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교황 비오 6세)
어느 한편에 서지 않고 제3의 세력이 되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대부분 그들의 생각대로 역사가 흘러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탈리아는 비오 6세의 생각과는 다르게 급변했고, 결국 공공의 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김구는 단일 정부를 원했지만 남북 모두 저마다의 이기적 이해관계로 그를 외면했다.
물론 당연히 김구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 정치도 3자구도가 형성되고 있는 상황이다.
역사가 말해주듯, 추한 역사 속에서 희생양은 늘 '제3자'로 정해져 있곤 했다.
글쎄, 민주당과 안철수 신당이 상호 혁신경쟁 속에 시너지를 내느냐,
뻔하디 뻔한 그저그런 공공의 적으로 규정되어 몰매를 맞느냐...
이 또한 중요한 하나의 역사가 될 것이다.
- 링 크 -
1년전 설 연휴관계로 휴재
- 순 서 -
165년전, 1849년 2월 9일
로마 공화국이 건국되다.
64년전, 1948년 2월 10일
김구가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반대 성명을 발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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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일과 10일의 역사
Wikipedia
1881년 - 러시아의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사망.
1950년 - 미국의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국무부에 수백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연설함으로써 매카시즘이 시작되다.
1989년 -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데즈카 오사무 사망.
1990년 -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 통일민주당의 주요 3당이 통합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하다.
2000년 - 미8군 용산기지에서 포름알데히드 223리터를 한강에 무단 방류하다.
1635년 - 프랑스의 학술 단체인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설립되다.
1763년 - 파리 조약이 조인되면서 7년 전쟁과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끝나다.
1898년 -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가 정치인 윤치영 탄생.
1904년 - 일본이 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러일 전쟁이 시작되다.
1927년 - 조선어 연구회가 기관지 《한글》을 창간하다.
1948년 - 김구가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반대 성명을 발표하다.
1995년 - 황우석 연구 팀이 대한민국 최초로 복제송아지 생산에 성공하다.
참고글 : 12월 29일과 30일의 역사 - 마이바흐에 대하여, http://blog.daum.net/smileru/8888397
1950년 - 미국의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국무부에 수백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연설함으로써 매카시즘이 시작되다.
참고글 : 4월 21일과 22일의 역사 - 매카시즘과 사상의 자유, http://blog.daum.net/smileru/8888254
1904년 - 일본이 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러일 전쟁이 시작되다.
참고글 : {5월 넷째주} 러일전쟁, http://blog.daum.net/smileru/8888052
오늘은 뭐 다룰만한 소식이 정말 많은 것 같다. 베르누이의 탄생에서부터 숭례문 방화사건까지... 그 중에서 '로마 공화국'이 눈에 띄더라.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듯? 지금 정치와도 한번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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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국! '시져' 또는 '카이사르'가 떠오르지만, 사실 이 로마 공화국은 그 로마가 아니다. 이게 전후 과정을 살펴보면 굉장히 복잡하다. 사실 이런 이야기가 재미있기도 하지? 이탈리아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해야 겠다. 이러면 글이 길어질텐데...
이탈리아는 476년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단일 왕국을 유지해왔지만,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일부 지역을 동로마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750년대에 프랑크 왕국이 이탈리아 북부를 지배하게 된 이후 '피핀 3세'가 교황령을 교황 '스테파토 2세'에게 기증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교황령, 즉 오늘날의 '바티칸'의 역사가 시작되게 된다. (물론 바티칸 지역은 고대 로마시대부터 유명했다. 여기에선 '독립된 지역'으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여하튼 그러다가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843년) 이탈리아 지역은 작은 공국들로 쪼개지게 되는데, 제노바, 베니스, 시칠리아등이 대표적인 도시 국가들이었고, 이들은 1500년대를 전후로 한 '르네상스'의 훌륭한 텃밭 역할을 했다. 하지만 북쪽에서 성장한 프랑스, 오스트리아등의 제국들은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 국가들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민족주의'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분열된 이탈리아 역시 단합되어야 한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촉매 역할을 했다. (참고글 : 문명5BNW-(#1-5) 백년전쟁 : 중세시대, 문명5BNW-(#1-10) 1차세계대전 : (1) 발발 : 민족주의)
180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탈리아 반도의 각 지역에서는 통일 이탈리아에 대한 열망이 거세졌다. 통일에 대한 방법론은 여러가지 였는데, 도시국가들이 통일 된 뒤 공화국이 되어야 한다는 '공화주의'와, 예전 서로마 제국처럼 교황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신교황주의'로 의견이 갈리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1846년,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열리게 된다. 이탈리아 상황이 너무나도 불안정해서, 이탈리아 밖의 추기경들은 콘클라베에 참여하지도 못해 사실상 이탈리아 대통령 선거의 느낌이 느껴지는 콘클라베가 되었다.
