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2월 1일과 2일의 역사 - 센카쿠열도 문제 : 카이로선언 70주년

스마일루 2013. 11. 28.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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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과는 무관한 이야기인데,

이 사진을 멍하니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이,

이러한 '역사적 지도자'들이 우리 시대에도 있을까 싶다.

 

상대적으로 평화의 시대이지만, 그렇다고 위대한 인물이 나오지 말란 법은 없지 않나?

솔직히 누구든 주목 받을수 밖에 없는 혼란의 시기의 지도자 보다는,

요즘 같은 시대에 세상을 한차원 진보하게 하는 지도자가 더 대단한 것 아니겠나?

 

 

 센카쿠열도의 갈등을 비유하자면,

주인(중국)도 내 것인지 모르겠다는 인형을

옆 집 사람(일본)이 주워가서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는데,

나중에 그 인형이 높은 가치를 지닌 조형물이라고 하니

그 인형이 본래 우리 집(중국역사)에 있었다며 돌려달라고 하는 꼴이다.

 

주인의 기억상실증(국내혼란)을 앓았다는 것을 이해해 줄 수도 있겠지만,

민사소송이라면 참작이 가능할지 몰라도 국가간의 관계에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결이 불가능해 보인다.

 

 

 

 

 

 

- 링 크 -

 

12월 2일과 3일의 역사

전두환 구속, 보팔 가스누출사고

http://blog.daum.net/smileru/8888151

 

 

 

- 순 서 -

 

70년전, 1943년 12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 :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다.

- 카이로 선언과 문제의 시작
- 중국과 일본의 입장 : 잘못한 중국
- 한번 더 꼬이다 : 미국은 왜 오키나와를 차지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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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과 2일의 역사

Wikipedia

 

12월 1일: 세계 에이즈의 날, 포르투갈의 독립부활기념일

1640년 - 포르투갈스페인에게서 독립

1821년 - 도미니카 공화국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다.

1913년 - 포드 자동차 회사가 최초의 일괄 조립 라인을 도입, 공개하다.

1934년 -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당했다.

1943년 - 제2차 세계 대전: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다.

1950년 - 중화인민공화국 군대가 티베트 수도 라싸를 침공

1958년 - 중앙아프리카공화국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1959년 - 12개 나라가 모여 남극의 평화적 이용을 규정한 남극 조약을 맺다.

1962년 - 대한항공공사 창립

1964년 - 말라위, 몰타, 잠비아, 국제연합 가입

1971년 - 인도군은 카슈미르를 점령하였다.

1980년 - 새벽 0시를 기해 KBS 1TV 탄생: KBS TV(채널 9)언론통폐합으로 KBS 1TV로 이름을 바꾸고 방송을 시작하다.

1988년 - 파키스탄베나지르 부토이슬람 최초의 여성 총리로 당선됨

1990년 - 영국프랑스를 잇는 채널 터널이 연결되다.

2009년 - 동대문운동장역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으로 역명을 변경하다.

 

 

12월 2일

1476년 - 조선 10대 국왕 연산군 탄생.

1804년 - 파리시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나폴레옹 1세 대관식이 열렸다. 대관식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스스로 자기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 프랑스 천년 역사에서 첫 번째 황제였다.

1869년 - 교황 비오 9세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다.

1899년 - 미국영국사모아 군도 분할협정이 체결되다.

1942년 - 우라늄 핵분열 연쇄반응 실험이 성공하다.

1972년 -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가 일어났다.

2010년 - NASA 연구진이 지구상 최초로 비소를 이용해 번성하는 생물을 발견하고, GFAJ-1라고 명명하다.

 

 

 

1942년 - 우라늄 핵분열 연쇄반응 실험이 성공하다.

 

참고글 : 9월 29일과 30일의 역사 - 페르미와 CERN

 

 

 

 

 

 

 

 

1943년 - 제2차 세계 대전: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다.

