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5월 26일과 27일의 역사 - 표트르1세&상트페테르부르크,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종료 등

스마일루 2013. 5. 25.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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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에서 광주에 북한군 특수부대 600명이 투입되었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쭉 읽어봤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투입되었다면 그들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참 의문이다.

 

왜 북한군 특수부대는 한명도 죽지 않은걸까?

사망자 거의 전부가 광주에 연고가 있는데,

 

광주에 가족이 있는 특수부대원들만 골라 보내기라도 한건가? 그게 가능하기는 한가?

결국 진짜 명백한 사실은, 일각의 헛소리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사망자 중에 그렇게 죽임을 당했어야 할 북한군 특수부대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건 완전히 명백한 '팩트'다. 어떻게 그렇게 일반 시민들을 골라서 학살했단 말인가? 북한군은 없었다!

또 북한군이 600명이든 1명이든, 만약 시위를 부추기기만 하고 빠졌다고 해도,

결국 성격이 민주화 운동이며, 시민들이 주축이 된 시위였다는 것이 변함 없는 이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도대체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원...

이건 소설도 아니고 결말 몇 줄만 적어 놓은 포스트잇 수준이다.

생각해 볼 가치도, 여지도 없다.

 

스스로 왜 그러한 종이쪼가리를 믿게 되었는지 생각해봐라.

혹시, 그런 소리를 '자주가는 어디에선가' 단지 많이 들었기 때문일 뿐인건 아닌가?

 

아마 그럴껄?

 

 

 

 

 

 

 

 

 

 

 

- 링 크 -

 

{'12. 5월 넷째주} 5월 28일의 역사

1905년 5월 27일, 러일전쟁 : 쓰시마 해전이 시작되다

http://blog.daum.net/smileru/8888052

 

 

 

- 순 서 -

 

310년전, 1703년 5월 27일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 1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우다.

 

33년전, 1980년 5월 27일

대한민국에서 신군부가 광주 재진입 작전을 시행해, 광주 민주화 운동이 완전히 진압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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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일과 27일의 역사

Wikipedia

 

5월 26일: 가이아나(1966년)와 그루지야(1918년)의 독립기념일

1828년 - 정체불명의 소년 카스파 하우저뉘른베르크의 거리에 나타나다.

1905년 - 마산(馬山)∼삼랑진(三浪津)간 철도가 개통되다.

1927년 - 포드 모델 T의 생산이 종료되다.

1952년 - 동독이 내독국경 폐쇄

1971년 - 오스트리아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하다.

1972년 - 미국린든 존슨 대통령과 소비에트 연방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탄도탄요격미사일 조약을 체결하다. 이 조약은 후에 SALT-1으로 발전한다.

1999년 - 과학실험위성 우리별 3호인도 샤르 기지에서 발사되다.

2002년 -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이 제55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다.

2004년 - 제1차 남북 장성급 군사 회담금강산에서 열리다.

 

5월 27일

1564년 - 프랑스의 신학자 장 칼뱅 사망.

1703년 -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 1세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우다.

1829년 - 프로이센, 헤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사이에 통상조약 체결. 훗날 독일 관세 동맹으로 발전.

1840년 -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 사망.

1905년 - 러일 전쟁: 쓰시마 해전이 시작하다.

1941년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가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북대서양에서 침몰하다.

1960년 - 카말 귀르셀이 터키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1년 - 소련의 축구 골키퍼 레프 야신이 은퇴하다.

1980년 - 대한민국에서 신군부광주 재진입 작전을 시행해 전남도청을 무력으로 점령해, 광주 민주화 운동이 완전히 진압되다.

 

 

 

   1828년 - 정체불명의 소년 카스파 하우저뉘른베르크의 거리에 나타나다.

