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8월 18일과 19일의 역사 - 김대중과 햇볕정책, 범유럽 피크닉, 코코 샤넬, 칭기즈 칸, T-4 작전 등

스마일루 2013. 8. 17.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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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 5시간 19분의 국회연설을 하고 있는 1964년의 김대중 의원.

이 필리버스터로 '가장 긴 국회연설' 항목의 기네스북에 오른다.

 

: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민주화 운동 측면에서는 전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지만,

경제위기 극복 같은 것이야 그렇다치더라도 대북정책 관련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그가 '폐쇄 전쟁지양에서 적극 평화지향으로' 라는

남한의 대북정책 대전략을 수립하고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고 정권이 거듭할수록 발전될 것이다.

 

강경책? 북한에게 '공산주의 포기해라', '거래는 무슨 너흰 무조건 폐쇄다'라는 정권 있나?

이 진짜 강경책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며,

한국전쟁 이후 2.0 버전의 남북관계, 그 시작에 김대중이 있다.

 

 

 

 

 

 

 

 

 

 

 

 

 

 

- 링 크 -

 

없음.

(1년전 '오늘의 역사' 결간)

 

 

 

- 순 서 -

 

786년전, 1227년 8월 18일

몽골 제국의 칭기즈 칸이 사망하다.

 

130년전, 1883년 8월 19일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 탄생.

 

124년전, 1989년 8월 19일

범유럽 피크닉이 일어났다.

 

72년전, 1941년 8월 18일

나치 독일의 장애인 안락사 계획인 T-4 작전이 비판을 받아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

 

4년전, 2009년 8월 18일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이 폐렴으로 인한 투병 끝에 사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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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과 19일의 역사

Wikipedia

 

8월 18일

1227년 - 몽골 제국칭기즈 칸이 사망하다.

1750년 - 이탈리아의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 탄생.

1906년 - 한말 의병장 최익현, 일본군에 잡혀 쓰시마 섬으로 유배

1934년 - 독일, 국민투표 통해 아돌프 히틀러를 총통으로 선출

1940년 - 미국캐나다, 공동방위조약 체결

1941년 - 나치 독일장애인 안락사 계획인 T-4 작전이 비판을 받아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

1949년 - 죽령터널 열차 사고가 일어났다.

1950년 - 한국 전쟁: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기다.

1955년 - 대한민국, 일본과 경제 관계 단절

1966년 - 중국, 마오쩌둥 지도하의 홍위병 100만 명 텐안먼 광장서 대규모 문화혁명

1972년 - 남북적십자사, 남북회담위한 직통전화 개통

1976년 -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판문점에 있는 미루나무를 자르던 유엔군·한국군조선인민군의 병사들이 실랑이 끝에 인민군 병사가 유엔군 병사 두 명을 도끼로 살해하다.

2008년 - 파키스탄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가 사임을 표명했다.

2009년 -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김대중폐렴으로 인한 투병 끝에 사망하다.

2011년 - 김성근SK와이번스감독직에서 전격 해임당하다.

2012년 - 대한민국누리망(인터넷)에서 신규로 주민등록번호를 수집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였다.

 

8월 19일

1839년 - 루이 다게르사진기의 원리를 공개하다.

1883년 -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 탄생.

1919년 - 아프가니스탄영국으로부터 독립하다.

1946년 - 미국의 제 42대 대통령 빌 클린턴 탄생.

1953년 - 이란에 친 팔레비 쿠데타가 일어나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가 축출되다.

1960년 - 소련의 우주개 벨카와 스프렐카를 태운 스푸트니크 5호가 발사되어 궤도를 돌다.

1989년 - 범유럽 피크닉이 일어났다.

1991년 - 소련의 보수강경파가 반 고르바초프 쿠데타 감행하다.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간다.)

1993년 - 대한민국, 초고속정보통신망 기본계획 수립하다.

1993년 - 대한민국 국회가 금융실명제 실시에 따른 대통령 긴급명령승인안을 통과하다.

 

 

 

 

 

 

 

 

 

   1227년 - 몽골 제국칭기즈 칸이 사망하다.

 

   칭기즈칸... 아직도 어색한 이름이다. 징기스칸이 편한데... 아무튼 바른 외래어 표기법은 '칭기즈칸'이다.

