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12일과 13일의 역사 - '나는 고발한다!', 나이지리아 내전, 니카 반란

스마일루 2014. 1. 8.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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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습니다.

프랑스의 얼굴에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이 생겼고,

'역사'는 당신이 대통령일 때 그런 사회적 범죄가 저질러졌다고 기록할 겁니다.

 

그들이 감히 그렇게 했기에, 저는 감히 이렇게 하겠습니다.

 

진실, 저는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정식으로 재판을 담당한 사법부가 만천하에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제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제 의무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

 

 

 

 

 

 

 

- 링 크 -

 

1월 13일과 14일의 역사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김보은-김진관 사건

http://blog.daum.net/smileru/8888184

 

 

 

- 순 서 -

 

44년전, 1970년 1월 12일

나이지리아 남동부 지역에서 분리 독립을 주장한

비아프라 공화국이 항복하면서 나이지리아 내전이 끝나다.

 

116년전, 1898년 1월 13일

에밀 졸라가 문학 신문 로로르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페릭스 포레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를 발표하면서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다.

 

1482년전, 532년 1월 13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니카 반란이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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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2일과 13일의 역사

Wikipedia

 

1월 12일

475년 - 바실리스쿠스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다.

1915년 - 로키마운틴 국립공원이 지정되다.

1923년 - 일제 강점기 조선, 의열단 김상옥,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1949년 - 반민특위에 체포된 박중양 등에 대한 공판이 서울 특별법원에서 열리다. 이 중 박중양조선총독부의 통치를 긍정하고 이완용은 억울한 희생자라고 주장하여 전국적인 논란이 되었다.

1949년 -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탄생.

1950년 - 미국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애치슨 라인을 발표하다.

1970년 - 나이지리아 남동부 지역에서 분리 독립을 주장한 비아프라 공화국이 항복하면서 나이지리아 내전이 끝나다.

2010년 - 아이티에서 7.3 강진이 일어나 가옥과 공공시설이 파괴되고 20여만명의 사상자 발생.  

 

1월 13일

532년 -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니카 반란이 일어나다.

1338년 - 고려의 문신 정몽주 탄생.

1665년 -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 사망.

1898년 - 에밀 졸라가 문학 신문 로로르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페릭스 포레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를 발표하면서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다.

1915년 - 이탈리아 아베차노에서 강진으로 29,800여명 이상 사망하다.

1953년 - 요시프 브로즈 티토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1958년 - 진보당조봉암간첩 혐의로 구속됨.

1988년 - 장징궈 중화민국 총통이 사망하면서 리덩후이 부총통이 차기 총통으로 취임하다.

1992년 - 김보은 김진관 사건이 발생.

 

 

 

1950년 - 미국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애치슨 라인을 발표하다.

 

   참고글 : 문명5BNW-(#1-18) 애치슨 라인, http://blog.daum.net/smileru/8888382

 

 

 

 

 

 

 

 

1970년 - 나이지리아 남동부 지역에서 분리 독립을 주장한

비아프라 공화국이 항복하면서 나이지리아 내전이 끝나다.

 

 

   난 이런 역사가 참 흥미롭더라. 낮선 역사 같은것? 난 솔직히 나이지리아 역사에 대해 정말 눈꼽만큼도 모를 정도인데, 이번기회에 나는 물론 우리 모두 다함께 알아가보자. 무슨 유아교육프로그램 같은 듯?

 

 

   코트디부아르는 과거 식민지배를 했던 유럽인들이 코끼리 상아를 많이 채취해간 덕에 '상아해안'이라는 이름이 그대로 국명 '코트 디 부아르(Côte d'Ivoire, 꼬뜨 디봐르)'가 되었다고 문명연재를 하면서 말한적이 있었다. 나이지리아는 코트디부아르 옆에 있는데, '노예해안'으로 불렸었다. 하지만 다행히 국명은 그 '착취품(?)'에서 따오지 않았고 옆에 있는 나이거 강(Niger River)에서 따왔다. 뭐 이건 그냥 다행이라서 적어본 것이고...