 

   참고글 : 12월 16일과 17일의 역사 - 독일의 미스테리 소년 카스파 하우저 사망, http://blog.daum.net/smileru/8888163

 

 

 

 

 

 

 

 

 

 

 

 

 

   1703년 -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 1세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우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내 문명연재에도 여러번 등장했고(핵공격을 받았던 것 같은데...), 이 도시를 세운 표트르 1세 역시 문명연재를 하며 자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문명5에서는 예카테리나 1세로 러시아의 지도자가 바뀐 관계로 다시는 문명연재에서 볼 수 없게된 표트르 1세를 기리며,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함께, 그 도시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빼 놓을 수 없는 표트르 1세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1672년 태어난 러시아 왕족 표트르 1세(오른쪽 그림)는, 첫째형 '표도르 3세'(표도르?)가 왕위에 오른 뒤 일찍 세상을 떠나자, 정신지체 장애인인 둘째형 '이반 5세'를 대신해  10살의 나이로 '차르', 즉 왕위에 오르고 어머니가 섭정 통치를 시작한다. 하지만 곧바로 1682년 이복누이 소피아 공주가 쿠데타를 일으켜, 표트르 주변 인물들을 살해하고 내쫓은 뒤 섭정자리에 올라, 표트르는 궁전 '크렘린'에서 쫓겨나 영국, 네덜란드인들이 모여있는 외인촌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표트르 1세는 다양한 문물을 접했다. 외인촌에서 공부를 게을리 하기도 했던 표트르 1세는, 석공술과 목수일에서 부터 대포를 주조하는 일등을 배우고 익혔으며, 기계를 들여다보는 일을 즐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이후 1689년 러시아가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서 지자,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소년병들과 함께 18살의 나이로 쿠데타를 일으켜, 소피아로부터 실권을 탈환하기에 이른다. 표트르 1세의 위대한 시작이었다고나 할까? 이후 1695년에 러시아는 다시 오스만제국과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 때 처음 전쟁에 참가한 표트르 1세는, 외인촌에 있을 당시 영국, 네덜란드인에게 배운 항해술과 선박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전무했던 러시아 해군 함대를 건설, 1696년에 그를 통해 오스만제국을 무찌르기에 이르고, 그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후 표트르 1세는 러시아의 발전을 위해 외국과 동맹을 맺음과 동시에 기술교류에 힘 썼는데, 왕의 신분을 속이고 위장한채로 사절단과 행동을 함께 하기도 했고, 프로이센에 갈 때는 포병부사관으로 신분을 속이고 대포 조작기술을 배웠으며, 네덜란드에서는 목수로 위장해 선박기술을 배웠고, 영국에 가서는 수학과 기하학을 배웠다. 그러한 기술, 학문적인 높은 지식을 습득한 표트르 1세는, 러시아의 낡은 관습, 행정기구, 법률, 언어, 교육 제도등을 뜯어고쳐, 서유럽에 비해 낙후되어있던 러시아를 빠른속도로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내정에 힘쓴 표트르 1세는 그 다음을 생각했다. 바로 러시아의 성장를 위한 '대전략'이었다. ('대전략'에 대해서는 문명연재에서 너무 많이 이야기 한 듯) 표트르는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발트해로 반드시 진출해 영향력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지정학적인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1700년, 표트르 1세는 발트해로 진출하고자 덴마크, 폴란드와의 동맹에 동참해 발트해를 장악하고 있는 스웨덴과 전쟁을 벌였다. '대북방전쟁'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전쟁 와중 표트르 1세가 국내로 잠시 복귀한 사이, 스웨덴의 용맹한 18살의 왕, '칼 12세'가 러시아군 사령부를 정면으로 돌파, 8500명의 병력으로 37000명의 러시아군을 분쇄시키는 대승을 거둔 '나르바 전투'로 인해 러시아는 패배하고 만다.  

 

   발트해로의 진출이 쉽지 않음을 절감한 표트르 1세는 묘안을 하나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발트해와 접한 군사용 요격 도시의 건설이었고, 그 도시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성스러운 표트르 대제의 도시'라는 뜻)였다.

 

   지정학적으로 봤을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에게 분명 유용한 위치에 있었다. 그에 표트르 1세는 17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을 시작하게 되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사실 버려진 땅으로, 애초에 강 하구에 여러 섬이 모여있는 습지이기도 해서 도시 건설이 어려웠다.

