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9월 15일과 16일의 역사 - 오존층과 지구온난화, 사카린밀수사건, 인천상륙작전

스마일루 2013. 9. 1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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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존 구멍의 2006년에서 2010년까지의 변화. 빠른속도로 오존층이 회복되고 있는 모습이다.

(사실 오존 구멍이 조금밖에 회복되지 않았음을 보이는 결과들이 아직까진 더 많다.)

 

우리는 이미 200개국 이상의 초국가적인 협력으로 전지구적 환경문제인 '오존층' 문제를 해결한 바 있다.

문제가 발견되고 국제적 움직임이 시작되기까지 20년,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20년이 걸렸고 말이다.

 

 하지만 다시한번 직면한 전지구적 환경문제인 '지구온난화'와 관련한

국제적 움직임은 오존층의 경우보다 상당히 느린 상황이다.

 

'이산화탄소' 문제가 가지는 경제적, 정치적 갈등을 이겨내고

우린 다시 한번 지구를 지켜낼 수 있을까? 

 

 

 

 

 

 

 

- 링 크 -

 

{'12. 9월 셋째주} 9월 16일의 역사

메이플라워호, 검은 수요일

http://blog.daum.net/smileru/8888103

 

- 순 서 -

 

63년전, 1950년 9월 15일

한국 전쟁 : 06시를 기해 인천 월미도로 인천 상륙 작전을 개시하다.

 

47년전, 1966년 9월 15일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정치문제화

 

34년전, 1987년 9월 16일

몬트리올 의정서가 채택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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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과 16일의 역사

Wikipedia

 

 

 

9월 15일: 과테말라,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코스타리카독립기념일 (1821년)

668년 -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스 2세이탈리아 시라쿠사의 욕실에서 암살당하다.

1835년 - 찰스 다윈이 탑승한 비글 호갈라파고스 제도에 도착하다.

1857년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미국 27대 대통령 탄생.

1911년 - 경원선, 용산역 ~ 의정부역 구간 개통

1916년 - 제1차 세계 대전: 솜므 전투에서 처음으로 전차가 사용되다.

1935년 -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시민권을 박탈하고 갈고리십자 문양을 국기로 하는 뉘른베르크 법이 통과되다.

1950년 - 한국 전쟁: 06시를 기해 인천 월미도인천 상륙 작전을 개시하다.

1954년 - 3월 1일의 비키니 섬 수소 폭탄 실험에 참가했던 158명 중 11명 갑상선종양에 걸려 2세 유전 등 문제가 됨.

1963년 - 대한민국에서 최초의 라면이 판매되다.

1966년 -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정치문제화

1977년 - 고상돈,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산 정복, 세계에서 여덟 번째 에베레스트 등정 국가가 됨

2000년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에서 대한민국의 선수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선수단이 처음으로 공동입장을 하다.

2007년 - 민주노동당권영길 후보가 경선 결선투표에서 52.74%를 획득함에 따라 심상정 후보를 제치고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가 되었다.

2011년 - 싸이월드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C로그를 런칭하다.

2011년 - 서울 시내의 전기 공급이 모두 끊겨 대정전 사태가 발생하였다.

 

 

9월 16일: 멕시코파푸아 뉴기니독립기념일

1782년 - 이탈리아의 카스트라토 파리넬리 사망.

1846년 - 조선 최초의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새남터에서 처형되다.

1908년 - 미국의 자동차 회사 제너럴 모터스가 설립되다.

1920년 - 미국 월 스트리트 J.P. Morgan Inc. 본사 앞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다.

1936년 -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시인 심훈 사망.

1945년 - 소련 정치국, 한반도 38선 이북 군정실시 공포.

1961년 - 미국, 네바다 주에서 두 번째 지하핵실험 실시

1963년 - 말라야 연방, 사라왁, 북보르네오, 싱가포르가 뭉쳐 말레이시아 연방을 만들다.

1974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제원자력기구(IAEA) 가입

1975년 - 미코얀 MiG-31이 첫 비행하다.

1978년 - 이란서 대지진 발생, 1만 5천여 명 사망

1983년 - 서울지하철 2호선 을지로 ~ 성수역 구간 개통

1987년 - 몬트리올 의정서가 채택되다.

1992년 - 영국, 검은 수요일 사건 발생

2011년 - 부산-김해경전철이 개통하였다.

