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3월 10일과 11일의 역사 - 만민공동회, 첼시FC 창립과 스탬퍼드 브릿지

스마일루 2013. 3. 8. 21:35
728x90

 

 

 

 

 

 

추천? 손가락 클릭!

 

 

 

 

 

 

 

 

 

첼시FC의 홈구장 스탬퍼드 브릿지는 1877년 개장했고,

'거스 미어스'가 이를 1904년 사들여 축구장으로 바꾼 뒤 첼시FC를 만드는 기초가 된다.

첼시FC를 넘어 스탬퍼드 브릿지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정말 흥미진진한데,

그런 스탬퍼드 브릿지는 분명 영원히 첼시의 홈구장으로 남을 것이다.

 

100년이 넘는 축구팀의 역사라...

 

우리의 역사는 반만년 한민족의 역사를 떠나, 

축구팀은 커녕 대한민국의 역사조차 일제강점기 때문이라면 일제강점기 때문에

60여년 정도로 밖에 기억 & 인식되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도 언젠가 수백년의 역사를 세울 수 있을 것이며,

훗날 우리 국민들은 오늘날의 일화를 소설책을 보듯 읽어갈 것이고,

무엇보다 지금을 교훈으로 삼아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우리는 지금 그들이 보기에

흥미진진하고 멋진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것일까?

 

백년 뒤에 교과서 속 한두페이지에 지나지 않을

오늘날의 역사는 어떻게 쓰여져 가고 있는 걸까?

 

 

 

 

 

 

 

 

 

- 순 서 -

 

115년전, 1898년 3월 10일

최초의 만민공동회가 독립협회 주최로 열리다.

(정확히는 최초는 아닌 듯)

 

107년전, 1905년 3월 10일

영국의 축구 클럽 첼시 FC 창단.

 

 

 

 

 

 

 

 

 

 

3월 10일과 11일의 역사

Wikipedia

 

3월 10일

기원전 241년 - 로마카르타고에가디 제도 전투에서 물리치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다.

1848년 -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미국 상원이 비준.

1898년 - 최초의 만민공동회독립협회 주최로 열리다.

1905년 - 영국의 축구 클럽 첼시 FC 창단.

1938년 - 한국의 독립운동가 안창호가 사망하다.

1945년 - 제2차 세계 대전: 미 공군 B-29 폭격기의 도쿄 대공습 감행.

1946년 -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전신인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이 창립하다.

1952년 - 독일 통일을 위한 스탈린 각서가 발간되면서 통일의 기본조건으로 독일의 중립성을 요구하다.

1957년 -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 탄생.

 

3월 11일

1818년 -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출간되다.

1893년 - 조선시대, 충청북도 보은군에서 첫 동학 농민 운동 집회가 열리다.

1921년 - 아르헨티나의 작곡가 아스토르 피아졸라 탄생.

1966년 - 인도네시아수카르노 대통령수하르토에게 축출되다.

1985년 -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서기장이 되다.

2004년 - 마드리드에서 열차 폭파 사건이 일어나 191명이 죽고 1,800명 이상이 다치다.

2010년 - 대한민국의 종교인 법정스님 사망.

2011년 - 일본 현지 시각 14시 46분, 규모 9.0의 동일본 대지진 발생.

 

 

 

 

 

 

   1898년 - 최초의 만민공동회독립협회 주최로 열리다.

   - 1893년 - 조선시대, 충청북도 보은군에서 첫 동학 농민 운동 집회가 열리다.

   - 1938년 - 한국의 독립운동가 안창호가 사망하다.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만민공동회 5년전에는 동학농민운동이 있었다. 동학, 즉 '천도교',는 1860년대에 등장한 민족 종교로 '인권'과 '평등'을 내세웠다. 그러다가 1893년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비리를 계기로 일어나게 된 것이 동학농민운동이었고 말이다.

 

   그리고 5년이 흘러 등장한 만민공동회... 이것도 어떻게 보면 맥락이 맞는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 미국에 갔다 돌아온 서재필(왼쪽 사진)은, '참정권', '인권'과 더불어, 청나라로부터의 자주독립, 부패척결 등과 관련된 운동을 벌이기 위해 '독립협회'를 설립(1896.07)하고, 다양한 계층의 참여를 위해 만민공동회를 개최한다. (만민공동회의 첫 개최는 1897년인듯 하다. 위키의 날짜가 잘못된듯?) 독립운동가 안창호는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에서 뛰어난 웅변가로 큰 인기를 얻기도 했는데, 이후 성장해가던 만민공동회는 1898년 3월 10일에 서울에서 1만여명이 공동회에 참여하기에 이르면서 그 세를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참고로 당시 서울인구는 23만명)

 

   만민공동회는 정책,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에 대한 심판, 자주독립, 신분차별철폐등에 대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소견을 주장하고, 그 때 그 때 추진해야 할 사안에 대해 대표를 선정, 실제로 추진하는 그런 집회였다. 바로 직접민주주의 방식이었다. 23세이던 '청년 이승만'(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만민공동회에서 연설을 하는 등, 나이도 가리지 않았다.

