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9월 29일과 30일의 역사 - 넬슨 일대기, 페르미와 CERN, '이더넷'

스마일루 2013. 9. 2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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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팔가 해전의 위대한 영국 제독 '허레이쇼 넬슨'은 오른팔이 없다.

#. "국가적인 시설 이상의 자원에 힘입어 규모와 비용 면에서 개별 국가의 범위를 넘어서는 과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 인터넷도 아니고 '이더넷'은 뭘까?

 

 

 

 

 

 

 - 링 크 -

 

9월 30일의 역사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조선 토지 조사 사업

http://blog.daum.net/smileru/8888109

 

 

 

 

- 순 서 -

 

255년전, 1758년 9월 29일

영국 해군사령관 허레이시오 넬슨 탄생.

 

112년전, 1901년 9월 29일

이탈리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엔리코 페르미 탄생.

 

59년전, 1954년 9월 29일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가 설립되다.

 

33년전, 1980년 9월 30일

제록스가 인텔, 디지털 이퀴브먼트 등과 함께 개발한 이더넷 표준이 공개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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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9일과 30일의 역사

Wikipedia

 

9월 29일

1758년 - 미국독립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싸운 영국 해군사령관 허레이시오 넬슨 탄생.

1887년 - 독일의 축구 클럽 함부르크 SV 창단.

1898년 - 러시아 생물학자 트롬핀 리센코 탄생.

1901년 - 이탈리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엔리코 페르미 탄생.

1902년 - 프랑스의 작가 에밀 졸라가 사망하다.

1927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 박태준 탄생.

1937년 - 이탈리아의 정치인, 기업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탄생.

1938년 - 독일·이탈리아·영국·프랑스 등 유럽 4개국 정부수반이 체코슬로바키아 문제로 뮌헨 회담을 개최하다.

1954년 -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가 설립되다.

1956년 - 한국 전쟁 참전 16개국 휴전감시위원단 한반도 철수 결정

1970년 - 오적 필화 사건: 대한민국 문화공보부김지하의 시 《오적》을 게재한 월간지 《사상계》의 등록을 취소하다.

1972년 - 일본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국교를 재개하기 위해 중국측과 회담을 가진 뒤 중일공동성명을 조인, 중화민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

1984년 -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개장.

1988년 - 대한민국 여자핸드볼, 올림픽 구기사상 첫 금메달

1999년 - AP 통신사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최초로 보도하다.

2003년 - 노무현 대통령 민주당 탈당 공식 선언

 

 

9월 30일: 보츠와나(1966년)의 독립기념일

1626년 - 금나라, 청나라의 초대 황제 누르하치 사망.

1732년 - 프랑스의 정치인 자크 네케르 탄생.

1791년 - 오페라 마술 피리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되다.

1895년 -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 정치인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탄생.

1910년 - 일본, 조선 토지 조사 사업 착수.

1914년 - 조선의 개화사상가 유길준 사망.

1927년 - 대한민국의 군인 주영복 탄생.

1946년 - 제2차 세계 대전 전범 처벌을 위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12명의 나치 지도자에게 사형이 선고되다.

1948년 - 대한민국 국회, 한글전용법안 가결

1949년 - 중국 공산당, 주석에 마오쩌둥(毛澤東)ㆍ수상에 저우언라이(周恩來)선출.

1951년 - 오스트레일리아의 생리학자 배리 마셜 탄생.

1955년 - 미국의 배우 제임스 딘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다.

1961년 - 유럽 경제 협력 기구(OEEC)가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로 확대·발족하다.

1963년 - 이준(李儁)의 유해, 56년 만에 네덜란드서 귀환해 서울 수유리에 안장.

1980년 - 제록스인텔, 디지털 이퀴브먼트 등과 함께 개발한 이더넷 표준이 공개되다.

1981년 - 독일 바덴바덴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84차 총회,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지서울특별시로 선정

1999년 - 일본 도쿄 인근 핵연료 재처리 공장에서 방사능 누출사고가 발생하여 작업자와 인근 주민이 피폭당하다.

2002년 - 강원도 화천군 평화의 댐 2단계 증축공사 개시.

 

 

 

 

 

 

 

 

 

   1758년 - 미국독립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싸운

   영국 해군사령관 허레이시오 넬슨 탄생.

 

   넬슨! 이야기를 짧게 하려고 했는데 넬슨 특집이 된 느낌이다. 내용은 별거 없는데...

