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5월 5일과 6일의 역사 - 수에즈 운하, 옴진리교 사린가스 테러 등

스마일루 2013. 5. 3.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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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4000년만에 현실이된 수에즈 운하...

답답한 갑문도 없고, 넉넉한 크기에, 파나마 운하에 두배가 넘는 길이를 가진 그런 운하다.

 

하지만 대륙을 관통할 수 있다는 지정학적 이득은,

파나마 운하가 그러했듯 충돌을 불러올 수 밖에 없었다.

 

 

 

 

 

 

- 링 크 -

 

{'12. 5월 첫째주} 간단: 오늘의 역사

5월 6일, 프로이트 탄생, 에펠탑 개관, 정인보, 몬테소리

 

 

 

- 순 서 -

 

57년전, 1956년 5월 5일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하다.

 

18년전, 1995년 5월 5일

신주쿠 역에 사린 가스 사건이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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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과 6일의 역사

Weekly Voice

5월 5일: 대한민국일본어린이날

1818년 - 독일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 탄생

1821년 - 나폴레옹 1세가 유배지인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사망하다. 

1929년 - 조선비행학교가 개교하다.

1956년 -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하다.

1957년 - 대한민국에서 어린이 헌장이 제정·공포되다.

1961년 - 대한민국 정부가 1923년부터 치뤄졌던 어린이날을 이날로 공식 제정하였다.

1973년 - 서울특별시어린이대공원이 개원하다.

1983년 - 중국의 민항기가 공중 납치돼, 당시 적성국이던 대한민국춘천에 불시착하여 외교적 파장을 일으켰다.

1984년 - 아이치 현 도요하시 시도야바 시민 구장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의 사바하라 선수가 타격 연습을 하다가 방망이가 부러져 여고생이 병원에 실려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95년 - 신주쿠 역에 사린 가스 사건이 발생하였다.

 

5월 6일

1840년 -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우표가 유통되다.

1856년 -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탄생.

1889년 - 에펠 탑이 개관하다.

1937년 - 독일의 체펠린 비행선 LZ 129 힌덴부르크 폭발사고가 일어나다.

1952년 - 이탈리아의 교육자 몬테소리 사망.

 

 

   1818년 - 독일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 탄생

 

   관련 글 링크 : 문명4BTS-(#7-6)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http://blog.daum.net/smileru/8887864

 

 

 

 

 

 

 

 

  

   1956년 -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하다.

 

   파나마운하에 대해서는 블로그에서 여러번 다뤘던것 같다. 오늘의 역사에서도 그렇고, 문명연재에서도 그렇고... 그래서 오늘은 수에즈 운하 역사가 '걸린'김에, 수에즈 운하에 대해서 간단히 다뤄보고자 한다. 뭐 그러고선 맨날 길어지는게 문제이긴 한데...   

 

   파나마 운하의 경우는 1500년대에 프랑스 인들이 파나마에 운하를 건설하면 좋겠다는 발상을 했었다. 그러다가 1880년에 그를 직접 실행에 옮겼고, 21900명이 죽은 뒤에야 포기했다. 그러다가 1900년대 초에 프랑스와 미국이 다시 도전해 1914년에 완성했고 말이다.

 

   참고글 : 11월 18일과 19일의 역사 - 파나마운하와 미국의 대전략, http://blog.daum.net/smileru/8888140

 

   수에즈 운하는 파격적이다. 수에즈 운하의 경우는 기원전 2100년에 벌써 그 아이디어가 존재했었다. 당시 그 지역에서 발달했던 위대한 문명, 바로 이집트 문명 때문이었다. 그들이 운하를 고려했던 이유는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의 교역 증대 때문이었다. 태평양과 대서양간의 물류이동과 지정학적인 전략고려까지 포함되어 있던 파나마 운하와는 다소 다른 부분이다. 하지만 당장은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아이디어보다는, 이집트 내륙과 홍해를 연결하는 아이디어가 우선되었다. '진짜 운하' 보다는 '경인운하' 같은 느낌? 일단 기원전 2000년경 이집트 제 12왕조의 왕인 '세누세르트 1세'가 홍해 수에즈만에서 부터 이집트 내륙 '자가지그'까지 연결되는 수로를 건설하면서 수에즈 운하의 초석을 다진다.

 

   그러다가 이집트 제 26왕조의 왕인 '네코 2세'가 기원전 600년경에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긴다. 하지만 예언가들이 운하 건설을 반대하면서 운하 건설은 중단되고 만다. 이후 기원전 500년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1세가 '세누세르트 1세'가 만든 운하를 보수, 재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후 이집트 지역이 중동 이슬람 제국에게 점령당한 뒤 이슬람 내분으로 이집트 지역이 혼란에 빠지게 되자, 운하는 효용성을 잃고 잊혀지게 된다.

 

   이후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고자 한 이들이 등장했으니, 그들은 놀랍게도 파나마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인들이었다. 1798년 이 지역을 점령했던 나폴레옹은 기존에 절반정도 건설되어 있던 운하를 아예 지중해까지 잇는, 근 4000년전 이집트 인들의 구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설계자의 계산착오로 시간만 낭비한채 공사는 중단되고 만다. 그나저나 프랑스 인들 '종특'이 운하 파기, 운하 구상하기 인듯?

