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4월 21일과 22일의 역사 - 매카시즘과 사상의 자유, 사르코지 대통령

스마일루 2013. 4. 18.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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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시즘'은 미국을 뒤흔들었다.

'색깔론' 공세 속에 공산주의자로 지목된 수백명의 사람들이 무고하게 투옥되었다 훗날 혐의를 벗었고,

수만명이 공산주의자로 지목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직장에서 해고되기까지 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산주의 국가를 적으로 두고 있는 한반도의 특수성이 있긴 하겠지만,

진보성향의 세력 또한 국민들은 '색깔론'에 의해 집요한 공격대상이 되고 있다.

보수세력들이 진보정권 기간동안 그런 공격을 당했었나? 전혀.

정부비판 시사프로그램들의 폐지, 군사정권 시절에 버금가는 기자들의 해고,

정치적 의사(특히 진보적인)를 표현하는 것에 대한 제한 등등등등...

 

색출해야 할 종북세력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국정원과 공안 당국은 무얼하는 것인지 대체 그들을 잡아 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지목질만 하면서, 색깔론, 즉 매카시즘으로 정치적 이득을 얻는데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그 결과 사회분열이 극심해졌고, 결국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성장을 위해 가장 중요한

복지와 새로운 경제시스템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사상의 자유'라는 말이 대체 왜 존재하는지,

그것의 근본적 의미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당신은 사상의 자유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는가?

 

 

 

 

 

 

 

 

 

- 순 서 -

 

60년전, 1953년 4월 21일

매카시 선풍: 조지프 매카시의 수석 조수 두 명이

USIS 도서관이 소장한 30,000여권의 책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다.

 

6년전, 2007년 4월 22일

니콜라 사르코지가 프랑스의 대통령으로 당선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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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1일과 22일의 역사

Wikipedia

 

 

4월 21일

기원전 753년 - 로물루스와 레무스로마를 건국하다.

1864년 -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 탄생.

1910년 -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 사망.

1953년 - 매카시 선풍: 조지프 매카시의 수석 조수 두 명이 USIS 도서관이 소장한 30,000여권의 책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다.

1960년 -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생각에 기초하여 계획도시브라질리아브라질의 공식 수도가 되다.

1967년 - 그리스에서 육군 대령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군사 정변을 일으키다.

1989년 - 닌텐도에서 게임보이를 발매하다.

1994년 - 태양계 밖에 있는 행성이 최초로 발견되다.

2006년 - 네팔의 갸넨드라 국왕은 행정권력을 국민에게 이양함으로써 절대군주제를 포기하고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또 7개 정당 연합체에게 조속한 시일 내에 신임 총리를 추천해 줄 것을 요청했다.

2008년 - 참여정부 때였던 2008년 2월 중순에 대한민국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의 전산망이 해킹당한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4월 22일: 지구의 날, 국제 대지의 날

1451년 - 스페인의 초대 여왕 이사벨 탄생.

1509년 - 헨리 8세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다.

1724년 -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 탄생.

1870년 - 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 탄생.

1930년 - 영국미국, 일본 사이에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이 맺어지다.

1984년 - 영국이 리비아와 국교를 단절하다.

1994년 - 미국의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 사망.

2004년 - 룡천 열차폭발 사고가 발생하다.

2007년 - 니콜라 사르코지프랑스의 대통령으로 당선되다.

2009년 - 연쇄살인범 강호순이 8명의 부녀자를 살해한 혐의와 장모집 방화사건 등이 모두 유죄로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1953년 - 매카시 선풍: 조지프 매카시의 수석 조수 두 명이

  USIS 도서관이 소장한 30,000여권의 책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다.

 

 

   1908년에 태어난 미국의 정치인 조지프 매카시(오른쪽 사진)는, 법대를 나와 변호사가 된 뒤 지방 판사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다시 판사로 근무하다가 정계로 진출, 1946년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해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하지만 매카시는 당선되고 얼마되지 않아 경력위조, 명예훼손, 금품수수, 음주추태 등으로 논란의 중심이 된다. 정치인생이 끝나기 직전, 매카시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다. 1950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미국에는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나는 297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다" 라고 폭로한 것이다. '매카시즘'이라고 불리게 된 반공주의 열풍의 시작이었다.

 

   당시 시대적 상황도 매카시의 주장에 설득력을 실어주었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등장했고, 소련의 핵실험이 있었다. 그리고 매카시의 발언 수개월 뒤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국민들도 그의 주장에 동조했다. 충분히 그럴 법했고,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감도 그에 동조하는 원인이 됐다. 민주당도 삼엄한 시대분위기 속에서 화살을 피해가고자 매카시의 발언에 역시 동조했다.

