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2월 23일과 24일의 역사 - 한일의정서, 시드마이어 탄생, 가우스 사망

스마일루 2014. 2. 23.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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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지루하지 않게 해준 사람들이 몇 명 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해준 '스티브 잡스'와,

게임 '심' 시리즈의 개발자인 '윌 라이트'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 게임 '문명'의 개발자인 '시드 마이어'를 빼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나의 유년시절은 윌 라이트와 시드 마이어에게 정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텐데,

생각해보면 굉장히 놀라운 것 같다. '문화의 전파', '생각의 전파'의 경이로움도 느껴지고,

내가 소수의 누군가에 의해, 나도 모르게 다듬어져 갔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위대한 이들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인류의 생각은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며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게 되나보다.

 

 

 

 

 

 

- 링 크 -

 

2월 24일과 25일의 역사

그레고리력, 하미마을학살사건, 스티브잡스 탄생

http://blog.daum.net/smileru/8888215

 

 

 

- 순 서 -

 

159년전, 1855년 2월 23일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사망하다.

 

110년전, 1904년 2월 23일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명의로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다.

 

60년전, 1954년 2월 24일

미국의 게임 프로그래머 시드 마이어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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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3일과 24일의 역사

Wikipedia

2월 23일

1685년 - 독일 출생 작곡가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이 출생하다.

1855년 -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사망하다.

1904년 -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명의로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다.

1918년 - 붉은 군대독일 제국군에게 처음으로 승리하다.

1947년 - 국제 표준화 기구가 발족되다.

 

2월 24일: 에스토니아독립기념일

1525년 - 파비아 전투에서 신성 로마 제국프랑스를 격파하다.

1582년 -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율리우스력 대신 그레고리력을 사용하라는 교서 《inter gravissimas》을 발표하다.

1867년 - 독일 북부의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북독일 연방이 성립되다.

1916년 - 조선총독부소록도에 자혜의원을 설립하다.

1941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박동완 사망.

1946년 - 후안 페론아르헨티나대통령에 당선되다.

1954년 - 미국의 게임 프로그래머 시드 마이어 탄생.

1955년 - 미국의 애플 CEO 스티브 잡스 탄생.

2010년 - 대한민국의 희극인 배삼룡 사망.

 

 

   1946년 - 후안 페론아르헨티나대통령에 당선되다.

 

참고글 : 3월 24일과 25일의 역사 - 아르헨티나 근대사 - 페론 정권과 군사 정권

 

 

 

 

 

 

 

1855년 -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사망하다.

 

 

   한창 공부를 열심히 하던 고등학교때는 위대한 수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미적분 같은것은 그냥 발견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나중에 든 생각은, 나같은 평범한 사람의 경우는 미적분이 필요한 상황에서 미적분과 같은 문제의 돌파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 그 자체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관련분야의 풍부한 배경지식들이 그러한 생각자체를 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어렸을 때 부터 두각을 나타낸 '가우스' 같은 신동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걸까? 그야말로 '천재'인가?

 

 

   1777년, 위대한 수학자 가우스가 신성로마제국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을 따라 벽돌 굽는일을 하는 일을 하기를 바랬기에 공부에 대한 지원을 해주지 않았지만, 유년시절부터 수학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고, 그 덕에 어머니와 숙부의 지원을 받아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다.

 

   그런 가우스는 10살 때부터 새로운 수학의 법칙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유년시절 발견한 것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 '등차급수 합의 공식'이다. 1에서부터 100까지의 합을 계산할 때, 1+100=101, 2+99=101, 3+98=101... 이런식으로 하여 결국 101x50=5050으로 간단하게 답을 낼 수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를 공식화 했는데, 역시 지금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보이지만 앞서 말한 것 처럼 그런걸 생각해낸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로는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새로운 수학적 발견을 계속해나갔다. 특히 대학교에 가서, 그리고 수학으로 박사학위까지 진행하며 많은 업적들을 이뤘다.