 

   아무튼,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해군의 물리쳐 영국을 구한 제독으로 이미 너무 유명한 인물이다. 트라팔가르 해전, 트라팔가 해전에 대해서는 전에 쓴 글이 있으니 참고하시길...

 

   참고글 : 10월 21일과 22일의 역사 - 트라팔가 해전, http://blog.daum.net/smileru/8888121

 

   오늘은 트라팔가 해전을 떠나, 그의 생애에 대해 위키에 나와있는 내용들을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허레이시오 넬슨'은 1758년 오늘인 9월 29일에 브리튼섬 오른쪽에 툭 튀어나온 지역인 '노포크'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한 때 영국 총리도 배출했었던 가문이었지만, '젠트리'계급, 즉 귀족은 아니지만 가문의 품위를 갖춘 '젠틀맨' 수준 정도의 집안이었는데, 아무튼 그래서 품위는 있는 집안이었지만 그냥 가난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넬슨이 9살때 어머니인 '캐서린 넬슨'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러자 해군 대령이던 외삼촌 '모리스 서클린'(왼쪽 그림)이 어린 넬슨을 바다로 데려가기로 결정한다. 결국 넬슨은 기초교육정도만 마친 1770년, 12살 나이로 해군에 입대한다. 넬슨은 애초에 배 체질이 아니었다고 한다. 평생 배멀미를 했다고 전해지니... 트라팔가 해전때도 배멀미를 했을지도? 하지만 어찌되었든 해군에 입대했고, 외삼촌 '모리스 서클린'이 선장을 맡게된 배에서 평범한 선원과 키잡이를 하며 해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던 넬슨은 인도양에서 '말라리아'에 걸리고 만다. 병에 걸려 장기간 시름시름 앓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우을증에 걸린 넬슨은, 낙천주의 생각으로 우울증을 극복하면서 과거 명망있었던 집안의 모습을 일으키고 영국을 부흥시켜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런 마음을 먹은 넬슨을 외삼촌은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었다. 솔직히 어떻게 보면 '혈연'이라는 '빽'으로 밀어줬는지도 모르겠는데, 외삼촌이 해군 회계감시관이 되면서 더 큰 도움을 받아, 1777년에는 대위 시험에 합격해 부관이 되며, 동인도, 서인도에서 활동하다가 1779년에 프랑스로부터 나포한 대포 28문의 작은 프리깃함 '힌친브로크'호의 지휘권을 받기에 이른다. 그의 나이 20살때였다.

 

   그리고 1780년에 중앙아메리카 니카라과에서 스페인 요새를 공격하는데 참여하게 되는데, 공격자체는 성공했지만 영국군 상당수가 말라리아에 걸려 후에 결국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고 만다. 이 때 넬슨은 또 다시 말라리아에 걸리게 되는데, 그래도 다행히 1년후에 완치되었고, 곧바로 영국에서 독립하려는 미국 독립군들과 싸우는데 투입된다.

 

   1784년에는 '보레아스' 함의 지휘를 맡아, 미국 선박과 영국 식민지간의 거래를 금지하는 '항해조례'법의 집행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임무 수행 중 넬슨은 카리브해의 네비스 항구에서 미국 선박을 불법 나포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하게 되는데, 결국 넬슨은 8개월간 네비스에서 머물며 재판을 치룬 끝에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넬슨은 네비스에서 머물던 기간동안 미망인인 '패니 네스빗'(오른쪽 그림)을 만나 그녀와 네비스에서 결혼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1787년부터 5년여간 함장으로 활약하지 못했던 넬슨은, 1793년에 프랑스 혁명으로 루이 16세가 처형된 후 프랑스 혁명 정부가 전쟁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대포 64문의 '아가멤논'함의 함장을 맡으며 다시 지휘관으로 복귀하게 된다.

 

   넬슨은 이 '아가멤논'함을 자신이 지휘했던 배 중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좋은 기동성과 부족하지 않은 화력을 갖춘 '아가멤논'함으로 넬슨은 서서히 그의 능력을 발휘했는데, 하지만 말라리아에 이어 다시 한번 시련을 겪게 된다. 프랑스군과의 육지 전투에 참가했다가 프랑스군의 포탄에 오른쪽 눈을 다쳐 실명하고 만 것이었다. 지휘관에게는 상당히 치명적인 부상이 아닐 수 없었는데, 그럼에도 넬슨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고, 1796년 영국 지중해 함대의 사령관이 된 '존 저비스'는 넬슨을 인정하여 그를 준장으로 임명하고 프랑스 해상 봉쇄 임무를 맡기기에 이른다. 동시에 낡은 아가멤논함은 수리를 위해 영국으로 보내졌고, 넬슨은 더 강력한 74문의 'HMS캡틴'함의 지휘를 맡게 된다. (왼쪽 그림 속 배 중 왼쪽)