 

   매카시는 애국보수 영웅이 되었다. 국민들이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고발하기 시작했고, 매카시는 명단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공무원, 연예계 인물, 교육자, 노조 활동가들이 공산주의자로 지목당했다. 지목으로 그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부는 약간의 증거로도 공격을 당했으며, 결국 직장을 잃고 심지어 구속되기도 했다.

 

   그리고 1952년, 매카시즘에 힘입어 공화당은 아이젠하워를 당선시키며 20년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하고, 이어진 선거에서도 승리해 다수당이 된다. 하지만 그 후에도 매카시는 멈추지 않았다. 금서 목록을 작성했고, 민주당 지도부는 물론, 공화당 지도부와 심지어 아이젠하워 대통령까지 공산주의자라며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1954년 3월 9일, CBS방송의 'See It Now'라는 시사프로그램에서, 미국의 전설적인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우'기자(왼쪽 사진)는 매카시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러자 여론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거짓 주장이 드러나자, '사상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매카시즘에 대한 피로감도 여론의 변화에 한 몫했다.

 

   결국 1954년 4월, 미국 상원은 매카시에 대한 청문회를 개최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도 매카시는 2차세계대전을 승전으로 이끌고 한국전쟁에서 북한, 중국, 소련에 맞서 싸운 육군 장성들 일부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해 역풍을 맞는다. 지식인들의 질문에 제대로된 근거를 내놓지 못했고, 이성을 잃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그 청문회는 미국 전역에 생중계 되었고, 결국 그렇게 매카시는 끝이었다.

 

   1954년 12월 미국 상원은 '매카시 비난 결의안'을 상정해 67대 22로 의결하였고, 인기를 잃은 매카시는 이후 알콜 중독자가 되어 3년뒤인 1957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비참한 최후였다. 하지만 이미 수백명이 수감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났고, 공산주의자로 의심을 받았다는 이유로 1만명 이상이 직장에서 해고된 뒤였다.

 

 

 

 

   매카시즘... 결국 우리식으로 말하면 '색깔론'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도 색깔론은 존재한다. 보면 매카시와 관련된 당시의 전체적인 흐름도 최근과 비슷하지 않나? 오래된 전교조 논란, 교수, 연예인의 사회활동 논란과 퇴출, 오세훈 시장의 무상복지 논란, 지난 통합진보당의 종북논란과 새누리당의 집권 뭐 그런 것들...

 

   하지만 중요한건, 종북 세력이 진짜로 있다는 것이다. 글쎄, 매카시의 경우 너무 앞서 나가 '매카시즘'이라는 말이 오늘날 '마구잡이 색깔론'으로 불리는 상황인데, 그러한 반공주의가 '적당'하고 '정확'했다면 어땠을까? 진짜 애국보수 영웅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전교조 논란의 경우 실제 전교조에서 과거 북한과 내통한다는 의혹이 있었던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지만, 좌파적인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교사 전부를 '종북'이라 할 수는 없다. 전체를 매도하는건 문제다. 연예인의 사회활동과 진보성향의 발언 같은 것도, 연예인 또는 교수가 사회활동을 해도 되냐 안되냐의 문제를 따져야지, 진보성향의 발언을 한다고 해서 색깔을 씌우는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퇴출이야 말로 웃긴일이고. 통합진보당은 해체되어야지 왜 아직도 살아있는지 모르겠다. 국정원은 요런 진짜 종북들을 좀 잡아주길. 왜 못 잡아 넣는건지 모르겠다. 통합진보당의 사회민주주의 개념은 북유럽국가에서도 채용하고 있는 것이지만, 통합진보당내의 일부는 사회민주주의의 가면만 쓰고 있을 뿐, 진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아무튼, 진짜 '빨갱이'들은 국정원 같은 기관이 댓글 같은거 달지 말고 반드시 색출해 내야 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최근의 추세는 진정한 종북세력 색출을 넘어 진보, 좌파들에게까지 칼날이 미치고 있다. 매카시즘이다. 분단 국가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과한 부분이 있다. 종북세력과 진보를 구분못하는 것인가?

 

   '사상의 자유'라는 말이 있다. 애국보수들이 우파적인 생각을 하는 것도 사상적 자유다. 하지만 진보도 애국진보이며 그것 역시 사상의 자유다. '사상의 차이'라는 것을 좀 좁은 범위로 설명하자면, 나라를 발전시키는데 있어 보수적인 방법을 택할 것인지 진보적인 방법을 택할 것인지의 차이이다. '애국'은 전제되어 있다. 물론 '무정부주의' 같은 것도 사상이라 할 수 있겠지만 국가와 그에 속한 우리 국민 모두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것이 설령 사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하더라도 난 탄압은 하지 못해도 배척하고 싶다. 아무튼 그렇다. 보수적이라 해서, 또는 진보적이라 해서 그 사람들로 인해 나라가 망할 것 처럼 속단할 수는 없다.