세상을 떠난 전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공화주의파와 교황령을 지키기 위한 전투를 벌일 정도로 신교황주의 편의 교황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반도의 분위기는 공화주의쪽으로 기울고 있었는데, 이런 와중 새로운 교황은 공화주의파쪽도 아닌, 신교황주의파쪽도 아닌 '비오 9세'(마스타이 페라티, 왼쪽사진, 1846)로 결정되었다. 흥미로운 결과였는데, 그는 애초에 그리 인기가 있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양쪽 파벌 모두로부터 성품을 인정받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결국 추기경들이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었을까? 여하튼 모두가 그의 선출을 축하했다.
그런데 이탈리아 애국주의적이면서 특별한 파벌이 없고 또 온정적이었던 그는, 혼란스러웠던 이탈리아반도와 300만 인구의 교황령을 안정시키고자 '관대한 조치'를 단행한다. 교황령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정치범들을 석방한 것이었다. 당연히 이전 신교황주의파 그레고리오 16세 시절에 잡혀있던 공화주의파 인물들이 많았고, 특히 급진적인 인물들이 상당했다. 여하튼 이는 공화주의파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고, 유럽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교황 비오 9세는 그 행동을 공화주의를 위해 한것이 아니었다. 말그대로 관대한 조치에 불과했던 것이며, 또한 나아가 고황령의 정치적 중립을 원했던 것이고, 더더욱 나아가 교황이라는 성직자의 자리에서 정치를 초월하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교황과 같은 수준의 모습으로 교황과 교황청을 격상시키고 싶어했던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어려운 '이상'이었다. 일단 교황령이 지금의 바티칸과는 달리, 프랑크 왕국 이후 완전히 독립된 도시 국가와 같은 존재였으며 교황은 그 국가의 수장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령의 영토는 심지어 넓기도 했다. 오른쪽 이미지에서 로마Rome을 포함하는 노란색 영역이 교황령이다) 그러다보니 교황의 정치범 석방으로 힘을 얻은 공화주의자들은,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과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려는 인기 많은 교황을 서서히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반도는 물론 유럽대륙에서도 높은 인기를 달리고 있었던 교황이 지배하는 교황령이라는 도시국가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그것은 반대로 움직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적이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1848년 프랑스에서는 2월 혁명이 일어나 프랑스 혁명이후 나폴레옹에 의해 군사 독재로 돌아갔던 프랑스에 공화정이 설립되었는데, 이는 전 유럽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공화주의자...라기 보다는 그냥 '민족주의자'에 가까운 이탈리아의 일부 급진세력들은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1848년 11월 15일 계획을 실행하여, 교황령의 총리를 암살하고 교황청 근위대의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교황을 바티칸 궁전에 감금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849년 1월에 로마 공화국을 선포한다. 제헌 의회를 구성하고, 2월 9일에는 건국을 선포하며, 제노바 출신인 '주세페 마치니'가 3월에 로마 공화국의 수상으로 오른다. 이탈리아 반도의 급진주의자들은 그렇게 이상을 강제로 실현해버렸다.