 

  이후 넬슨은 더더욱 승승장구한다. 1797년의 상비센테 곶 전투가 그 시작이었다. 독자적인 임무를 수행하던 넬슨은 대서양 '상비센테 곶'에서 '존 저비스'의 함대와 합류하기로 했는데, 그러다가 스페인 함대를 만나게 된다. 당시 '존 저비스'는 스페인 함대 사이를 돌파하려는 작전을 넬슨에게 하달했는데, 영국 함대가 스페인 함대 사이를 돌파할만한 속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넬슨은, 독자적으로 '존 저비스'의 함대보다 먼저 스페인 함대 앞 쪽을 공격했고, 지휘관으로는 드물게 적함 갑판에 올라가 두척을 나포하기까지 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 일로 '넬슨'은 기사 작위를 받음과 동시에 승진했고, '존 저비스'도 백작 작위를 받게 된다.

 

   넬슨은 소장으로 승진하여 독립적인 함대를 이끌게 되었는데, 하지만 말라리아와 오른쪽눈 실명에 이은 시련을 또 겪게 된다. 프랑스군과의 소규모 전투에서, 프랑스 함대가 쏜 포도탄(일종의 산탄포)에 오른쪽 팔을 맞아 결국 오른쪽 팔을 통채로 잘라내야 했던 것이다. 넬슨은 자신의 기록에 '나는 이제 끝났다' 라고 쓸 정도로 절망했다.

 

   하지만 1년만에 복귀한 넬슨은, 1798년 '나일 해전'(오른쪽 그림)에서 목적불명의 원정군을 태우고 이동중인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는 승리를 거둔다. 훗날 알려진바로는, 당시 프랑스 함대의 원정군은 나폴레옹의 지시로 이집트에 상륙해 중동을 거쳐 인도로 가려던 부대였다고 한다. 결국 이 승리로 나폴레옹의 인도진출이 좌절되었는데, 트라팔가 해전보다 더욱 전략적으로 중요한 승리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뭐 어쨌든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둔 넬슨은 갈수록 유명해지게 되는데, 나폴리에서 잠시 머물게 된 넬슨은 그곳에서 자신이 '아가멤논'함을 몰 때 큰 도움을 받았던 나폴리 주재 영국 외교관 '윌리엄 해밀턴' 경의 부인인 '에마 해밀턴'(왼쪽 그림)을 만난다. 에마 해밀턴은 넬슨을 환대하며 40번째 생일을 축하해 주었고, 그 과정에서 넬슨은 본 부인이 있음에도 에마 해밀턴과의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러한 넬슨의 '위험한 사랑'은 영국 해군본부로 전해졌고, 해군본부는 사생활 문제와 더불어 나폴리 방어 문제 등으로 불화를 겪은 넬슨을 본국으로 불러들인다. 그렇게 1800년에 넬슨은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국가적 영웅으로 엄청난 환대를 받음과 동시에 '염문설'로 비난도 함께 받았고, 결국 본 부인을 버리고 에마와 함께 살게 된다. 이후 덴마크 해군과 싸우게 된 넬슨은, 상관인 '파커'경이 덴마크군의 화력이 막강하니 피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자신의 기함을 지휘하던 함장 '폴리'에게 망원경을 보이지 않는 오른쪽 눈에 대고 "아무 신호도 보지 못했어!" 라고 말하며 그대로 싸워 승리한다. 이 승리로 넬슨은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파커'경에 이어 발트해 영국함대를 담당하는 총사령관이 되기에 이른다. 이후 1801년 영국과 프랑스는 휴전을 하게 되고, 넬슨은 대저택을 사들인 뒤 에마와 함께 오랜만에 육지에서 지낸다. 한편 1803년에는 에마 해밀턴의 본 남편, 윌리엄 해킬턴 경이 넬슨과 에마가 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그 직후, 프랑스와 영국의 동맹은 파기되었다. 나폴레옹이 다시 전쟁을 시작한 것이었다. 프랑스군의 상륙을 우려한 영국은 넬슨을 전쟁발발직전 104문의 대포를 가진 'HMS 빅토리'(오른쪽 그림)호의 함장으로 취임시킨 상태였다. 결국 해군 서열 5위의 '백색 부제독' 넬슨은, 국민들은 물론 휘하 장교들과 수병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며 1803년 바로 바다로 나아가, 프랑스 함대들, 그리고 프랑스와 스페인 함대들이 한 곳에 뭉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봉쇄작전을 수행했다. 적 함대가 다른 함대를 만나고자 이동하면 길을 막고 전투를 벌여 되돌려 보내는 작전이 반복됐다.

