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8월 4일과 5일의 역사 - 넬슨만델라 수감 시작, 에볼라바이러스, 라울 발렌베리

스마일루 2013. 8. 1.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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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는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1962년 수감된 뒤

1990년 백인 정부가 흑인들의 반발을 견디지 못하고 풀어줄 때까지 28년간 감옥에 있었다.

 

넬슨 만델라가 수감 이전 정치 활동 과정에서, 또 출소 이후

남아공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로 대통령이 된 뒤에 한 일 그 모두가 빛나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더더욱 빛나는 건,

그가 수감되어 있던 그 28년간의 암흑기 동안,

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변화시켜 온,

기어이 백인 스스로 만델라를 풀어주게 만든,

자유와 평등과 진정한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민들이 아닐까?

 

 

 

 

 

 

 

 

 

- 링 크 -

 

{'12. 8월 첫째주} 8월 5일의 역사

동의보감, 엥겔스

http://blog.daum.net/smileru/8888085

 

 

- 순 서 -

 

101년전, 1912년 8월 4일

제2차 세계 대전 때 수만 명의 유대인 생명을 구한

스웨덴의 외교관인 라울 발렌베리가 태어나다.

 

14년전, 1999년 8월 4일

치사율 80% 에볼라 바이러스가 독일에서 첫 출현

 

51년전, 1962년 8월 5일

넬슨 만델라가 수감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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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4일과 5일의 역사

Wikipedia

 

8월 4일

1875년 - 덴마크 동화작가 안데르센 사망.

1896년 - 조선이 행정 구역을 13도로 개편하다.

1909년 - 대한제국, 보부상(褓負商)들 모임인 대한상무부 발족

1912년 - 제2차 세계 대전 때 수만 명의 유대인 생명을 구한 스웨덴의 외교관인 라울 발렌베리가 태어나다.

1914년 - 미국, 제1차 세계 대전에 중립선언.

1914년 - 영국, 독일에 선전포고 (제1차 세계 대전)

1936년 - 그리스의 총리 요안니스 메탁사스그리스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시켜 8월 4일 체제를 세우다.

1914년 - 영국, 독일에 선전포고 (제1차 세계 대전)

1949년 - 그리스, 대한민국 승인

1961년 - 미국의 제 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 탄생.

1964년 - 한국군의 월남 파병안 국회 통과

1988년 - MBC 본사에서 도청장치 방송사고 발생.

1995년 - 크로아티아에서 폭풍 작전이 시작되다.

1997년 - 공인 기록상, 세계 최장수 인물인 프랑스의 잔 칼망 사망. 향년 122세.

1999년 - 치사율 80% 에볼라 바이러스 독일에서 첫 출현

2008년 -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향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하다.

 

 

8월 5일: 부르키나파소독립기념일 (1960년)

1895년 -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엥겔스 사망.

1907년 - 원주 진위대 장병, 군대해산에 항의 무장봉기

1930년 - 미국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 탄생.

1947년 - 고려레코드, 최초로 한국 기술진에 의한 음반제작 성공

1952년 -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제3대 부통령 선거 실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함태영 당선

1962년 - 넬슨 만델라가 수감되다.

1963년 - ·· 삼국이 핵실험금지조약을 맺다.

1965년 - 마릴린 먼로가 사망하다.

1995년 - 대한민국 최초의 상업위성인 무궁화 1호가 플로리다에서 발사되다.

1995년 - 미국과 베트남, 베트남전쟁 패망 후 20년 만에 외교관계 재개

2007년 - 대한민국의 리얼로드 야생 버라이어티, 강호동의 1박 2일 첫방송

2010년 - 칠레에서 산호세 광산 붕괴 사고가 발생하다.

 

 

 

 

 

 

 

 

 

 

   1912년 - 제2차 세계 대전 때 수만 명의 유대인 생명을 구한\

  스웨덴의 외교관인 라울 발렌베리가 태어나다.

