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바흐'라는 브랜드가
2013년을 끝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오늘날 독일차에 대한 세계인의 무한한 신뢰의 배경에는
최고의 차를 만들고자 했던 '마이바흐'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사진속 자동차는 'Maybach 62S Landaulet')
- 링 크 -
12월 30일과 31일의 역사
독재자 마르코스와 박정희
http://blog.daum.net/smileru/8888174
- 순 서 -
84년전, 1929년 12월 29일
독일의 기술인 빌헬름 마이바흐 사망.
- 재능의 발견과 '다임러'의 조수로의 활동
- '메르세데스'와 '마이바흐'의 시작
- 뒷이야기들...
117년전, 1896년 12월 30일
필리핀의 독립 운동가 호세 리살 사망.
(12월 30일: 필리핀의 호세 리살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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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9일과 30일의 역사
Wikipedia
1922년 - 제1차 전연방소비에트대회에서 소비에트 연방이 수립된 것을 선포하다.
1927년 -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하철 노선인 도쿄 지하철의 긴자 선이 개통되다.
1965년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필리핀의 대통령이 되다.
1996년 - 서울 지하철 5호선 이 완전 개통하였다.
1997년 - 대한민국에서 흉악범 23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다.
2003년 - 대구광역시의 지하철 참사로 인한 화재로 불타버린 중앙로역을 재건하다.
2006년 -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에게 교수형이 집행되다.
삼성 '이건희' 회장 덕분에 최고급 자동차 브랜드로 유명한 '마이바흐'... 보통의 명품 브랜드들이 흔히 그렇듯 마이바흐 역시 사람 이름이다. 오늘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 재능의 발견과 '다임러'의 조수로의 활동
'빌헬름 마이바흐'는 1846년에 태어났다. 그런데 1856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1859년에 아버지 역시 세상을 떠나면서, 친척들에 의해 자선 재단의 학교로 보내지게 된다.
그가 보내진 곳은 '구스타프 베르너'라는 개신교 목사가 설립한 재단의 학교였는데, 그곳에서 베르너는 마이바흐의 공학적 재능을 발견하고 교내에 있는 공학작업장으로 마이바흐를 보내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한 교육자의 뛰어난 선택이었다. 이후 마이바흐는 고등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배우면서 물리학과 수학도 공부하게 되며, 그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고틀리프 다임러'(1834~1900, 오른쪽 사진)를 만나게 되면서 29살(1874)에 그의 보조가 되기에 이른다. 아, 물론 이 '고틀리프 다임러'가 한때 자동차 브랜드이자 회사였던 '다임러-크라이슬러'의 그 다임러이다. (지금은 크라이슬러와 분리, '다임러 AG'라는 사명으로 변했다)
마이바흐가 다임러의 보조가 되던 1874년 전후는 자동차 역사에서 획기적인 시기였다. 이전에는 증기기관 차량, 전기차 등이 존재하였으나 상용화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석탄가스기관을 이용한 엔진이 지금의 자동차와 그나마 흡사했으나 역시 한계가 있었는데, 결국 1863년에 프랑스의 '르누아르'가 액체연료를 이용하는 엔진으로 자동차를 만들어 주행하는데 성공했고, 여러 발명가들의 개선 끝에 1876년에는 독일의 '오토'가 4행정 사이클 기관을 발명하기에 이른다.