 

   칭기즈칸은 1162년 왕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9살때 아버지가 독살당하고 권력의 밖으로 밀려나면서 고난의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이후 아버지의 의형제의 도움을 받아 흩어진 자신의 부족들을 모았고, 아버지를 독살한 부족을 무찌른 뒤 주변의 부족들도 정리했다. 후에는 자신들을 도와준 동맹부족들도 제거하여 확고한 몽골 전체의 최고권력으로 거듭나고자 했다. 그렇게 몽골의 수많은 부족들을 굴복시키고 몽골족을 통일한 것이 1206년으로 그가 44세때의 일이다.

 

   이후 칭기즈칸은 아시아의 초원지대, '스텝 지역'을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중국 지역의 '서하'와 '금나라'를 향해 돌격, 1215년엔 금나라의 수도를 점령하였고, 나머지 지역의 정복은 부하 장수에게 맡긴 뒤 중앙아시아로 진출한다. 다음 목표는 화레즘(Khwarezm) 제국이었다. 칭기즈칸은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고 학살하며 화레즘 제국의 속국이었던 '서요'를 점령한 뒤 바로 화레즘 제국을 점령하였는데, 그것이 1223년이었다. 사실 이 때까지 금나라도 그렇고, 서하, 화레즘 제국 등 모두가 완전한 영토를 몽골에게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도가 초토화되고 백성들은 물론 왕족등이 완전히 학살당한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칭기즈칸이 죽기 직전 원정을 떠난 곳이 끝까지 버티고 있던 서하였는데, 1224년 중앙아시아에서 돌아온 칭기즈칸은, 군을 정비한 뒤 1226년 본격적으로 침공을 시작해 기어이 서하를 굴복시켰다. 그리고 항복하는 서하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는 유언을 남겼고(유언을 남기도 이런걸...), 1227년 8월 18일에 칭기즈칸이 세상을 떠난 뒤 서하 백성들은 칭기즈칸의 유언대로 철처하게 학살당했다. 이렇게 한 나라의 국민들이 정복을 당했다는 이유로 멸족당한 사례는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라고...

 

   아무튼, 끝이다. (?)하나 알아두어야 할 것은, 칭기즈칸 시절에는 딱 중앙아시아 정도까지 진출했다는 거다. 물론 그것도 큰 것이었지만 이것을 발판으로 칭기즈칸 사후에 금나라도 완전히 정복당하고 러시아까지 몽골족이 진출하게 되어, 이후 50여년 정도가 지난 1279년에 최대 영토를 달성하게 된다.

 

   이러한 몽골제국의 초대 '칸'(왕)인 칭기즈칸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잔인함, 때로는 관용, 리더쉽, 전략전술 등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평가가 이뤄지고 있으니... 뭐 그건 그거고, 사실 재미있는건 몽골제국의 붕괴 이후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그건 오늘 다루지 못한 것 같다.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1883년 -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 탄생.

 

   사치의 대명사중 하나인 명품 의류-잡화 브랜드들... 샤넬도 그 중 하나인데, 사실 명품 브랜드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굉장히 놀랍다. 디자이너의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변천, 그리고 구구절절한 스토리까지... 본래 '사치'보다는 '장인정신'과 '혁명'과 가까운 것들이 바로 이 명품브랜드들이다. 하나하나가 마치 기업 '애플'의 역사를 보는 것 같고 말이다. 여러분들이 아는 명품 브랜드들의 역사를 한번 찾아보시길. 참 흥미롭다.

 

   여기서는 샤넬이야기만 간단히 해볼까? 위키에는 내용이 부족해서 네이버캐스트를 참고했다. '코코 샤넬' 영화를 보기도 했었지만... (사실 영화는 그렇게 재미있진 않다)

 

   1883년 8월 19일에 태어난 '가브리엘 샤넬'(본명, 오른쪽 사진은 1920년.)은, 12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에 의해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학업을 마친 후, 양복 재단 보조로 일하면서 밤에는 노래를 불렀다. 이때 불렀던 노래가 '코코가 트로카데로에서 누구를 만났던가?' 였는데, 그리하여 그녀의 별명이 '코코'가 되었다. 노래를 부르면서 인기도 상당했다고.