 

   그러다가 1859년, 진짜 공사가 시작된다. 운하가 건설되면 물류 이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국제적 여론이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수에즈 운하 지역은 오스만 투르크의 점령지였는데, 오스만 투르크는 운하가 건설되면 서구 열강들이 수에즈 운하를 통해 터키를 공격하지 않을까 우려해 공사를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국제적 여론이 너무도 강해 공사를 수락하게 되고, 그 공사를 프랑스 인들이 맡는다.

 

   공사는 카이로 주재 프랑스 영사였던 '드 레셉스'가 맡게 되었다. (그는 이후 파나마 운하 건설에도 참여한다) 처음에는 '인력'으로만 공사가 진행되었다. 수만명의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는데, 사막지역에서 일하는 그들에게 물과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운하와 중간 항구를 별도로 건설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3년부터는 굴삭기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1869년 10월에 첫 배가 홍해에서 지중해로 이동하는데 성공한다. 공식 개통일은 1869년 11월 17일이다. 건설이 시작된지 10년만이었다.

 

   수에즈 운하의 길이는 162.5km(실거리 192km)로, 77.1km(실거리 81.6km)의 파나마 운하의 배가 넘는 거대한 운하다(그 중에 이집트 인들이 운하를 파기 전부터 자연적으로 존재했던 물길이 상당구간을 차지한다). 더 놀라운건, 산을 타고 넘는 듯한 파나마 운하의 경우에는 갑문이 많은데 수에즈 운하에는 갑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길이에 비하면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파나마 운하보다는 길어도 짧은 편이다. 또 지중해와 홍해의 해수면 차이도 거의 없어서 운하를 통과하는데 별 문제도 없다한다.

 

   그러한 수에즈 운하의 효용성은 상당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다보니 이권다툼이 거셌다. 우선 운하가 완공된지 6년뒤인 1875년에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드 레셉스'가 세운 '만국운하회사'의 지분을 사들여 대주주가 되고, 이후 이집트와 이집트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프랑스와 오스만 투르크가 약해진 틈을 타, 영국은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만들고 수에즈 운하의 운영권을 손에 넣는다. 수에즈 운하는 '대영제국'의 지정학적 이익을 위해 꼭 손에 넣어야만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파나마 운하와 이제 슬슬 스토리가 비슷해지는 듯? (위에 링크한 글 보시길)

 

   상황이 이리되자 1888년에는 터키와 유럽 주요국들이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맺어 운하를 누구나 정당한 대가를 내고 이용할 수 있게 하지만, 영국은 운영권을 꽉 틀어쥔 채 그를 놓지 않았다. 그런 와중 이집트 내에서는 영국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졌고, 수에즈 운하는 그들에게 수탈의 상징이 되어갔다.

 

   결국 1차세계대전이 종전되고 몇년되지 않은 1922년 2월 28일에 이집트가 독립 하게 되자, 이후 1936년에 영국은 이집트와 '영국-이집트 동맹'을 맺고 수에즈 운하에 영국군을 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를 보장 받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51년 2차세계대전 와중에 이집트는 영국과의 동맹을 파기해버린다. 그 결과 영국군은 수에즈 운하에서의 철수를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건국(1948)으로 벌어진 제1차 중동전쟁과 아랍-아프리카 식민지배에 반대하며 국제사회와 마찰을 빚던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은, 서방국가들이 제재를 가하자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시켜버린다. 그러자 비밀 군사협정을 맺은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해 수에즈 운하를 점령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제2차 중동전쟁이었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 군을 압도했지만, 국제적인 비난속에 결국 그들은 수에즈 운하에서 다시 철수하고 만다. 이후 이집트 정부도 이러한 갈등의 원인이라면 원인인 수에즈 운하의 전면적 자유 통행을 1956년에 보장하면서 수에즈 운하로 인한 갈등은 일단락 된다. 하지만 이스라엘 국적 선박은 1979년에서야 제대로 통행할 수 있었다고...

 

   이를 보면 확실히 '운하'라는,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놀라운 시설물은, 미국과 영국같은 시대를 풍미한 국가들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유용한 대상이었던 것 같다. 그를 통해 많은 갈등들이 벌어졌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국제사회가 성숙하여 가지고 싶다고 맘대로 빼앗는다던지 하는 일이 사라졌고, 운하들도 평화적으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운용되고 있으니, 역시 평화는 그렇게 전쟁과 깨달음으로 얻어지는 것인 듯 하다.

 

   관련 내용 출처

   http://blog.daum.net/imbg77/12760874

 

 

 

 

 

 

 

 

   1995년 - 신주쿠 역에 사린 가스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들 알다시피 일본의 사린가스 살포 사건은 '옴진리교' 신자들이 벌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유명한 그 '사린가스 사건'은 '도쿄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이다. 1995년 3월 20일에 도쿄 지하철 5개의 객차에서 오전 8시경 동시에 사린가스가 살포된 사건이 그것이다. 그것말고도 사린가스 살포사건은 2건이나 더 있었다.

