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3월 16일과 17일의 역사 - 이탈리아 알도 모로 총리 납치, 생수 판매 허용

스마일루 2014. 3. 14.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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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대통합을 추구했던 이탈리아의 총리는

왜 자동차 뒷자석에 구겨넣어진채 발견되고 말았을까?

 

 

 

 

 

 

 

 

 

- 링 크 -

 

3월 17일과 18일의 역사

정인숙 살해사건, 골다 메이어 총리

http://blog.daum.net/smileru/8888233

 

 

 

- 순 서 -

 

36년전, 1978년 3월 16일

이탈리아 총리 알도 모로가 로마에서 붉은 여단에 납치되다.

 

20년전, 1994년 3월 16일

정부, 생수시판 전면 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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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과 17일의 역사

Wikipedia

 

3월 16일

1521년 - 페르디난드 마젤란필리핀에 도착하다.

1787년 - 독일의 물리학자 게오르크 옴 탄생. ('옴'의 법칙)

1815년 - 네덜란드 왕국이 성립되다.

1815년 - 빌럼 1세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다.

1935년 - 아돌프 히틀러베르사유 조약 파기를 선언하고 독일이 재무장하도록 지시하다.

1962년 -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정치활동정화법 공포.

1968년 - 베트남 전쟁: 미군베트남 미라이 마을에서 민간인 347명을 학살하다.

1969년 - 강원도 주문진에 북한 무장공비 침투.

1978년 - 이탈리아 총리 알도 모로로마에서 붉은 여단납치되다.

1978년 - 대한민국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이규혁 탄생.

1989년 - 프랑스군 한국전쟁 참전기념비 건립.

1994년 - 정부, 생수시판 전면 허용.

2001년 - 이규혁,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1500m 세계신기록 수립.

2006년 - 대전도시철도 1호선 개통.

2008년 - 안양 초등학생 납치 살해 사건의 용의자 정성현이 검거됐다.

 

3월 17일: 성 패트릭의 날

1834년 - 독일의 기업가 고트리브 다임러 탄생.

1861년 -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다.

1958년 - 미국 해군이 최초의 태양광 발전 인공위성밴가드 1호를 발사하다.

1959년 - 14대 달라이 라마텐진 갸초티베트에서 인도로 망명하다.

1969년 - 골다 메이어이스라엘제4대 총리에 취임하다.

1969년 -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 프로그램이 탄생했다.

1970년 - 대한민국 제3공화국의 권력층 스캔들로 번진 정인숙 살해 사건이 발생하였다.

2008년 - 쥐머리 새우깡 파문이 일어나다. 농심은 다음날 주가가 4.43% 하락했다.

2009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미국인 여기자 2명이 억류당하다.

 

 

 

 

 

1834년 - 독일의 기업가 고트리브 다임러 탄생.

 

참고글 : 12월 29일과 30일의 역사 - 마이바흐에 대하여, http://blog.daum.net/smileru/8888397

 

 

 

 

 

 

 

 

1978년 - 이탈리아 총리 알도 모로로마에서 붉은 여단납치되다. 

 

 

    바로 들어가자. 이탈리아는 2차세계대전에서 독일과 함께 했다 패배했다. 파시즘을 창시했다고 볼 수 있는 무솔리니는 스위스로 도망가다 공산주의 빨치산들에게 걸려 총살당했는데, 이 일련의 사태(라고 하기엔 거대하지만)는 무솔리니를 내각수반에 임명한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군주제 폐지 여론으로 발전했으며, 결국 1946년 6월 2일, 국민투표를 통해 이탈리아에서는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정이 부활, 이탈리아 왕국은 이탈리아 공화국이 되었다.

 

   그 무렵 대학생이던 이가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훗날의 이탈리아 총리, '알도 모로'였다. 1939년까지 법학을 공부했던 그는 후에 모교에서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1943~), 그와 동시에 그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본래 학생시절 파시스트 학생단체에서 활동했던 그였지만(그 때는 그럴 수 밖에...) 졸업 후에는 사회민주주의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하는데, 결국 이후 왕권과 파시즘이 붕괴하자 좌파 진영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그는, 이탈리아 헌법 작성에도 참여하면서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그기 시작한다.

