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가하라 전투를 그린 그림. 1854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 아베 총리까지...
참 재미있다. 역사란 그런 것이다.
- 링 크 -
10월 21일과 22일의 역사
인류를 발전시킨 노벨상, 트라팔가 해전, 야신, 임보단 탄생 등
http://blog.daum.net/smileru/8888121
- 순 서 -
186년전, 1827년 10월 20일
나바리노 해전이 일어나 터키-이집트 해군이 궤멸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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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전, 1967년 10월 21일
아일라트호 격침 사건이 발생하다.
29년전, 1984년 10월 20일
영국의 물리학자 폴 디랙 사망
413년전, 1600년 10월 21일
세키가하라 전투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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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과 21일의 역사
Wikipedia
1740년 -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의 왕위에 오르다.
1827년 - 그리스 필로스 섬의 나바리노 항 인근에서 나바리노 해전이 일어나 터키-이집트 해군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 연합군 해군에 궤멸되다.
1870년 -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회하다.
1944년 - 제2차 세계 대전: 소련, 티토가 이끄는 게릴라군 베오그라드를 해방시키다.
1950년- 한국전쟁: 대한민국 국군이 평양수복작전을 개시하였다.
1973년 - 엘리자베스 2세가 참석한 가운데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정식으로 개관하다.
1983년 - 대한민국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타이거즈가 창단 첫 우승을 달성했다.
2011년 - 대한민국의 산악인 박영석과 대원 2명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되다.
2011년 - 리비아의 독재자이자 정치인, 군인 무아마르 카다피 사망.
1600년 - 세키가하라 전투 발발(음력 9월 15일).
1805년 - 영국의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군을 물리치다.
1854년 - 영국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38명의 간호사가 크림 전쟁 전장으로 가다.
1878년 - 비스마르크, 사회주의자 탄압법 의회 통과.
1891년 - 독일사회민주당(SPD), 에어푸르트 강령 채택.
1943년 - 수바스 찬드라 보스를 중심으로 한 자유 인도 임시 정부가 수립되다.
1949년 - "국제 연합 총회 결의 293 (IV) 한국의 독립 문제"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선언하였다. 결의 원문 참조.
1967년 - 아일라트호 격침 사건 발생.
1994년 - 성수대교 붕괴 참사: 성수대교 상판이 붕괴하여 32명이 목숨을 잃다.
1740년 -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의 왕위에 오르다.
참고글 : 문명5G&K-(#1-티져) 마리아 테레지아, http://blog.daum.net/smileru/8888076
{'12. 5월 둘째주} 마리아 테레지아 탄생, http://blog.daum.net/smileru/8888046
1854년 - 영국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38명의 간호사가 크림 전쟁 전장으로 가다.
참고글 : 5월 12일과 13일의 역사 - 나이팅게일이 위대한 이유, http://blog.daum.net/smileru/8888266
1994년 - 성수대교 붕괴 참사: 성수대교 상판이 붕괴하여 32명이 목숨을 잃다.
참고글 : {'11. 10월 셋째주} 성수대교 개통, http://blog.daum.net/smileru/8887956
1827년 - 나바리노 해전이 일어나 터키-이집트 해군이 궤멸되다.
1967년 - 아일라트호 격침 사건이 발생하다.
우선 늘 그렇듯 배경을 좀 설명해 볼까? 늘 이게 길어져서 문제인데...
