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9월 1일과 2일의 역사 - 간토(관동) 대지진, 국회의사당 준공, 안중근-노무현 탄생, 톨킨-루이14세 사망 등

스마일루 2013. 8. 29.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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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로그 2000일'을 맞이하여

실시한 설문조사가 종료되었습니다.

 

참여해주신분들에게 정말로 감사드리며,

결과는 2주내에 정리하여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하아...

어떻게 만들긴 만들었는데...

 

 

사진 출처 : http://khphoto.tistory.com/63

 

 

 

 

 

 

 

 

 

 

- 링 크 -

 

{'12. 9월 첫째주} 9월 2일과 3일의 역사

중성자탄

http://blog.daum.net/smileru/8888096

 

 

 

- 순 서 -

 

[유명인들의 탄생과 죽음]

1715년 -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 사망.

1946년 -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탄생.

2009년 - 대한민국 배우 장진영, 위암으로 사망.

1838년 - 하와이 왕국의 여왕 릴리우오칼라니 탄생.

1879년 - 한국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탄생.

1969년 - 베트남의 혁명가 호찌민 사망.

1973년 - 영국의 소설가 J. R. R. 톨킨 사망.

 

38년전, 1975년 9월 1일

대한민국, 여의도국회의사당 준공

 

90년전, 1923년 9월 1일

리히터 규모 7.9의 간토 대지진이 일본의 간토 지방을 강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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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과 2일의 역사

Wikipedia

 

 

9월 1일

1715년 -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 사망.

1914년 - 여행 비둘기가 멸종됨.

1917년 - 제1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독일군대독가스를 대량 투입함으로써 러시아 제국군대는 패배하고, 現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를 빼앗겼다.

1923년 - 리히터 규모 7.9의 간토 대지진일본간토 지방을 강타하다.

1939년 - 독일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다.

1946년 -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탄생.

1951년 - 태평양 안전 보장 조약이 체결되다.

1952년 - 대한민국, 국군 징병제 실시

1955년 - 대한민국, 전국 인구조사 사상 첫 실시

1957년 - 대한민국, 가짜 이강석(李康石. 이승만 대통령 양아들) 사건의 주인공 강성병(姜聖炳), 대구에서 검거

1975년 - 대한민국, 여의도국회의사당 준공

1979년 - 파이어니어 11호가 우주선 중에서는 처음으로 토성에서 2만2천 km 거리까지 접근하다.

1983년 - 대한항공 007편소련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격추돼 탑승자 269명이 전원 사망하다.

1986년 - 대한민국, 외국산 담배 국내 시판 시작

1991년 - 리펑(李鵬) 중국 총리, 소련 공산주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고수 방침 천명.

1996년 -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군함 2척,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처음으로 부산에 입항

2003년 - 대한민국 정부, 종합부동산세 신설 등 관련 세법 개정 추진 발표

2004년 - 러시아 연방 북오세티야공화국에서 베슬란 학교 인질 사태발생. 334명 사망.

2009년 - 대한민국 배우 장진영, 위암으로 사망

 

9월 2일: 베트남독립기념일 (1945년)

기원전 31년 - 옥타비아누스악티움 해전에서 승리

1666년 - 런던 대화재가 발생하여 사흘간 세인트 폴 대성당을 비롯한 만여 동의 건물이 전소되다.

1838년 - 하와이 왕국의 여왕 릴리우오칼라니 탄생.

1879년 - 한국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탄생.

1919년 - 강우규, 서울역에서 제3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했으나 암살 실패.

1945년 - 일본미국 전함 USS 미주리 호 위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다.

1969년 - 베트남의 혁명가 호찌민 사망.

1973년 - 영국의 소설가 J. R. R. 톨킨 사망.

1981년 - 미국, 중성자탄 생산 시작

1991년 - 미국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하다.

1998년 - 스위스 항공 111편 추락 사고가 발생하다.

2000년 - 대한민국 정부가 판문점을 통하여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하다.

2007년 - 2007년 탈레반 한국인 납치 사건: 탈레반에 납치됐던 나머지 인질 19명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

 

 

 

 

 

 

 

 

  [유명인들의 탄생과 죽음]

 

   오늘은 뭔가 '땡기는' 이야기가 많지도 않은데 유명인들의 탄생과 죽음이 많이 보여 한두문장 정도로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루이 14세부터.

 

   #. 프랑스 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된 프랑스 왕은 루이 '16세'다. 또 사실 루이 15세는 14세의 손자이고, 16세는 15세의 손자였다. 14세와 16세간의 차이가 가계도상으로는 2세가 아닌 4세인 셈. 루이 14세는 베르사유의 궁전을 지었고 전쟁으로 영토를 넓혔으나 다시 '본전'이 되고 말았는데, 그 과정에서 나라는 피폐해져 프랑스 혁명의 '원흉'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유언으로 6살의 루이 15세에게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이 점에서 짐이 밟은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했었다." 라는 말을 남겼다. 진심은 그러했을지언정 국민들은 그가 죽자 하느님에게 감사했다한다.