 

 

   사회민주주의에 관심이 많았지만 종교적 이유로 중도성향의 기독교민주당(DC)에 입당한 그는, 이후 법무부 장관(1955~), 교육부 장관(1957~1959)을 지내고 기독교민주당의 사무총장이 된다. 그리고 이탈리아 최초로 이탈리아 사회당, 이탈리아 사회민주당등의 좌파진영과 연대하는데 성공하며 1963년에 이탈리아 총리가 되기에 이른다. 애초에 기독교민주당내에서 좌파성향의 일을 많이 했던 그는, 집권하자 다양한 복지정책들을 펼쳤다. 최소한의 기본 주택 공급, 저소득층 대학생 지원, 3~5세 교육지원, 연금시스템 통합과 개편을 통한 은퇴한 자영업자&농민 그리고 실업자에 대한 건강보험, 최저임금인상, 공무원 연금등이 그것이었다. 그것들은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그리고 1969년 부터 1974년까지 이탈리아 총리를 역임하는 동안 추진된 것이었다. (1966~1968년의 시기에는 좌파연대로 인해 '외무부 장관'을 지내며 잠시 '쉬어 갔을' 뿐이었다) (오른쪽 사진은 총리 시절 알도 모로)

 

   중도-좌파연대로 오랜 기간 집권하며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던 모로 총리는, 더더욱 발전된 정치연대를 꿈꿨다. 전체적으로 좌경화 되어있었던 이탈리아가 과거처럼, 또는 소련처럼 독재로 추락하지 않고 민주주의가 지속되게 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당이 이탈리아 국회에 입성해 활동하고 그 정당들이 연대하여 연합정부(연정)를 구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많은 유럽국가들이 오늘날 그러한 정치형태를 택하고 있다)

 

 

   모로 총리는 그 구상을 '국민 연대'라고 이름 짓고, 극단적 사상의 정당들을 민주주의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대표적인 첫 타협 상태가 바로 이탈리아 공산당(PCI)이었다.

 

   이탈리아 공산당... 2차세계대전 이후 나치가 무너지자 유럽 각지에서는 공산당들이 크게 활동했었는데, 이들은 사회주의 분파중에서도 극단적인 축에 속해, 민주화된 각국의 정치활동에서 한계를 보였고 결정적으로 소련에게 조종받는 경향이 커서 사람들의 거부감도 컸다. 결정적으로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독재 체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60년대말 유럽 각지의 공산당의 이미지는 더더욱 추락하여 갈수록 정치적으로 고립될 수 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그러한 상황이 더했다. 알도 모로 총리의 중도좌파연대는 '왕따'가 된 공산당을 더더욱 '뻘쭘하게' 만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공산주의(Eurocommunism)라는 것이 이탈리아에서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사회주의'혁명'을 배제하고, 합법적인 의회 의사결정 절차에 따라 공산주의를 실현하며, 소련과 달리 일당독재가 아닌 다당제를 유지하고, 사유재산제를 허용하는 새로운 공산주의 사상이 그것이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본래 '진짜 공산당'이었으나 '엔리코 베를링게' 공산당수는 70년대 들어 바로 그 유럽공산주의를 지향했고, 이는 1976년 이탈리아 총선에서 이탈리아 공산당이 34%를 득표하는 아주 놀라운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알도 모로의 출신 정당인 기독교민주당은 39%를 득표하였다)

 