그리스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것 같다. 그리스는 서구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구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닌 국가였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BC431~404) 이후 몰락, 이후 마케도니아에 점령당하고 후에는 로마제국에, 그리고 그 다음에는 비잔티움 제국에, 또 그 다음에는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했다. 아시아와 유럽이 충돌하는 아나톨리아 지방과 발칸반도의 숙명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했던 걸까? (참고글 : 문명4BTS-(#6-5) 아나톨리아와 터키)
그랬던 그리스는 오스만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고 '프랑스 혁명'(1789)으로 민족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자, 그 오랜 시간동안 그리스의 문화를 지켜왔고 간간히 독립운동을 해왔던 그리스인들은 본격적으로 독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받아 '발칸 공화국'을 세우고자 했던 '페라이오스'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살해당한 것은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참고글 : 문명5BNW-(#1-10) 1차세계대전 : (1) 발발 : 민족주의)
그리스인들은 1821년에 혁명을 일으켜 민병대를 조직하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싸우기 시작했다. 특히 해상 왕국 고대 그리스인들의 후손답게, 군사적 목적으로 장비를 갖추고 조직화된 오스만 해군에 대항하여 상선과 어선으로 맞서 싸워 연이어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게릴라전을 이어가며 힘겹게 저항해가던 1825년, 이집트가 대규모로 개입하면서 그리스 혁명군은 위기에 빠진다. 그러자 미적거리던 유럽국가들은 발칸반도에서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를 몰아내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앞다투어 개입하고자 했다.
정치적 갈등 끝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함께 발칸반도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기로 하고, 그리스 독립을 전제로 하는 중재안을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 양측에 제안한다. 당연히 그리스 혁명군은 환영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반대하며 전쟁을 지속하고자 했다. 그에 영국-프랑스-러시아 해군은 '나바리노 만'에서 이집트-오스만 제국 함대가 진격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는데, 영국군이 작은 보트를 타고 그들에게 물러나라는 경고를 전하려 하자 이집트군이 보트에 탄 장교를 총으로 쏘았고, 결국 전투가 시작되고 말았다. 1827년 10월 20일에 나바니로 해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집트-오스만 제국 함대는 영국-프랑스-러시아 해군보다 세배나 많은 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성능이 좋은 유럽의 대포들은 이집트-오스만 제국 함대를 무참하게 박살내버렸다. 결과적으로 강력한 대포의 성능차이로 인하여 이집트-오스만 제국 함대의 배는 89척 중 14대를 제외하고 완전히 격침되었지만, 영국-프랑스-러시아 해군의 배는 단 한대도 침몰하지 않았다. 전사자 수도 181 대 8000여명으로 일방적이었다.
이 해전으로 오스만 제국은 보급로를 잃으며 붕괴직전의 상황에 빠지고 말았으며, 그리스 혁명군은 드디어 조직화 되어 정규군을 구성, 오스만 제국을 '페트라 전투'에서 무찔렀고, 1년 뒤 오스만군은 그리스 지역에서 완전히 철수했으며, 일련의 정치적 논란 끝에 1832년에 그리스는 완전히 독립하는데 성공했다.
'나바니로 해전'은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를 가져온 결정적인 전투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이 해전이 해전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나무로 만든 배가 사용된 마지막 해전이었다는 점이다. 인류는 해전을 시작한 이래 항상 나무로 만든 배를 이용해 전쟁을 해 왔었다. 그 오랜 역사가 끝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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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약 100여년의 시간이 흘러... 1918년 오스만 제국은 1차세계대전 '동맹군'에 참가했다가 연합군에 패배하면서 최종적으로 붕괴되고 만다. 어떻게 보면 쇠락의 징조가 보인지 오래되었지만 나름 버틴 셈이었다.
여하튼 그 이후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들은 영국과 프랑스 등의 유럽국가의 식민지가 되고 마는데, 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 영국에 의해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분할되고 만다. 서구 열강들이 2차세계대전 이후 나치에 핍박받은 유대인들의 안식처를 만들어 준 셈이었다.
이후 중동은 난장판이 되고 만다. 사실 이 이스라엘 문제에서 파생되고 또 파생되어 지금까지의 모든 중동 갈등들이 생겨났다고 봐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여튼 1차 중동전쟁의 승리로 건국된 이스라엘은 이후 2, 3, 4차 중동전쟁과도 계속 연관되었고, 불안한 중동의 역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참고글 : 문명4BTS-(#6-16) 중동분쟁과 UN)
그 과정속에서 또 해군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때는 '나바니로 해전'이 140년 주년을 맞이하던 1967년... 이집트와의 갈등 끝에 터진 3차 중동전쟁(1967.05~06)에서 이스라엘은 엄청난 맹공으로 6일만에 전쟁을 승리로 끝낸다. 하지만 긴장감은 계속되고 있었다. UN의 중재로 3차 중동전쟁은 일단락 되었지만,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은 곳곳에서 옅보였다.