 

 

   가끔 오늘의 역사를 쓰다보면, 그 '오늘의 역사'가 지금 현시대의 이슈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럴때 매우 흥미롭기 그지 없다. 관심도 더 많이 가게 되고? 그래서 그런지 오늘 좀 여러 소식을 다루려고 했는데 이 글이 너무 길어져서 이 소식 하나로 끝내야 할 듯 하다. 항상 '오늘의 역사'는 이래서 문제다. 내가 쓰다가 내가 너무 재미있어 하는 듯.

 

 

   ◆ 카이로 선언과 문제의 시작

 

   1942년 말이 지나면서 2차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은 우위를 보이기 시작했다. 1943년 2월에는 수개월간 지속된 인류역사상 최대의 단일전투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결국 소련군이 승리했고, 1943년 7월에는 '허스키 작전'의 성공으로 이탈리아가 큰 피해를 입어 결국 9월에는 이탈리아가 항복, '파시즘'의 시작이었던 무솔리니가 실각하게 된다.

 

   아직 낙관할 수만은 없었지만 유럽의 상황이 정리되어가는 상황에서, 다음 관심은 일본에게로 옮겨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는 일본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고 그로 인해 연합군은 유리한 고지에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아니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미국, 유럽-중국'간의 정치적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그리고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 이 세 '위인'이 만나 회담을 가지게 된다. 카이로 회담이었다. 1943년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1차회담이, 1943년 12월 2일부터 7일까지 2차회담이 열렸다. 1차회담은 일본에 대한 결의와 일본의 패전을 가정한 일본 처리 방침을 정하는 자리였고, 2차회담은 먼저 소련의 스탈린과 루즈벨트, 처칠이 만난 뒤, 터키의 '이노뉴 대통령'과 루즈벨트, 처칠이 만나 터키의 연합군 참전을 요청하는 자리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최고사령관이 '아이젠아워'라는 것을 루즈벨트가 처칠에게 말한 것도 이 때였다.

 

   2차회담에서의 터키의 연합군 참전은 이노뉴 대통령의 거절로 실패해서, 결국 이 카이로 회담의 성과는 12월 2일에 발표된 오늘의 주제, '카이로 선언' 뿐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문 (영어 원문은 Wikipedia에서 확인하시길)

 

 

   각 군사사절단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3대 동맹국은 일본의 침략을 정지시키며 이를 벌하기 위하여 이번 전쟁을 속행하고 있는 것으로, 위 동맹국은 자국을 위하여 어떠한 이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며 또 영토를 확장할 의도도 없다. 위 동맹국의 목적은 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과 만주, 대만 및 팽호도와 같이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구축될 것이다. 앞의 3대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3대 동맹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촉진하는데 필요한 중대하고도 장기적인 행동을 속행한다.

 

 

 

   *카이로 선언을 정리한 것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발췌 & 수정) 

 

1. 3국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2. 3국은 야만적인 일본에 가차없는 압력을 가할 것을 결의하였다.
3. 3국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 응징하나 모두 영토확장의 의사는 없다.
4.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여러 섬을 박탈한다.

5. 또한 만주, 타이완, 펑후제도 등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한다.

6.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축출한다.
7. 3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 주목, 한국을 자주독립 시킬것을 결의하였다.

 

  

 

   이걸 읽어보시는 분들은 정리된 것 중 7번에 집중하실 것 같다. 우리와 관련된 이야기이니 말이다. 카이로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공식화한 것으로도 정말 유명하지만,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4번이다. '댜오위다오', 즉 '센카쿠열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카이로 선언을 정리하면, 연합군은 전체적으로 일본이 강제 점령한 영토들을 원래의 국가들에게 돌려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차세계대전때처럼 연합군이 재식민지화하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참고글 : 11월 3일과 4일의 역사 -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독립, http://blog.daum.net/smileru/8888366

 

 

   그럼 센카쿠열도를 보자. 센카쿠열도는 본래 중국땅이었다. 명나라 시절의 어로 활동 관련 서적인 '조어서'(1403)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후 중국의 여러 문헌에 등장하고 말이다. 그런데 1895년 청일전쟁 도중 오키나와의 사업가 '고가 다쓰시로'가 이 섬을 발견하자, 일본은 청일전쟁 종전 몇개월 전 강제로 자국영토에 편입시키게 된다. 그리고 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은, 일본의 패망이후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2차세계대전 와중 점령했던 오키나와와 함께 센카쿠열도를 27년간 신탁통치하다가 1972년에 일본에 반환하게 된다.