 

 

 

   1963년 - 대한민국에서 최초의 라면이 판매되다.

 

 

   참고글 : 8월 25일과 26일의 역사 - 라면 발명 등, http://blog.daum.net/smileru/8888327 

 

 

 

 

   1857년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미국 27대 대통령 탄생.

 

 

   참고글 : 7월 28일과 29일의 역사 -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 http://blog.daum.net/smileru/8888311

 

 

 

 

 

 

 

 

 

 

 

 

 

   1950년 - 한국 전쟁: 06시를 기해 인천 월미도로 인천 상륙 작전을 개시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되고 4일 뒤인 6월 29일, 북한군이 한강 이북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을 무렵, 그 덕분에 더글러스 맥아더 UN군 총사령관이 수원을 통해 한국에 도착하여 한강방어선을 시찰한다.

 

   참고글 : 문명4BTS-(#7-8) 전장의 안개 : (1) 한국전쟁의 미스터리, http://blog.daum.net/smileru/8887872

 

   한강방어선을 시찰한 맥아더 사령관은 29일 당일, 상륙작전을 통해 북한군 후방을 공격하여 병참선을 차단한 뒤, 낙동강에서부터 반격에 나서겠다는 기본전략을 세워 워싱턴에 보고한다. 중요한건 '어디에 상륙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핵심은 '병참선'을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경부선 철도를 장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다보니 동해 쪽의 삼척은 확실히 제외되었고, 서해 쪽의 군산은 상륙하기도 좋고 대전까지 진격하면 경부선을 장악할 수도 있었지만, 맥아더 장군은 오히려 상륙이 어려운 인천에 상륙하는 것이 허점을 노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러모로 상륙이 어려워 미 해군내에서는 성공확률이 1/5000도 안된다고 주장했는데, 그럼에도 맥아더는 그를 결국 관철시켰고, 8월 23일에 미합참본부가 작전을 승인하기에 이른다. 이미 낙동강 방어선은 8월 3일에 전개된 상황이었다.

 

   이후 삼척과 군산에서 영화 '배틀쉽'에도 나왔던 미주리호등이 포격을 하며 마치 그곳에 상륙할 것처럼 기만작전을 펼치기 시작했고, 아직 참전하지 않았던 중국의 공산당 쪽과 북한군에게 군산에 상륙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9월 4일부터 인천 주변에 대한 공습을 감행하여 인천을 고립시켰고, 9월 14일에는 낙동강 방어선 쪽인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앞선 행동과 비슷한 기만전술인 '장사상륙작전'이 진행되는데, 미8군이 수행했어야 하는 작전이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군번도 없는 대한민국 학도병 772명에게 작전이 맡겨지고 만다. 그 결과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당했으며, 541명 나머지 전원은 행방불명되고 만다.

 

   그래도 '장사상륙작전'은 북한군의 관심을 돌리려는 본연의 목적을 달성했다. 바로 다음날인 대망의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어, 압도적인 화력으로 월미도를 점령한 뒤 인천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9월 17일에는 인천에 상륙한 부대가 여의도 아래인 영등포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는데, 다급히 북한군이 강원도와 남쪽에서 돌아오면서 시가전이 벌어지기 시작, 치열한 전투 끝에 9월 27일에 서울을 수복하는데 성공한다.

 

   낙동강 쪽에서도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소식을 들었을 무렵부터 반격이 시작되었는데, 앞으로의 보급이 끊길 것을 우려한 북한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하면서, 모래성처럼 절반 이상이 와해되어버리고 만다.

 

 

   확실히 인천상륙작전은 현대 전쟁사에서 길이 기억될 '작품'이었다. 맥아더 사령관의 판단도 대단했다. 결과론적이라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상륙작전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던 자체를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후에 중공군의 개입가능성을 평가절하하는 오판 하에 북진 과정에서 큰 문제를 보이는 치명적 실수를 저지르게 되지만...

 

   한편 인천상륙작전 도중 벌어진 폭격으로 민간인 피해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 확인된 바로는 최대 100여명의 민간인들이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데, 위원회가 2008년에 정부에게 손해배상을 권고했고 2011년에는 피해주민들이 손해배상소송을 내기도 했지만, 결과가 전해지지 않는걸 보니 아직 해결이 되지 않은 듯하다. 또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학도병들이 탔던 상륙선은, 47년이 지난 1997년에 난파선으로 발견되었다고... 이러한 전쟁의 비극,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되겠지? 물론 싸울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면 싸워야 겠지만. 