 

   그 사상때문에 나라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으로 이상한 정책을 만드는 '무지함'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사상이 잘못된게 문제가 아니라, 멍청한게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다양한 사상에 대한 이해와 필요성에 대해 인식해야, 즉 사상의 자유를 이해해야, 그를 기반으로 진정으로 애국하는 정책들을 만들어내고 지지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가? 모두 매카시의 후예가 되어버린건 아닌가?

 

 

 

 

 

 

 

 

 

 

 

   2007년 - 니콜라 사르코지프랑스의 대통령으로 당선되다.

 

   원래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쓰곤 했는데, 생존 인물의 이야기를 쓰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한번 써본다. 또 사르코지야 은근 특이한(?) 케이스니까...

 

   무려 사르코지 '가문'은 헝가리 출신이었다. 사르코지의 조상님 중 한분이 터키군(오스만투르크일까?)과 맞서 싸웠고, 헝가리의 왕 페르디난트 2세는 그 공을 인정해 사르코지 가문에 귀족처럼 이름에 고향을 넣을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사르코지 가문만의 '문장'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도 주었다. 그게 1628년 9월 10일이었다. 이후 사르코지 가문은 부다페스트에서 92km 떨어진 알라티안이라는 마을의 땅 일부와 작은 성을 소유하게 되는데, 그렇다 해서 크게 부유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명예'는 얻었는지, 사르코지의 할아버지는 헝가리 중부의 도시인 '솔노크' 부시장 자리에 있었고 사르코지의 아버지(오른쪽 사진)는 솔노크 시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치 독일과 함께 '주축국'에 헝가리가 가담했다가 결국 패배, 1944년에 소련군이 헝가리를 점령하게 되면서 사르코지 가문의 재산은 완전히 몰수당하고 만다.  

 

   이후 사르코지 가족은 망명길에 오른다. '주축국'이었던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거쳤는데, 결국 사르코지의 아버지가 그 유명한 '프랑스 외인부대'에 1948년에 입대하게 되면서 아버지는 프랑스 국적을 얻는다.

 

   그리고나서 사르코지가 태어난다. 1955년 1월 28일 파리에서 사르코지가 태어나는데, 당연히 사르코지도 프랑스 국적을 얻었다. 하지만 1959년 아버지는 이혼을 하게 된다. 이혼, 이거 기억해 두시길.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73년, 19살의 사르코지는 프랑스의 수능이라고 할 수 있는(질적으로 굉장히 다르지만) '바칼로레아'에 합격해 대학입학자격을 얻는다. 어린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왜 없냐구? 위키에 없더라. 프랑스어 위키에도 없고... 아버지의 사업성공으로 부유했지만, 키가 크고(사르코지는 지금도 키가 굉장히 작다) 부자인 아이들에게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훗날 사르코지는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내가 어린 시절 겪었던 모든 굴욕의 합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요 정도가 어린시절 이야기?

 

   아무튼... 이제부터는 좀 복잡한데 정신바짝 차리고 보도록 하자. 위키에는 사생활과 정치인생이 분리되어 서술되어있지만, 난 그냥 시간순서대로 쭉 다루고자 한다.

 

   대학에 법학을 전공하면서 진보성향의 '운동권' 활동을 잠시 하다가 우파정당인 '공화국 연합'에 가입하여 청년 당원 대표가 되며 정치에도 서서히 입문하기 시작해, 1976년에는 '뇌이으 쉬르 센'지역 당 책임자가 된다. 학업도 계속하여 1978년에는 민법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0년에는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81년에는 변호사 자격을 얻어 변호사 일도 시작한다.

 

   1982년에는 마리 도미니크 퀼리올리와 결혼한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오늘날 한명은 음악 프로듀서로, 한명은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무튼, 당시 그녀의 삼촌은 공교롭게도(?) 사르코지가 활동하던 지역인 '뇌이으 쉬르 센' 시의 시장이었는데, 사르코지의 좋은 정치멘토가 되었다. 그 덕분인지 1983년 사르코지는 '뇌이으 쉬르 센' 시의 시장에 당선된다. 겨우 28살의 나이었다. 그런데 1984년 시장 신분으로 TV진행자 자크 마탱과 모델 출신 '세실리아'의 결혼 주례를 서주다가 세실리아와 눈이 맞게 되고, '은밀한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다.