 

 

 

    ◆ 중국과 일본의 입장 : 잘못한 중국

 

   이에 대해 일본은, 미국이 '오키나와와 함께 반환했다'라는 입장이고, 중국은 '원래 우리땅', '청일전쟁 당시의 강제점령 자체가 무효',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중국을 배제한 것이 문제'라는 입장이다. '카이로 선언'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요즘에도 자주 뉴스에 나오는 중국의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은 중국의 신성한 영토인 댜오위다오를 청일전쟁이 끝난

1895년 불평등조약(*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부당하게 훔쳐갔다.

(일본이) 중국 정부가 강제로 불평등 조약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은

일본이 댜오위다오와 그 부속도서를 중국에 돌려줄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일본의 댜오위다오 국유화 조치는 반(反) 파시스트 전쟁 승리의 결과를 공공연하게 부정할 뿐 아니라

전후 세계 질서와 유엔헌장의 취지 및 원칙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2012년 9월27일, 제67차 유엔 총회 일반 연설에서

 

 

 

   여기에서 '불평등 조약'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다. 그 불평등 조약은 청일전쟁 이후 맺어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말하는데, 이 때 중국의 여러 섬들이 일본에게 넘어간다. 거기에 '댜오위다오'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었다는게 일본 주장이고, 중국은 포함되어 있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중국은 '카이로 선언'에 있는 '5. 또한 만주, 타이완, 펑후제도 등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한다' 라는 것에 댜오위다오도 포함된다는 것이 양제츠 장관의 말이다.

 

   그런데 '시모노세키 조약' 당시에 청나라가 일본에게 넘긴 중국 섬 지도에, 일본에게 넘어갈 섬으로 댜오위다오가 표시되어 있지 않음이 확인되었다. 일본도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의 중국의 주장은 확실히 틀렸다. 댜오위다오는 시모노세키 조약 때문에 일본에게 넘어간 것이 아니고, 따라서 시모노세키 조약의 부당함으로 돌려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것은, 일본이 청일전쟁 종전 전, 시모노세키 조약 전에 센카쿠열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한 것은 옳으냐는 것이다. 중국 역사서에 댜오위다오가 오래전부터 등장하고 중국 영토라고 표시된 것들이 있어 본래 중국 영토여야 맞는데 일본이 시모노세키조약과 별도로 빼앗은게 아니냐, 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혹자는 남에 땅 점령하면 그게 그 나라 땅 되는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이 류쿠 왕국(오키나와)을, 중국이 티베트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것과 다르게, 이건 그냥 1895년에 일본이 행정적으로 편입해버린 것이다. 보면 일본이 독도를 시네마현에 그냥 편입해 버린 것과 유사한 모양새다. 그냥 혼자서 행정적으로 자기 땅이라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싸워서 빼앗아간게 아니고 문서로 사기를 친거다. 그렇게 본다면 '5. 또한 만주, 타이완, 펑후제도 등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한다' 라는 카이로 선언 내용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콕 집어 말하고 있지 않기에 어떤식으로든 빼앗아간 댜오위다오 역시 중국으로 반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중국이 억울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중국이 댜오위다오에 대해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 스스로 시모노세키 조약 당시 일본에게 내민 자국 섬 지도에 댜오위다오가 넘어갈 대상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일본의 강제편입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거나 댜오위다오가 본래 일본 땅인 줄 알았던 거다. 또 당시에는 일본이 두려워 대들지 못했다 하더라도, 심지어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 중국지도에는 댜오위다오가 일본 영토라고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걸 보면 중국 역사서에 댜오위다오가 적지 않게 등장하는 것과는 달리, 중국이 근대의 내전과 혼란기를 거치면서 댜오위다오라는 작은 무인도가 중국의 영토라는 인식 자체가 증발해버렸던게 아닌가 싶다. 애초에 지배에 관심이 없었던, '있는 걸 알고만 지내던 섬'이었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정말로 할말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이 우리와의 큰 차이점이 되겠다. 우리는 1600년대의 '안용복'을 비롯, 1950년대의 민간조직 '독도의용수비대'를 비롯한 여러 일반 국민들의 노력으로 독도를 실효지배하고 있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중국은 충분히 자국 땅이라 주장할만 하지만, 스스로의 노력 부족으로 '실효지배'에 실패했고, 이제서 그걸 문제라고 제기하니 자원 때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험난했던 중국의 근대사야 이해하지만 댜오위다오에 대한 관심이 너무도 부족했고 스스로 역사를 잃어버렸으니...