 

   재미있는건 그 다음이 아닐까 싶다. 가우스는 자신의 능력을 실용적인 쪽으로 적용해나갔다. 우선 여러 역사속 수학자들이 그러했듯, 천문학에 뛰어들었다. 1801년에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주세페 피아치'가 오늘날 가장 큰 소행성으로 알려진 '세레스'를 발견하는데, 태양 뒷편으로 사라지기까지 너무 잠깐 동안밖에 관측하지 못해서, 전체궤도의 1% 정도로 추정되는 관측 데이터로는 다음 위치를 추정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에 가우스가 뛰어들어서, 스스로 발견한 '최소제곱법'을 이용하여 석달간 작업한 끝에 약 1년 뒤인 1801년 12월의 위치를 예측하여 피아치에게 그 결과를 보냈고, 후에 피아치는 그 위치에서 세레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우스가 23세 때의 일이었다. (박사학위는 21살에 땄다)

 

   그런 '수학자' 가우스는 결국 1807년 천문학과 교수가 되고 만다. (자금 지원 때문에 그러기도 했다고) 그래도 수학적인 연구를 많이 했다고 하는데, 그가 천문학과 교수시절 주로 연구했던 비유클리드 기하학쪽은 거의 100년이 지난 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쓰였으니, 끝내 우주를 위한 연구를 한 셈이 되었다. (사실 수학과 우주론은 떼어놓을 수가 없다) 1831년에는 물리학과 교수가 되기에 이른다. 이후 부피, 길이, 자기장의 단위를 정립했는데, 그 결과 자기력선의 밀도를 나타내는 단위의 이름이 'G' 또는 'Gs', '가우스'라고 이름 붙여진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가우스가 물리학자라고 생각되기 쉽게 되었지만, 가우스는 그 전에 천문학자였고, 그 전에 수학자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그런 가우스는 1855년 오늘,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일단 가우스가 남긴 자료들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다. 특히 가우스의 일기가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가우스는 그가 한 수 많은 발견보다 더 많은 발견들을 남보다 먼저하고도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가우스가 논문만 좀 더 열심히 썼어도 수학발전이 50년은 빨라졌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또한 가우스의 두뇌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가우스는 무시무시한 암기력을 보여줬다고 하는데, 가우스의 사후에 그의 뇌는 적출되어 연구에 사용되었다. 당시의 뇌연구라고 해봐야 아주 대단한 것은 없었지만, 뇌의 주름이 남다른 것이 확인되기도 했다.

 

 

왼쪽이 가우스, 오른쪽은 일반 근로자

 

 

   위대한 수학자들... 가만 보면 참 많다. 그들의 업적은 무시무시할 정도이고 말이다. 르네상스, 근세시대의 수학자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요즘엔 왜 그런 사람들이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하지만 지금도 사실 다 있을 것이다. 아직 그들이 유명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뿐...

 

 

 

 

 

 

 

1904년 -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명의로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다.

 

 

   1904년 2월 10일에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다. 러일전쟁의 발발이었다. 청일전쟁을 진작에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조선은,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자 전쟁이 발발하기 몇주전인 1904년 1월23일에 중립을 선포한 상태였다. 물론 조선조정은 실질적으로는 친러성향이었지만...

 

   하지만 일본이 그를 보고만 있을리 없었다. 일본은 조선을 두고 중국, 러시아와 싸운 것이 아니었다. 제국으로 크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를 이겨야했고, 그를 위해서 조선은 일본의 상륙함 역할을 해야 했을 뿐이었다.

 

   그런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있어 조선이 필요했다. 지정학적으로 중국, 러시아와 모두 접하고 있어 대륙 진출을 위해서는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국가였다. 청일전쟁은 일단 승리한 상황...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화 하기로 결정한다.

