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소 박사는 한국의 핵개발에 전혀 참가하지 않았다.
오늘날 소설로 인해 그것이 사실인냥 잘못 알려지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똑똑하면서 한국을 위해 헌신한 애국 과학자라는 잘못된 인식을 넘어,
똑똑하면서 핵무장과 독재정권이 들어선 한국을 걱정한 평화주의 과학자이자
한국의 기초과학 발전을 염원한 과학자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미 사라진 피다만 무궁화 꽃을 추억할 것인가,
그 뜻을 이어 이제부터 새로운 무궁화 꽃을 피워갈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 링 크 -
{'12. 6월 셋째주} 6월 17일의 역사
대만 총독부, 소련의 발트3국 점령
http://blog.daum.net/smileru/8888061
- 순 서 -
50년전, 1963년 6월 16일
소련의 발렌티나 테레시코바가 보스토크 6호를 타고 여성 최초로 우주비행을 하다.
36년전, 1977년 6월 16일
대한민국의 물리학자 이휘소 사망.
9년전, 2004년 6월 16일
e하루616가 시작됐다.
추천? 손가락 클릭!
6월 16일과 17일의 역사
Weekly Voice
1897년 - 미국과 하와이 간의 합병 조약에 체결됐다.
1954년 - 스위스에서 FIFA 월드컵이 개막되었다.
1963년 - 소련의 발렌티나 테레시코바가 보스토크 6호를 타고 여성 최초로 우주비행을 하다.
1998년 -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와 함께 방북하다.
1291년 - 술탄 알 아슈라프 칼릴이 이끄는 무슬림 군대가 십자군의 최후 거점 도시인 아크레를 함락하다.
1462년 - 왈라키아의 블라드 가시공이 메메드 2세를 암살하고자 오스만 투르크 군대를 습격하다.
1631년 - 무굴 제국 황제 샤 자한의 왕비 뭄타즈 마할이 사망하다. 샤 자한은 이후 17년 동안 뭄타즈의 영묘 타지마할을 지으며 국고를 탕진하다.
1940년 -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의 발트 3국이 소비에트 연방에 점령당하다.
1953년 - 1953년 동독 폭동 사태가 일어났다.
1954년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첫 월드컵 경기가 개최되었고, 이 경기에서 헝가리에게 9:0으로 패배하였다.
1972년 - 워터게이트 사건: 5명의 괴한이 포토맥 강 변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선거본부에 침입하다.
1897년 - 미국과 하와이 간의 합병 조약에 체결됐다.
- 관련글 -
11월 18일과 19일의 역사 - 파나마운하와 미국의 대전략, http://blog.daum.net/smileru/8888140
1963년 - 소련의 발렌티나 테레시코바가 보스토크 6호를 타고
여성 최초로 우주비행을 하다.
소련의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는 17세부터 공장해서 일했던 평범한 노동자였다고 한다. 그런 그녀의 취미는 낙하산 타기였는데, 25살에 여성우주비행사 모집공고를 통해 그녀는 우주비행사에 지원했고, 결국 그 취미가 그녀를 26살에 여성 최초의 우주비행사로 만들어줬다.
이후 최초의 인공위성, 최초의 유인우주비행 타이틀을 소련이 차지한 상황속에서, 테레시코바는 최초의 여성우주비행사라는 타이틀을 소련에 안겨주기 위해 우주비행에 나섰다. 보스토크 6호를 타고 우주로 간 테레시코바는, 먼저 발사된 보스토크 5호와의 통신과 도킹 실험에 성공했
고, '여성이 우주환경에서 겪는 신체적 변화'의 실험대상이 되기도 했다.
70시간이 넘는 우주비행을 하고 난 뒤 지구로 돌아온 그녀는 유명인사가 되었는데, 계속 우주에 가고 싶었던 그녀의 뜻과는 다르게, 소련 정부의 의도대로 체제선전용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해, 이후 다시는 우주에 가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주 비행에 대한 환상적인 기억을 잊지 않고 있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더라도 화성에 가고 싶다고 최근 발언했다 한다.