 

   비유하자면, 주인(중국)도 내 것인지 모르겠다는 인형을 옆 집 사람(일본)이 주워가서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는데, 나중에 그 인형이 높은 가치를 지닌 조형물이라고 하니 그 인형이 본래 우리 집(중국역사)에 있었다며 돌려달라고 하는 꼴이다. 주인의 기억상실증(내부혼란)을 앓았다는 것을 이해해 줄 수도 있겠지만, 민사소송이라면 참작이 가능할지 몰라도 국가간의 관계에서는 정상적인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고 그럴 수 밖에 없다.

 

 

 

   ◆ 한번 더 꼬이다 : 미국은 왜 오키나와를 차지했나?

 

   그런데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카이로 선언에서 연합군은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영토를 모두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겠다고 했고, '3국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 응징하나 모두 영토확장의 의사는 없다'고도 말했었다. 그런데 왜 오키나와와 센카쿠열도는 미국이 신탁통치를 하다가 27년만에야 일본에게 반환한 것일까? 그 행위는 결국 미국도 센카쿠열도가 오키나와 현에 속하는 일본 영토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으니 이 사안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겠다. (실제로 일본도 미국의 반환을 근거로 센카쿠열도가 '원래' 오키나와 현 소속의 일본 고유 영토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일단 미국은 '6.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축출한다.'는 카이로 선언과는 다르게 오키나와를 '류큐 왕국'으로 독립시키지 않았다. 반면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은 보장하고 있다. 조선 자체가 류큐왕국에 비해 크기면에서 크기도 했지만, 류큐왕국은 말그대로 멸망해버린 반면, 김구를 비롯한 한국인들이 장제스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이며 함께 일본과 싸우고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만약 그런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하지만 독립을 안 시킨걸 떠나, 결정적으로 미국은 말이 신탁통치였지 더 오랫동안 오키나와를 가지고 있을 생각이었던 것 같다. 카이로 선언이고 뭐고 말이다. 바로 지정학적인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서가 그것이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종전 직전 오키나와에 '후텐마 비행장'을 건설한다. 그리고 종전 이후 오키나와 신탁통치를 시작하면서 후텐마 비행장의 활주로를 확장하고 미사일 등을 배치하면서 '후텐마 기지'로 확장해 미국 해병대의 극동지방 본거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남한에서 일본군의 무장해제 이후 미군이 500명만을 남기고 1949년에 완전히 철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양새다.

 

   그러나 일단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내에서는 오키나와를 반환받아야 한다는 운동이 거세졌다. 이는 '미일안보조약 연장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동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항공모함' 일본이 꼭 필요했기에 일본의 '반미투쟁'은 골치아픈 문제였다. 당시에는 베트남 전쟁까지 벌이고 있어 더욱 그랬다.