 

 

 

 

 

 

 

 

 

 

 

 

 

   1966년 -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정치문제화

 

 

   박정희 대통령이 재선도전을 1년 앞두고 있던 1966년 5월 24일, 당시 삼성그룹의 계열사이던 '한국비료'가, 단맛을 내는 인공첨가물인 '사카린'의 원료 55톤을 건설자재로 속여 밀수한 뒤 판매하려다 부산세관에 적발되었다. 이 사건은 6월에 한국비료가 벌금을 내는 것으로 조용히 일단락 되었다.

 

   그런데 1966년 오늘인 9월 15일, 경향신문이 '밀수'라는 범죄행위가 벌금으로 조용히 무마되었음을 폭로하면서 사건은 정치문제로 커지기 시작한다. 우선 삼성이라는 재벌그룹이 왜 그렇게 대규모로 밀수를 하였는지 부터가 화제였다. '밀수' 무슨 '일감몰아주기' 와 같은 불공정, 불평등한 그런 사안이 아닌 '엄연한 의도적 범죄'이기 때문이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은 '밀수'를 '5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엄단하겠다고 한 바 있었는데 너무도 조용히 처리가 되었다는 점이 뭔가 이상했다. 이러한 부분은 사건을 폭로한 경향신문과 그 외의 언론들, 그리고 삼성 소유의 언론인 중앙일보와 동양방송간의 난타전으로 이어지면서 의혹이 더욱 증폭되는 결과를 낳았다. (오른쪽 신문은 사카린 밀수가 '사실과 다르다'라고 쓴 중앙일보의 당시 기사)

 

   결국 9월 22일에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이 진행되게 되는데, 여야간의 격렬한 공방속에 분노한 '왕년의 주먹' 김두한 의원이 국무총리 및 부총리를 향해 준비해 온 오물을 투척하면서 사건은 절정에 달한다.

 

 

   사태가 이쯤되자 9월 23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겸 한국비료 사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삼성을 옹호하는데 사용된 언론사업을 비롯한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다. (왼쪽 사진은 사퇴 선언문을 읽고 있는 이병철 회장)

 

 

   이 사건으로 김두한 의원은 구속되어 의원직을 상실했고, 이후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다시 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남산'으로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한 뒤, 이후 박정희의 독재를 비판하다, 유신헌법이 통과되던 1972년 11월 21일 세상을 떠난다.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 주식을 헌납했지만, 사업에서 물러나겠다고 한 뒤 1년반이 지나 사업에 복귀하게 된다. 헌납했던 한국비료는 28년 뒤인 1994년에 한국비료가 민영화될 때 다시 사들여 오늘날의 삼성정밀화학이 되었다.

 

   그나저나 삼성은 왜 밀수를 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조세피난처' 논란이 있었던 현 CJ회장 '이재현'의 부친인 '이맹희' 씨는, 1993년 펴낸 책 '회상록 - 묻어둔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배경을 밝혔다.

 

 

   1965년 말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아버지(이병철 회장)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이맹희)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레스 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결국 이병철 회장이 리베이트 자금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주려했는데, 현금을 가져오기가 쉽지 않자, 그 현금으로 일본에서 사카린 원료등을 구입하여, 애초에 들어오기로 한 기계류처럼 그를 들여온 뒤(밀수), 다시 그를 되팔아 현금화 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물건을 밀수해 한국에서 되팔면 4배 이상의 차익이 났었다고 한다. 그 과정을 정부가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묵인했던 것이고... 뭐 요즘 우리나라도 난장판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지? 엇, 설마?

 

 

 

 

 

 

 

 

 

 

 

 

 

 

   1987년 - 몬트리올 의정서가 채택되다.