 

 

   1912년 8월 4일, 중립국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라울 발렌베리가 태어난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엄친아였다. 금융회사로 유명한 스웨덴 최대 재벌인 '발렌베리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직계자손은 아니었던듯) 그는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는데, 이후 스웨덴 건축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가문이 금융가문이어서인지 후에 은행업에 종사하게 된다.

 

   하지만 노동자의 경영참여와 권리를 인정하고 특히 '노블리스 오블리주'로 유명한 발렌베리 가문에서 자란 탓이었을까?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막을 중립국 외교관이 필요하다는 소식에, 잘 다니던 은행에서 나와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스웨덴 대사관 외교관으로 직업을 바꾸게 된다. 이미 독일이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있는 상황이었음은 은연중 알려져 있었고, 은행업에 종사하면서 헝가리 쪽 유대인과 거래했던 그는 그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던 상태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1944년 7월에 헝가리에 도착했다.

 

   당시는 6월에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기세좋게 곳곳에서 독일을 몰아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물론 독일군의 저항도 상당했지만 큰 전투에서 대패하는 등 확실히 예전과는 분위기가 다른 상황이었는데, 그에 대한 분풀이는 바로 그들이 전쟁을 일으킨 목적중 하나였던, 유대인에게 가해졌다.

 

 

   이미 그리스와 헝가리 등 독일 동쪽에 있던 유대인들은 이미 4월부터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기 시작한 상태였다. 그곳으로 가게 되면 죽게 될 것은 뻔한 상황... 그에 라울 발렌베리는 아직 이송되지 않은 유대인들을 구하고자, 스웨덴 정부 명의로 건물 수십개동을 매입하여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동되려는 유대인들을 머물게 하였고, 그들에게 '보호 여권'을 발행해 스웨덴으로 돌아갈 스웨덴 국민이라고 주장해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을 막았다. 그렇게 해서 구해낸 유대인이 35,000여명에 달했다.

 

   그 외에도 독일 관리나 장교를 때로는 매수하거나 협상하거나, 또는 '전범'이 될 수 있다고 협박하기도 하는 등, 외교관의 지위를 최대한 활용해 그들을 회유하고 압박하였으며, 그렇게 해서 결국 그들이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이송하는걸 포기하게 만들어, 70,000여명의 유대인들을 또 구했다. 총 100,000명 이상의 엄청난 유대인들을 구한 것이었다. 목숨의 무게를 따질 수는 없는 것이다만, 유대인들을 구한 '쉰들러 리스트'로 유명한 '오스카 쉰들러'가 구한 1,200여명의 인원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숫자였다.

 

 

   그렇게 유대인들을 구한 라울 발렌베리는, 1945년 1월 17일에 소련군에 의해 체포된다. 사실 누가 체포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일단 소련이 개입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미국의 스파이라는 의심을 사서 체포되었는데, 그 후 그의 행방은 완전히 사라졌고, 1957년 2월 6일에 소련 정부는 라울 발렌베리가 1947년 7월 17일에 35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화장되었다고 발표했다. 1991년 러시아 정부는 다시 이에 대해 조사했는데, 1947년에 세상을 떠났음을 다시 발표했으며, 1983년에는 그를 감옥에서 봤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가, 2000년에는 그가 소련 내무 인민 위원부, NKVD에 의해 납치되어 1947년에 맹독으로 독살되었다는 설이 주장되기도 했다. 아직도 그의 가족들은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그런 그는 1948년과 1949년에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고, 오늘날 아르헨티나, 호주, 캐나다, 독일, 헝가리, 러시아, 스웨덴, 영국, 미국등에서 기념비와 동상, 나무, 거리, 교육기관, 기념우표, 명예시민 등으로 기려지고 있다.

  

 

 

 

 

 

 

 

 

   1999년 - 치사율 80% 에볼라 바이러스 독일에서 첫 출현

 

   찾아보니 위키피디아 내에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자가 1999년 독일에 첫 출현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단 1999년 8월에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독일로 돌아온 한 독일인이 눈과 귀에서 피를 흘리는 에볼라 출혈열 증상을 보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다른 질병인지 조사가 진행중이라는 이야기는 보이지만 확진판정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위키에 있는 이야기는 이 이야기인듯? 아무튼, 이렇게 된 김에 에볼라 바이러스 이야기로...