 

   #. 노무현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고 이미 유명하니, 그나마 덜 알려진 생에 초기 이야기를 해보자. 노무현은 1946년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매우 가난했는데, 큰 형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둘째형인 '노건평'은 살아남아 1968년에 9급공무원이 된다. 초등학교 시절 노무현은 성적은 좋았는데 가난으로 결석이 잦았지만 전교회장을 했었다. 가난으로 중학교를 1년 휴학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 어망 제조업체에 취업했으나 최저생계비만큼도 임금을 주지 않는 등 고용주의 비정함으로 인해 그만둔다. 그리고 막노동과 사법시험을 병행한다. 그러다가 군대에 갔고 만기제대 후 초등학교 동창 '권양숙'과 결혼했으며, 4번의 도전 끝에 유신시절에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고졸로는 유일한 합격자였다. 판사가 되었지만 7개월만에 그만두고 변호사를 1978년에 개업, 요트를 즐기는 등 여유로운 생활을 하다, 3년만에 1981년부터 인권변호사 활동을 시작한다. 그 이후는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다. 많은 사람들이 없이살고 비참하게 살았던 시대... 그 속에서 누군가는 '이 세상에서 난 살아남겠다' 라고 생각한 반면, 노무현은 '이 세상을 모두 살 수 있게 바꾸겠다' 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 장진영은 2008년 9월 17일에 건강검진을 통해 위암을 발견한다. 곧바로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2009년 8월말부터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었고 결국 2009년 9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2달전인 7월에 장진영은 연인 김영균씨와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4일전에는 혼인신고를 마쳐, 그러한 '순애보'가 그녀가 주연했던 영화 '국화꽃향기'와 비슷해 안타까움을 더하기도 했었다.

 

   #. 릴리우오칼라니는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왕, 여왕이었다. 본래 하와이에 살던 원시 부족들은 영국인과의 교류를 거친 뒤 부족들이 무력으로 통일되어, 1810년에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하와이 왕국'으로 거듭나 있었다. 그러다 1874년부터 미국인들의 이주를 허용하자 미국인들에게 경제적으로 완전히 종속되고, 하와이에서 큰 수입을 올렸던 미국은 지정학적인 계산과 겹쳐 하와이를 탐내기 시작하는데, 릴리우오칼라니는 법률개정 등으로 대항하다 끝으로 사탕수수 농장 국유화 조치를 단행한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미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왕국의 법률가가 된 친미성향의 '샌포드 돌'은 미국 이주민들과 공화제를 외치는 농장주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미국의 사주가 있었다), 결국 왕궁이 점령당한 뒤 폐위되고 만다. 이후 '샌포드 돌'이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대통령이 되고, 미국과 유럽 기업인들로 구성된 임시정부가 구성된 뒤, '샌포드 돌'은 하와이의 미국 합병을 선언(1898)하여, 하와이 왕국, 하와이 공화국은 멸망한다. 릴리우오칼라니는 폐위된 이후 참수당할뻔 했다가 풀려나는데, 합병 이전까지 왕위를 다시 맡아줄 것을 제의받지만 거절했으며, 오히려 하와이의 미국 합병 이후 미국 정부에 소송을 걸어 상당한 사유재산을 되찾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1917년에 뇌졸증으로 인하여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런 그녀의 재산은 '릴리우오칼라니' 기금으로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고아와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데 쓰이고 있다.

 

   #. 안중근의 집안은 본래 '이서', 즉 지방 공무원 집안으로, 공무원하면 뭔가 대단해 보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의 시장, 도지사의 심부름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안중군의 5대조 안기옥이 무과에 급제했고, 그의 4형제(안중근의 고조부뻘) 역시 모두 무과에 급제한다. 또 그 형제들(증조부뻘)의 아들도 상당수가 무과에 급제하고, 그 자손들, 즉 안중근의 할아버지, 아버지 뻘 상당수가 고위관직에 진출하기에 이른다. 안중근도 어렸을 적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다. 집안에 포수꾼들이 자주 들락날락거려 명사수로 이름이 나기도 했다. 1894년에는 아버지 '안태훈'과 함께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서기도 했는데, 안태훈은 동학농민군이었던 '김구(백범 김구)'의 인품을 높이사 동학농민군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숨겨주고 지켜주게 된다. 이 때 유년시절의 안중근은 김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데, 이후에도 김구와 안중근은 따로 활동했고 그들의 성향대로 김구는 임시정부를 구성해, 안중근은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저항했다. 안중근의 '거사' 이후 김구는 안중근의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고 한다. (사진은 하얼빈역에서 내려 안중근의 총을 맞기 직전의 이토히로부미(빨간점).)