   공산당은 확실히 살길을 찾은셈이었다. 소련에서 벗어나, 폭력적인 사회주의혁명이 아닌 사회민주주의로 가는 것... 1976년 총선 이후 엔리코 베를링게 공산당수는, 그의 말대로 '이탈리아에서만 필요하고 가능한 사회주의'를 추구하면서 소련에서 멀어졌다. 서방세계의 군사연대인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를 옹호하기도 했다. (알도 모로 총리는 1970년에 NATO 의사회 의장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탈리아 공산당은 사상적으로 극단적인 모습을 버려가면서 알도 모로의 '국민 연대'에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기독교민주당과 그 연대, 그리고 이탈리아 공산당과의 연대는 어느때보다도 성사직전에 놓였다. 하지만 미국발 '록히드 스캔들'(미국 군수업체 '록히드'사로부터 이탈리아를 포함한 세계 각국 정치인들이 50년대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스캔들)이 터지고, 그로 인해 기독교민주당이 큰 타격을 입음과 동시에, 60년대에 오랜기간 총리를 역임한 알도 모로에게도 의심의 눈초리가 이어지면서, 기독교민주당과 이탈리아 공산당과의 연대, 연합정부구성은 1978년 3월 3일에 무산되었음이 선언된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으로 일시적인 지연이라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이 있지 않겠나? 연대는 충분히 다시 한번 시도해 볼 법했다. 그러나 그 흐름을 막아내려는 사람들은 늘 있기 마련이었다.

 

   연합정부구성이 무산되고 13일 뒤인 1978년 3월 16일, 알도 모로 전 총리가 납치된다. (오른쪽 사진이 납치된 상태에서 찍힌 사진) 극단적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여 유럽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공산당을 거세게 비판하던 이탈리아 공산주의 무장조직, '붉은 여단'이 모로 전 총리의 경호원 5명을 살해하고 그를 납치한 것이었다. 그리고 '붉은 여단'은 구속된 자신들의 조직원 십여명을 석방하지 않으면, 모로 전 총리를 기독교민주당이 저지른 '범죄'(? 공산당과의 연대?)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에 대해 이탈리아 정부는 테러리스트들과의 협상은 없다는 원칙을 내세웠고 곧장 범인들에 대한 수사를 시작하게 되지만...

 

   54일 뒤인 1978년 5월 9일, 알도 모로 전 총리는 시내에 한 버려진 자동차 트렁크 안에서 십여발의 총을 맞고 숨진채 발견된다. 이탈리아 정치사 최고의 비극으로 꼽히는 알도 모로 납치 사건의 결말이었다.

 

   이후 이탈리아 정부는 범인들을 추적했고, 수년만에 10명중 8명을 체포(한명은 2004년에 체포)했지만, 너무나 많은 의문점들이 있어 그들의 배후나 범행의도는 물론, 그들이 진짜 범인인지 조차 많은 의문에 싸여 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수 많은 음모론이 뒤따랐다. 경찰이 초기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것이 특히 의심스럽다보니, 너무 오랫동안 이탈리아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모로 전 총리를 시기하여, 또 공산당과의 연대에 대한 불만으로, 기독교민주당 또는 정부에서 이탈리아 정보기관을 이용해 암살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까지도 다수의 이탈리아인들이 믿고 있는 설이라고 한다) 더불어 미국이 개입했다는 설도 힘을 얻었다. 유럽공산주의든 뭐든간에 공산당과 민주세력의 연대가, 냉전상황에서 '민주주의의 한계', '공산주의와의 타협'으로 보여지는 것을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우려했다는 것이다.

 

 

당시 알도 모로 총리의 시신이 실린 차량이 발견된 장소

 

 

 

   또 NATO가 '국민 연대'이후 이탈리아가 NATO를 탈퇴할 것을 우려했다는 설, 심지어 '프리메이슨'(기독교로부터 탄압받는 자유주의, 개인주의 성향의 비밀결사단체. 실존한다.)과 '일루미나티'(계몽주의적으로 기독교와 마찰을 빚는 단체. 실존여부 불분명.)가 움직였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등, '설'은 참 많다. 하긴 알도 모로가 기독교민주당 출신이면서 공산당이기도 했으니 그들이 싫어할 이유는 충분했겠다. 특히 알도 모로 사건 대책위원회의 한 인사가 프리메이슨 단원인 것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고...