 

참고글 : 문명5BNW-(#1-13) 동아시아의 '항공모함'

 

   결국 미국은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되,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기본적인 유지는 물론 당시 미일간 경제분쟁이 있었던 섬유산업과 관련해 일본이 미국에게 손해를 보면서도 자금을 예치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지원하고, 오키나와 군사시설의 원상복구 비용을 일본이 부담하며, 유사시에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배치할 수 있게 한다는 조건을 관철시킨다. 미일안보조약이 연장되었음은 물론이다. 참고로 이 내용들은 거의 다 '밀약'이어서 훗날 밝혀진 것이다. 심지어 오키나와 반환을 성사시킨 일본의 '사토 총리'는 일본의 비핵화 천명으로 1974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지만, 미국의 오키나와 핵무기 배치를 용인하고 중국의 공격시에 사용해 줄 것을 요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참고기사 : 비핵화로 노벨상 사토 전 日총리 '두 얼굴' - 한국일보, 2008  

 

 

   여하튼 그렇게 미국은 카이로 선언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를 신탁통치한 덕에, 오늘날까지 오키나와를 계속 근거지로 활용하고 있다. 미국의 도청파문으로 논란이 된 미국 주도의 국제적 감청기구 '에셜론'의 기지로 후텐마 기지가 유명세를 타기도 했었고 말이다. (그러고보니 문명5BNW #1 연재를 하면서 나도 오키나와섬에 근거지를 마련했는데...)

 

   오키나와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결국 미국이 중국, 대만, 일본, 한반도와 가까우면서 그들의 해로가 지나갈 수 밖에 없는 오키나와를 전략적 거점으로 삼기로 결정하면서 신탁통치 후 일본에게 센카쿠열도와 함께 넘겨주었고, 그러면서 센카쿠 열도 문제는 한층 더 꼬이게 되었다. 그 일만 없었더라도 일본이 '미국이 오키나와아 함께 넘겨준 것 자체가 센카쿠 열도가 오키나와에 속하는 일본 영토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라는 미국을 내세운 주장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로지 청일 전쟁때 강제편입한 것이 옳았냐는 문제만 남았을텐데 말이다.

 

 

   꼬이고 꼬인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중국도 답답할테고... 하지만 센카쿠 열도에 자원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야 들고 일어선 중국도 일본의 실효지배를 방관했다는 비난을 피하긴 어려울 것이다. 조금 딴 소리같지만, 그런 걸 보면 우리나라 국민들이 대단하긴 하다. 여러가지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긴 했겠지만, 독도도 되찾고, 독립운동으로 카이로 선언에 조선의 독립과 관련된 특별 조항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다 국민들의 노력 때문이 아니겠나?

 

   아무튼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강대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조금이라도 취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모든 이권들을 차지하고자 움직이고 있다. 일본도 중국처럼 하고 싶은데 패전 이후 만들어진 법이 그를 막고 있어 그 법을 바꾸려 하고 있는 모양새다. 미국은 과거 중국과 손을 잡아 일본을 상대로 싸웠던 것 처럼, 이번엔 일본과 손을 잡아 중국을 상대하려 하고 있다.

 

   그럼 우리는 뭔가? 잘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카이로 선언, 시모노세키 조약, 샌프란시스코 조약... 그곳에 우리나라는 없었고 우리의 의견도 없었다. 그들의 우리의 운명을 한두문장으로 결정해 왔다. 또 그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첨단무기 도입과 개발이 기본으로 깔려있어야 외교를 해도 할 수 있다. 강대국들을 압도하진 못해도 충분한 억지력을 가져 균형추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뭔가 속도가 늦는 느낌이다. 이지스함도 있고 해서 국방력이 성장한 것 같지만, 다 수년전에 도입된 것들이고 당분간 전력 증강이 없는 공백상태이니 남들은 하루하루 업그레이드 되어가는 상황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리 준비하지 않으면 늦다.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고시생처럼 밤낮으로 고민해도 부족한 것이 국력강화, 국익추구인데 요즘 보면 대외적, 대내적으로 나라걱정만 늘어간다.

 

   역사를 알수록 두렵다. 비극의 역사를 알아 갈 때마다, 결국 또 반복될 것 같아서 말이다.

 

 

 

 

 

 

12월 1일과 2일의 역사

 

- fin -

 

 

 

 

 

 

문장 어색한 부분 수정 (201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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