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5월 19일과 20일의 역사 - 인류역사 전환의 대흐름 : 앤 볼린, 잉글랜드 공화국

스마일루 2013. 5. 17.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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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쩌다 영국 특집이 되어버렸지만, 결론적으로는 영국 이야기가 아니다.

민주주의와 과학이라는 것에 '각성'하게 된 인류 역사 전환의 대흐름,

어쩌면 지금 그 '각성'의 2.0 버전이 진행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그 흐름,

그에 대한 이야기다.

 

 

 

 

 

 

 

 

- 링 크 -

 

{'12. 5월 셋째주} 5월 20일의 역사 :

스튜어트 밀, 리바이스 청바지, 미터협약, 대서양 횡단

http://blog.daum.net/smileru/8888047

 

 

 

 

- 순 서 -

 

477년전, 1536년 5월 19일

헨리 8세의 두번째 부인 앤 볼린이 불륜을 죄목으로 처형당하다.

 

364년전, 1649년 5월 19일

청교도 혁명: 잉글랜드가 공화제를 선언하면서 잉글랜드 연방이 성립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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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과 20일의 역사

Wikipedia

 

5월 19일

1536년 - 헨리 8세의 두번째 부인 앤 볼린이 불륜을 죄목으로 처형당하다.

1546년 - 일본 센고쿠 시대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 후 호조씨가 우에스기씨 연합군을 격파.

1643년 - 30년 전쟁: 프랑스로크루아에서 프랑스군 지휘관 대 콩데스페인군을 격파하는 매우 의미있는 승리를 거두다.

1649년 - 청교도 혁명: 잉글랜드가 공화제를 선언하면서 잉글랜드 연방이 성립되다.

1769년 - 교황 클레멘스 14세, 249대 로마 교황 취임.

1848년 - 멕시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비준

1890년 - 베트남의 혁명가 호찌민.

1941년 - 호찌민을 중심으로 하는 비엣민을 결성하다.

1961년 - 민족일보가 폐간됐다.

1962년 - 존 F. 케네디의 생일잔치가 TV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는데 메릴린 먼로가 부른 축하 노래가 유명하다.

5월 20일

2002년 - 미국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 탄생.

1873년 - 리바이 스트라우스청바지의 미국 특허를 받다.

1891년 - 토머스 앨바 에디슨이 최초의 등사기를 대중에 공개하다.

1927년 - 미국의 찰스 린드버그가 최초로 뉴욕-파리간 무착륙 비행에 도전하다.

1940년 - 유대인 대학살: 나치가 만든 아우슈비츠 수용소(사진)에 처음으로 수용자들이 들어가다.

1978년 - 일본나리타 국제공항이 개장하다.

2002년 - 동티모르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하다.

2002년 - 미국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 사망.

2006년 - 박근혜 피습 사건 : 신촌에서 선거 운동을 하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19시 20분경에 피습당하다.

 

 

 

 

 

 

 

 

   1536년 - 헨리 8세의 두번째 부인 앤 볼린이 불륜을 죄목으로 처형당하다.

 

   '앤 볼린'(왼쪽 그림, 앤 불린이라고도 읽는듯?)은 명망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프랑스 루이 12세의 왕비 '메리 튜더'의 시녀였던 인물이다. 세련된 기품을 지닌 그녀는, 이후 영국 헨리 8세의 왕비 '캐서린'의 시녀가 된다. 그리고 앤 볼린은 공작들과의 두번의 결혼 시도에 실패하게 되는데, 그런 그녀를 영국의 왕 헨리 8세가 정부, 즉 내연녀로 두고자 한다. 이미 헨리 8세는 앤 볼린의 언니인 '메리 볼린'을 내연녀로 둔 적이 있었는데, 앤 볼린은 왕의 구애를 거절하고 정식으로 결혼해 줄 것을 요구했다.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 사이에서 아들을 두지 못했었는데, 결국 헨리 8세는 앤 볼린이 아들을 낳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그녀와 결혼하기로 마음 먹는다.