 

   어찌되었건 나이지리아는 주변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유럽국가의 지배를 받았다. 나이지리아는 유럽 국가들의 다툼 끝에 수많은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나가다가 최종적으로는 영국의 차지가 되었는데, 영국은 나이지리아의 부족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총독을 보내 보호령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많은 식민지배국가들이 그러했듯, 1차세계대전 전후로 본격화된 민족주의 운동, 그리고 2차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제국주의 열강들의 지배력 상실은 나이지리아 민족주의, 정확히는 나이지리아 부족들의 부족주의 운동으로 이어져 결국 50년대를 전후로 한 헌법개정을 통해 1960년에 나이지리아는 영국 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애초에 다양한 민족들이 저마다의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던 땅에, 영국이 식민지배를 하면서 그를 '나이지리아'로 묶었고, 그렇게 강제로 민족이 뭉쳐진 국가가 후에 독립한 것이었다. 결국 민족간의 권력다툼이 시작됐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많은 내전들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 종교적 문제도 더해서...)

 

   나이지리아는 독립 초기 인구가 많은 북부 지역 부족들이 연방의회의 다수를 차지했었다. 그러자 많은 부족들이 극렬히 반대하기 시작했다. 국회는 대한민국 국회보다 난장판(!)이 되어 폭력사태가 일어나기도 했고, 일부는 분리독립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대통령이 암살 당하기도 했다. 대충 이렇게 얼버무리는 이유가, 독립에 성공한 1960~1966년 사이가 워낙 난장판이라 한글, 영문 위키, 다양한 포털사이트 사전들 모두 내용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 혼란의 정치상황의 연장선상에서, 남부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보족' 출신의 장군 '이론시'가 1966년에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을 암살하고 정권을 잡는데, 다시 북부 지역 '하우자족'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을 다시 암살하고 정권을 잡는다. 그러자 이보족은 남부지역의 분리독립을 요구, 1967년에 '비아프라 공화국'을 건국하기에 이른다. 이는 당연히 정권을 잡은 하우자족의 나이지리아 정부와 비아프라 공화국간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나이지리아 내전(나이지리아-비아프라 전쟁)은 2차세계대전 이후 아프리카 최초의 내전이면서, 앞으로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서의 유사한 갈등, 내전을 예고하는 '갈등의 표본' 그 자체였다. 이것은 이슬람 위주의 하우자족과 기독교 위주의 이보족간의 종교분쟁이기도 했으니...

 

 

   동시에 엄청난 비극이기도 했다. 군인은 총 55000명이 전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과정에서 안 그래도 발전이 더뎠던 남부쪽, 즉 '비아프라 공화국'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그 결과 200~300만명의 아사자들이 발생하는 비극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300만명의 아사자... 비아프라 공화국 인구의 15%가량이었다. 상상이 되는지? 그냥 굶어죽은 사람이 300만명이었다는거다.

 

   결국 비아프라 공화국은 말그대로 '멸망'했다. 군사적으로도 패배했음은 물론이다. 초기 승전을 거두기도 했지만 계속 수세에 몰려 방어만 하다가 패배하고 말았다.

 

   참 끔찍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아프리카에서는 부족간 전쟁이 벌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아프리카 문제의 모든 시작은 '부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강 주변에서 문명을 발생시켰던 세계 여러 곳들과 달리, 유목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프리카의 드넓은 자연환경이, 부족문화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고 강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하긴 꼭 문제라고 표현할 수는 없겠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책임도 없지는 않으니까...

 

   그나저나 더 끔찍한 것이 남아있다. 아직도 나이지리아에서는 그 형국 그대로 여전히 분쟁이 진행중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너무 놀랄 필요는 없다. 1960년에 독립한 나이지리아에서 남북부 부족간의 갈등이 그대로 유지 되는 것 처럼, 우리 역시 90년대 중반의 남북 이념대립의 역사가 국가간, 또 남한 내부에서 역시 그대로 진행되고 있으니까...