이휘소는 일제강점기 시절이던 1935년 1월 1일에 3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대다수가 일본인 학생으로 채워진 경성사범학교에서 보냈는데, 이 때부터 책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이후 초등학교 4학년때 해방이 되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경기중학교에 입학해 이 때부터 화학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경기중학교 4학년 때(현재의 고1) 한국전쟁이 발발, 피난을 다니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국전쟁 도중이던 1951에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전쟁의 와중에 마산에서 중학교 5학년을 마친 그는, 검정고시를 치뤄 대학입학자격을 얻는다. 그리고 입학시험을 봤는데, 그 결과 1952년, 18세의 나이로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합격한다. 하지만 당시는 전시상황이었기에 부산의 한 가건물에 전국 대학교가 다 모여있었고, 그곳에서 힘겹게 학업을 이어갔다.
서울 수복후에는 서울에서 공부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힘겹게 한학기를 마치게 되자 이휘소는 화학보다는 물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혼자 양자역학을 독학했고, 한 책의 오류를 찾아내기도 했다고... 그러한 관심때문에 공대 화학과에서 문리과대 물리학과로 전과하려 했는데, 당시 서울대는 전과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전과를 하지 못한 상황에서, '한국전 참전 미군 장교 부인회'의 후원을 받는 유학장학생으로 선발되었고, 그렇게 1955년에 마이애미대학교 물리학과로 편입한다.
3학년과정으로 편입한 이휘소는, 1년 반만에 물리학과를 최우수로 조기졸업했고, 이후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하였으며, 1958년에는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리고 박사학위 자격시험도 수석으로 합격하는데, 그곳에서 원자핵 이론 강의를 담당했던 '시드니 메슈코프'는 그의 재능을 아까워해, 명문 대학인 펜실베니아 대학교 '에이브러햄 클라인' 교수에게 추천하는데, 그 결과 클라인 교수는 펜실베니아 대학교 대학원 박사 시험을 면제해주고 연구장학금도 주선해주면서 이휘소를 데려가게 된다.
이후 이휘소는 훗날의 명성만큼은 아니지만 서서히 연구성과를 보이며 명성을 높여가기 시작한다. 뛰어난 연구성과로 인해, 27세였던 1961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아인슈타인이 연구를 했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오른쪽 사진) 연구회원이 되었고 펜실베니아 부교수 자리를 보장 받았으며, 1962년에는 국제원자력기구 세미나의 미국인 대표 10인에 뽑히게 된다. 그리고 1961년 만난 말레이시아 화교인인 '마리안 문 칭 심'과 교제를 하다 결혼하게 되고 말이다. 그리고 1963년에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펜실베니아 대학교로 돌아가, 약속받은 부교수가 되며, 2년뒤인 1965년에는 펜실베니아 대학교 정교수가 된다.
그리고 60년대 말에서 부터 70년대까지 이휘소는 본격적인 연구성과를 내기 시작한다. 1964년에 지도교수 클라인과 함께 발표한 자발적 대칭성 붕괴에 대한 논문은, '신의 입자'라 불리며 최근 그 존재가 확인된 힉스입자의 존재를 예측한 힉스메커니즘의 등장에 크게 기여하였고, '맵시 쿼크'(참 쿼크, Charmed quark)의 존재가 예측되자 1974년에 그 질량을 예측하여, 연구자들이 그 예측을 토대로 실험을 시작해 실제로 참 쿼크가 발견되는데 기여하게 된다. 이 두가지가 대표적이긴 하지만, 이 외에도 굉장한 연구논문들과 그가 수행한 세미나들은, 훗날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밝혔듯 그들의 노벨상에 말 그대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게 페르미 연구소,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시카고 대학교 등 다양한 곳에 소속되어 광범위한 연구활동을 했던 이휘소는 곧 노벨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 많았는데, 하지만 1977년 오늘인 6월 16일, 페르미 연구소의 연구 심의회에 참가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맞은편 차선에서 타이어가 펑크나면서(추정) 차선을 이탈해 중앙의 20m가량의 잔디밭을 넘어온 대형 트레일러와 충돌하면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42세의 나이였다. 이러한 의문의 죽음은 후에 한국의 핵개발을 반대한 미국이 이휘소를 암살한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을 낳기도 했다. 일단 완전한 사고인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혹시 음모론적으로 생각해 본다해도 박정희가 이휘소를 암살한게 아니냐는 쪽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이휘소는 이런말을 했다한다.