하지만 이상은 이상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일반 신부로 변장하여 바티칸 궁전에서 탈출한 교황 비오 9세는 카톨릭 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결국 프랑스 원정군이 들이닥쳐 공성전 끝에 6월에 바티칸을 점령, 로마 공화국은 반년도 되지 않아 사라지고 만다. 돌아온 교황 비오 9세는 열렬한 반공화주의, 친보수주의자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공화국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탈리아가 통일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분위기는 완전히 무르익은 상태였고, 이탈리아 반도에 '알박기'된 교황령만 요지부동이었을 뿐이었다. 결국 이탈리아는 사르데냐 왕국 주도로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고 1861년에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자발적인 합병과 통일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그 와중 이탈리아의 정치가 '카밀로 카보우르'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했는데, 통일된 이탈리아 왕국은 교황령을 무력으로 점령한 다음, '교황 보장법'을 통해 교황령을 이탈리아 왕국이 흡수하되, 교황의 지위와 종교적 활동을 보장하고 교황청을 금전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비오 9세를 이미 도왔었던 프랑스가 교황령을 보호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최종적으로 1870년에 1000년이 넘었던 교황의 교황령 지배는 그렇게 끝이나고 지금의 '바티칸'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후 교황의 인기가 급상승하였다는 점이다. 교황은 비로소 순수한 종교적 지도자가 되었음은 물론, 지난 굴곡진 역사로 인해 교황에 대한 동정심도 생겼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사도들의 무덤에 참배하기 위해서가 아닌 교황을 보기 위해서 로마를 방문했다고... 결국 오늘날 교황의 '이미지'도 이 때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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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국'에 대한 이야기를 전후로 해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쓴 것 같다. 흠... 그런데 나는 이 이야기를 쓰면서 뭐가 생각났냐면, 딱 지금의 우리나라 정치 상황이 떠오르더라. 분노의 공화주의파를 민주당, 구태적인 신교황주의파를 새누리당, 갑작스럽게 이탈리아의 인기인이 된 중도성향의 교황 비오 9세를 안철수로 하면 대충 분위기가 맞는 느낌이다.
무슨 말이냐면, Weekly Voice에서도 몇번 말했지만, 옳은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기에 앞서, '선거 승리', 즉 목적만을 생각하다보니 요즘 안철수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는 듯 한데, 비오 9세가 초기에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공화주의파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처럼, 안철수 역시 반한나라당을 주장하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안철수는 '새정치'라는 새로운 성향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안철수를 자연스럽게 야권의 범주에 넣는 자체부터가 본래 웃긴 것 같다. 안철수의 생각도 그것이고 말이다. 대의 앞에서 요지부동이었던 비오 9세와 같다고나 할까.
물론 위기의 시대에 중립은 결코 칭찬받을 수 만은 없는 것이다. 단지 그냥 그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를 승리를 위하여 몰아치게 되면, 비오 9세가 결국 돌아섰던 것 처럼 안철수 역시 진보에 대한 환멸만 더욱 강해지지 않을까? 그래도 최근 김한길 대표가 개혁정책을 내세우고 있는데, 아주 바람직한 접근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부분에서 얼마나 안철수와 연결고리가 생기게 될지는 모르겠다. 내가 말했던 것 처럼 몇가지 개혁조치를 전제로 민주당과 안철수가 연대하게 된다면 김한길의 수는 신의 한수가 되는 것일텐데, 지금 전체적인 야권 여론의 분위기는 중립적 교황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이탈리아 급진주의자들과 비슷해 보일 뿐이며 김한길의 목소리는 너무도 작다.
승리 이전에 옳은 방향으로 가자. 정치가 뒤바껴야 한다는 것에 모두 공감하지 않나? 김한길이 노력하는 듯 하나 야권 전체의 분위기는 그렇지 못하다. 이렇게 사분오열 될 경우 오히려 가장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잊지 말자. 이탈리아는 통일되었고 교황은 많은 것을 잃었지만, 끝내 교황의 인기는 더욱 커졌고, 경제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이탈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솔리니의 파시즘으로 뒤덮였음을...
1948년 - 김구가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반대 성명을 발표하다.