 

   그 사건이 있기 9개월 전, 1994년 6월 27일에 마쓰모토시에서 8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부상한 '마쓰모토 사린가스 사건'이 있었다. 역시 '옴진리교' 신자들이 벌인 사건인데, 당시에는 옴 진리교와의 연관성 자체를 전혀 몰랐었다. 오히려 경찰은 피해자 한명의 남편인 '코노 요시유키'가 범인이라 추측했고, 그 결과 언론에서는 그를 '독가스맨'이라고 불렀으며 코노 요시유키는 살해 협박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결국 무죄로 드러났다. 언론사들은 그에게 사죄했지만, 코노 요시유키의 부인은 혼수상태로 14년이 지난뒤에 사망했다.  

 

   여튼 이 사건은 훗날 옴진리교 신자들이 자신들이 연관된 사건을 맡고 있던 판사들을 살해하기 위해, 동시에 '사린가스'의 성능을 테스트 하기 위해 벌인 사건인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고, 그 결과 9개월 뒤인 1995년 3월 20일에 '도쿄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이 일어난다. 13명이 사망했고 550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찰이 옴 진리교가 사건의 배경에 있음을 파악, 이틀만에 옴진리교에 대한 수사를 실시하여, 간부급 신자 '하야시 이쿠오'의 자백에 의해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의 전모는 물론, 9개월전의 마쓰모토 사린 가스 사건의 전모까지 밝혀지게 된다. 이후 옴진리교 본부에서는 화학무기, 생물무기 제조시설은 물론, 생화학 무기 살포를 위한 군용 헬기까지 발견된다.

 

   이후 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에 대한 수사가 계속되는 가운데, 18년전 오늘인 5월 5일에 신주쿠역에서 사린 가스가 다시 살포된다. 옴진리교 신자가 벌인 범행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역무원에 의해 신속히 처리되어, 사망자나 부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 외에도 옴진리교의 마지막 발악은 상당했다. 경찰청 장관에게 총격을 가하고, 도청에 소포폭탄을 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경찰은 수사끝에 '아사하라 쇼코'가 숨어있는 주택을 확인하고 5월 16일에 그곳을 급습한다. 경찰은 사린가스 공격에 대비해 의무용 헬기는 물론, 탄광에서도 유해가스를 확인하는데 쓰는 새인 '카나리아'까지 데리고 진입하게 된다. 결국 패닉룸에 숨어있던 아사하라 쇼코가 체포되고, 재심조차 거부당한 채 사형을 선고 받는다.

 

 

   본래 옴 진리교는 1984년 '아사하라 쇼코'에 의해 만들어진, 기독교와 불교가 혼합된(?) 그런 신흥 종교였다. 종교법인으로 인정도 받은 뒤 신자도 1만여명까지 모으는 등 잘 활동하고 있었지만, 1989년 자신들을 비판하는 방송 이후 비판에 관련된 자들을 살해한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사건' 이후 반사회적인 공격적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교단 전체가 피해망상에 의한 사이코패스로 빠져들었다고나 할까?

 

   옴진리교... 허나 옴진리교는 아직도 존재한다. 사건 4년만인 1999년 출소한 '조유 후미히로'가 옴진리교를 모체로 한 '알레프'를 세워 2007년까지 이끌었고, 후에 자신은 '빛의 고리'라는 또 다른 신흥종교를 만들어 독립했다. 물론 그들이 아직까지는 특이한 동향을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사실 모든 종교가 언제 등장했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계실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일단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렇다해서 종교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류에게 도덕적 가치와 사랑이 최우선임을 강조하는 문화를 종교가 전파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러한 역할을 종교가 하지 않는다면 종교는 무의미하며 사회에 불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곧 종말이 올 것이라며 주장하는 종교들은 대부분 사이비종교다. 도덕적 가치와 사랑을 내세우지 않고, 공포와 불안을 조장해 인간의 나약함을 이용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런것이 필요없는 종교이며, 난 그런 종교를 사이비종교라 부르고 싶다.

 

   앞으로 옴진리교와 같은 도덕, 사랑과 무관한 '사이비종교'는 계속 등장할 것이다. 인류 역사를 보면 계속 그래왔다. 언제까지 그렇게 될까? 언제까지 인간의 나약함을 악용하는 사이비 종교들이 유효할 것인가? 새삼 궁금해진다.

 

 

참고글

문명5G&K-(#1-4) 종교와 인류 : (1) 종교의 기원과 예수의 등장까지, http://blog.daum.net/smileru/8888093

문명5G&K-(#1-5) 종교와 인류 : (2) '밀라노 칙령' 까지, http://blog.daum.net/smileru/8888095

문명5G&K-(#1-6) 종교와 인류 : (3) 그리고 계속 반복된 역사, http://blog.daum.net/smileru/8888098

 

 

 

 

 

 

 

 

5월 5일과 6일의 역사

 

- fin -

 

 

 

 

 

현재까지 수정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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