 

   하지만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일부 함대의 봉쇄해 실패하기도 한 상황에서 정면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 넬슨은, 1805년 9월 29일 자신의 47번째 생일에, 기함 'HMS빅토리'호에서 휘하 15명의 함장들과 식사를 함께 한 뒤, 뭉쳐 공격하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함대를 둘로 나눠 프랑스-스페인 함대를 공격하는 전술을 설명했다.

 

   이후 부인 '에마 해밀턴'과 둘 사이의 딸 '호레시아'를 국가에 맡긴다는 문서에 서명한 넬슨은, 프랑스와 스페인 해군이 10월 21일에 비로소 움직이자 33척의 배(전열함은 27척)로 전투에 돌입, 5시간만에 41척의 프랑스-스페인 함대(전열함은 33척) 중 21척을 나포하고 1척을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이것이 '트라팔가 해전'으로, 전사자는 영국군 458명, 프랑스-스페인군 3243명이었다.

 

 참고글 : 10월 21일과 22일의 역사 - 트라팔가 해전, http://blog.daum.net/smileru/8888121

 

   하지만 넬슨이 타고 있던 HMS 빅토리호가 가장 선두에서 다른 함선들과 뒤엉켜 싸우는 과정에서, 넬슨은 윗쪽에서 총을 맞아, 탄환이 어깨로 들어와 폐를 뚫고 척추에 박히는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도 4시간 동안 넬슨은 지휘를 하였으며, 전투 후 20척을 나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며 "신이여 감사합니다. 나는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라는 말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가 죽기전 남긴 '유명한 말'이고, 실제 마지막 말은 "내말 잘 받아적었는가? 내가 뭐라고 했는가?"였다고 한다.) 자신감이 넘쳤던, 하지만 충분히 그럴만 했던 천재 제독의 최후였다.

 

 

넬슨의 장례식을 그린 그림. 트라팔가 해전에서 나포한 선박에서 얻은 스페인과 프랑스 국기가 걸려있다. 

 

 

 

   그의 시신은 조금 끔찍한 느낌도 있지만 브랜디 술통에 넣어져 보존되어 영국으로 옮겨졌다. 이후 '국장'으로 장사 지내졌고, 영국에서는 트라팔가 해전의 엄청난 승리와 그 중요성 보다는 넬슨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더욱 높았다고 한다. 손상된 HMS 빅토리호는 견인되어 현재까지도 보존되고 있으며, 결국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선박으로 남아있다. 또 그를 죽게한 탄환, 그가 당시에 입었던 옷도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참 대단한 듯.

 

 

포츠머스 항구에 정박해있는 HMS 빅토리호의 모습. 2007년.

 

 

 

   한편, 넬슨이 국가에게 맡겼던 '에마 해밀턴'과 '호레시아'는, 과거의 논란 때문인지 사람들로 부터 외면 받아, 넬슨이 세상을 떠난지 9년만에 가난속에서 에마 해밀턴은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래도 호레시아는 9자녀를 두고 잘 살았다고. 

 

   넬슨의 대한 평가는 필요 없을 것 같다. '이순신'에 대해 무슨 평가를 더 하겠나? 뭐 그래도 굳이 돌이켜 보자면, 그의 천재성과 부하들의 잠재성을 이끌어내는 세심한 관리 능력과 같은 리더쉽이 크게 주목 받던데, 그 보다는 애초에 배에 잘 적응도 못했던 그가, 우울증과 한쪽눈과 팔을 잃은 장애를 이겨내고 놀라운 업적을 이뤄냈다는 것에 대한 그의 '셀프 리더쉽'을 더 높게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1901년 - 이탈리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엔리코 페르미 탄생.

1954년 -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가 설립되다.