 

   이후 그녀는 한 영국인 폴로 선수 '아서 카펠'이 그녀가 가게를 열고 싶다는 소원을 들어주게 되면서 자신만의 옷가게 시작하게 된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샤넬의 연애사는 거의 책 한권이라 생략하고... (아래 이야기에서 뭐 하나 할 때마다 그를 도와준 연인들이 계속 바뀐다고 보면 된다.)

 

   아무튼 샤넬은 옷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여자는 왜 쓸모없는 복장을 갖춰야 하나?' 라는 의문에서 시작하여, 당시 여성의 옷차림을 확 바꿔놓게 된다. 그가 가게를 처음 차린 1910년대는 '타이타닉호'가 만들어지고 침몰했던 바로 그 때였는데, 그 때만 해도 여성들은 답답한 '코르셋'과 요즘 웨딩드레스 식의 풍성한 치마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샤넬은 그를 확 뒤엎었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치마와 여성용 바지를 만들었고, 코르셋과 같은 스타일에서 벗어나 편한 옷을 만들었다. 물론 고급스럽게... 또 손가방에는 끈을 달아 어깨에 멜 수 있게 했다. (요즘엔 다시 끈 없는 클러치백이 유행하는 듯?) 지금은 당연한 것 같지만 이건 뭐 거의 '아이폰'에 버금가는 혁명이었다. '샤넬 스타일', '샤넬 슈트' 라고 불리는 이러한 옷차림은, 현대 여성 옷차림의 시작 그 자체였다. 그에 더해 샤넬이 마른 모델을 선호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아예 현대 여성의 모습 그 자체를 샤넬이 만들었다고 보면 되겠다.

 

 

"진정으로 럭셔리 한 스타일이라면 편해야 한다. 편하지 않다면 럭셔리 한 것이 아니다."

 

- 가브리엘 샤넬

 

 

   그리하여 명성을 얻고 고급화를 거듭하던 1921년에는, 샤넬의 가장 유명한 제품인 '샤넬 넘버 5' 향수를 만든다. 패션 브랜드가 향수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화제가 되었던 건 바로 '샤넬 넘버 5'라는 이름이었다. 당시에는 향수 이름이 '봄의 욕망', '저녁의 도취' 같은 이름이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오그라들지 않을수가 없는데, 이 '샤넬 넘버 5'라는 이름은 지금봐도 말 그대로 '모던한' 그런 이름이었다. 여러 향수 샘플 중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이 5번 샘플이라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그리고 1927년에는 지금의 샤넬 로고가 탄생한다. 이것도 참 기가 막히다. '샤넬 넘버 5'라는 이름처럼 'CHANEL' 글씨의 글꼴 자체도 이게 정말 1920년대에 만든것인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던함 그 자체다. 또 'C' 두개를 대칭되게 놓아 '워드마크'를 만들었다. 자신의 별명 '코코'에서 따왔다고 한다.

 

   결국 시대를 앞서나가며 여성 의류 브랜드들의 방향을 이끈 샤넬은, 2차세계대전으로 사업을 중단하고 패션계에서 은퇴하지만, 1954년에 다시 복귀한다. 하지만 예전과 같은 영광을 누릴 수는 없었고 그녀는 열심히 일을 하던 1971년에 세상을 떠나는데, 80년대부터 서서히 다시 떠오르기 시작하여 일부 한국 여검사들이 샤넬백을 뇌물로 선호하는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다.

 

 

 

 

 

 

 

 

 

 

 

   1941년 - 나치 독일장애인 안락사 계획인 T-4 작전이 비판을 받아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

 

   지난번에 나치 등장 직전의 이야기에 대해서 했었는데 또 나치 이야기다. 워낙 특이한 일들을 많이 벌여서...

 

   위의 타이틀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나치는 2차세계대전 와중에 자국 장애인들을 학살했다. 그것이 바로 T-4 작전... 이유는 우월한 게르만족을 유전적으로 더욱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민족주의에서 더 나아가 인간을 우생학적으로 바라보는, 즉 '품종개량'의 대상으로 바라본 결과였다. 2차세계대전 자체도 우월한 게르만족의 살 터전과 미개한 나머지 민족들의 청소를 위한 것이긴 했다.  