그러던 1967년 10월 21일, 사건이 터지고 만다. 그날 이스라엘 해군 구축함 '에일라트 호'(왼쪽 사진)는 수에즈 운하의 북쪽 입구인 이집트 포트사이드 항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에일라트 호는 2차세계대전 도중인 1944년 영국에서 만들어져 1955년 이스라엘에 판매된 만재배수량 2500톤급 구축함이었다.
그런데 이집트 해군의 작은 80톤급 코마급 고속정이 에일라트 호를 향해 빠르게 돌진해, 순식간에 'P-15 테르밋 미사일' 4발을 발사, 그를 모두 명중시켰고 에일라트 호는 순식간에 침몰하고 만다. 당연히 인명피해도 컸다. 이스라엘 해군 47명이 전사하고 91명이 부상했다.
80톤급의 함정이 2500톤급의 함정을 침몰시킨 사건... 이건 해전사에서 엄청난 사건이었다. 함대함 미사일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고 말이다. 바로 그 함대함 미사일, 'P-15 테르밋 미사일'은 1956년에 소련이 개발한 것이었는데, NATO소속 국가들은 소련 무기들을 NATO코드로 부르고 그 이름이 'SS-N-2 스틱스'여서 이 사건은 '스틱스 쇼크'로 불린다. (오른쪽 사진은 스틱스 미사일을 발사하는 코마급 고속정)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서방 국가들은 함대함 미사일 개발과 그를 방어할 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중소형 미사일 고속함의 위력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미국의 유명한 함대함 미사일 '하푼'은 1977년에 완성된다) 또 이스라엘은 이집트 영해에서 침몰한 에일라트 호에 비밀리에 잠수부를 보내 정보를 수집하게 되는데, 그 결과 1973년의 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에서 시리아 군의 스틱스 미사일을 '지그재그' 회피 기동과 레이더 방해 장피로 훌륭하게 피하고, 스틱스 미사일에 대항해 이스라엘이 개발한 '가브리엘 미사일'로 시리아 함정 3척을 격침시키는 성과를 거두기에 이른다. (최초의 미사일 해전, 라타키아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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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전쟁사가 재미있는 것 같다. 누군가 죽고 죽인 역사이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바람으로 가는 나무배를 타고 무쇠 대포를 쏘던 인류가, 140년만에 모터보트를 타고 레이더 유도 미사일을 쏘아대었으니, 참 놀랍기도 하다. 정말 140년 뒤에는 레일건, 레이저포 같은건 아무것도 아닐 것 같지 않나? 하긴 뭐 이미 부분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140년은 커녕 몇십년 뒤면 되지 않을까 싶다. 140년 뒤면 굳이 거대한 뭔가를 물 위에 띄워야 할 필요성도 없어지지 않을까?
지난주에도 물리학자 '페르미'를 다뤘었는데, 그의 업적이라고 소개했던 '페리미-디랙 통계'에 기여한 폴 디랙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해보고자 한다. 지난번 처럼 일대기를 너무 장황하게 이야기하기엔 좀 그렇고, 간단하게 몇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 '폴 디랙'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것은 이 일화가 아닐까 싶다. 디랙은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유명한 슈뢰딩거와 함께 193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결정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1935년에 슈뢰딩거가 제안한 사고 실험이다) 그런데 디랙은 소심...하다기 보다는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는데,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청중 앞에 나서기가 싫어 노벨상을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노벨상을 거절하면 폭발적인 관심을 끌 것이라는 주변의 충고를 듣고 노벨상을 받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 비슷한 일화로 '리처드 파인만'의 일화가 있다. 그는 양자역학과 관련, 폴 디랙의 연구를 발전시킨 공로로 196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결정되는데, 스웨덴까지 가는 것이 귀찮아 수상을 거부하려 했다가 그의 부인이 그럴 경우 기자들이 몰려들어 더 귀찮아 질 것이라고 조언해 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 외에 몇가지...