 

 

   넬슨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다른걸 좀 짧게 해야 겠다. 1901년 오늘인 9월 29일,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로마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공무원, 어머니는 교사였는데, 18살 때부터 물리학을 배우기 시작해 순식간에 그를 가르치던 교수들을 뛰어넘는 비범함을 보였다. 그리하여 26살이었던 1926년에 '페르미-디랙 통계'에 대한 논문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에 이른다. '페르미-디랙 통계'란 요즘엔 재료공학과나 전자공학과에서 반도체를 공부하다보면 나오는데, '파울리의 배타 원리'를 따르는 '페르미 입자'(='페르미온', 예를 들면 '전자')가 보이는 분포의 통계를 말하는 것으로, 반도체에서의 '페르미 에너지 준위'를 계산하는데 쓰이며, 별이 붕괴하여 '백색 왜성'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도 쓰인다.

 

   아무튼 천재였다는 말이다. 그렇게 그 논문이 발행된 1926년에 이론 물리학 교수가 되고, 1933년에는 '베타 붕괴'이론을 완성했으며('중성미자'제안), 1934년에는 세계최초로 우라늄의 핵분열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잘나가던 페르미는, 아내가 유대인이었던 탓에 이탈리아의 유명한 독재자 '무솔리니'의 탄압을 받게 되자 1938년 열중성자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고나서 바로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1938년에는 콜롬비아 대학교의 물리학 교수가 되기에 이른다.

 

   미국으로 간 페르미는, 타이밍이 아주 딱 맞게도 곧바로 '맨해튼 계획'에 참가하게 된다. 핵무기를 개발하는 계획이었다. 핵무기의 설계 및 제조, 핵물질의 분리 등 다양한 연구가 진행된 맨해튼 계획에서 페르미는 플루토늄 핵무기 제조를 위한 플루토늄 생산 역할을 맡았다. 핵무기를 위한 플루토늄 생산을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우라늄을 이용한 원자력 발전연구를 해야 했다. 우라늄의 핵분열을 발견한 페르미에게 제격인 분야였다. 그리하여 페르미는 1942년에 세계 최초의 원자로를 가동시켜 전기를 발전 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페르미 자신이 직접 핵연료를 넣어가며(물론 안전하게) 원자로를 개량, 원자력 발전의 부산물인 플루토늄을 얻는데 성공했다.

 

 

페르미가 처음으로 우라늄 연쇄반응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던 원자로, 'Chicago Pile-1'의 그림.

'Pile'은 '더미'라는 뜻으로, 우라늄과 흑연이 더미로 쌓아올려져 만들어진 탓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방사선을 막기 위한 차폐장치와 별도의 냉각장치도 없었고, 핵분열 반응의 제어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카드뮴 등으로 만들어진 '제어봉'을 수동으로 넣고 빼는 방식으로 이뤄졌는데,  

페르미는 '콤프턴 산란'으로 유명한 콤프턴과 함께한 계산으로 '핵폭발'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고,

기어이 이 엉성하게 쌓아올려진 '더미' 속에서 수동으로 핵분열 연쇄반응에 성공했다.

이는 미국원자력에너지위원회로부터 높은 인구밀도에 시카고에서 벌어진 '도박'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렇게 맨해튼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페르미는, 이후에 많은 참가 과학자들이 그랬던 것 처럼 핵무기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고, 수소폭탄 계획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말년에 우주에서 날아온 입자들에 대해 연구하던 페르미는, 방사능으로 인해 유발된 암으로 인하여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1954년 11월 28일의 일이었다. (사실 암이 방사능에 의해 유발되었는지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페르미가 당시 사고로 다량의 방사능을 쬔 뒤 암에 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죽기전 페르미는 병상에 누워 링거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걸 보며 유속을 '어림짐작'하여 계산했는데, 이러한 어림 계산을 많이 했던 페르미의 행동은 오늘날 이것은 '페르미 추정'이라고 불리며 '서울시의 미용실 수는?' 등과 같은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미국에서 핵무기 제조를 향한 거대한 핵물리학 연구가 핵무기의 투하로 끝난 1940년대말에, 유럽에서도 움직임이 있었다. '드 브로이 물질파'로 유명한 192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프랑스의 '드 브로이'는, 프랑스 원자력 고등 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있던 1949년에 스위스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서,

 

"여러 참가국 개개의 상황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학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실험실 또는 연구소가 생기면, 국가적인 시설 이상의 자원에 힘입어, 규모와 비용 면에서 개별 국가의 범위를 넘어서는 과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라며 초국가적인 핵물리 연구시설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리하여 1951년 12월 파리에서 연구소 설립을 준비하기 위한 평의회 설립 결의안이 채택되고, 1952년 2월에 '핵연구를 위한 유럽 평의회'가 설립되니, 그것이 'Conseil Européen pour la Recherche Nucléaire', CERN이었다.