다임러와 마이바흐는 오토가 운영하던 연구소에 있었는데, 다임러는 오토와의 의견충돌 끝에 회사를 나와 1880년에 '가솔린'을 연료로 하는 엔진을 발명한다. 세계 최초의 가솔린 엔진이었다. '카를 벤츠'(왼쪽 사진)도 같은 시기에 별도로 가솔린 엔진을 발명하게 되는데, 다임러와 벤츠 모두 그 엔진을 마차에 장착해 자동차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다임러와 벤츠는 자동차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잠깐, 그 동안 마이바흐는 뭘하고 있었을까? 여전히 다임러의 곁에서 다임러를 돕고 있었다. 단순히 도운 정도가 아니고 거의 공동으로 일을 했기에 다임러를 이야기할 때 마이바흐는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마이바흐가 이 정도 수준이었다면 별로 유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차차하도록 하고... 여하튼 다임러와 마이바흐는 세계 최초의 가솔린 엔진을 만들어낸 것에 이어 1889년에는 세계 최초의 자동차를 시판하기 시작했고, 다임러와 마이바흐의 엔진 특허가 다양한 회사들에서 채택되면서 자동차 산업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다임러와 마이바흐가 회사 'DMG'를 설립하고 사업을 확장해 가기 위해 '두텐호퍼'와 '로렌츠' 등으로부터 자본을 끌어오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자동차 산업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투자자들은 '엔진'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임러와 마이바흐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오토'의 엔진회사 'Deutz-AG'와 다임러의 회사를 합병해버리고 만다. (1890) 오토와 싸우다 오토의 회사에서 나왔던 다임러와 마이바흐였기에 합병 이후에도 의견충돌을 계속하게 되었는데, 결국 다임러와 마이바흐 모두 회사를 나오기에 이른다.
이를 놓고 훗날 독일의 역사가들은 다임러와 마이바흐가 두텐호퍼와 로렌츠 등과 계약한 것을 '악마와의 계약'이라고 주장했다. 경영자가 기술자를 몰아낸 판단이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그 판단이 틀려서 세계 최초의 자동차를 개발한 다임러는 시장을 완전히 선도하는데 실패하였으며, 따라서 자금난도 계속되고 만다. 또한 당시 논란이 있었던 회사 지분에 대한 갈등은 아직도 자손들간의 소송으로 계속되고 있다고...
◆ '메르세데스'와 '마이바흐'의 시작
아무튼, 그렇게 다임러와 마이바흐(왼쪽 사진. 1900)는 회사를 나오게 되는데, 마이바흐는 이후에도 자신만의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이미 큰 돈을 벌었던 다임러가 재정적 지원과 기술자문을 해주었는데, 그 결과 마이바흐는 새로운 엔진 '피닉스 엔진'을 개발했고 이는 자동차 업계의 표준이 된다. 한편 1894년에는 다임러가 노력끝에 자신이 설립했던 회사인 DMG를 되찾게 되어, 1895년에는 마이바흐가 다시 DMG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힘들게 회사를 되찾은 다임러는 1899년에 세상을 떠나고 마는데, 회사를 놓고 계속된 분쟁이 그의 건강을 크게 악화시켰다는 주장들이 있다.
아무튼 마이바흐는 다시 DMG에 돌아가서도 빛을 발했다. 오늘날 '메르세데스-벤츠'로 불리는 '메르세데스' 라인업의 자동차를 1902년에 처음으로 만들어 폭발적인 힘과 디자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가 기술자이자 산업디자인을 공부했다는걸 기억하자) 그리고 지속적으로 세계 최고의 힘을 내는 엔진을 발명해내면서 자동자, 엔진, 그것들의 디자인과 같은 모든면에서 명성을 얻었다. 슬슬 마이바흐는 엔진개발에서 벗어나 최고의 차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07년, 마이바흐는 회사의 홀대로 인해 쫓겨나다시피 또 다시 회사를 나오게 되는데, 이후 그는 드디어 자신의 회사를 차리게 된다. 'Maybach-Manufaktur'가 그것이다. 처음에는 자동차보다는 비행선과 비행기의 엔진을 만드는 사업을 했다. 그 시기는 비행기가 발명된 시기이기도 했고 1차세계대전 전후이기도 해서, 마이바흐의 엔진기술력을 여기저기에서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독일의 비행선이 금지되어 마이바흐는 다시 자동차를 만드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들 '카를 마이바흐'와 함께 '완벽한 자동차'를 목표로 럭셔리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렇게 죽을 때까지 최고의 자동차를 만들었다. 특히 아들 '카를 마이바흐'가 주도해 제작한 최초의 12기통 엔진과 그 엔진을 얹은 차 'Maybach DS 8 Zeppelin'은 마이바흐의 명성을 크게 높여줬다고 한다.