 

   이런 만민공동회는 서재필과 독립협회에서 출발했지만, 차차 독립협회에서 벗어나 자발적인 시민단체로 변모하게 된다. 이후 만민공동회는 입헌군주제를 요구했으며, 하원의원을 설치해 각료들을 임명하게하고, 외세의존적인 정책을 탈피할 것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그 결과 러시아와 일본의 군사교관제도가 폐지되고, 러시아의 철도부설권과 프랑스의 금광채굴권이 불허되기에 이르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후에 만민공동회는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여 왕실에 전달하게 되는데, 그것이 1898년 10월의 '헌의 6조'다.

 

헌의 6조.

 

- 일본인에게 의탁하거나 부역하지 말 것.

- 전권대신(외국과의 계약에 전권을 부여받는 관료) 임명을 폐지, 외국과의 이권계약이 있을 때는 대신이 단독으로 하지 말 것.

- 정부 재정을 공정히 하고 예산 사용 내역을 공개적으로 발표할 것.

- 중대 범인의 재판과 형집행은 공개 재판으로 하며, 언론-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 칙임관(오늘날의 장관, 차관 정도의 고위 공무원 분류)의 임명은 황제가 정부 대신들과 중추원 의관들의 의견를 따를 것.

- 기타 별항의 규칙을 실천할 것.

 

   고종황제는 이와같은 내용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하기에 이르는데, 정부관료 보수세력들은 서재필과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의회를 개설해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고 모함하고, '윤치호 대통령 설'등을 유포한다. 그 소문에 넘어간 고종은 결국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탄압을 지시하게 되고, 결국 독립협회 간부와 만민공동회 인사 17명이 체포되고 만다. 이후 독립협회는 1899년 해산하게 되는데, 애초에 조직이 없었던 만민공동회는 행사를 이어가려 했지만 정부의 지속적 탄압으로 얼마가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참 흥미롭다. 만민공동회는 입헌군주제 쪽이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1789)이후 100여년 남짓만에 한국에서도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만민공동회 등의 운동이 있었던 거다.

 

   후에 우리는 입헌군주제나 공화정등을 달성하지 못한채 일제강점기를 맞이하게 되고, 결국 50년 가까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민주주의를 시작하게 된다. 물론 후에 한국전쟁에, 개헌과 쿠데타가 있긴 했지만... 여튼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었을까? 재미있는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문명연재를 하며 말했던 것 처럼, 지금이 가장 잘 된 우리나라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으나, 어쩌면 그 때가 현대 대한민국의 모습을 바꿀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던 것은 아닐까?

 

 

 

 

  

 

 

 

   1905년 - 영국의 축구 클럽 첼시 FC 창단.

 

 

   이런걸 보면 참 경이롭기까지 하다. 만민공동회가 실패하고 한국이 을사늑약을 맺던 1905년, 영국에서는 첼시FC가 창단된다. 1904년에 기업가이자 건축가였던 '거스 미어스'가 영국 풀럼에 있던 운동장을 사들여 축구장으로 개조해,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단인 '풀럼FC'(1879년 창단)에 그 축구장을 양도하려고 했는데, 풀럼FC가 그를 거절하면서 결국 거스 미어스는 새로운 축구단을 창단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첼시FC는 1905년 3월 14일, '라이징 선'이라는 풀럼의 술집에서 결성된다. 그 때 거스 미어스가 사들인 운동장이 첼시의 홈구장으로 사용되는데, 바로 오늘날까지 첼시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스탬퍼드 브릿지'가 바로 그 운동장이다. 축구단의 역사도 100년이 넘었는데, 홈구장의 역사까지 100년이 넘은 것이다. (물론 리모델링을 거쳐왔다. 오른쪽이 1905년 스탬퍼드 브릿지의 사진)

 

   그런 첼시는 10년만인 1915년에 FA컵 결승전에 진출하면서 크게 성공하게 된다. 명문구단으로 성장한 첼시는 오늘날 리그 최다 승점, 리그 최소 실점, 리그 최다 무실점, 리그 최다 무실점 경기수, 리그 최다 연속 무실점 경기, 프리미어리그 최다 승리 기록, 프리미어리그 한 시즌 최다 득점 등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흥미로운 기록은 홈경기 최다 무패 행진 기록으로 2008년 10월 26일 리버풀에게 질 때 까지 4년 8개월 동안 홈경기에서 지지 않았던 기록이 그것이다. 또 재미있는건 첼시에 의해 홈경기 최다 무패 행진 기록을 빼앗긴 팀이 리버풀이라고.

 

   이렇듯 오랜 역사가 오랜 전통, 재미있는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아마 끝이 없을 것이다. 첼시는 영원히 지역주민들에게 대대손손 기억될 것이며, 스탬퍼드 브릿지는 영원히 홈 구장일 것이고, 지역주민들은 다시 한번 홈경기 최다 무패행진 기록을 세우기 위해 파란 옷을 입고 스탬퍼드 브릿지로 향해 열성적인 응원을 펼칠 것이다. 이런 전통과 역사가 부럽다. 우리도 그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모든 것도 훗날 역사이고, 전통이고, 재미있는 일화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다고 봤을때, 우린 정말 '멋진'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걸까? 난 그것이 항상 궁금하다.

 

 

 

 

 

3월 10일과 11일의 역사

 

- fin -

 

 

 

 

 

문장 어색한 부분 수정 (2013.3.9)

 

 

 

추천? 손가락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