 

   에볼라 바이러스는 1976년 수단과 자이르(오늘날의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국제보건기구(WHO)의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숙주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과일박쥐'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여기에서 이야기 해 봐야 할 것이, '진화'라는 것은 결국 오랫동안 번영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는 사실 진화에는 불리하다는 것이다. 감염시켜버린 '숙주'가 금방 죽어버려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썩어버리면 전파가 잘 안되니까... 그래서 보통 '숙주'에 충분히 적응한 바이러스는 그리 치사율이 높지 않다. 조류독감 바이러스도 정작 새에게는 큰 해를 끼치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바이러스가 다른 '종'으로 옮겨가게 되면, 바이러스 또는 새로운 숙주의 면역체계가 기존 숙주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 바이러스 때문에, 또는 새로운 숙주의 과민 면역반응때문에 치사율이 급격하게 높아지곤 한다.

 

   에볼라 바이러스가 대표적인 바이러스라 할 수 있겠다. 숙주가 정말 과일박쥐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일박쥐 입장에서는 감기였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였을 그 바이러스가, 1976년 인간에게 전염되면서(돌연변이로 인해서?) 88%의 치사율을 보이게 된다. 이는 엄청난 치사율이다. 과거에는 치사율이 매우 높았지만 요즘엔 치사율이 20%대로 떨어진 HIV 바이러스(에이즈를 일으킨다) 보다도 심각한 최악의 바이러스였다.

 

   전염성도 높았다. 광견병 바이러스는 감염되면 거의 100% 사망하는, 에볼라 바이러스보다 치사율이 높은 유일한 바이러스인데, 타액이나 혈액으로 감염되기 때문에 보통 동물에게 물리는 식으로 전염되어 그 속도가 매우 느렸다. 사실 에볼라 바이러스도 체액으로 전염되긴 한다. 하지만 구토, 혈변, 출혈 등의 증상을 일으켜 전염을 쉽게 했고, 땀을 통해서도 전파되었다.

 

   결국 그 전염성과 치사율로 인해 1976년 첫 발생한 에볼라 바이러스는 지역 주민과 의료진 280명을 순식간에 몰살시켰다. (318명중 280명 사망, 치사율 88%) 모든 사망자들은 1주일내에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고, 모두 14일내에 사망했다. 만약 전염성과 치사율을 유지한 채 감염자들이 아프고 죽어가는 속도만 좀 더 느렸다면, 감염자들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심각한 사태를 일으켰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런 에볼라 바이러스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앞서 언급한 1976년 한 마을을 휩쓴 에볼라 바이러스가 '에볼라 자이르형'으로 가장 치사율이 높다. 장기가 전체적으로 손상되면서 코, 입으로 피를 흘리며 죽게 된다. 비슷한 것이 '에볼라 수단형'인데, 역시 1976년에 발생했지만 치사율은 60%내외로 조금 낮다. 1989년에 발견된 '에볼라 레스턴형'은 공기전염(!)이 가능한 형태였는데, 침팬지 같은 영장류에게는 치명적이었지만 인간에게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에볼라 아이보리 코스트형'은 역시 영장류에게 치명적이어서 영장류의 심장을 거의 파괴해 버렸다. 부검을 하던 과학자가 감염되었는데, 다행히 생존했다. 그리고 2007년에는 '에볼라 분디부교형'이 발견되었는데, 현재까지 이로 인해 200여명이 사망했고 치사율은 평균 60%에 달하는 상황이다.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등에서는 가끔 이렇게 에볼라 바이러스가 발병하고 있다고... 2012년에도 51명이 사망했다한다.

 

   이렇게 치명적인 에볼라 바이러스... 치료제는 없을까? 없다. 끝.

 

 

 

 

 

 

 

 

 

   1962년 - 넬슨 만델라가 수감되다.