그렇게 아들이 성공적으로 회사를 이어가는 것을 목격한 마이바흐는, 1929년 12월 29일에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물론 최고의 엔진과 최고의 차량을 추구한 마이바흐의 노력은 독일 자동차 업체들의 모범이 된 뒤였다. 결과적으로 다임러와 마이바흐가 만들어낸 것들은 자동차의 역사 그 자체였다. 자동차의 시작과 함께 했기에 더더욱 그랬고 말이다. 아참, 마이바흐가 학교에서 재능을 발견한 것도 잊지 말아야 할 듯?
◆ 뒷이야기들...
뒷이야기들을 좀 살펴보면... 다임러가 만들어 잃었다가 되찾은 회사인 DMG는, 다시 경영이 악화되면서 1924년에 '벤츠'와 합병되어 '다임러-벤츠'가 되었고, 1998년에는 미국의 자동차 회사 '크라이슬러'를 합병해 사명을 '다임러-크라이슬러'로 변경했다가, 2007년에 그를 다시 팔고 사명을 '다임러 AG'로 변경했다. 현재 다임러 AG에 유명한 브랜드로는 '메르세데스-벤츠'가 있다.
마이바흐의 회사는 강력한 엔진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치 독일'을 위해 다양한 거대 엔진들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었는데, 1960년에 다임러-벤츠에 흡수되었다. 그러다가 1998년에 다임러-크라이슬러는 '마이바흐'를 럭셔리 브랜드로 출시하게 된다. 성장한 롤스로이스와 벤틀리를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아,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등장해 오늘날 '마이바흐'와 함께 세계 3대 명차로 불리는 '롤스로이스'와 '벤틀리'의 경우는 영국의 회사들이었는데, 오늘날 그들은 각각 'BMW'와 '폭스바겐'이라는 독일 회사에 흡수된 상태다. 그 시기가 바로 1998년이다. 결국 독일의 BMW와 폭스바겐이 최고급 차 브랜드를 가지게 되자 다임러-크라이슬러도 '마이바흐'를 부활시켰던 것... 하지만 그런 마이바흐는 2013년을 끝으로 더이상 생산되지 않을 예정이라고 한다. '벤츠 S클래스'와의 차별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벤츠와 비교되어 사라지게 되다니 마이바흐가 지하에서 통탄할 일이지만, 그래도 '메르세데스-벤츠'라는 브랜드가 여전히 다임러 AG의 것이니까, 메르세데스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던 마이바흐의 자취가 아직은 남아 있는 것이겠지? 물론 또 언제 다시 마이바흐가 돌아올지도 모르는 것이긴 하다.
필리핀은 포르투갈인인 '마젤란'에 의해 1520년대에 서양세계에 알려지게 되고, 이후 스페인이 필리핀을 무역기지화하면서 300년간의 식민지배에 들어가게 된다. 식민지배로 인해, 동남아시아 국가 상당수가 중동의 상인들, 또는 인도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교나 불교를 채택했던 것과는 다르게 필리핀은 완전히 카톨릭화되었는데, 필리핀의 스페인 교회 성직자들이 종교권력을 휘두르면서 폐단이 심해지자 1800년대 말부터 필리핀에서도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세계적으로 민족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한 것도 원인이었다.