 

 

   1527년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을 시도한다. 하지만 왕비 캐서린과 로마교황청이 거세게 반대하는데, 이에 헨리 8세는 '종교개혁'을 일으켜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카톨릭, 즉 교황의 영향권에서 분리시켜 버린다. 이후 헨리 8세는 앤 볼린에게 미혼 여성에게는 최초로 '여후작'의 지위를 내리고, 영국 교회가 헨리 8세의 영향력으로 완전히 들어가버린 상황에서 영국의 '크랜머' 대주교는, 헨리 8세와 캐서린과의 결혼이 성서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이혼의 근거를 마련해준다.

 

   그렇게 1533년, 헨리 8세는 앤 볼린과 정식으로 결혼한다. 이미 '속도위반'으로 앤 볼린은 임신한 상태였다. 이후 앤 볼린은 왕비 즉위식까지 치루게 되는데, 출산을 했지만 딸이었다! 캐서린에게서 얻지 못했던 아들을 기대한 헨리 8세는 실망했는데, 이후에도 유산이 반복되면서 앤 볼린은 결국 아들을 낳는데 실패했고 헨리 8세와도 자주 다투게 된다.

 

   이후 헨리 8세는 캐서린의 시녀 앤 볼린에게 관심을 뒀던 것 처럼, 앤 볼린의 시녀 '제인 시무어'(오른쪽 그림)에 관심을 두게 되고, 앤 볼린은 '제인 시무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치적으로도 공격받기 시작한다. 결국 1536년에 앤 볼린과 남동생 로시포드 공작 '조지 불린'을 비롯한 측근들은, 간통, 반역, 근친상간 등의 혐의로 런던탑에 감금된다. 앤 불린은 마법으로 왕을 유혹했다는 혐의까지 받게 된다. 사실 증거라고는 없었지만 결국 유죄판결을 받게 되었고, '화형'이 결정된다.

 

   하지만 헨리 8세는 마지막 양심이 있어서였는지, 화형이 아닌 '참수형'(!)으로 감형을 시켜줬고, 당시 참수에 쓰이던 '도끼' 대신 잘 드는 '칼'을 쓰게 하여 노련한 칼잡이를 고용하기도 했다. 사실 배려라면 배려인 것이, 도끼로 참수하는 경우 '잘 안 잘라져서' 끔찍하게도 여러번 내리쳐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앤 볼린은 자신의 시녀들에게 "내 목이 가늘어서 다행이다" 라는 말을 남겼고, 동생이 처형당한지 이틀 후인 1536년 5월 19일에 참수된다. 사형장에서 앤 볼린은 "왕에게는 잘못이 없으니 충성을 다해달라"고 말했고, 잘 드는 칼과 노련한 칼잡이를 고용한 덕인지, 단칼에 참수가 진행되었다.

 

 

   결혼한지 4년만에 참수당한 앤 볼린... 이후 헨리 8세는 결국 앤 볼린의 시녀 '제인 시무어'와 결혼하는데, 제인 시무어는 헨리 8세가 바라던 아들을 낳는데 성공하지만, 출산과 함께 제인 시무어는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만다. 제인 시무어의 아들인 '에드워드 6세'는 헨리 8세가 세상을 떠나자 1547년에 왕위에 오르지만, 그도 1553년에 16살의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헨리 8세의 저주라고 불러야 할 정도다. 앤 볼린의 저주일까나?

 

   이후 헨리 8세 누나 딸의 딸이었던 '레이디 제인 그레이'가 여왕이 되는데, 헨리 8세의 첫 왕비, '캐서린'의 딸인 '메리 1세'가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9일만에 여왕자리에서 몰아내 참수 시키고 여왕자리에 올라 사실상 영국 첫 여왕이 된다. 여왕이 된 메리 1세는 아버지인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을 뒤엎고 로마 카톨릭으로 돌아가고자 반대파들을 탄압해 '피의 메리'라는 별명을 얻는다. 한편 그녀는 난소 종양에 걸려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런 메리는 결국 1558년에 병사하게 되며, 이후 200년동안 그녀의 병사일이 '해방일'로 기념되기에 이른다.