 

   1993년에 사르코지는 64.9%의 득표율로 '뇌이으 쉬르센'의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하지만 당선된지 한달도 되지 않은 3월 13일, 뇌이으 쉬르 센 지역의 한 유치원에서 테러범이 어린이 21명을 인질로 잡고 인질극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르코지는 테러범과 협상을 하게 되고, 협상에 성공, 아이들을 석방시키는데 성공해 전국적으로 유명인사가 된다. (사르코지가 사건에 얼마나 개입했는지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고 한다. 진실은 저 너머에...) 그렇게 유명해진 사르코지는 이후 행정부 산하 예산부 장관이 되었고, 프랑스 정부 대변인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리고 1995년 대선에서 사르코지는 '에두아르 발라뒤르'(왼쪽 사진)를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 대변인 자리를 사임한다. 에두아르 발라뒤르는 당시 유력한 대선주자였지만, '자크 시라크'에게 추격을 허용, 결국 겨우 1차 선거에서 떨어지게 되었고, 사르코지도 결국 공직에 오르지 못했다. 그 와중 1996년 사르코지는 첫번째 부인인 퀼리올리와 이혼, 오랫동안 '은밀한 관계'를 가지던 세실리아와 결혼한다.

 

   그 후 1997년... 프랑스 국회의원 선거에서 좌파가 승리하게 되자, 지난 대선 이후 우파 정당인 '공화국 연합'에서 아무 공직도 맡지 못하고 물러나 있었던 사르코지는 1997년 소속 정당인 '공화국 연합'의 총서기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1999년에는 당 대표가 되기에 이른다. 사르코지의 부활이었다. 하지만 그도 얼마가지 못했다. 1999년 EU의회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사르코지는 1년도 되지 않아 당 대표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3년뒤, 그는 다시 부활한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사르코지가 1995년 대선에서 자신의 경쟁자였던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2002년 재선에 성공하자 초기 내각을 구성하며 사르코지를 내무부 장관으로 지명한 것이다. 그에는 '대중운동연합'이 있었다. '대중운동연합'은 보수정당연대로, 2002년 대선 승리를 통한 자크 시라크의 재집권을 위해 만들어진 연대였다. 이후 아예 정당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사르코지의 '공화국 연합'도 연대에 참가했고 사르코지가 '한 자리'를 받게 된 것이었다. 2004년에 사르코지는 재무부 장관 자리도 거치게 된다.

 

  그런데 2004년에 의회 선거에서 '대중운동연합'이 진보정당인 '사회당'에 참패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자 사르코지가 부상하기 시작한다. 자크 시라크와 같은 우파이지만, 한 때는 다른 길을 걸었던, 분명히 달라도 뭔가 다른 사르코지라는 인물이 우파의 새로운 대표로 부상한 것이었다. 1997년 좌파 승리 이후 사르코지가 부상했던 때와 비슷한 상황이라고나 할까? 사르코지는 분명 달랐다. 자크 시라크가 찬성한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에 반대의사를 표시하기도 했고, '자유주의'를 내세우면서 유학생과 이민자들의 벽을 낮추고, 지속된 재정 적자를 낮추기 위해 최대 세율을 올림과 동시에 실업자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줄이는 등의 정책을 주장했다. (오른쪽 사진은 2004년의 사르코지)

 

   그리고 2006년 11월 29일, 사르코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선출마 의사를 밝힌다. 사르코지의 선거 운동 슬로건은 '더 일하고, 더 많이 벌자' 였다. 그를 바탕으로 2007년 1월 14일, '대중운동연합'의 유일한 대선 경선 후보가 되어, 98%의 찬성률로 공식 후보가 된다.

 

   그렇게 2007년 4월 22일, 사르코지는 1차 투표에서 31.18%의 득표를 얻어 우파 역사상 2번째의 기록을 세웠고, 사회당 '세골렌 루아얄'과 경쟁하여 53.06%의 득표를 하여 대통령에 당선된다. (왼쪽이 당시 개표 결과)

 

   그것이 6년전 오늘이었다.

 

 

 

   사르코지 당선까지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부가적으로 내가 할 이야기는 없는 것 같다. 당선 이후의 이야기들까지 하면 너무너무 글이 길어질테고... 잘 모르던 프랑스 이야기를 사르코지를 빌어 언급하게 된 정도로 보면 될 듯? 그래도 한마디 하자면, 잘 보면 정치의 흐름이 우리나라랑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지 않나? 굳이 차이라면 글쎄... 질적인 차이가 있으려나?

 

   아참, 사르코지는 대통령에 당선된 2007년에 두번째 부인 세실리아와 이혼하고 역시 모델출신인 카를라 브루니와 세번째로 결혼한다. 능력자다. 이 글의 결론이다.

  

 

  

  

 

 

4월 21일과 22일의 역사

 

- fin -

 

 

 

 

 

 

현재까지 수정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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