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8월 25일과 26일의 역사 - 전두환 사형 선고와 오늘, 크레시 전투, 라면 발명 등

스마일루 2013. 8. 25.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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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로그 2000일을 맞이하여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처음오신 분들, 애독자분들 모두 아래에 링크된 조사에 참가해주세요!

http://www.surveymonkey.com/s/MQSX7JX

 

 

 

 

 

 

문민정부 등장 4년 만에 정말 힘겹게 그들에게 죄를 물을 수 있었지만,

1년만에 그들은 석방, 아니 아예 사면되고 만다.

 

:

 

역사의 죄인들은 반드시 절멸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라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가 없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미화되고, 역사가 반복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 국정원 사건과 NLL 대화록 공개 논란에 대해 '불필요한 국력소모'라는 말들이 많다.

12.12에 대한 혐의를 기소유예 처분했던 검찰이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이다.

 

진실이 밝혀져야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

정치공작이면 정치공작이라고, 대선개입이면 대선개입이라고

한 쪽을 K.O 시킬 근거가 나올 때까지 몇년이고 몇십년이고 싸워 결판을 내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나라가 몇백년이고 몇천년이고 말 그대로 번영하는 국가가 될 수 있다.

 

국민들도 상황을 주시하며 결론을 내리고 행동으로, 높은 투표율과 '표'로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한다.

옛날처럼 비자금에 내 세금 털렸다는 사실이나 드러나야

저 놈이 나쁜놈이라는 걸 알아차릴 것인가?

어떻게 해야 정치인들이 국민을 무서워 하게 될까?

 

이집트에서는 군부가 독재자 무바라크에 대한 석방명령을 내렸다.

민주주의 신생 국가의 어처구니 없는 결말로 보이나? 그래도 걔네는 가택연금 한다더라.

우리는 뭔가? 전두환, 노태우, 지금 어디에 있나?

 

 

 

 

 

 

 

 

 

 

- 링 크 -

 

{'12. 8월 넷째주} 8월 26일의 역사

만지케르트 전투, 윤보선

http://blog.daum.net/smileru/8888094

 

 

 

 

- 순 서 -

 

667년전, 1346년 8월 26일

백년 전쟁 중 처음으로 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를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하다.

 

55년전, 1958년 8월 25일

안도 모모후쿠가 처음으로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하다. 

 

17년전,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게

반란·내란수괴죄 등으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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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일과 26일의 역사

Wikipedia

 

8월 25일: 우루과이독립기념일(1825년)

 

1398년 - 조선에서 이방원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다.

1530년 - 러시아의 이반 4세 탄생, 짜르(tsar)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러시아 황제.

1822년 - 독일 출신의 영국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 사망.

1825년 - 우루과이브라질로부터 독립하다.

1900년 -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사망.

1930년 - 스코틀랜드의 영화배우 숀 코네리 탄생.

1936년 - 일장기 말소 사건: 동아일보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채 보도하다.

1948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총선거 실시

1958년 - 안도 모모후쿠가 처음으로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하다.

1965년 - 대한민국 정부, 한일협정 반대 시위 확산되는 고려대학교에 무장군인 투입

1986년 - 대한민국, 영광 원자력 1호기 준공.

1989년 - 보이저 2호해왕성을 지나가다.

1991년 - 리누스 토르발스유즈넷 뉴스그룹에 새로운 자유 운영 체제를 만들고 있음을 밝히다.

2003년 - 대한민국 정부, 신용불량자 81만 명 구제 대책 발표

2005년 - 허리케인 카트리나플로리다 반도에 상륙하다.

2009년 - 대한민국 고흥군 나로우주센터에서 우주발사체 나로호가 발사됐다. (1차발사, 페어링 문제발생)

2012년 - 미국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 사망.

 

8월 26일

1071년 -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군이 셀주크 제국군에게 대패하다.

1346년 - 백년 전쟁 중 처음으로 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하다.

1743년 - 프랑스의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 탄생.

1789년 - 프랑스 혁명: 인간 및 시민의 권리 선언이 제헌 의회에서 채택되다.

1910년 - 알바니아계의 로마 가톨릭 수녀 테레사 수녀 탄생.

1920년 - 미국, 여성참정권 인정.

1948년 - 한국의 노동운동가 전태일 탄생.

1955년 - 대한민국,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개발은행(IBRD)에 가입하다.

1978년 -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가 263대 로마 교황으로 취임하다.

1996년 - 서울지방법원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게 반란·내란수괴죄 등으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하다.

1999년 - 대한민국 대우 채권금융기관 대우그룹 12개 계열사 워크아웃 결정.