 

   헨리 8세가 사망한 이후 에드워드 6세부터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거쳐 메리 1세에 이르기까지, 1547년에서 부터 1558년까지 11년간은 영국 역사에서 가장 황폐했던 기간으로 불린다. 하지만 해 뜨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헨리 8세이후 에드워드 6세와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거쳐, 아이를 낳지 못했던 메리 1세의 뒤를 이어 앤 볼린과 헨리 8세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딸이 여왕자리에 오르니, 그녀가 바로 영국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만들 발판을 마련한 엘리자베스 1세였다. (왼쪽 그림. 1546년 14세 때 그림. 엄마 앤 볼린과 많이 닮은 것 같지 않나?)

 

(이어서 계속)

 

 

 

 

 

 

 

 

   1649년 - 청교도 혁명: 잉글랜드가 공화제를 선언하면서 잉글랜드 연방이 성립되다.

 

   아버지 헨리 8세의 종교개혁에서 시작하여, 이후 어머니 앤 볼린의 참수, 이어진 권력 다툼과 메리 1세의 종교탄압 등을 보고 들으며 자라온 엘리자베스 1세... 그로 인해 종교를 숨기다시피하며 성장한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의 극단성'을 배척하는 '르네상스'형 인물이었다. 1558년 즉위한 이후 종교문제를 잘 매듭지었고, 경제와 국방에 전념했다.

 

   그렇게 영국은 성장했고, 엘리자베스 1세는 세상을 떠나던 1603년까지 무려 45년간 영국을 통치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1603~1625, 왼쪽 그림), 찰스 1세(1625~1649)는 달랐다. 일단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바로 뒤를 이은 제임스 1세의 경우는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로 꼽긴 했지만 아예 다른 집안 인물이었다. 게다가 말 그대로 위대했던 엘리자베스 1세의 그늘에 가려 인기도 없었는데, 결국 그들은 종교를 바탕으로 한 '왕권 신수설'로 지배권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헨리 8세때 부터 시작된 종교갈등 이후 엘리자베스 1세와 같은 인물이 등장했던 것 처럼, 로마 카톨릭과 영국 성공회 모두를 개혁해야 한다는 칼뱅주의 개신교인 '청교'까지 성장하면서 종교 '통제'에 저항했다. 그 결과 제임스 1세 시절에는 영국 성공회로의 개종 압박을 피해 청교도 인들이 신대륙으로 떠나 훗날 '미국'이 되는 식민지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결국 종교를 통해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일련의 흐름에, 억압받던 종교인들은 물론, 종교를 명분으로 극심한 독재로 흘러가는 왕의 권력에 의회마저 반대하게 되면서, 기어이 사단이 일어나고 만다.

 

   1628년, 찰스 1세(오른쪽 그림)가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인한 세금을 부과하려하자 불만이 쌓여가던 의회가 반기를 들게 되고, 이후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하지만 스코틀랜드에 영국 성공회를 강요하다 또 전쟁이 발발, 찰스 1세 단독으로 전쟁을 치루다 스코틀랜드에 패배하면서 배상금 지불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의회를 소집해, 결국 세금을 걷는 대신 의회의 요구들을 대거 들어주고 만다. 이후 주도권을 잡은 의회는 왕 주변에 섰던 인물들을 쳐내기 시작하는데, 결국 이에 왕권의 위협을 느낀 찰스 1세가 1641년에 근위병 400명을 의회로 보내 의원들을 체포하고자 했지만, 이미 의원들은 그를 알고 도주한 뒤였다. 서로가 서로의 의중을 완전히 알아버린 상황... 결국 내전이 시작되고 만다.