 

   이에 표트르 1세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건설해 군대를 우선적으로 배치한다. 그러자 서서히 도시가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대로된 도시의 모습을 갖추려면 할일이 많았다. 이후 습지를 메우기 위해 이곳을 통과하는 모든 선박과 사람들에게 일정량의 돌을 가져 올 것을 지시하게 된다. 노예들을 동원하여 습지를 메우게 했는데, 이 때 수많은 노예들이 숨졌고, 그들도 함께 습지에 묻어버렸다고 전해진다.  

 

   여튼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1세의 강력한 추진 속에 지속적으로 커갔으며, 동시에 스웨덴에게 설욕하기 위한 러시아 군대도 커가기 시작한다. 그러다 1708년, 이번엔 스웨덴이 러시아로 침입해오자 표트르 1세는 역공으로 상대했는데, 1709년 '폴타바 전투'(오른쪽 그림)에서 칼12세를 상대로 대승을 거둬 지난 1700년의 나르바 전투를 설욕하게 된다. (상당수의 스웨덴 포로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러시아는 발트해로의 진출권을 확보하게 된다. 

 

   이후 1713년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러시아의 수도를 옮긴 표트르 1세는, 1714년에는 '항코 해전'(왼쪽 그림)에서 스웨덴 함대를 격파하게 되며, 1710년대 후반에 표트르 1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근거지로 한 세계 최고 수준의 함대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결국 1721년, 발트해를 장악하고 있던 스웨덴은 러시아에 강화를 요청하게 되고, 1700년부터 시작된 '대북방전쟁'에서 러시아는 승리하게 되어, 20여년간 발트해로 진출하고자 했던 표트르 1세의 러시아를 위한 대전략은 완성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표트르 1세는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러시아 제국'으로의 전환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표트르 1세는 4년뒤인 172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건설 현장을 돌아보다, 한 병사가 물에 빠진 것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다가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 시작을 알린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오른쪽 사진)에 묻힌다. 세상을 떠나기 전 표트르 1세는 표트르 2세에게 왕위를 물려줬어야 했지만 둘째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한다. 여왕은 전례가 없었지만 표트르 1세는 밀어 붙였고, 그렇게 예카테리나 1세가 왕위에 오른다.  

 

   표트르 1세가 묻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후 101개의 섬을 500여개의 다리가 연결한 계획도시로 완성된 모습을 보이게 되었고, 이후 언제나 러시아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우선 그 지정학적인 위치 덕분에 러시아 최대의 무역항이 되었고 공업도시로 성장했다. 모스크바와 연결되는 러시아 최초의 철도가 연결되기도 했으니,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과 인천을 합친 급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또 수도였기에 문화적인 중요성도 매우컸다. 러시아에 사회주의 열풍이 몰아쳤을때도 '피의 일요일'과 같은 모든 큰 혁명운동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 사회주의 혁명이 진행되던 1918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수도의 지위를 다시 모스크바에게 내주게 되고, 소련의 성립 이후 1924년 1월 24일 사회주의운동가였던 '레닌'이 세상을 떠나자 26일에 이름이 '레닌그라드'로 바뀌게 되는데, 소련 붕괴 이후인 1991년 9월 6일에 옛 이름을 되찾게 된다. 이후 오늘날까지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많은 정치집회들이 열리고 있으며, 무엇보다 과거 표트르 1세 이후 러시아의 문화 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어, 도시의 넓은 구역이 통채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상태이다.

 

   표트르 1세와 그의 꿈, 대전략, 그를 위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이후 러시아의 역사까지... 크... 아무래도 다음엔 문명 연재를 할 때 러시아로 해야겠다. 끝.

 

 

 

 

 

 

 

  

 

   1980년 - 대한민국에서 신군부광주 재진입 작전을 시행해 전남도청을 무력으로 점령해, 광주 민주화 운동이 완전히 진압되다.

 

 

   요즘 말이 참 많은 광주 민주화 운동... 굳이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않겠다. 설명하자면 길어질 것이고, 그 길고 명백한 이야기를 해도 믿지 않을 사람은 믿지 않을테니까... 여튼 5.18에 대해서는 이미 전두환 정권은 물론 전두환 정권의 기록을 읽어본 해외 전문가들도 그 진정성을 인정하지 않았던가?