 

   1966년 영국 과학자들은 남극에서 오존층의 구멍을 발견한다. 이후 지속된 관측은 오존 구멍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줬고, 원인은 미스터리인 상황이었다. 그러던 1974년에 미국 과학자들은, CFC(염화플루오르화탄소, 즉 '프레온') 가스가 태양의 자외선에 의해 분해 된 뒤 '오존'을 연쇄적으로 파괴하여 수많은 오존 분자들이 파괴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과학전문지 '네이쳐'에 발표했다. 이것이 사실로 입증되면서 가장 먼저 스웨덴이 1978에 프레온 가스의 사용을 금지했고, 위성 관측 결과 거대한 '오존 구멍'에 충격을 받은 미국과 함께, 오존층에 민감한 북극권 국가들(노르웨이, 캐나다)이 프레온 가스의 사용을 1978년부터 금지하기에 이른다. (사실 당시 오존 구멍은 남극에 생겼지만, 그 다음 위험한 곳으로 북극이 지목되었다. 오른쪽은 몬트리올 의정서가 없었을 경우의 북극의 오존층 감소 시뮬레이션.)

 

   계속 충격적인 위성 사진과 연구결과들이 나오는 사이, 80년대에 들어서서는 국제적인 논의가 시작되어, 그 결과 '몬트리올 의정서'가 채택된다. 1987년 9월 16일 채택된 이 의정서는, 사용을 중단하기 쉬운 물질부터 단계별로 그 사용을 중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간의 물질사용중단시기도 차등을 두었다. 그 결과 2013년 현재 선진국으로 분류된 국가들은 HCFCs만 2030년까지 사용중단하면 되는 상황이고, 개도국으로 분류된 국가들은 2015년까지 브롬화메틸을, 2040년까지 HCFCs의 사용을 중단하면 된다. 현재 가입국은 초기 46개국에서 200개 이상의 전세계 국가로 확대된 상태다. (왼쪽은 대기중 프레온가스의 몬트리올 의정서 전후 농도변화 예측 그래프)

 

   아무튼, 그 결과는 어땠을까? 오존층 파괴물질들은 대기중을 떠돌며 지속적으로 오존층을 파괴시키기 때문에 당장 모든 물질의 배출을 중단한다고 해도 파괴는 계속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빨리 오존층이 반응을 보이면서, 2000년 중반부터 오존 구멍의 확대가 멈춘 상황이며, 회복세에 접어들었다는 결과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아직 남아있는 대기중의 오존층 파괴물질이, 근래의 북극 한파로 인해 그나마 손상이 적었던 북극의 오존층들을 파괴하여 북극의 오존량은 크게 감소된 상황이라고 한다. 물론 전반적인 회복세는 분명하기에 계속될 것 같지는 않다만...

 

   문제는 이 '북극한파'의 원인이 지구온난화라는 것이다. 지구온난화... 이것도 오존층 문제의 해결의 선례에서 보이듯, 모든 국가들이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몇몇 물질의 사용금지가 아닌, 산업 전반에서 배출 될 수 밖에 없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야 하기에 선진국과 개도국간의 갈등이 첨예하고 음모론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또 며칠전에는 북극의 얼음이 증가했다는 소식도 있더라? 지구온난화가 음모론이라는 말이 더욱 힘을 얻는 모양새고 말이다. 하지만 뜨거운 콜라에서 탄산이 빠지듯 바닷물에서도 탄산가스가 빠져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기중의 너무 많은 이산화탄소로 인해 해양의 산성화는 계속되는 상황이다. 확실히 이산화탄소 수준에 문제가 있음은 분명해보이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책을 읽어보았지만 지구온난화가 사실이라고 보고 있다. 이번 북극의 얼음량 증가는 해수순환 중단이나 앞서 말한 지구 온난화에서 기인한 북극의 한랭현상이 원인일 것이라고 본다. 또 지구 온난화로 인한 북극 수증기 증가가 많은 눈을 내리게 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고 말이다. 뭐 곧 연구 결과들이 나오겠지? (오른쪽은 북극 얼음 면적 그래프. 9~10월에 최저점을 보이는데, 매년 감소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2013년(빨간선)의 경우는 지난 몇년보다 면적이 넓을 수도 있다. 감소 '추세'라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한 건, 지구온난화가 사실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과연 전지구적인 대처를 하게 될 것이냐는 것이다. 선진국, 개도국간의 싸움으로 모든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당장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소를 강요하기 이전에, 어떤 결과를 놓고 지구온난화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인정할지를 명백히 해두고, 그를 각국이 교차 검증하여 잡음없이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소를 이어갈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1997년 교토의정서가 통과된지 무려 16년이 지난 상황... 더욱 빠른 국제적 움직임이 시급하다.

 

 

 

 

 

 

 

 

 

9월 15일과 16일의 역사 

 

- fin -

 

 

 

 

 

 

 

현재까지 수정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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