2008년 - 남오세티야 전쟁: 러시아남오세티야의 독립을 승인하다.

2011년 - 일본, 간 나오토 총리가 사임함.

 

 

1965년 - 대한민국 정부, 한일협정 반대 시위 확산되는 고려대학교에 무장군인 투입

 

   참고글 : {'12. 8월 둘째주} 1965 한일 어업 협정, http://blog.daum.net/smileru/8888090

 

 

1789년 - 프랑스 혁명: 인간 및 시민의 권리 선언이 제헌 의회에서 채택되다.

 

   참고글 : 7월 14일과 15일의 역사 - 프랑스혁명 정리, http://blog.daum.net/smileru/8888303

 

 

 

 

 

 

 

 

 

 

 

   1346년 - 백년 전쟁 중 처음으로 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하다.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충돌하며 발발한 백년전쟁... (1337-1453) 사실 백년전쟁이라지만 중간에 쉰 기간도 상당했다. 이 크레시 전투 직전에도 그러했다. 수년간 전쟁을 하고 휴전을 하길 반복했는데, 그래도 중요한 것은 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 '플랑드르' 지방에 상륙할려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야금야금 파리를 향해 진격해 갔다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거의 600년 뒤의 2차세계대전의 독일군은, 연합군이 '플랑드르' 바로 옆 '파드칼레'에 상륙할 것을 예상했다가(연합군도 실제 그럴 생각을 했었다)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뒷통수를 맞게 되었다는 점이다. 영국에서의 프랑스 상륙은 노르망디가 진리라는 걸까?

 

   아무튼, 그렇게 잉글랜드군이 파리로 진격하자 프랑스군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1만5천명 정도의 말 탄 기사들과 6천명의 석궁병을 보냈는데, 이에 1만명도 되지 않는 기사와 7천명의 장궁병으로 구성된 영국군은 지형적으로 유리한 '크레시'로 일단 퇴각해 전투를 준비했다.

 

   크레시까지 잉글랜드군을 추격해간 프랑스군은 기세가 등등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잉글랜드군을 매우 깔봤다. 자신만만한 프랑스 귀족 기사들 수만명으로 이뤄진 프랑스군은 '필리프 6세'가 통솔하기엔 너무도 벅찼고, 결국 필리프 6세는 크레시에 도착한 당일, 바로 잉글랜드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잉글랜드군은 말에서 모두 내려 조금 높은 언덕에 진을 구축했다. 프랑스 기병의 돌격을 막기 위해 장애물들을 배치한다음, 중앙에 보병부대를 세우고 양 옆을 장궁병(Longbowmen)이 감싸는 구조를 반복해 진영을 짰다. 옆 그림을 참조하면 도움이 될 듯?

 

   그러한 잉글랜드군을 보고 프랑스군은, 일단 제노바에서 데려온 제노바 석궁병 용병 6천명을 앞세웠다. 제노바 석궁병과 웨일즈에서 온 장궁병들간의 사격전이 시작되었다. 사실 석궁이 정확도가 더 높았지만, 석궁이 당시 비를 많이 맞아 탄력을 잃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 장궁병들은 비가 오는 동안 활줄을 풀어 놓아 활줄이 탄력을 잃어버리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또 장궁병들은 지형적으로 높은 곳에 있어 유리했고, 훈련도 잘 되어 발사속도도 석궁병들보다 빨랐다. 결국 제노바 석궁병들은 엄청난 사상자를 낸 뒤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제노바 석궁병들을 겁쟁이라 생각하고 도망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 그렇게 석궁병은 와해되어 버리고, 다음으로 프랑스 기사들이 돌격했다. 하지만 비가 와 진흙탕이 된 지역을 기사들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고, 장궁병의 관통력은 프랑스 기사들의 상상보다 훨씬 좋아, 느리게 움직이는 기사들을 꿰뚫어 버렸다. 프랑스군은 이후 16번이나 돌격과 퇴각을 반복했는데, 영국군에게 거의 피해를 입힐 수 없었고 결국 퇴각하고 만다. 잉글랜드군은 수백명, 프랑스군은 수천명 또는 거의 1만에 가까운 전사자를 낸 상황이었다. 프랑스의 참패였다.

 

   사실 당시 병력과 전사자 수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프랑스 병력이 수만명에 달했고 1만명은 물론 3만명에 가까운 전사자가 발생했다는 말도 있고, 잉글랜드의 전사자가 너무 적다는 말도 있다. 이렇게 혼선을 빚는 이유는 기록도 부족하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기록이 당시에 너무 왜곡되어 서로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결과는 분명했다. 프랑스 귀족의 수분의 1이 살해당할 정도 프랑스의 기사들은 참패했다는 것이며, 사냥용으로 사용되던 장궁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이후의 전투에서도 잉글랜드는 승리를 이어갔고 프랑스는 '삽질'을 반복했으며, 결국 약 21년간 벌어진 백년전쟁 '1기'는 잉글랜드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물론 뭐 이건 백년전쟁의 시작일 뿐이었지만...