 

   최근글 : {5월 셋째주 정리} 5.18 폭동?, http://blog.daum.net/smileru/8888272

 

   하지만! 그래도, 오늘의 역사 이야기를 위해 얘기 해야겠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뒤, 1980년 5월에 전두환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북한의 남침설을 퍼트리고 계엄을 선포, 박정희 사후 민주화를 준비중이던 국회를 병력으로 장악하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의 정치인들을 감금한다. 동시에 전두환은 전국에서 반대 집회가 열릴것을 예상해 학교등을 서둘러 폐쇄했고, 지속적인 집회 장소 폐쇄와 집회 차단을 위해,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부터 이러한 상황을 대비해 미리 진압 훈련을 시켜둔 군부대들을 투입하기에 이른다.

 

   동시에 아무 근거가 없었던 '북괴남침설'은, 계엄령에 따라 배치된 전국의 군부대에 전파되어, 전국 어디서든 집회가 일어나면 그들을 북한의 소행으로 몰아 강경진압할 명분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북괴남침설'에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 미국에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흘린 헛소문이라 미국에 보고했고, 이에 미국 국무무 대변인도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다고 발표했지만, 당연히 우리 언론에서는 그런 발표가 보도되지 못했다.

 

   그렇게 전국 어디에서든 소요사태가 일어나기만 하면, 우리에게 오늘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기억되고 있는 대참사가 일어날 '시한폭탄'은 전국곳곳에 이미 준비되어있었던 상황이었다. 어디에서 터지느냐가 문제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5월 18일 오전, 군부대가 장악한 광주 전남대학교 앞에서 학생들이 출입을 막는 공수부대원들에게 항의를 하다 구타를 당했는데, 이미 며칠전부터 군부대의 학교 폐쇄를 예상했던 학생들이 모여들자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고, 공수부대원들의 폭력이 계속되면서 그러한 시위가 광주 시내까지 확산된다. 그 결과 19일에 공수부대가 추가로 투입되고,  결국 시한폭탄이 터지고 만다. 군 부대가 학생은 물론 근처 행인들까지 대검으로 찌르고 총을 쏘기 시작한 것이었다. 첫 발포였다. (위키에는 18일 오후 4시로 적혀있으나, 19일 오후 4시 30분에 발포가 이뤄졌다한다. 결국 18일 구타로 인한 사망자에 이어, 칼과 총에 의한 첫 사망자가 19일에 나왔다.)

 

   대립하던 한 쪽이 법이나 도덕의 한계선을 넘게되면, 이후 사태는 예측할 수 없게 되기 마련이다. 그 때부터는 '시궁창 싸움'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일단 18일의 사건 발생이후 19일과 20일에 집회가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규모는 더욱 커졌다. 19일에는 수천명이, 20일에는 20만명이 모여들었다. 그러다 방송에서 광주의 집회를 '북한의 소행'으로 몰자 시위대가 광주 MBC를 찾아가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날 저녁 11시, 군부대는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사격하기 시작한다.

 

   21일에도 군부대는 시위대를 향해 일제사격을 가했다.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도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그에 반발하는 시위대에게는 건물 옥상에서 조준사격을 가했다. 사태는 진압의 개념에서 학살로 변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럴 계획이기도 했었고...

 

   항의를 했더니 폭력이 가해지고, 돌을 던졌더니 총알과 대검이 날아온 끝에 사태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병원과 보건소에 사상자와 부상자가 미어터지는 상황에서, 5월 18일의 사태 이후 3일이 지난 21일 저녁부터 시위대는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로 무장을 하기 시작했고, 시청을 점거했다. 공수부대는 일단 광주 외곽으로 이동해 광주를 포위했다.

 

   그렇게 공수부대에 포위된 광주 안에서는 시민군들이 과잉 분출된 무기를 회수하고, 자체 치안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각계인사 15명은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21일 밤에 사태해결을 위한 7개항을 제시한다.