 

   #. 본래 심장병으로 고생했던 호찌민은 제대로된 치료를 받지 못했는데, 결국 1964년 '통킹만 사건'으로 베트남 전쟁이 더욱 불타오른 뒤 미국이 한계를 느껴가던 1969년 9월 2일에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결국 사망했다. 그는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을 낭비하지 말고 화장하여 북부, 중부, 남부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본래 검소했던 그는 남긴재산도 낡은 옷과 구두가 전부였다고. 보통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말만 그러지 독재로 부를 축적하고 사치를 부리는 경우가 사실 대부분, 아니 호찌민 빼고 전부인데, 그렇게 본다면 공산주의자였지만 나름 스스로가 스스로를 속이지 않은 것은 높게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거야 호찌민의 생각이었고, 그의 사후 공산당은 그를 화장하지 않고 방부처리하여 거대한 묘에 전시했다.

 

   #. '존 로널드 루엘 톨킨', J.R.R.톨킨으로 불리는 그는 영문학 교수이자 작가이다. 언어학에 관심이 많아 자신의 작품에 자신이 직접만든 언어 '꿰냐'와 '신다린'을 넣기도 했다. 그가 쓴 작품이 무엇? 바로 '반지의 제왕'(1954~1955)이다. 본래 비교적 근래에 영화로 개봉된 '호빗'(1937)은 그가 가장 처음 쓴 작품이었는데, 그는 그 책에서 '오크', '엘프' 와 같은 오늘날 각종 소설, 영화, 게임 등에서 사용되는 판타지 세계관의 기본설정을 처음으로 창조해내거나 기존 신화의 것들을 정립했다. 사실 그러한 '허구적 설정'은 아이들에게만 먹힐 것이라고 생각했던 톨킨은 자녀들에게만 그 소설을 보여줬는데, 한 출판사 여직원이 우연히 그를 읽어보고선 톨킨에게 출판을 강력히 권유해 결국 출판했고, 성인들에게도 대성공을 거둔다. 이어서 10년에 걸쳐 쓴 책이 바로 스케일이 남다른 '반지의 제왕' 시리즈로, '반지원정대', '두개의 탑', '왕의 귀환'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성공을 거둔다. 그런 그는 1973년 9월 2일에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사후 아들 '크리스토퍼'가 아버지의 미발표 원고들을 추려 '반지의 제왕' 전후 역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출판하게 된다. 그런데 그 양이 톨킨이 생전에 출판한 양보다 더 많다. 사실 톨킨은 애초에 하나하나 다 출판하고 싶었지만 양이 워낙 방대하고 반지의 제왕이 출판되던 50년대가 2차세계대전 직후라 인쇄비를 감당하지 못해 출판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존재하지 않는 역사를 그렇게 방대하게 써 내려간다는 것... 상상이 안된다.  

 

 

 

 

 

 

 

 

 

   1975년 - 대한민국, 여의도국회의사당 준공

 

   1961년의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은 1963년에 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그 '첫번째' 임기가 끝나가던 무렵이던 1966년 5월에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의사당 건설 지시를 내린다. "남북통일에 대비하고, 양원제 실시에 적응할 수 있으며,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대규모 건물로 하되 국내 기술진이 세울 수 있어야 한다" 라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사실 그 이전부터 기존 국회의사당으로 쓰던 '부민관'(오른쪽 사진, 현 서울시의회 의사당)이 너무 좁아 의원들의 불평불만이 많던 상황이었다.

 

   부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는데, 1967년 '박정희의 브레인'이었던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새로운 국회의사당 부지로 '여의도'를 선정하면서 여의도로 결정되게 된다. (의견수렴이 있었겠지?) 이어서 국회의사당건립위원회가 생겨 1968년 2월 15일에 부지를 여의도로 최종 확정한뒤, 3단계로 공사를 진행하여 1978년에 준공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후 자금 문제로 도서관과 의원회관 건립을 미루고, 일단 의사당 본관을 1975년까지 완성하기로 하여 1975년 9월 1일에 준공되게 된다.