 

 

 

 

 

 

 

 

 

 

   1958년 - 안도 모모후쿠가 처음으로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하다.

 

   1910년 일본 제국에게 점령당해있던 대만에서 태어난 '안도 모모후쿠'는, 1945년 일본이 2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극심한 식량위기에 빠지게 되자 1948년에 '닛산 식품'을 설립하고 식품산업을 시작한다.

 

   그러던 1958년에 그는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식품인 라면을 개발한다. 이는 안도 모모후쿠가 중국에서 중국군인들이 면을 튀겨서 말린 뒤 가지고 다니던 것에 착안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중국에서 태어나, 전쟁이 나서 중국군들을 자주 보게 되었던게 도움이 된 셈.

 

   그리고 1971년에는 컵라면을 최초로 개발한다. 미국에 수출된 라면을 미국인들이 부숴서 컵에 넣어 먹는 것을 보고 착안한 것이었다. 2001년에는 일본인으로 최장시간 우주에서 머문 '노구치 소이치'를 위한 '스페이스 라면' 개발에 착수하여 2005년에 완성하게 되었고, 노구치 소이치와 함께 국제우주정거장으로 보내지게 된다. 그리고 2년뒤인 2007년에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음, 아무튼 라면은 참 맛있다. 한 광고카피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발명'이라고도 했는데, 유해논란이 있긴 하지만 맛있는다는건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듯 하다. 이런 라면은 1963년 '삼양라면'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는데, 금새 인기를 얻게 되었고 정부의 쌀부족 문제 해결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그 때문인지 라면을 단순히 '특별한 음식'으로 보는 다른나라 사람들과는 다르게 우리나라에서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제2의 주식'의 위치에 올라와 있는게 라면이라 할 수 있는데, 실제로 라면 소비량은 당연히 인구가 많은 중국이 제일 많긴 하지만, 1인당 소비량은 우리나라가 1위여서, 2012년에 1인당 72개를 먹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라면을 열심히 먹긴 하지만, 아시아에서 라면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상황... 생각해보면 이렇게 현대사회에 와서 새로운 스타일의 식품이 등장한 것도 참 특이한 일이 아닌가 싶다. 뭐 그냥 본래의 면음식을 '인스턴트'화 한 것에 불과하긴 하지만, 확실히 면음식들과 라면은 뭔가 달라도 다르지 않나?

 

 

 

 

 

 

 

 

 

   1996년 - 서울지방법원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게 반란·내란수괴죄 등으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하다.

 

   뭐 길게 말할 내용은 없다. '전·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 심판'이라는 위키에 있는 한페이지 정도의 글 만으로도 과거, 그리고 현재, 게다가 미래까지 설명된다. 

 

   1993년, 6월항쟁으로 얻어낸 직선제 개헌 이후 드디어 '문민정부', 즉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해 군사정권을 이어간 전두환, 노태우를 처벌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거셌고 큰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은 문민정부가 광주 5.18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 명하면서 군사정권의 반대에 서는 민주정부임을 분명히 했지만, '12.12 사태는 쿠데타적 하극상'으로 규정해 '쿠데타'로 규정하지는 않았고(군사정권(박정희)에서 군사정권(전두환)으로의 쿠데타라 그랬을까?)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기자'면서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얼마전에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역사에 맡기자'라는 현대 문명사회의 인류라면 누구도 동의 못할 말이 대통령 입에서 나오자, "야,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 너희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지금 전차를 몰고 가서 네놈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어!!" 라는, 드라마 대사이면서 실제로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전두환에게 말했던, '장태완' 당시 수경사령관 등 22명이, 전두환, 노태우 등 34명을 1993년 7월에 군 형법상의 반란, 내란, 살인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게 된다. 1994년에는 5.18 유족들이 전두환, 노태우 등 35명을 역시 유사혐의로 검찰에 고소하였다.

   이에 대해 1994년 10월 검찰은, '12.12는 명백한 군사반란'이나 '불필요한 국력 소모의 우려가 있다' 라며 12.12사건을 기소유예 처분해버리고 만다. 1995년 7월에는 5.18과 관련, 신군부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규하 대통령을 배제하는 등 각종 불법적인 방법으로 무고한 양민을 사살하는 작전을 기획했음을 밝혀냈으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라는 논리로 관련자들을 불기소 처분해버렸다. 뭔가 어디서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결국 정치권, 학계, 시민사회들이 그러한 검찰의 결정을 거세게 비판했다. 낡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너무도 명백한 죄인, 이견의 여지가 없는 죄인들을 심판할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친일파들에 이어 군사독재자까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겨야 하는 상황...