1861년 태어난 '호세 리살'은 그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스페인으로 유학을 가 의학공부를 하게 되는데, 탄탄대로의 길 앞에서 그는, 식민지배의 모순을 비판하고 필리핀에서 필리핀인들이 차별받는 것을 묘사한 소설을 여러편 출간하게 된다. 생각 외로 그 소설은 스페인 지식인과 학생들 사이에서 급속하게 퍼지게 되었는데, 그러자 필리핀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 여론이 스페인 내부에서 나오는 상황으로 이어지게 된다. 분노한 스페인 정부는 호세 리살의 책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했고, 그를 학교에서 퇴학시킨뒤 필리핀으로 추방한다.
하지만 수많은 역사에서 보이듯, 그러한 탄압은 이미 잃을대로 잃은 그들을 더욱 불타오르게 할 뿐이었다. 결국 필리핀으로 돌아온 '호세 리살'은 '필리핀민족동맹'을 결성해 사회개혁운동을 시작한다. 그는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보다는 식민지 시스템을 개혁하고 스페인으로부터 자치를 얻어내는 쪽을 추구했는데, 어찌되었건 스페인 정부 입장에서는 '반대편'에 있는 인물이었고, 무엇보다 그가 독립운동과 필리핀 민족주의에 대한 사상적 기반을 계속 홍보하고 있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결국 1892년에 스페인 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었던 그는, 1896년 무장 폭동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갑자기 받고 1896년 12월 30일에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근처에서 총살당하게 된다. 공권력으로 막아낼 수 있었던 행동하는 자들보다,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세 리살이 더 두려웠던 것일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런 극단적 선택은 필리핀 민중들의 독립운동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스페인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그를 차단했고 필리핀의 독립운동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됐는데, 1898년 스페인과 미국간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필리핀인들은 미국과 함께 스페인에 저항하며 활로를 찾게 된다.
하지만, 미국에게 패배한 스페인이 필리핀의 지배권을 필리핀 혁명정부에 넘기지 않고 미국에 넘기는 일이 일어났고, 미국도 그를 필리핀 혁명정부에 넘기지 않으면서 다시 미국을 상대로한 독립투쟁이 시작되었다. 요 뒷 이야기는 예전에 쓴 글이 있으니 그 글을 참고하시길... 미국으로부터 독립한뒤에는 일본이 또...
참고글 : 2월 3일과 4일의 역사 - 미국-필리핀 전쟁 발발, http://blog.daum.net/smileru/8888200
아무튼 이런 역사들을 보면 굉장히 뻔하고 뻔하다. 권력에 반대하는 자들을 누르려는 공권력, 하지만 그를 비집고 튀어나와 퍼지고 퍼지는 '생각'들, 결국 그를 차단하고자 벌이는 극단적인 행동들, 그리고 폭발하는 분노... 요즘엔 역사가 그를 말해주고 있기에, 여러 국가들이 과거 정부나 '행동하는 자들'을 '폄하'하는 식으로 대중의 마음을 떠나게 만드려고 하고, 극단적인 공권력 행사는 최대한 자제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뭐 우리나라도 그런게 사실이다. 특히 공권력의 경우 예전 이명박 정부시절 촛불집회에서, 방패를 이용한 폭력과 '군화발' 논란이 집회를 폭발시켰었는데, 그러다보니 요즘엔 서울광장을 차로 가려서 사람들이 집회를 보지 못하게 해 생각이 '확산'되는 걸 막고, 충돌이 발생할 수 있는 도로 점거 상황 자체를 조기에 봉쇄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근 철도노조가 피신한 조계사로의 진입도 예전과 다르게 자제하면서 여론의 눈치를 보고 있고 말이다.
이런 걸 보면 참 그 권력자들도 진화하는듯 하다. 대항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어떻게 진화하게 될까?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같은게 진화의 사례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뭐 정치적 입장을 떠나, 민중들의 투쟁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앞으로의 흐름은 매우 흥미로울 듯 하다. 그 흥미로운게 우리나라여서 실제로는 흥미롭게 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겠다만...
12월 29일과 30일의 역사
- fin -
오타 수정 (2013.12.28)
마이바흐 아버지의 사망년도 정정 1895 -> 1859 (20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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