 

 

 

 

  

 

 

1898년 - 에밀 졸라가 문학 신문 로로르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페릭스 포레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를 발표하면서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다.

 

 

  '에밀 졸라'! 어느 썰렁한 유머글에나 나올 법한 '드립'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프랑스의 작가 이름이다. 하지만 그는 작가이기 보다는 '나는 고발한다!' 라는 정치적 활동(?)으로 더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배경은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1894년 프랑스 군 당국은 한 간첩이 쓴 것으로 보이는 문건을 확보하게 되는데, 그 문건에 있는 'D' 라는 암호명을 토대로 프랑스 육군의 포병대위인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오른쪽 사진)'를 체포,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내린 뒤 종신형을 선고하고 남아메리카의 '악마섬'으로 유배를 보낸다.

 

   하지만 'D'라는 암호명이 'Dreyfus'를 뜻한다는 근거는 전무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단지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편견이 작용했고, 그 결과 D가 드레퓌스로 엮이게 된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 군 고급장교들은 그러한 실수를 은폐하고자 했고, 가톨릭교회와 보수적 언론들은 드레퓌스 사건으로 유대인 전체를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2년 뒤, 조르쥬 피가르 중령은, 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인 프랑스 군 소령 '페르디낭 에스테라지'를 다른 간첩사건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체포하게 된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드레퓌스가 드레퓌스 사건의 범인이 아님을 알게 되는데, 이를 상부에 알리며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오히려 페르디낭 에스테라지가 무죄로 풀려나게 되고 피가르 중령이 '군사기밀 누설죄'로 체포되고 만다. 프랑스 군이 드레퓌스 사건의 잘못된 수사를 은폐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한 신문은 피가르 중령의 증거자료를 복사해서 폭로했는데, 풀려난 진범 에스테라지는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놨고, 프랑스 군은 그 변명에 오히려 동조하면서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막았다.

 

   그에 프랑스에 대한 애국심이 남달랐고 유대인이기도 했던 작가 '에밀 졸라'가 나섰다. 프랑스 신문 '로로르'('여명'이라는 뜻) 1898년 1월 13일자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내용으로 당시 대통령인 '펠릭스 포르'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1면 전체에 기고한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

끝났습니다. 프랑스의 얼굴에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이 생겼고, ‘역사’는 당신이 대통령일 때 그런 사회적 범죄가 저질러졌다고 기록할 겁니다.


그들이 감히 그렇게 했기에, 저는 감히 이렇게 하겠습니다.

 

진실, 저는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정식으로 재판을 담당한 사법부가 만천하에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제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제 의무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공범자가 된다면, 앞으로 제가 보낼 밤들은 가장 잔혹한 고문으로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속죄하고 있는 저 무고한 사람의 유령으로 가득한 밤이 될 겁니다.
:
피카르 중령은 양심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는 정의의 이름으로 상관들에게 건의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그들에게 간청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직무유기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역설했습니다. 끔찍한 뇌우가 조금씩 힘을 축적하고 있거니와,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 그것은 엄청난 폭발력으로 온 세상을 강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비열한 광경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빚더미와 죄악으로 얼룩진 자들은 무죄를 선고받고, 한 점 오점도 없는 명예로운 이는 오욕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지요! 이 지경에 이른 사회라면 그 운명은 파멸밖에 없습니다.

:

오늘 저의 행위는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앞당기기 위한 혁명적 수단일 뿐입니다.

 

(번역 : 책 '에밀 졸라 나는 고발한다', 2005)

 

 

 

 

 

 

   이 기고로 인해 에밀 졸라는 군법회의 명예훼손을 이유로 징역 1년을 선고 받는데, 항소를 진행하던 과정에서 고발당한 프랑스 군 장교들이 고소가 이어지자 구속을 피하기 위해 런던으로 망명한다.