 

   하지만 1995년 10월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폭로하면서 상황은 바뀌기 시작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자각과 역사에 대한 심판, 일부 지역에서 이뤄진 탄압에 대한 범죄에, '전국민적인 착취'라는 혐의가 붙으면서 논쟁에는 다시 불이 붙었다. 

 

   결국 11월 24일에 김영삼 대통령은 '5.18 특별법'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11월 27일에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한 헌법소원 결과, 헌법재판소는 그것이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으며, 이어서 전두환 정권에서의 비자금 문제까지 터져나오면서, 1995년 12월 21일에 5.18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5.18 공소시효를 하루 남긴 1996년 1월 23일에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이 전격적으로 기소된다. (하지만 대통령 임기 와중에는 공소시효가 정지되기 때문에, 사실 하루 남은 것은 아니었다고.) 그리고 2월에는 12.12 사태, 전두환 비자금 사건, 노태우 비자금 사건 등이 줄줄이 기소된다.

 

   그리하여 1996년 8월 26일 오늘, 1심 재판에서 그들은,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에 대한 죄목을 인정받아 전두환에게 사형을, 노태우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그런데 2심에서는 전두환에 대한 형량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는데, 12월 16일 마지막 재판에서 그 형이 최종 확정된다. 관련자들에게도 마찬가지 혐의가 적용되었다. 이때 최근 논란이 되는 추징금도 부과되었고, 5.18 진입을 잘했다며 전두환 자신이 자신에게 수여한 훈장도 박탈당했다. 동시에 대통령 관련 법률에 따라 대통령 예우 역시 박탈당했다.

 

   이걸로 끝이었으면 좋았겠지만, IMF가 터지고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후인 1997년 12월 27일,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관련자들을 전원 사면하고 만다.

 

 

 

 

   역사의 죄인들은 반드시 절멸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라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가 없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미화되고 그 역사가 반복될 수 밖에 없다.

 

   박근혜 당시 대선후보는 5.16, 인혁당 사건등에 대해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는 말을 했었다. 전두환의 12.12에 대해 김영삼이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이다. 다행히도 후에 사과를 했고 난 그 사과를 받아줘야 한다는 글을 썼었지만, 그 때도 그랬고 지금에 와서도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는 말은 소름끼치기 그지 없다. 그럼 항상 멋대로 하고 역사의 평가에 맡기게? 인류 역사 그 어느곳에서도 절대 성립할 수 없는 문장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 일부에서의 박정희와 5.16 미화 논란에 대해서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라는 주장이 나왔었다. 12.12사태와 관련해 헌법재판소는 그 말이 '위헌'임을 확인해 주었지만, 그렇다면 처벌 받아야 했을 그들은 사면 받은 상황이다. 

 

   최근 국정원 사건과 NLL 대화록 공개와 관련하여 시시비비를 가리는 상황을 놓고 '불필요한 국력소모'라는 말들이 많다. 12.12에 대한 혐의를 기소유예 처분했던 검찰이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인데, 진실이 밝혀져야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 여당에서는 야당의 정치공작, 야당에서는 여당의 대선개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여기까지 온 이상 멈출 수는 없다. 정치공작이면 정치공작이라고, 대선개입이면 대선개입이라고 한쪽을 K.O 시킬 근거가 나올 때까지 몇년이고 몇십년이고 싸워 결판을 내야 한다. 결판을 내 관련자를 엄정히 처벌하고 사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나라가 몇백년이고 몇천년이고 말그대로 번영하는 국가가 될 수 있다.

 

   국민들도 상황을 주시하며 결론을 내리고 행동으로, '표'로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한다. 김영삼 정부 시절 노태우 비자금 논란이 나왔을 때 처럼, 비자금에 내 세금 털렸다는 사실이나 드러나야 저 놈이 나쁜놈이라는 걸 알아 챌 것인가?

 

   이집트에서는 군부가 독재자 무바라크에 대한 석방명령을 내렸다더라? 민주주의 신생 국가의 어처구니 없는 결말로 보이나? 그래도 걔네는 가택연금 한다더라. 우리는 뭔가? 전두환, 노태우, 지금 어디에 있나?

 

 

 

 

 

8월 25일과 26일의 역사

 

- fin -

 

  

 

  

 

오타 수정 (2013.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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