 

   정말 상상이상으로 정신나간 사람들이 이렇게 있었는데, 이 작전은 히틀러가 나치집권 이후 줄곧 생각에 있었던 것이지만 실행을 하지 못하다가, 1939년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의 혼란속에서 시작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죽은 정신적, 육체적 장애인들이 무려 최소 7만명에서 최대 20만명이라고 한다. (!!!)

 

   '경악'이라는 단어로도 표현이 안될 정도다. 그래도 보면, 확실히 이렇게 정신 나간 부류들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것 같다. 덕분에 자만심이 오판으로 이어졌고 말이다. 정말 T-4 작전 같은 짓을 벌이는 데에 힘을 쓰지 않았다면, 또 괜히 게르만족의 살 터전을 확보하겠다며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았다면, 나치 독일의 미래는 아무래도 좀 더 나았을테니... 물론 절대 그러길 바라진 않지만...

 

 

 

 

 

 

 

 

 

 

 

   1989년 - 범유럽 피크닉이 일어났다.

    (1991년 - 소련의 보수강경파가 반 고르바초프 쿠데타 감행하다.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간다.))

 

 

   1985년, 공산주의 경제의 한계를 인정한 소련의 고르바초프(왼쪽 사진. 왼쪽이 고르바초프, 오른쪽은 푸틴. 2000년.)는,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개혁개방정책을 시작한다. 2차세계대전 종전 40년만에,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변화하면서 언론의 자유와 인권의 향상을 가져오는 혁신적 조치였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민주화의 물결로 이어지고, 소련에 병합되어있던 동유럽 민족들의 독립운동을 야기하게 된다. (그 외에도 서방측과의 정상회담, 종교활동 허용, 미국과의 핵감축, 아프가니스탄 철수 등을 진행했고, 고르바초프는 1990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그렇게되자 1989년 6월에는 폴란드 공산당에서 민주선거가 이뤄져 공산당의 일당독재가 붕괴되고,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에서 독일도 예외일 수 없었다.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분할되어 있었는데, 동독은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긴 했지만 마치 한 때의 북한처럼 소련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공산주의국가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동유럽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동독은 이렇다할 민주화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유럽 혁명의 와중, 공산당이 붕괴되어가던 헝가리가, 접하고 있던 서방세계 국가인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동독 주민들은, 서독이나 서베를린으로 가고 싶지만 베를린 장벽은 넘을 수가 없으니, 통행이 허용되어 있는 같은 공산국가인 헝가리까지 이동하여, 그곳에서 서방세계 국가인 오스트리아로 넘어간 뒤 서독으로 들어가는 방안을 생각하게 되었다. 서방세계 국가로 넘어가면 된다는 생각이었던 거다. 그렇게 1989년 8월, 동독사람들이 헝가리로의 여행을 떠나는 운동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범유럽 피크닉'이다. (오른쪽 사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에 있는 범유럽 피크닉 기념비)

 

   하지만 헝가리는 헝가리 국민만 오스트리아로 넘어갈 수 있게 허용하였고, 불법적으로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에는 '피크닉'을 온 동독 주민들이 쌓여가기 시작했고, 그것은 국경을 개방하라는 평화집회로 이어졌다.

 

   그러나 공산당이 지속적으로 붕괴되어가던 헝가리에서, 일순간 동독 주민 수천명이 국경을 넘어 헝가리로 넘어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렇게 수천명이 오스트리아로 넘어가 이후 서독으로 갔겠지만, 그 사건으로 '범유럽 피크닉'은 금지되어 동독 주민들은 헝가리로도 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 흐름,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넘어가려는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범유럽 피크닉'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에서의 평화시위는, 동독주민들에게는 서독으로 넘어가고자 하는 이뤄질 수 없는 열망을, 그 피크닉 자체로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작은 행복' 그 자체였는데, 그것조차 막히게 되면서 동독주민들의 답답함과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된다. 그리고 10월에는 헝가리 공산당이 붕괴되어 헝가리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까지 한다.