"핵무기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특히 독재가 행해지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
- 훗날 제자 강주상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의 증언
"위수령 발동, 학생운동 탄압 등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로 우리가 추진중인 여름 학교 사업을 재고하게 됩니다 ...(중략)... 여름 학교의 책임을 맡게 된다면 내가 한국의 현 정권과 그 억압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까 걱정이 됩니다. 참으로 난처한 입장입니다. 한 편으로는 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하여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 싶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이러한 처사들에 실망되어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에서 이에 관한 초청이 오더라도 수락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엉뚱한 짓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한국 국민의 장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 1972년 한국의 초청을 거부하며 보낸 서신
실제로 이휘소는 그가 명성을 얻게 된 이후 박정희가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뒤, 한국의 각종 초청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독재를 하고 있는한 한국에 오라는 말도 꺼내지 말라고 했다고... 하지만 한국에 대한 관심은 놓지 않고 지도 학생이었던 강주상과 끊임없이 한국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해왔다고 한다. 한번은 미국 대표 자격으로 한국에 간 적이
있었는데, 소련 스탈린이 해외 자국 과학자들을 초청한 뒤 억류해 연구를 시킨 사례들 때문에 안전에 극도로 신경을 써, 주한 미국 대사관 숙소에서 머물기도 했다 한다.
대한민국 역사에 전무후무한 과학자였고, 핵개발과 독재에 반대했던 이휘소... 그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생존했다면 78세) 그랬다면 한국 과학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을테고, 그 사람 한명만으로 우리나라 기초과학 발전히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정말 너무나도 아쉬운데,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일... 지금이라도 제 2의 이휘소를 발견하고 그를 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e하루616은 인터넷상의 디지털 정보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온라인 캠페인이다. 현재 '다음세대재단'이 주관하고, Daum과 한국인터넷진흥원이 공동주최로 참여하고 있다.
보면 보통 웹보존 사이트나 서버들이 불특정 다수의 홈페이지들을 몽땅 저장해버리는 반면, e하루616은 사전에 추천을 받아 선정된 사이트들을 6월 16일에 저장하고 있다. 최근에도 진행한 듯.
2004년에 시작되어 매년 사이트들을 저장하고 있는데, '전시실'에 가보면 저장된 사이트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캡쳐본만 있는 듯? 사이트를 완전히 통채로 저장하는것도 좋을 것 같은데... 아무튼 과거의 우리나라 사이트들을 기록해두는 것도 참 의미있는 것 같다. 한번 사이트 가보시길.
- 참고 링크 -
6월 16일과 17일의 역사
Weekly Voice
오타 수정 (2013.6.17)
추천? 손가락 클릭!
'오늘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6월 30일과 7월 1일의 역사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솜 전투, 퉁구스카 폭발, 특수상대성이론 (1) | 2013.06.30 |
---|---|
6월 23일과 24일의 역사 - 7년전쟁과 유럽, 프레데릭 더글러스, 쿠베르탱과 올림픽의 부활 (0) | 2013.06.20 |
6월 9일과 10일의 역사 - 라마 9세, 6.10만세운동-6월항쟁-촛불집회 등 (0) | 2013.06.07 |
6월 2일과 3일의 역사 - 반달족 로마약탈, 최연소 미국영부인, 루게릭, 호메이니와 이란 (0) | 2013.05.30 |
5월 26일과 27일의 역사 - 표트르1세&상트페테르부르크,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종료 등 (0) | 2013.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