 

   당연히 조선은 그를 거부할 것이었으니 일본은 무력을 쓰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1904년 2월 6일에 러시아와의 국교를 단절한 뒤 2월 9일에 그대로 인천으로 군대를 보내 서울로 진격했다. 이후 앞서 말한대로 10일에 전쟁이 발발했고, 12일에 주한 러시아 공사는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을 빠져나갔고, 일본군에 의해 포위된 황궁에서 고종은 '한일의정서'를 강요당한다.

 

 

   고종은 물론 대신들은 당연히 그에 크게 반대했다. 사실 일본은 1월부터 한일의정서를 한국에 요청해왔는데, 한국이 줄곧 거부해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전쟁준비과정 중 하나가 한일의정서였던 것인데 이미 전쟁이 발발한 상황...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일본은 친러파, 반일파등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하거나 협박을 했고, 왕족 중 한명이었던 '이지용'은 1만엔에 매수당했다.

 

   결국 이지용을 비롯하여 매수, 협박당한 대신들이 고종에게 속히 한일의정서를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2월 23일, 이지용과 주한 일본 대사 하야시 사이에서 한일의정서가 체결된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1조 한·일 양제국은 항구불역(恒久不易)할 친교를 보지(保持)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를 확신하고

시정(施政)의 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들을 것.

 

   제2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황실을 확실한 친의(親誼)로써 안전·강녕(康寧)하게 할 것.

 

   제3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정부는 속히 임기 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하며,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할 수 있을 것.

 

   제5조 대한제국정부와 대일본제국정부는

상호의 승인을 경유하지 않고

훗날 본 협정의 취지에 위반할 협약을 제3국간에 정립(訂立)할 수 없을 것.

 

   제6조 본 협약에 관련된 미비한 세조(細條)는

대한제국외부대신과 대일본제국대표자 사이에 임기 협정할 것.

 

 

 

   2, 3조를 보면 일본이 조선을 지켜줄 것 처럼 말하고 있지만, 1, 4, 5, 6조를 보면 조선을 완전한 '시다바리'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고스란히 엿보인다. 1조만 봐도 주권은 끝 아니겠나? 당연히 이러한 한일의정서에 국민들은 분노해 들고 일어났는데, 당황한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 국민들의 반대를 진압하거나 유화책을 썼으며, 결국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성공한 일본은 곧바로 조선 대신들을 친일파로 완전히 교체한다. (사진은 한일의정서 체결 기념 한일 각료 단체사진)

 

   이후 곧바로 조선 토지들을 군사용도로 이용하기 시작했고, 3월에는 조선의 통신망까지 군사적 목적으로 접수했다. 5월에는 조선과 러시아의 모든 협정을 파기시켜버렸고, 경부&경의 철도부설권을 강탈해갔다. 물론 일본은 강탈이 아니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한일의정서 제1조에 따라 일본이 조선에게 이러한 것들을 '충고'한 것이었고 조선은 그를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따른 것'이겠나! 단순한 강요, 강탈이지...

 

 

 

 

    많은 것이 이 때 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을사늑약은 1년 뒤, 한일강제병합조약은 6년 뒤 였지만, 식민 지배는 사실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은 허술한 포장에 불과했고, 대륙진출을 위한 한반도의 '수탈'이 시작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독도에도 군용통신시설이 건설되어 군사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에게 독도가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 때도 이 때부터였다.

 

   그리고 훗날 을사오적에까지 포함된 '이지용'... 일제강점기때도 가장 부유하게 산 조선인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한일의정서를 놓고 1만엔에 매수를 당했는데, 오늘날 가치로 3, 4억원정도 하는 것 같더라. 그 돈에 나라를 팔았다니 정말 대단하다. 차라리 그의 신념이 친일이었다면, 친일만이 조선의 살길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게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단순히 돈에 나라를 팔다니!