 

   결국 동독에서는 난리가 났고, 동독 정부는 그러한 움직임을 잠재우고자, 제한적이지만 공안당국의 허가 과정을 거쳐 어느곳으로든 국경을 넘고 여행을 할 수 있게 허용하는 새로운 법안을 준비했다. 그런데 11월 9일에 해외언론 브리핑 과정에서 '여행자유화 [규칙]이 11월 10일에 발표된다'라는 것이, '전면적 여행자유화 조치가 시작된다'는 잘못된 내용으로 발표되었고, 이것은 다시 잘못된 해석을 거쳐 '전면적 국경자유화 조치가 시작된다'는 놀라운 내용으로 속보가 되어 방송되기에 이른다.

 

   어떻게 되었을까? 외신의 속보를 전해들은 동독 주민들은 서독으로 가기 위한 가장 가까운 국경,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갔다. 베를린 장벽의 동독쪽 당직자들도 '국경자유화' 소식을 뉴스로 들은 상황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몰려드는 사람들,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한 당직자들... 결국 당직자들이 무력으로 제압하지도 어쩌지도 못하는 사이에 몰려든 사람들은 이미 장벽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렇게 통일이 되었다.

 

 

   동유럽 피크닉은 베를린 장벽 붕괴의 시작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북한이 중국으로의 국경단속을 철저히 하는 것도 그것에서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탈북자들은 중국을 거쳐 동남아로 넘어간 뒤 그곳 한국 대사관에 진입하는 곳을 통해 한국으로 넘어오고 있다. 당시와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 중국도 북한 붕괴시 중국으로의 대량 탈북을 우려하고 있고 말이다. 어찌되었건 평화적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글쎄... 이렇게 갑작스러운 일로 통일이 다가오게 될까? 그렇게라도 통일이 되면 다행이겠지? 물론 불확실한 상황을 피할 수는 없을텐데, 여하튼 그렇게라도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2009년 -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김대중폐렴으로 인한 투병 끝에 사망하다.

 

 

   그것에 대한 해답 중 하나로, '대북화해협력정책', 즉 흔히들 별칭으로 '햇볕정책'이라 부르는 정책을 제시한 것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사실 현금지원과 북한 무력도발에 쉬쉬한 것, 조급한 나머지 핵폐기 이전에 지나치게 빠르게 경제협력을 진행한 점(물론 핵 불능화라는 성과를 얻긴 했었지만...) 등은 분명히 비판받을 일이었다고 보이나, 북한을 결국은 시장경제와 개방으로 끌어내겠다는, 강제로 '페레스트로이카'를 하게 만들겠다는 전략 자체는 매우 유효하다고 보인다. 이는 결국 이명박, 박근혜 정부 쪽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어떤 정부도 북한과 연을 끊겠다고 한 정부는 없으니 말이다. 특히 보수정권도 핵만 포기하면 국민소득을 3000달러로 끌어올려주겠다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있는 상황이다. 

 

   진짜 강경책은 이제 없다. 왜 누구도 북한에게 공산주의 포기를 요구하지 않는 걸까? 그것이 없다면 너희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왜 말하지 않는 것이냔 말이다. 그것이 진정한 '강경책' 아닌가? 이는 결국 우리가 무서운 핵만 없으면 일단 되는거고, 공산주의는 경제지원을 통해 알아서 와해될 것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진보든 보수든 우리의 대전략은 이런 방향으로 맞춰가는 듯 하다. '북한에 대한 지원으로 달성되는 통일' 말이다. 1970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말한, '폐쇄 전쟁지양에서 적극 평화지향으로 가자' 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고, 그것이 김대중 대통령 취임 이후 시작되면서 민주화 이후 오늘날까지 북한에 대한 우리의 대전략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난 북한의 소득을 3000달러로 올려주고 싶지가 않다. 싫다. 배신할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북한에 대한 지원으로 달성되는 통일'이라는 전략은 유효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북한과의 부분적 경제협력이다.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한 것이 더욱 확대되면, 북한의 경제는 껍데기만 성장하면서 우리에게 크게 종속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앞서 말한 '범유럽 피크닉' 같은 사태를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고 말이다. 꼭 그것이 목표는 아니지만, 이미 북한 주민들은 깨어가고 있지 않나?