 

 

1. 사태수습 전에는 군을 투입하지 말 것

2. 연행자를 전원 석방할 것

3. 군의 과잉 진압을 인정할 것

4. 사후 보복을 금지할 것

5.상호 책임을 면제할 것

6. 사망자에 대해 보상할 것

7.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을 해제하겠음

 

 

   7개항에 대해 책임자였던 소준열 전교사령관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이에 전두환은 23일에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은 친필메모를 전달한다.

 

 

"공수부대의 기를 죽이지 마시오. 희생이 따르더라도 광주사태를 조기에 수습해주십시오."

 

 

   이에 25일 '광주 재진입 작전'(상무충정작전)이 수립되고, 27일에 그를 시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27일에 진압을 하겠다는 통보가 시위대에게 전해졌다. 이에 광주 시위대는 전남도청별관에 끝까지 남기로 한 157명을 제외한 남은 시위대의 무기를 회수하여 대피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5월 27일이 왔다. 20317명의 군대가 5개의 방향에서 투입되었다. 157명이 남았던 전남 도청은 1시간 반도 되지 않아 점령되었다. 진압 작전 중 사망한 시위대는 18명이었고, 그 외에 10명의 일반 시민은 오인사격, 유탄, 수하불응등의 이유로 총에 맞아 사망해, '광주 재진입 작전'으로 총 28명이 사망했다. 군인은 2명이 사망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전체적으로는 5월 27일의 사망자 28명을 포함해, 165명이 사망했고, 사체가 유기된 것으로 추정되는 행방불명자들은 65명이며, 부상으로 27일 이후에 사망한 사람은 376명이었다. 총 606명이 숨진 것이다. 나이는 2세에서부터 72세까지 다양했는데, 중고등학생이 25%였다. 군인과 경찰도 27명이 사망했는데, 10여명은 스스로 오인사격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 죽지 않은 부상자들은 수천명에 이르는데, 부상으로 27일 이후에 사망한 376명중 39명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한다. 그 때의 충격으로 인한 고통때문이 아니었을까?

 

 

 

 

    일부에서 광주에 북한군 특수부대 600명이 투입되었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쭉 읽어봤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투입되었다면 그들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참 의문이다. 군인, 경찰 사망자가 10명 정도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를 보면 그 대단한 북한 특수부대가 군인, 경찰과 교전을 벌인 것 같지도 않다. 무기를 탈취해다가 시민들에게 줬을까? 일반 시민들이 평화 시위만 할까봐? 그럼 겨우 그거하려고 광주까지 600명이나 왔을까?

    또, 왜 북한군 특수부대는 한명도 죽지 않은걸까? 사망자 거의 전부가 광주에 연고가 있는데, 광주에 가족이 있는 특수부대원들만 골라 보내기라도 한건가? 그게 가능하기는 한가?

    

    결국 진짜 명백한 사실은, 일각의 헛소리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사망자 중에 그렇게 죽임을 당했어야 할 북한군 특수부대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건 완전히 명백한 '팩트'다. 어떻게 그렇게 일반 시민들을 골라서 학살했단 말인가? 어떻게든 북한군을 끼워넣고 전무한 사망자를 설명하기 위해, 북한군이 600명이든 1명이든 만약 시위를 부추기기만 하고 빠졌다고 해도, 결국 성격이 민주화 운동이며 시민들이 주축이 된 시위였다는 것이 변함 없는 이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오른쪽 이미지는 영화 '26년' 중 한 장면) 

 

    아니 도대체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원... 이건 소설도 아니고 결말 몇 줄만 적어 놓은 포스트잇 수준이다. 생각해 볼 가치도, 여지도 없다. 스스로 왜 그러한 종이쪼가리를 믿게 되었는지 생각해봐라. 혹시, 그런 소리를 '자주가는 어디에선가' 단지 많이 듣게 되었기 때문일 뿐인건 아닌가? 아마 그럴껄?

 

 

 

 

 

 

 

 

5월 26일과 27일의 역사

 

- fin -

 

 

 

 

문장 어색한 부분 수정 (2013.5.26)

오타 수정 (2013.5.26)

예카테리나 1세가 문명5에 등장했다고 한 부분 수정 (예카테리나 2세가 등장함. 2013.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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