 

   이 사건을 놓고 정말 말들이 많았고 아주 최근까지도 이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개봉되는 등(앞으로도 계속 될 것 같다), 알도 모로에 대한 기억과 이 납치살인사건의 충격은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다. (오른쪽 포스터는 2003년에 개봉된 영화, 'Good Morning, Night')

 

   여하튼, 대단한 정치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모로 총리만의 업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극단적인 공산주의자들을 계몽시키다시피하여 중도좌파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특히 전 유럽에 '정상적인 사회주의'(?)를 전파시킨 결정적 인물이라는 평가는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유럽은 오늘날 말이 많긴 해도 전반적으로 복지국가를 목표로 나아가게 되었고 말이다.

 

   극단주의자들까지 포용할 수 있는, 그리고 진짜로 그들을 바꿔낼 수 있는 정치지도자... 우리에겐 그런 지도자 어디 없을까? 요즘에야 말로 정말 필요한 것 같은데 말이다.

 

  

 

 

 

 

 

 

1994년 - 정부, 생수시판 전면 허용.

 

 

   위의 '오늘의 역사'는 좀 무거운 이야기이고 길기도 해서 가벼운걸 하나 골라봤다. 이런게 또 은근히 재미있기도 하지? (위키피디아에서는 '먹는 샘물' 항목 참고)

 

   우선 '생수'의 정의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결국 수돗물이 아닌 물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암반수, 해양심층수, 빙하에서 얻은 물('에비앙'이 대표적) 등등을 통칭해 생수라고 하는데, 생수의 '생'을 '날 것'이라는 의미로 보면 쉽겠다. (물론 어느정도 물리적, 화학적 처리는 하는 것 같더라. 물론 안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생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70년대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외국인들에게만 판매가 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우물'을 사용했던 것을 생각하면, 본래 우리는 생수와 친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생수가 판매되기 시작한 것이 88올림픽때였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수돗물에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생수판매를 광범위하게 허용했던 것인데, 올림픽 이후 곧바로 금지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생수 판매를 허용하는 것은 수돗물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국가가 인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고, 돈있는 사람들은 돈을 주고 생수를 사먹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뭔가 꺼림칙한' 수돗물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생수 판매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지은 것은 '끝판왕', 헌법재판소였다. 헌법재판소가 생수판매를 금지하는 것은 깨끗한 물을 마실 권리인 '행복추구권'을 침해하고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생수판매 금지 법안은 위헌판결을 받았고, 결국 생수판매가 허용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생수... 물을 사먹는 세상이 되었고, 물을 안 사먹었던 때가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이미 물은 일종의 공산품이 되었다. 또 '자원'의 특성도 보이고 말이다. 하지만 뭐 이것이 당장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아 물론 수자원의 중요성은 당연한 것이고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되겠지만, 모든 물이 깨끗하고 풍부했어도 결국 우리의 생활방식상 물을 사먹는 일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화와 상수도, PET병 생수, 정수기, 미네랄워터 등등) 뭐 아직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일부 국가에서는 아니지만...

 

   그리고 가만보니 헌법재판소의 위엄(?)도 새삼 느끼게 된다. 그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인 역할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헌법'에 기초한 것이지만 그것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어느정도 자의적으로 해석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한 것 같은데, 찾아보니 1994년에 쓰여진 '헌법의 해석'이라는 책(최대권, 헌법재판연구 5권, 헌법재판소)에서는 해당 판결에서 생수업자가 아닌 국민의 행복추구권까지 언급한 것은 과대한 해석이었다는 평가도 있더라. (p.64) 하지만 오늘날 살펴보면, 편의점에서 작은 생수PET를 팔지 않는다고 했을 때 많은 국민들이 불편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결과론적으로는' 헌재의 판단이 맞았나 싶기도 하다.

 

    조금 다른 소리지만, 왠지 가까운 미래에 마약에 대한 합법화 논란도 헌법재판소를 거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 때는 어떤 판결을 내릴지... 아무튼 이번 글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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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과 17일의 역사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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