 

   결국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한민국은 북한에 대한 지원을 통해(지원조건은 정부마다 다양하다) 통일을 달성하겠다는 방향을 굳힌 상황이고, 이 큰 대전략은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좋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뭐 나도, 또 다른 사람들도 이래저래 할말은 많긴 하겠지만 말이다. 뭐 이 쪽 이야기는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지니 이 쯤하고... (하지만 아래에서 또 간단히 설명)

 

 

 

 

    사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위키피디아의 문서는 내가 지금까지 정리해 왔던 그 어떤 문서보다도 길다. 목차 길이만 'Page Down' 키를 세번 눌러야 사라질 정도다. 아무튼 간단하게 다뤄보겠다. 자세한건 위키를 직접 보시길.

 

   김대중은 1924년 첩의 아들, 즉 서자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왠 조선시대이야기 같지만, 일제강점기가 한창이던 시절이었으니 그럴만 했다. 그는 전라남도 목포 앞 '하의도'라는 작은 섬에 살고 있었는데, 고종황제의 양녀인 '덕혜옹주'가 일본제국으로 시집가게 되면서 이 섬을 팔았고, 그러면서 이곳 주민들은 일시에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김대중은 훗날 이것이 자신이 민족과 함께 불의에 항거하게 된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학창시절의 김대중의 성적은 항상 상위권이었는데, 8살때부터 신문 1면과 정치면을 주의 깊게 읽었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가 집과 농지를 팔아 '육지'인 목포로 학교를 보내 그곳에서 일본 학생들과 공부했는데, 따돌림 속에서도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결국 보통학교(초등학교) 수석졸업, 고등학교(당시는 5년제) 수석합격, 고등학교 1, 2, 3학년 반장의 우수한 모습을 보였다. 웅변도 잘해서, 생활기록부에는 "언변은 늘 정확, 명료하다." 라고 적혀있다 한다. 웅변학원 강사를 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4학년 시절부터 반일 감정을 크게 가지게 되면서 반일 관련 글을 써 문제가 되기도 하고 일본학생들과 싸우기 시작했는데, 이후 그는 일본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목포상선회사에 취업하게 된다. 그렇게 징집을 피하고 이후 해방이 되자, 노동 운동을 하다가 이후 공산주의 정당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1946년에 그들과 갈등을 빚고 탈당하게 되며, 후에 좌익세력과 몇차례 함께 활동하지만, 한국 전쟁때는 국군 보조기관인 '해상방위대'에 자진입대하여 전라도 지구 부사령관 자격으로 인민군 게릴라 소탕작업에 참전하기도 했다. (이는 훗날 이회창 후보와의 대선 대결에서 김대중 후보의 병역의혹으로 논란이 되었는데, 당시 논란끝에 국방부에 의해서 '전남지부 해상방위대'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참고글 : 위키피디아 - 전남지부 해상방위대)

 

   이후 1955년에는 민주당에 입당한다. 1960년에는 민주당 기획위원 겸 대변인이 된다. 한편 지역구에서는 당선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1961년에 몇차례 시도 끝에 당선되지만 이틀뒤에 1961년 박정희의 5.16 쿠데타가 일어나 제대로된 활동은 하지 못했다. 그래도 1964년 공화당이 한일협정협상에서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은 사건이 '김준연 의원'에 의해 폭로되자 공화당 출신 국회의장이 김준연 의원 체포동의안을 상정해버리는데, 그를 막기 위해 5시간 16분동안 물한모금 마시지 않고 국회연설을 한다. '필리버스터'를 사용한 셈이었는데, 그리하여 구속동의안은 무산되고, 이 기록은 기네스북에 오르게 된다.

 

(참고글 : {'12. 8월 둘째주} 한일어업협정, http://blog.daum.net/smileru/8888090)

 

   그리고 1967년에는 신민당 창당작업에 참가하고 대변인이 됨과 함께 국회의원에 당선되나, 신민당 총무는 경합끝에 김영삼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같은해에 지금의 '통일부'의 전신인 '통일원' 신설을 제안하는데 1969년에 통일원이 신설되기에 이른다. 1970년에는 박정희와 다시 선거에서 격돌하는데, 여지없이 부정선거가 자행되고 끝에 박정희는 당선, 김대중은 낙선하게 되고, 김대중의 예언대로 박정희는 유세과정에서의 말을 뒤집고 독재를 시작하게 된다. 특히 이 때 김대중과 박정희의 격돌은 결국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감정으로 이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 뭔가 역시 예상대로 글이 엄청나게 길어지고 있는데...) 아무튼 박정희는 김대중의 성장에 큰 위협과 함께 부정선거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는 1973년의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이어진다. 너무도 유명한 사건이고... 1980년에는 전두환이 5.18등의 배후라는 이유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해 사형을 선고하는데,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 라는 최후진술이 유명해지면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압박으로 사형을 면하게 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편지가 결정적이었다고.