- 폴 디랙은 논리적이고 과묵하여, 그의 동료들은 1시간에 1마디를 말하는 것을 '1 디랙'이라는 단위로 정의하였다고 한다. (이거 정말 웃긴 듯!)
- 폴 디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슈뢰딩거가 시대를 연 양자역학을 연결시켰고 그게 가장 큰 업적이다.
- 그를 통해 폴 디랙은 영화 '천사와 악마'로 유명해진 반입자를 예측한다. (1928년 예측, 1932년 '칼 앤더슨'이 실험으로 발견. 반입자가 모여 반물질을 만듬)
1600년 - 세키가하라 전투 발발(음력 9월 15일)
1590년대를 전후로 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른쪽 그림)는 일본을 사실상 통일하게 되는데, 천황으로 부터 인정 받고 다이묘들을 규합하기 위해 통일 전부터 준비하였던 조선 침략을 곧바로 감행, 1592년에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그의 아래에 있던 여러 다이묘(영주)들은 임진왜란에 반대했지만 히데요시는 결국 그들을 모두 조선으로 끌고가는데, 단 한명의 다이묘는 기어이 끌고가지 못했으니 그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바로 전 일본의 패권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했던 인물인데, 1582년에 쿠데타라 할 수 있는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자결 한 뒤 히데요시가 부상하자,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 '오다 노부카쓰'와 함께 '반 히데요시' 세력을 이끌며 히데요시와 서로 피를 낭자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사실상 힘의 우세는 히데요시에게 있었으나 이에야스는 집요하게 저항했는데, 1584년에 히데요시에게 노부카쓰가 무너지자 이에야스는 주변인물들의 조언에 따라 저항을 포기, 히데요시의 여동생과 정략결혼을 하고 1586년에 형식적으로나마 히데요시의 부하가 된다.
이후 그는 수도 '교토'에서 떨어진 작은 어촌 '에도'로 좌천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람을 모으고 덕망을 얻어 세를 키운 뒤, 황무지 개간과 풍토병, 치안문제 등을 이유로 임진왜란에 참전하기를 거부하며 힘을 비축했다. 그리고 1598년 조선과의 전쟁 도중 히데요시가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가려져있던 이에야스에게도 기회가 오게 된다. (왼쪽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상화)
이에야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자신의 세력들을 모은다. 그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그의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따르는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한 세력이 형성되어 이에야스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들은 군사적으로 충돌했고, 이에야스가 미쓰나리 쪽의 다이묘들을 각개격파하려하자 그 둘은 결국 한판 제대로 붙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1600년 10월 21일(음력 9월 15일), 8만여명에 달하는 이에야스의 '동군'이 먼저 세키가하라 지역에 진을 치자, 마찬가지로 8만여명의 미쓰나리의 '서군'이 그를 마중나와 진을 치고 대치하면서 세키가하라 전투의 모든 준비가 끝나게 된다.
하지만 이에야스의 '동군'의 군사배치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동군은 골짜기에 위치한 반면, 미쓰나리의 '서군'은 산위에 위치하여 동군을 포위하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인 '클레멘스 메켈' 소령이 군사고문으로 일본을 방문했었는데, 양쪽 군대의 포진을 보고 서군의 승리를 장담했었다고...
그리하여 서군은 승리를 장담하고 있었지만, 사실 동군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서군 일부 다이묘들의 배반이 그것이었다. 서군을 이끄는 이시다 미쓰나리는 임진왜란 당시 무능한 모습을 보이며 서군 다이묘들과 함께한 행주대첩에서 권율 장군에게 대패한 전력이 있었기에 신임이 두텁지 못했다. 이를 이에야스가 노려 일부 서군 다이묘들을 포섭해 놓았던 것이다.
그에 따라 믿는 구석이 있었던 동군이 먼저 서군을 향해 조총을 발사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서군은 고지에서 동군을 공격하며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갔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럼에도 병력을 빼지않고 전투를 지속했다.