 

 

   하지만 에밀 졸라(왼쪽 사진)의 바램대로 드레퓌스 사건은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는데 성공한다. 많은 지식인과 언론들이 진범은 에스테라지라고 주장하게 되었고, 결국 프랑스 사회는 두산백과의 글을 거의 그대로 빌리자면, '정의, 진실, 인권옹호'를 부르짖는 드레퓌스파와 '군의 명예와 국가 질서'를 내세우는 반(反)드레퓌스파로 분열되었다. 이런 양상... 뭔가 요즘의 우리와도 굉장히 비슷하지 않나? 훗날 우리도 이런 식으로 평가받을까?

 

   여하튼 이는 극도의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저 프랑스 정부에게 큰 위기를 가져왔다. 궁여지책으로 군부는 새로운 증거서류를 내세워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했는데, 그 서류가 날조된 것임이 밝혀졌고, 그러자 8월에 서류를 날조한 군 소령이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는 프랑스 정권이 바뀌는 일로 이어진다. '드레퓌스파'의 집권과 앞선 사건들로 인해 결국 법원은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을 시작했고, 그는 군법회의에서 형량만 감소되었을 뿐 다시 유죄를 선고받게 되지만, 9월에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게 된다. 드레퓌스의 혐의는 결국 풀린 것이 되었으며, 에밀 졸라도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게 되고, 드레퓌스는 명예를 회복해 군에 복직하여 승진도 하고 1차세계대전에서도 참전하게 된다.

 

 

 

 

   역사학자 바브라 투흐만은 이를 '역사상 위대한 소동의 하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흠... 결국 훗날 보면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시에는 얼마나 혼란스러웠고, 프랑스에 '망조'가 드리우고 있다 생각했을까?

 

   우리도 지금 큰 논란을 겪고있다. 이 드레퓌스 사건에 해당하는 것이 국정원의 대선개입 논란과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사건일 것이다. 관련된 이야기는 별도로 'Weekly Voice'에서 다루겠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봤을 때', 진정으로 대한민국을 위하는 마음에서 하나만 말하고 싶다. 당신이 지지하는 편이 이기길 바라지 말고, 진실이 밝혀지길 바라자. 그래야 이것은 '망조의 시작'이 아닌 '위대한 소동'으로 그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내 생각이 맞길 바래왔나, 진실이 밝혀지길 바래왔나?  

 

 

 

 

 

 

 

 

532년 -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니카 반란이 일어나다.

 

 

   오늘은 쓰다보니 정치적인 사건들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하게 되는 것 같다? 하긴 요즘에 오늘의 역사에서 왠 '마이바흐', '농구 탄생' 그런 것들을 다뤘던 것 같긴 하다. 그래 뭐 할 때는 해야지.

 

   532년... 이런 연도가 있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시대에,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의 위대한 황제이고 그래서 문명4에서도 지도자로 등장했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대항하는 반란이 있었다. 이게 배경이 재밌다.

 

 

   비잔티움 제국, 곧 '동로마 제국'은 역시 로마의 문화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전차 경주'였다. 이 전차 경주는 당시 유명한 오락거리 중 하나였는데, 로마 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기 전에는 전차 경주팀, 즉 지금으로 치면 '프로구단'이 4개이다가, 395년 로마 제국이 분열되면서 동로마제국에는 전차경주팀이 2개만 남게 되었다. 적색, 청색, 녹색, 백색 중 녹색과 청색팀만 남게 되었다고. (오른쪽 사진은 전차경주를 현대에 재현한 모습. 실제 경기장은 훨~씬 컸다)

 

   그런데 이게 시간을 거치면서 해당 팀을 지지하는 세력이, 지금으로 치면 '서포터즈'인 수준을 넘어 거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오늘날의 정당과 같은 형태를 구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녹색당과 청색당이 생긴 것인데, 녹색당은 상인과 기술자와 같은 중간계층, 청색당은 대지주와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단다. (글쎄... 우리도 프로야구 역사가 100년 쯤 되면 광주의 KIA와 대구의 삼성이 정치세력화 되려나? 정말 웃긴 상상인데 말이지...)