김구는 일반적으로 교육자, 종교인,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소개되는데, 그런 단순한 표현은 김구를 엄청나게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김구는 대한민국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민족의 지도자였다.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며 내다보고 행동했던 사람으로는 한민족 반만년의 역사상 김구가 유일했다. (오른쪽 사진은 38선에 선 김구. 1948)
그런 김구가 한반도가 분단위기에 놓이자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을 보면, 구구절절 그가 내다 본 분열된 민족의 절망적인 미래에 대한 끝없는 걱정과 슬픔이 느껴진다. 한국전쟁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도 '빨갱이', '친일파'라며 정치가 분열되고, 동북아는 커녕 북한만 바라보며 국방비를 집중해야 했던 역사... 그것이 그의 눈 앞에 선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그 때 썼던 글로 오늘의 역사를 마치고자 한다. '나의 소원'도 그렇지만, 김구의 글을 볼 때마다 정말 가슴이 벅차오른다. 정말 새누리당이건 민주당이건 안철수건, 이 모든 것들이 만들어내고말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떨지 생각해보자. 우리가 늘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다. 우리 민족의 미래 말이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김 구
친애하는 3천만 자매 형제여!
우리를 싸고 움직이는 국내외 정세는 위기에 임하였다.
제 2차 대전에 있어서 동맹국은 민주와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천만의 생령을 희생하여 써 최후의 승리를 전취하였다. 그러나 그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 세계는 다시 두 개로 갈리어졌다. 이로 인하여 제 3차 전쟁은 온양되고 있다. 보라!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편을 다시 만난 아내는,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아들을 다시 만난 어머니는, 그 남편과 아들을 또다시 전장으로 보내지 아니하면 아니 될 위험이 닥쳐오고 있지 아니한가. 인류의 양심을 가진 자라면 누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바랄 것이랴! 과거에 있어서 전쟁을 애호한 자는 파시스트 강도군 밖에 없었다.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자는 파시스트 강도 일본뿐일 것이다. 그것은 그놈들이 전쟁만 나면 저희들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남북에서 외력에 아부하는 자만은 혹왈 남정, 혹왈 북벌 하면서 막연하게 전쟁을 희망하고 있지마는 실지에 있어서는 아직 그 현실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촉발된다 하여도 그 결과는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동족의 피를 흘려서 왜적을 살릴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 될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새 상전들의 투지를 북돋울 것이요, 옛 상전의 귀염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이 난다 할지라도 저희들의 자질 만은 징병도 징용도 면제될 것으로 믿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왜정 하에서도 그들에게는 그러한 은전이 있었던 까닭이다. 한국은 일본과 수십 년 동안 계속하여 혈투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과 전쟁하는 동맹국이 승리할 때에 우리도 자유롭고 행복스럽게 날을 보낼 줄 알았다.
그러나 왜인은 도리어 환소 중에 유쾌히 날을 보내고 있으되 우리 한인은 공포 중에서 죄인과 같은 날을 보내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말이라면 우리를 배은망덕 하는 자라고 힐책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 신문 기자 리처드 씨의 입장에서 나온 데야 어찌 공정한 말이라 아니 하겠느냐. 우리가 기자리던 해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의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의 해방이란 사전상에 새 해석을 올리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유엔은 이러한 불합리한 것을 시정하여 써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며, 전쟁의 위기를 방지하여 써 세계의 평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다. 그러므로 유엔은 한국에 대하여도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임시 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 위원단은 신탁 없고 내정 간섭 없는 조건하에 그들의 공평한 감시로써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거에 의하여 우리에게 남북통일의 완전 자주 독립을 줄 것과 미·소 양군을 철퇴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이제 불행히 소련이 보이콧으로써 그 위원단의 사무 진행에 방해가 불무하나 그 위원단은 유엔의 위신을 가강하여 써 세계 평화 수립을 순리하게 진전시키기 위하여 또는 그 위원 제공들의 혁혁한 업적을 한국 독립 운동 사상에 남김으로써 한인은 물론 일체 약소민족 간에 있어서 영원한 은의를 맺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만일 자기네의 노력이 그 목적을 관철하기에 부족할 때에는 유엔 전체의 역량을 발동하여서라도 기어이 성공할 것은 삼척동자라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이 서광이 비치고 있는 것이다.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 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 몰각한 도배들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이 없이 통일 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음으로 양으로 유언비어를 조출하여 써 단선 단정의 노선으로 민중을 선동하여 유엔 위원단을 미혹하게 하기에 전심력을 경주하고 있다. 미군정의 난익하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종용하여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태연스럽게 현실을 투철히 인식하고 장래를 명찰하는 선각자로써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각자는 매국매독의 인진회식 선각자일 것이다.
