 내용 중 일부를 다시 가져와 보자.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본인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지방자치제를 강제적으로 실시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 문제가 조속히 매듭지어져서 본인의 임기 내에 지방 자치가 시작된다면 민주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튼튼한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참 난데없는 지방자치제 이야기가 나온 것을 보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느낀 것이, 스스로 위기를 느껴야만 정치권력을 포기하고 민주적인 방향으로 이동하겠다는 공약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위기를 넘기면 그 '약속'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이다.

 

   실제로 이어서 대통령이 된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 대통령은 지방자치제도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고, 실제 당선된 뒤 야당과 합의하여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기로 하였으나, 1990년 3당합당으로 거대여당을 탄생시킨 뒤에는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자치단체장선거를 1995년으로 미루게 된다. 1991년에 기초의회, 광역의회 선거가 있었으나 시장, 도지사 선거는 없는 비정상적인 상태... 결국 군인들이 모두 물러나고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야 지방자치제도가 제대로 실시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정상적인 지방자치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방의회가 별도로 움직이기 보다는 너무 중앙당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지방자치의 형태라고 할 수도 있다. '단체자치'라고 하는데, 그것에서 더 나아간 것이 '주민자치'이다. 중앙당에서 지방자치단체장들돠 지방의회가 완전히 벗어나는 것으로, 그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바로 '기초선거무공천'이다. 이에 대한 정당의 계산 역시 전두환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함께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우리의 정치도 시대의 변천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꾸준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인물에게 발전하는 나라의 장래를 의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전환기의 정치를 이끌어나갈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 신진들을 광범위하게 포용하고 육성하는 정당의 노력은 매우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끝)

 

 

   전두환 대통령은 지방자치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낡은 인물 보다는 새로운 정치신인을 정당이 키워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자신을 곤혹스럽게 하던 정당들을 정치신인들을 통해 위협하려는, 즉 견제당하던 역사속 권력가들이 많이들 그러했던 것처럼 '판을 뒤엎으려는' 생각이었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주민자치'가 아닌, 최고수준의 '단체자치'를 염두해두고 있는 것인데...

 

   그런식으로 지방자치를 '정치신인 발굴의 장'으로 인식했다는 것은, 지방자치가 결과적으로 그런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해도 '지방자치'라는 단어의 의미는 찾아볼 수가 없는, 굉장히 삐딱한 시선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정당이 지방자치를 바라보는 진정한 시선을 알 수가 있다. 그를 알아보기 위해 지방자치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상황에서 기초선거무공천등으로 지방의회가 '단체자치'를 벗어나 '주민자치'로까지 이동하게 된다면 어떤일이 생길지 생각해보자. 무슨일이 생길까?

 

 

   단체자치 형태라면 중앙당의 정치신인이 될 사람들이, 주민자치에서는 지역을 기반으로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로 한걸음 더 이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역주민들의 관심도 더욱 높아질 것이고 말이다. 특히 지방의회가 중앙당과 공생하는 관계가 아닌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격상되면서, 지역경제발전과 연관될 수 밖에 없는 중앙정부와 집권당은 지역 사회로부터 아주 냉정한 판단을 받게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이다. 결국 '기초선거무공천'과 같은 '주민자치'로 가는 길은 집권 여당에겐 피하고 싶은 길이다. 특히 우리처럼 지역구도가 분명한 상황에서는, 인구수가 많은 경상도를 기반으로 장기집권을 노리는 새누리당의 경우 기초선거무공천과 같은 것이 싫을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체제는 지금의 체제이기 때문에... 그를 토대로 또 생각해보면, 국회에서의 지속적인 장악력을 바탕으로 국가 지도자 자리까지 지속적으로 장악하려 한다고 봤을 때, 결국 전두환의 민정당이 그랬던 것처럼 '의원 내각제' 카드를 꺼내들지 않을까? 새누리당이 다수당인 이상 계속 총리는 새누리당에서 나올 것이고, 결국 박빙의 대통령 선거를 치루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이야기가 너무 많이 온 것 같으니 여기서 끊자. 아무튼 '소모적 정치논쟁을 피하자'면서 개헌이나 지방자치&민주주의의 확대를 피하려 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또한 그를 약속해놓고 번복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똑똑히 지켜봐야 한다는 점만 꼭 알아두자. 그런 자들이 줄곧 역사속에서 악역을 맡아 왔으니 말이다.

 

 

 

 

 

 

 

1997년 - 타이거 우즈가 마스터스 골프대회 최연소 우승을 달성하다.