 

   논란이 있었던 것은 국회의사당의 설계였다. 설계는 1968년 5월에 국회의사당건립위원회가 국내에 유명한 6명의 건축가에게 의뢰를 맡겼는데, 보름도 되지 않아 설계 공모를 내어 의뢰받은 건축가들을 당황하게 했다. 또 설계에 대한 건축가의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결국 최대한 많은 설계를 받아 장점만 살리겠다는 것이었고 국회의사당건립위원회도 실제로 그렇게 해명했는데, 이에 대해 많은 건축가들은 반발해 신인건축가들만 설계공모에 참여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우여곡절끝에 이런저런 설계가 합쳐서 결정되고 설계가 반영된 건축가들에게는 공동저작권도 인정해주게 되었는데, 문제가 또 엉뚱한데서 터졌다. 건물 설계에 '권위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정부 각료들과 건축가들이 회의를 거쳐 국회의사당 위에 '돔'을 올리기로 했다. 원래 돔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동저작권'을 인정받은 건축가들은 돔을 올리는데에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냥 돔 건설은 강행되었다. 돔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좀 밋밋했을 것 같기도 하지만, 나중에 뭔가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확실히 '모던한' 뭐 그런 느낌이었을 것 같다. 그러고보니 지금 돔은 확실히 좀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1923년 - 리히터 규모 7.9의 간토 대지진일본간토 지방을 강타하다.

 

   위키에 있는 글을 그대로 가져와도 될 것 같다. [간토 지진은 5분 간격으로 발생한 세 차례의 지진이다. 최초에 발생한 M 7.8의 진원은 거의 동시에 11시 58분에 오다와라와 미우라 반도의 지하에서 약 15초 간 일어났다. 계속하여 M 7.3의 첫 번째 여진이 12시 1분에 일어나고, 두 번째 M 7.2의 여진이 12시 3분에 발생하였다. 이 세개의 지진은 모두 약 5분이상 계속되었다. 지진 후 간토 지방은 총체적인 혼란에 빠졌다. 정부 조직이 마비되었으며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간토대지진이 일어난 시간은 11시 58분은 점심시간이 임박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날 도쿄를 비롯한 지진 피해 지역에서는 화재가 발생하였다.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각 가정집과 요식업소에서 불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지진이 발생하면서 불이 대부분 목재건물인 피해지역 건물들을 불태우며 널리 퍼져나간 것이다.]

 

   그랬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사진에서 보이듯 말그대로 초토화되어버린 도시는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상태였다. 그 때 일본 내무성이 경찰서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 라는 공문을 보냈는데, 이 자체도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피해로 정확한 사실이 전달되지 않는 간토 지방에 이 내용이 흘러들어가게 되면서, 이미 조선인들이 약탈과 방화를 시작했고 물이 끊긴 간토지방 우물에 독을 풀고있다는 소문으로 번져가자 간토 지방은 광기에 휩싸인다.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해 스스로 방범활동을 펼치면서, 조선인 옷을 입고 있으면 곧바로 일본도나 죽창, 몽둥이, 총으로 살해했고, 조선인들이 따라하지 못하는 어려운 일본발음을 시켜 그를 발음하지 못하면 역시 곧바로 죽였다. 하지만 이는 중국인, 일본 지방인들까지 살해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경찰은 소문이 헛소문임을 알면서도 경찰서로 피신해온 조선인들이 끌려나가도 수수방관했고, 폭력이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자 그제서야 개입하였다. 하지만 이미 주변 강이 핏빛으로 물들 정도로 학살이 자행된 상황이었는데, 이후 조사가 이뤄지긴 했지만 형식적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조금의 처벌이라도 받은 사람은 전혀 없었다. 이 학살로 인한 피해자는 일본정부 추산인 233명에서 최대 60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엄청난 피해와 이어진 인간과 일본의 야만성을 드러내게 했던 간토 대지진... 이는 일본인들에게 일본땅 자체가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이는 일본인 집단 공통의 생각이 되어 대륙진출 야욕을 부추기는 대전략으로 연결되고 만다(라는 말들이 많고 위키에도 그런 말이 있다). 결국 간토 대지진으로 인한 경제불황속에서 1929년 경제 대공황이 더해지자 일본 극우 세력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만주 침략을 반대하던 인사들을 암살하고 일본 의회를 장악해 1931년의 만주 침략을 일으켰으며, 이후 일본 정부가 국제적 비난 여론으로 만주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키려 하자 이번엔 군인들이 193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그들을 암살하고 정권을 잡는다. 극우중에서도 극우로 가는 흐름이었고, 이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연결된다. 너무 많이 갔나? 뭐 간토 대지진이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건 당연히 아니다. 단지 요즘 일본에서 지진과 함께 방사능 사태도 터지고 해서, 그들의 본성이 깨어나지 않을까 걱정될 뿐이다. 후쿠시마 원전이 정말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되면 일본은 어떤 행동을 보이게 될까? 다시 한번 광기에 휩싸이게 되지는 않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될 가능성이 그리 적지는 않아 보이니 말이다.

 

 

 

 

 

 

 

9월 1일과 2일의 역사

 

- fin -

 

 

 

 

 

 

오타수정 (2013.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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