그렇게 2시간이 흐르고, 서군의 '미쓰나리'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남은 서군 병력들에게 동군을 포위공격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만약 그 신호에 따라 남은 서군들이 산을 내려오며 동군을 몰아친다면 동군은 큰 위험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신호에 반응하는 서군은 없었다. 끝까지 이에야스와 미쓰나리 중 누굴 따를지 고민하던 '고바야카와 히데야키'등의 다이묘는 결국 이에야스를 따르기로 결정하여 오히려 서군을 공격했고, '야스하루', '스케타다' 등의 몇몇 다이묘들이 그 모습을 보고 그에 동참하면서 동군을 포위 하려던 서군의 '날개'는 무너지고 말으며, 이에야스의 동군은 대승을 거뒀다.
붉은색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파란색이 이시다 미쓰나리의 수군,
주황색이 배반한 서군.
이후 서군을 이끈 이시다 미쓰나리는 6일 뒤 붙잡혀 참수 당했다. 그리고 이에야스는 애초에 포섭했던 서군의 다이묘들을 제외하고 뒤늦게 배반에 동참한 다이묘들은 '철새'같은 다이묘로 생각하여 오히려 처벌을 받아 영지등을 빼앗겼다. 서군이 따르던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세력이 크게 몰락했고, 결국 15년 뒤인 1615년 이에야스에게 공격받은 끝에 오사카 성에서 23살의 나이로 자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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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과 함께했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다시 한번 일본의 패권자가 된다. 그리하여 1603년 일본 천황으로 부터 '쇼군'의 자리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교토'에 본거지를 두지 않고 히데요시가 그를 좌천시켰던 어촌마을 '에도'에 에도 성(오른쪽 사진)을 확장하여 '막부'*를 두게 되는데, 이 에도가 바로 오늘날 일본의 수도 '도쿄'다. (*'막부'는 본진, 본거지라는 뜻. 훗날에는 '정부', '정권'이라는 뜻으로 쓰임)
에도 막부는 서구 열강에 의한 강제 개항과 막부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막부'라는 시스템이 무너지고 천황이 다시 부활한 1868년 '메이지 유신'때까지 250여년간 유지되었는데, 에도 막부가 끝내 무너질 때 군대를 일으켜 도쿠가와 막부를 최종적으로 무너뜨린 '메이지 정부'가 바로 250여년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게 패배했던 서군의 시마즈 가문(사쓰마 번*)과 모리 가문(조슈 번)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때의 원한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번 = 제후가 다스리는 영지로 일종의 행정구역 단위, 우리로 치면 '도' 정도. '막부'가 그랬듯 후에 제후의 지배기구를 가르키는 뜻으로도 쓰인다.)
좀 더 가볼까? 그리고 그 때 모리 가문 아래에서 메이지 유신과 이후의 과정을 도운 공을 인정 받아 '시마네 현령'(시마네 도지사) 자리를 하나 받은 집안과, 또 역시 모리 가문의 지역인 '야마구치 현'(조슈 번)에서 메이지 유신 이후 초대 '현 의원'이 되어 국회의원까지 된 집안, 그 두 집안의 딸과 아들이 결혼해 이후 그들의 후손이 계속 고위 공직에 오르니, 가장 최근의 유명인물이 바로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다. 모리 가문과 조슈 번이 주목 받지 못했다면, 또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결과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았을 역사였을지도... 참고로 '이토 히로부미'도 조슈 번 출신이다. 여튼 메이지 유신 이후 야마구치 현으로 이름이 바뀐 조슈 번 지역에서 많은 인물들이 정계에 진출해 세력을 구성하였고, 그들을 '조슈바츠'라고 한단다. (오른쪽은 모리 가문의 문장)
늘 말하지만 역사에서 어떤 가정을 하기는 어려워도 가정을 하는건 늘 재미있다. 위에 나열한 여러 사건 중 어느 한 곳에서만 틀어졌어도 아베 총리가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면 참 기분이 묘한게 사실이다. 아베 총리가 등장하지 말았어야 된다는 말을 하는게 아니다. 누가 총리가 되었어도 일본은 다수가 생각하는 역사적 흐름의 방향, 즉 대전략에 따라 지금과 큰 차이 없는 길을 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단 엄청나게 작은 확률들이 끊임없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진 '역사'의 경이로움을 다시 한번 놀랄 따름이다.
10월 20일과 21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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