 

   그렇게 각 당의 세력이 너무 거대해지면서 결국 황제도 공공사업을 진행할 때 녹색당 또는 청색당과 함께 했는데, 당시 사병을 가지고 있었던 녹색당과 청색당이 490년 이후부터 무력으로 충돌(서포터즈간의 난투극이 아닌 전투!)하기 시작면서 두 당의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527년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청색당'을 지지(?!)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게 무슨 민주주의 정당정치도 아니기 때문에 황제의 통치에 목소리를 내는 이런 세력들은 모두 황제에게 방해가 될 뿐이었다. 결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즉위 이후 녹색당은 물론 지지했던 청색당까지 억압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532년 1월, 전차경기 이후 발생한 녹색당과 청색당과의 충돌과정에서의 살인행위로 인해, 녹색당과 청색당의 지도자를 포함한 당원들이 다수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그 중 두명이 탈출에 성공하는 일이 벌어진다. (두명이 각각 녹색당과 청색당의 당원이었던 듯 하다) 그들은 교회로 숨어들었는데, 녹색당과 청색당은 그들을 함께 보호하기로 결정한다. 녹색당과 청색당의 싸움이, 그들의 싸움을 방해하는 황제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당원들의 사형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세금에 대한 불만도 그에 한 몫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를 군대로 쓸어버리면 되는게 아니었나 싶지만, 녹색당과 청색당의 세력은 엄청났기에 황제도 쉽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결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1월 13일에 전차경기를 열고, 그 두명의 형량을 감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하지만 녹색당과 청색당은 완전한 사면을 요구했고, 그러한 의견 충돌속에서 1월 13일 전차경기가 열리게 된다.

 

 

   그리고 1482년전인 532년 1월 13일, 왕궁 옆에 붙어있는 전차경기장에서 경기가 개최되었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궁전과 연결된 관람석에서 경기를 관람했는데, 경기 시작 전부터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비난하던 군중들은 전차가 22바퀴를 돌았을 무렵, "니카!" 라고 다같이 외치기 시작했다. ('승리' 또는 '정복'이라는 뜻) 그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관람석에서 빠져나오는데, 그를 본 군중들은 뛰쳐나와 왕궁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분노한 폭도로 변해 왕궁은 물론 도시의 많은 시설물들, '하기아 소피아'와 같은 건축물들도 파괴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들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전 황제인 유스티누스 1세의 조카 '히파티우스'를 황제로 옹립하기도 했다.

 

   폭동이 계속되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왕궁을 떠날 채비를 하게 되는데, 그러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대신하여 문명5에서의 비잔티움 제국의 지도자로 등장하는 황후 '테오도라'가 황제를 꾸짖으며, 황제가 도망가도 자신은 황궁을 지키겠다면서 황궁을 지키고 폭도에게 맞서라고 주장했다. 결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마음을 고쳐먹고 폭동, 아니 '반란'을 진압할 계획을 세우게 되고, 결국 군인들은 군중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시작했다. 경기장 안에서만 3만명이 학살당했다고... (경기장이 얼마나 컸길래!)

 

   이후 폭동이 진압되고 황제로 옹립되었던 '히파티우스'도 잡혀오게 되는데, 히파티우스는 애초에 군중의 추대를 반대했었기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그를 용서하려고 했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한번 군중의 대표가 되었기 때문에 후에 다시 반란의 핵심이 될 수 있다며 처형할 것을 주장했고 결국 히파티우스는 처형당하면서 '니카 반란'은 종결되게 된다.

 

   1400여년전에 있을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황제마저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던, 황제도 벌벌 떨었던 뭉쳐진 군중들의 힘, 그리고 그것의 발생과정... 참 흥미롭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또 군중들도 한번 힘을 얻게 되자 그를 주체하지 못했으며, 자신들의 힘을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말이다. 물론 그것이 '국민 주권'이라는 현대 민주주의의 대원칙으로 연결되진 못했지만 말이다.

 

  아, 그리고 그에 더해 문명5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지도자가 바뀐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 역사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번주는 여기까지다.

 

 

 

 

 

 

 

1월 12일과 13일의 역사

 

- fin -

 

 

 

 

 

 

오타 수정 (20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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