 

   잉글랜드 내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642년 전쟁이 발발하자 찰스 1세는 초반에 정규군과 외국 용병들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지만, 청교도인인 '올리버 크롬웰'이 신식군대를 이끌고 승승장구했고, 결국 1646년 패배하면서 유배당하고 만다. 그곳에서 찰스 1세는 재기를 노려 내전을 다시 일으키지만, 1년만인 1647에 최종적으로 패배한다. 결국 올리버 크롬웰은 '처형은 하지 말자' 라는 의원들을 몰아내고 찰스 1세를 1649년에 처형한다. 그리고 1649년 5월 19일, 앤 볼린이 참수 당한지 113년이 흐른 그 날에, 잉글랜드 연방, 잉글랜드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되기에 이른다.

 

 

 

   사실 이후의 상황이 해피앤딩은 아니었다. 승리에 도취된 올리버 크롬웰은 이후 군사독재를 하다 참수 당했고, 찰스 2세가 다시 왕위에 오르며 왕권이 복원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다음 왕인 제임스 2세때 다시 한번 종교와 왕권신수설 문제로 인한 갈등이 생겨나자, '명예혁명', '권리장전'으로 이어지며, 1688년에 영국에서 '전제군주제'는 완전히 폐기되고 오늘날과 유사한 '입헌군주제'로 변모하게 된다.

 

   이런 흐름을 쭉 보면, 결국 시작은 헨리 8세가 앤 볼린과 결혼하기 위해 종교개혁을 일으키며 영국 성공회를 만들면서 부터인 것 같다. 물론 역사라는 것이 꼭 그렇게 말할 수 없다지만 굳이 한 시점을 꼽자면 말이다. 잉글랜드 공화국과 명예혁명 이후 영국에는 민주주의가 다가왔고, 책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 '대런 애스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심지어 '산업혁명'도 결국 '명예혁명'으로 인한 '민주적인 사회의 분위기'가 만들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인류가 거듭난 단 하나의 시점을 꼽자면, 종교에서 탈피한 그 시점 부터라고 말하고 싶다. 종교 혁명 이후의 종교 갈등으로 종교적 극단주의를 배척한 엘리자베스 1세와, 이후 종교 갈등으로 인한 영국 왕권의 붕괴, 그리고 이어진 산업혁명...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인한 교황권의 붕괴와 이어진 르네상스로 인한 이탈리아 중심의 과학&문화의 발전까지...

 

   더 재미있는건 뭘까? 앞서 말한 것 처럼 개인적으로 인류역사 대전환의 분기점은 이러한 종교 탈피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그러한 역사의 과정은 1600년대에서 부터 1800년대까지, 거의 한 200년 정도가 걸렸다는 것이다. 그 '근세' 시대를 전후로 하여 인류의 모습은 정말 큰 차이를 보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 '더 재미있는 것'이란... 그 다음은 무엇일까? 그 다음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인류의 모습을 전후로 비교해 보았을 때 완전히 뒤바꿔 놓을 전세계적인 흐름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과학의 발전과 같은 과거의 모습,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 혹시 최근 Weekly Voice에서도 이야기 했던 인터넷을 통한 사람과 사람사이의 초연결, 초협력... 그것으로 인한 직접민주주의에 근접하는 고도의 민주주의 사회와, 사람과 사람 또는 기술과 기술간의 고도의 협력적 과학발전이, 우리는 지금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인터넷의 등장 이후 수십년에 걸쳐 인류와 인류사회의 모습을 다시 한번 완전히 뒤바꿔 놓고 있는 중인 것은 아닐까?

 

   난 그렇다고 본다. 우리는 분기점을 지났고, 역사 전환의 대흐름이 시작되었다.

 

 

 

 

 

 

 

5월 19일과 20일의 역사

 

- fin -

 

 

 

 

 

 

 

잘못된 내용 수정 (2013.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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