 

   전두환 이후 대선에서는 김영삼과 단일화를 이루지 못해 노태우가 당선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며, 다음 선거에서는 3당합당을 비난하며 김영삼과 결별, 대선에서 다시 충돌하게 되지만, 지역감정조장과 관련된 '초원복국집 사건'은, 오히려 역으로 영남표를 집결시켰고, 다시 김영삼에게 패배하였으며 결국 김대중은 정계 은퇴 선언을 하게 된다.

 

   하지만 3당합당으로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의 혼란과 여러 사건등은 김대중의 정계복귀 논의를 표면화 시켰고, 결국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대승을 거두면서 김대중의 정계복귀는 사실상 '승인'되어 복귀로 이어지며, 당시 대세였던 '이회창'을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재임기간동안 IMF 외환위기 극복에 전념하면서 IT, 벤처기업을 육성했는데, 확실히 가장 잘한 부분은 이 경제쪽 부분이었다. 대기업들이 IMF로 재편되는 동안, 벤처기업 육성정책은 빛을 발해 중소기업들의 성장과 경제기여율을 크게 높여주었다. 대한민국이 지금은 주춤하고 있지만 IT강국으로 도약한 것도 이것이 계기였다. 하지만 이후 '벤처=대박'이라는 잘못된 사회현상으로 이어졌고, 이를 바로 잡지 못해 많은 피해자들이 양산되기도 했다.

 

   대북정책은 그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상반되게 하는 부분이다. 연평해전등의 사태와 관련해, 전사자 보상과 관련해서는 관련법 미비의 문제가 있어 논란이 되었는데, 결국 우회적으로 24억원의 보상을 하였으며 법 개정도 하였지만, 표면적으로 국민감정을 고려하지도 못했고 북한에게도 제대로 항의하지 못했다. 이러한 기조는 참여정부, 즉 노무현 정권까지 이어졌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북한과의 화해협력 분위기를 우선한 정책이 그 배경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물론 그리하여 북한과의 사업도 늘렸고 북핵불능화에도 성공하는 역사적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북핵불능화는 북미갈등과 북한의 추가 핵개발 속에 무산되었던 것을 보면, 과연 북한의 무력도발과 핵 포기 과정등을 지나치게 별개로 보고 과도하게 교류-협력을 추진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기조는 맞았지만 '오버페이스' 였다는 이야기다. 특히 무상 현금 지원은 애초에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고 말이다. 앞서 말한 것 처럼 김대중 대통령이 '폐쇄 전쟁지양에서 적극 평화지향으로' 라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북정책의 큰 방향을 정한 건 높이 평가할 부분이지만, 확실히 잘못한 부분은 있었다. 정권이 거듭될수록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대북정책은 완성형에 다다르지 않을까?

 

   아무튼 재임중인 2000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퇴임후에는 자질구레한 사건들과 함께하다,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86세의 나이로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하였다. 그 이전에도 뭐 몰랐던건 아니지만 그 이후에 더 느꼈던 건, 확실히 근대 세계 민주화 운동 역사에서는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굉장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하긴 뭐 아예 박정희와 대적한 인물이니... 뭐 그러니 노벨상도 받긴 했겠지?

 

 

   아무튼 이 정도다. 역대 최고로 긴 위키를 정리해보았다. 이곳저곳에 내 의견을 넣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슈인 대북정책 부분에서만 내 의견을 넣기에도 빠듯했던 것 같다. 급마무리한 느낌인데, 자세한 내용, 그에 대한 긍정적/부정적 평가에 대한 정리등은 위키에서 꼭 확인해 보시길~!

 

 

 

 

 

 

 

8월 18일과 19일의 역사

 

- fin -

 

 

 

 

 

 

문장 어색한 부분 수정 (2013.8.17)

전남지부 해상방위대 관련 링크 추가 (2013.8.17)

T-4작전 관련, 문장 어색한 부분 수정 (201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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