 

   요즘에도 그런 사람들 많이 있을 것이다. 국가 기간 산업, 인프라등을 해외 민간 자본에 넘기거나 불공정한 계약으로 사업권을 넘기는 자들이 그들이다. 왜 그런 말도 안되는 민영화와 계약들이 체결되겠나? 당사자들이 무식하고 잘 몰라서? 설마... 당연히 자신의 이익 때문 아니겠나? 안타까울 따름이다.

 

 

 

 

  

 

 

1954년 - 미국의 게임 프로그래머 시드 마이어 탄생.

 

 

   시드마이어! 바로 내가 아주아주 좋아하는 게임, '시드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의 제작자다. 오늘날 여기저기 쓰이는 '~타이쿤'이라는 장르를 창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1990년 '시드마이어의 레일로드 타이쿤'이 그 시초) 스티브 잡스보다 1년 빨리 같은 날에 태어난 것도 괜히 흥미로운 부분!

 

   시드마이어는 '심' 시리즈를 만들어 낸 '월 라이트', 그리고 '파퓰러스'와 '블랙앤화이트' 등 신god의 입장이 되는 게임을 주로 만들었던 '피터 몰리뉴'와 함께 세계 3대 게임 제작자로 불린다. 그 중에서도 시드마이어는 돋보이는데, '공식적인 상을 가장 많이 수상한 게임 제작자' 부문 기네스에 올라있기도 하다(오를 예정?). 출시한 게임 자체도 다른 두 게임 제작자들보다 많다. 1996년에 유명 게임 사이트 'Gamespot'은 '시드마이어를 게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기도 했다.

 

   그래 뭐 시드마이어가 유명한 것이야 잘 알려진 것이고... 나는 Wikipedia를 통해 시드마이어의 유년시절을 알고자 했으나, 별 내용이 없더라. 네덜란드 출신의 부모를 두고 있고 캐나다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에서 역사와 컴퓨터 과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역사 공부... 그래서 '문명' 같은 게임은 만들었던 것일까? (왼쪽 이미지는 '문명1', 1991)

 

  아무튼 1982년, 그러니까 시드마이어가 29살이 되던해에 '빌 스탠리'와 함께 '마이크로 프로즈'라는 컴퓨터 회사를 창업했는데, 그곳에서 많은 게임들을 만들어냈다. 그의 게임이 좋은 반응을 얻자, 1986년부터는 '시드마이어의ㅇㅇㅇ' 과 같은 식으로 게임 이름을 붙이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시드마이어는 왠 '가우스'처럼 어렸을 때 부터 게임이나 스토리 창조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가 게임에 대해서 한 말을 보면 왜 그가 위대한 게임제작자가 되었는지 알 수 있는 것 같다. '게임'의 사전적 정의는 '규칙을 정해놓고 승부를 겨루는 놀이'이나, 시드마이어는 게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게임은 흥미로운 선택의 연속이다.' 

 

 

   이젠 널리 알려진 유명한 말인데, 본래 시드마이어가 한 말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승부를 겨루는 놀이'라는 게임의 정의는 3인칭 시점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그 안에서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한 두뇌회전과 결과적으로 다양한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행동하게 되는, 그 흥미로운 선택들을 끝없이 반복하게 되는 것이 1인칭 관점에서 느껴지는 게임이다. 더더욱 정확한, 본질적인 게임의 정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모습은 게임 '문명'에서 유난히 두드러지는 것 같다. 매 턴마다 수 많은 선택들을 해야 하고 그것이 미래에 영향을 미치게 되니... 시드마이어는 그를 의도한 것인 듯?

 

   정말 어떤 분야, 대상의 본질을 파고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길지 않은 한 문장으로 쓸 수 있는 그런 본질... 결국 우린 그가 만든 게임 '문명'과 각종 '타이쿤'에 우리 모두는 매료되어 있다. 오늘의 역사는 여기까지!

 

  

  

 

 

 

 

2월 23일과 24일의 역사

- fin -

 

 

 

오타 수정 (201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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