 

   1952년 10월에는 이 연구소의 부지가 스위스 제네바로 정해졌고, 1953년 6월에 투표로 최종 확정되었으며, 1953년 7월에는 CERN 창립에 12개국이 최종 동의하면서 1954년 5월 17일 연구소의 공사가 시작된다.

 

   그리고 1954년 9월 29일, 엔리코 페르미의 53번째 생일에 CERN은 '유럽 핵 연구 조직'(Organisation Européenne pour la Recherche Nucléaire)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출범하며 화려한 시작을 알린다. 단 당시 이 연구소의 설립을 준비했던 평의회의 이름인 CERN을 그대로 연구소의 이름으로 쓰기로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런 CERN은 설립 후 근 60년이 지난 2012년, 소립자 표준모형에서 마지막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던 일명 '신의 입자'라는 '힉스 입자'를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인류의 과학발전사를 통틀어 손꼽힐 경이로운 업적이었다. 무엇보다 '드 브로이'의 주장이 새삼 떠오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과학에서만 그렇겠는가? 모든 분야에서 전 인류가 협력한다면, 국가가 국가와 싸우기 위해 파괴적인 핵무기를 만들던 기술이 위대한 업적을 이뤄낸 것 처럼, 해내지 못할일이 없을 것이다. 단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뿐 아니겠나? 

 

 

 

 

 

 

 

 

1980년 - 제록스인텔, 디지털 이퀴브먼트 등과 함께 개발한 이더넷 표준이 공개되다.

 

   은연중에 페르미와 CERN이야기도 길어진 것 같다. 이건 진짜 짧다. 내가 궁금해서 추가한 것이다. 컴퓨터에서 네트워크설정을 하며 참 많이 봤고, 그래서 그 '이더넷', 영어로는 'Ethernet'이라고 쓰는 이게 뭔지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오늘의 역사에 딱 있더라. 뭘까?

 

   '프린터'를 만드는 회사로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미국 '제록스'라는 회사는 1970년에 '팰로앨토 연구소'(오른쪽 사진, 2007)를 세운다. 이 연구소에서는 훗날 '레이저프린터', Windows와 같은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의 개념, 비트맵 이미지 등이 개발되었는데, 그러한 개발품 중 하나가 바로 1973년에 개발된 '이더넷'이다. (1980년에 표준이 됨)

 

   '이더넷'은 회사나 PC방 등에서 컴퓨터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기술인 'LAN(근거리통신망, 핵무기 연구를 위해 개발됨)'을 위해 개발된 컴퓨터간의 통신 기술 표준이다. 컴퓨터와 컴퓨터간 어떤 절차와 '언어'로 통신을 할 것인지(프로토콜)에 대한 표준이라 하겠다. 원래 LAN이 1964년 개발 된 이후 다양한 통신 기술로 LAN이 구성되어 왔었는데, 이 '이더넷'이 개발되면서 빠르게 '이더넷'으로 통합, 훗날에는 인터넷을 가능하게 하는 TCP/IP 등이 그 위에 올려지면서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거의 모든 디지털 통신에서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일부분이 되어 있다.

 

   이 '이더넷'은 한 때 '빛의 매질'로 여겨졌던 가상의 물질, '에테르'(ether)에 'net'을 붙여서 만들어졌다고 한다(Ethernet). 여기에서 에테르 이야기를 하면 말이 길어지겠지? '이더넷'이 뭔지는 대충 알았으니 이번주는 여기에서 끝내야 겠다. 끝으로 한마디만 더 하자면, 우리가 3G, 4G, Wi-Fi, 블루투스 등의 통신기술들을 그냥 무의식중에 편하게 쓰고 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자. 어떻게 이런 기계간의 통신이 가능한건가? 공기중에 흩뿌려진 전파에서 어떻게 자신의 신호를 찾아내는 것인가? 나름 이런데 관심이 많은 나지만, 정말 상상도 안될 정도다. 뭔가 쉽게 설명해 줄 수도 없는 굉장한 기술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어찌되었건 6G도 빨리 개발해 주시길. 

 

참고글 : 12월 9일과 10일의 역사 - 마이켈슨 탄생(에테르 관련), http://blog.daum.net/smileru/8888157

 

 

 

 

 

 

 

9월 29일과 30일의 역사

 

- fin -

 

 

 

 

 

 

넬슨 마지막 말 부분 내용 추가 (2013.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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