 

   1918년 7월 18일에 '남아프리카 연방'(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식민지배시절 이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넬슨 만델라(오른쪽 사진, 1937년)는, 1940년대부터 대학교에서 법학을 배우며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에 가입해 학생운동을 시작한다. 그가 한 '운동'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프리카 연방의 백인 지배계층이 만든 '유색인종 차별 법안'으로, 인종을 '백인, 흑인, 컬러드, 인도인' 등으로 구분해, 주거, 결혼, 이동 등을 제안하고 각종 차별을 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델라는 1950년 ANC 청년동맹 의장이 되고, 1952년에는 백인이 아닌 사람 중에서는 처음으로 남아프리카 연방 요하네스버그에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하여 본격적으로 흑인인권운동에 뛰어든다. 그리고 같은 해에 ANC 부의장에 취임한다. 1956년에는 인도의 간디와 비슷한 '시민불복종운동'을 펼치게 되는데, 그로인해 반역죄로 체포당해 처음으로 감옥에 수감된다.

 

   그런데 1960년,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범아프리카 회의'가 연 집회에, 경찰이 실탄을 발포해 67명이 사망하고 400명이 부상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한다. 이에 평화투쟁을 벌이던 만델라는 노선을 전환, '민족의 창'이라는 군사 조직을 만들어 무장투쟁을 준비하게 된다.

 

   결국 그로 인해 또 반역죄로 수감되는데, 금새 무죄판결을 받고 출소한 만델라는 다시 무장투쟁을 준비한다. 이미 상당한 유명세를 떨치던 만델라의 그런 움직임은 정부입장에서는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었는데, 결국 1962년 8월 5일, 만델라는 '흑인의 거주지 이탈' 등을 죄목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그렇게 그의 28년간의 수감생활이 시작되게 된다. (왼쪽 사진은 만델라의 감방)

 

   그 28년간 만델라의 흑인인권운동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 정부측의 회유도 시도되었고, 만델라 진영의 석방노력도 계속되었지만 이뤄지지 못했었다. 하지만 28년이 흘러 그동안 신장된 흑인 인권과 높아진 흑인들의 목소리는 백인들을 진정으로 위협하게 되었고, 결국 백인들은 타협점을 찾고자 했다. 그에 따라 당시 대통령인 '데 클레르크'는 과거 체포된 인사들을 석방하고 금지된 단체들의 금지령을 해지하기에 이르며, 그렇게 해서 만델라는 1990년에 석방될 수 있었고, 그는 다시 ANC의 부의장에 취임, 1991년 7월에 백인정부와 협상을 벌여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시키기에 이른다. 350년간의 투쟁의 결말이었다.

 

   이후 1993년 넬슨 만델라는 만델라를 석방시킨 '데 클레르크' 대통령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199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1인 1표 민주 선거에서 65%의 지지로 당선된다. 대통령 시절에는 인종간 화해와 협력을 강조하며 '진실과 화해 위원회'(우리도 참여정부 시절 같은 이름의 위원회가 생겼었다)라는 과거사 청산 위원회를 설치해, 가해자가 과거 인권탄압 잘못을 고백하면 민사상 책임을 면제해주는 활동과 함께 자수하지 않는 범죄들을 찾아내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방대한 양의 살인, 사체소각, 암매장, 고문, 언론조작 등의 범죄를 밝혀낼 수 있었다. 또한 부흥개발계획(RDP)를 추진해 경제성장에도 힘썼고,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스와질란드와 잠비아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9년 만델라는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 때까지 노벨평화상을 비롯해 세계 곳곳의 수많은 평화관련 수상을 했던 그는, 2007년에는 은퇴한 세계 지도자들의 회의인 '세계원로회의'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최근 건강이 매우 안 좋은 상태로 병상에서 95세 생일을 맞이한 만델라... 여전히 인기가 대단한데, 우리나라야 말로 만델라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국가 단합과 민주주의 신장을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사실 가만 보면 만델라 보다는, 그가 28년간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노력해온 수 많은 사람들이 더 큰 역할을 했던 것 아닐까 싶다.

 

 

 

 

 

 

 

8월 4일과 5일의 역사

 

- fin -

  

  

 

 

 

 

 

오타 수정 (2013.8.2)

문장 어색한 부분 수정 (20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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