왜적이 한국을 합병하던 당시의 국제 정세는 합병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애국지사들이 생명을 도하여 반항하였지만, 합병은 필경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현실을 파악한 일진회는 도쿄까지 가서 합병을 청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자들은 영원히 매국적이 되고 선각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설령 유엔 위원단이 금일에 단정을 꿈꾸는 그들의 원대로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다면 이로써 한국의 원정은 다시 호소할 곳이 없을 것이며, 유엔 위원단 제공을 한인과 영원히 불해의 원을 맺을 것이요, 한국 분할을 영원히 공고하게 만든 새 일회는 자손만대의 죄인이 될 것이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조국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사갱에 넣는 극악 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이와 같은 위기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최고 유일의 이념을 재검토하여 국내외에 인식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유엔 위원단에 제출한 의견서는 이 필요에서 작성된 것이다. 우리는 첫째로 자주 독립의 통일 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이것을 완성하기 위하여 먼저 남북 정치범을 동시 석방하며, 미소 양군을 철퇴시키며, 남북 지도자 회의를 소집할 것이니 이 철과 같은 원칙은 우리의 목적을 관철할 때까지 변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불변의 원칙으로서 순식 만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순응 혹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독립이 원칙인 이상 도립이 희망 없다고 자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을 왜정하에서 충분히 인식한 것과 같이 우리는 통일 정부가 가망 없다고 단독 정부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단독 정부를 중앙 정부하고 명명하여 위안을 받으려 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조선과도 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사사망념은 해인해기 할뿐이니, 통일 정부 수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3천만 자매 형제여!
우리가 자주 독립의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면 먼저 국제의 동정을 쟁취하여야 할 것이요, 이것을 쟁취하려면 전민족의 공고한 단결로써 그들에게 정당한 인식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일절 내부 투쟁은 정지하자! 소불인 이면 난대모라 하였으니 우리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용감하게 참아 보자.
3천만 자매 형제여!
한국이 있고야 한국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자주 독립적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이때에 있어서 어찌 개인이나 자기의 집단을 사리사욕을 탐하여 국가 민족의 백년 재계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 우리는 과거를 한번 잊어버려 보자.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의심하지 말며 타매하지 말고 피차에 진지한 애국심에 호소해 보자!
암살과 파괴와 파공은 외군의 철퇴를 지연시키며, 조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조출할 것뿐이다. 악착한 투쟁을 중지하고 관대한 온정으로 임해 보자!
마음속에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에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 하나 일생을 독립 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70 유 3인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 금일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화를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랴! 더구나 외국 군정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랴! 내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주지하는 것도, 한독당을 주지하는 것도 일체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위해서는 일신이나 일당의 이익에 구애되지 아니 할 것이요, 오직 전민족의 단결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3천만 동포와 공동 분투할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서는 누가 나를 모욕하였다 하여 염두에 두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이번에 마하트마 간디에게서도 배운바가 있다. 그는 자기를 저격한 흉한을 용서할 것을 운명하는 그 순간에 있어서도 잊지 아니하고 손을 자기 이마에 대었다 한다. 내가 사형 언도를 당해 본 일도 있고 저격을 당해 본일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 있어서는 나의 원수를 용서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것을 부끄러워한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용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도는 원귀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3천만 동포 자매 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 번 더 심사하라.
대한민국 30년 (1948) 2월 10일
이 글을 쓰고 1년뒤 김구는 암살당했고, 다시 1년이 흐른뒤 김구가 위에서 우려했던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2월 9일과 10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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