 

 

   타이거 우즈! 그는 천재형 선수다. 아버지 '얼 우즈'가 40대에 새로 결혼을 하여 얻은 '늦둥이' 타이거 우즈... 그는 때마침 아버지가 취미로 삼았던 골프채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그렇게 골프를 '따라한' 타이거 우즈에게 정식으로 골프를 처음 가르쳤던 골프선생 '듀런'은, 4살의 타이거 우즈가 스윙을 하는 것을 보고 "모짜르트 같았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천재성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골프는 백인들의 품격있는(?) 스포츠였다. 그러나 우즈는 차별 속에서도 골프에 매진하여, 주니어 대회부터 닥치는대로 휩쓸기 시작했다. 역사상 최초로 주니어 대회를 3년 연속 우승하기도 했고, '골프 다이제스트지'의 '올해의 선수'로 3년 연속 선정되기도 했다. 프로선수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1995년에 처음으로 메이져 대회인 '마스터즈 대회'에 참가한다. 하지만 기록은 41위였다. 그럼에도 '나이키'는 프로에 데뷔하지도 않은 타이거 우즈와 연평균 최소 120억의 수입을 보장해주는 5년간의 스폰서 계약을 맺는다. 파격적이었다. 이후 우즈는 1996년에 공식적으로 프로에 데뷔하며 PGA투어에 참가하지만, 그 해에는 썩 좋은 성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1996년 '브리티시 오픈'의 22위가 최고기록이었다.

 

   하지만 1997년 4월 13일, 타이거우즈는 마스터스 대회에서 깜짝 우승을 차지한다. 최연소 우승이었다. 그렇게 전설이 시작되었다. 1997년부터 2009년까지 13년간, 타이거우즈는 9년은 상금랭킹 1위, 2년은 2위, 또 2년은 4위를 기록하며, 상금랭킹의 최상위권을 달려갔다. 역대 골프 선수 중 가장 많이 우승했으며, 가장 많은 우승상금을 챙겼다. 아래의 표는 Wikipedia에 있는 그의 메이져 대회 우승 기록과 PGA투어 상금랭킹 기록이다.

 

 

Major championships

Results timeline
Tournament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Masters Tournament T41 LA CUT 1 T8 T18 5 1 1 T15 T22 1 T3 T2 2 T6 T4 T4 T40 T4 DNP
U.S. Open WD T82 T19 T18 T3 1 T12 1 T20 T17 2 CUT T2 1 T6 T4 DNP T21 T32
The Open Championship T68 T22 LA T24 3 T7 1 T25 T28 T4 T9 1 1 T12 DNP CUT T23 DNP T3 T6
PGA Championship DNP DNP T29 T10 1 1 T29 2 T39 T24 T4 1 1 DNP 2 T28 CUT T11 T40

 

LA = Low Amateur / DNP = did not play / CUT = missed the half-way cut /  WD = withdrew
"T" indicates a tie for a place / Green background for wins. Yellow background for top-10.

 

 

PGA Tour career summary

Year Wins (Majors) Earnings ($) Money list rank
1996 2 790,594 24
1997 4 (1) 2,066,833 1
1998 1 1,841,117 4
1999 8 (1) 6,616,585 1
2000 9 (3) 9,188,321 1
2001 5 (1) 6,687,777 1
2002 5 (2) 6,912,625 1
2003 5 6,673,413 2
2004 1 5,365,472 4
2005 6 (2) 10,628,024 1
2006 8 (2) 9,941,563 1
2007 7 (1) 10,867,052 1
2008 4 (1) 5,775,000 2
2009 6 10,508,163 1
2010 0 1,294,765 68
2011 0 660,238 128
2012 3 6,133,158 2
2013 5 8,553,439 1
2014* 0 86,919 172
Career* 79 (14) 109,591,058 1

 

* As of March 9, 2014.

 

 

    하지만 위의 기록을 봐도 알 수 있는 것인데, 2009년 이후 타이거 우즈는 급격한 추락을 겪는다. 불륜설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당시 타이거 우즈는 의혹들이 맞다고 시인했고 골프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결국 2010년 8월에는 아내와 이혼하면서 우리돈으로 9200억원의 위자료를 지급해야 했다. 이미 그 전에 AT&T, 질레트, 게토레이, GM, 태그호이어 등의 기업들이 타이거우즈와의 광고 계약을 끊거나 재계약을 포기했으며, '골프 다이제스트'도 우즈의 월간 칼럼란을 없애버렸다. 그렇게 타이거 우즈는 서서히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타이거 우즈의 첫 스폰서였던 '나이키'는 타이거 우즈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다. 그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였을까? 그리고 그랬을 때에 그것이 또 다른 역사, 스토리가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일까? 결국 타이거 우즈는 골프 활동 중단을 선언한지 4개월만인 2010년 4월에 복귀를 선언하는데, 아직 이혼도 완료되지 않았던 어수선한 시절이어서 전반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진 못했다.

 

   하지만 2010년 말에 접어들면서 금새 기량을 회복하기 시작, 빠르게 세계랭킹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013년에 다시 세계 1위로 복귀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글쎄... 2014년에는 어떤 결과를 보여줄까? 가만보면 정말 굉장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시기를 제외하면, 15년이 넘는 시간동안 운동선수로서 세계 1위의 기량을 유지해왔다는 것인데, 이런 스포츠 선수가 또 있을까? 이런 경우에야 말로 '전설'이라는 말을 써야 하는 것 아닐까? 1위라기 보단, 그를 뛰어넘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야할테니 말이다. 오늘 글은 여기까지다.

 

 

 

 

 

 

4월 13일과 14일의 역사

 

- fin -

  

 

 

 

 

 

오타 및 서식이상 수정 (2014.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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