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3월 3일과 4일의 역사 - 아편전쟁, 아폴로 계획, 제 4땅굴

스마일루 2013. 3. 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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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기가 바다에 던져졌다는 이유로 시작된 제 2차 아편전쟁...

아편전쟁에서 완패한 중국은 침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50여년이 지난 오늘날, 중국은 부활했고, 역사속 필연적인 강자는 다시 돌아왔다.

군사력을 증강하고, 미국 국채를 마구 사들이는 중국...

그는 아편전쟁을 교훈삼아 그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일까,

그를 남에게 반복하기 위함일까?

 

 

 

 

 

 

 

 

- 순 서 -

 

156년전, 1857년 3월 3일

프랑스와 영국이 청나라를 상대로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키다.

 

44년전, 1969년 3월 3일

아폴로 계획: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달 착륙선을 시험할 목적으로 아폴로 9호를 발사하다.

 

23년전, 1990년 3월 3일

대한민국에서 제 4땅굴 발견.

 

 

 

 

 

 

 

 

 

3월 3일과 4일의 역사

Wikipedia

 

3월 3일: 일본히나마쓰리, 불가리아해방일

1857년 - 프랑스와 영국이 청나라를 상대로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키다.

1878년 -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불가리아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얻다.

1918년 - 소비에트 연방동맹국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제1차 세계 대전을 중단하다.

1923년 -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창간되다.

1931년 - 《스타-스팽글드 배너》가 미국의 공식 국가가 되다.

1938년 -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석유가 발견되다.

1939년 - 모한다스 간디가 인도에 대한 폭압 통치에 항의하는 단식을 시작하다.

1969년 - 아폴로 계획: 미국 항공우주국(NASA)가 아폴로 달 착륙선을 시험할 목적으로 아폴로 9호를 발사하다.

1973년 - 대한민국의 방송사인 한국방송공사가 출범하다.

1980년 - 미국의 원자력 잠수함 SSN-571 노틸러스가 퇴역하고 해체되었다.

1990년 - 대한민국에서 제 4땅굴 발견.

1991년 - 한 아마추어 촬영가로스엔젤리스 경찰관로드니 킹을 구타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이 영상때문에 1992년 로스엔젤레스 폭동 사태가 벌어졌다.

1994년 - 커트 코베인이 '발리움'(Valium, diazepam) 약제를 샴페인으로 넘겨 마신 뒤 혼수상태로 들어갔다.

 

 

3월 4일

1152년 - 프리드리히 1세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다.

1193년 - 쿠르드족 출신 술탄, 살라흐 앗딘

1461년 - 장미 전쟁: 랭커스터 왕가헨리 6세가 물러나고 요크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다.

1824년 - 선거인단 수와 총 득표 수에서 모두 뒤졌던 존 퀸시 애덤스가 하원의 결선 투표를 통해 미국제6대 대통령에 취임하다.

1882년 - 영국 런던에서 최초로 노면 전차의 운행이 시작되다.

1942년 - 숙칭 대학살이 종료됐다.

2000년 - 일본에서 플레이스테이션 2가 출시되다.

 

 

 

 

 

 

 

1857년 - 프랑스와 영국이 청나라를 상대로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키다.

 

   아편전쟁은 제국 열강의 단순한 문호개방 압력이나 식민지배, 지정학적 이득을 챙기기 위해서가 아닌, 무역거래로 생긴 갈등을 원인으로 한다는 점이 특이한 부분이다.

 

   1차 아편전쟁의 경우 1700년대 말, 영국에서 차tea와 도자기가 큰 인기를 끌자 중국에서 그를 대량으로 수입하게 되고, 그로 인해 영국의 무역적자가 극심해지자 영국이 마약인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게 되고, 중국이 아편 수입을 금지하자 발생하게 된다.  

 

   보면 정말 깡패 그 자체다. 중국은 차와 도자기, 비단과 같은 고급 사치품을 영국에게 판매했다면, 그로인한 무역적자를 영국은 인도에서 양귀비를 재배해 채취한, 모르핀이 함유된 마약인 아편으로 만회하려 했기 때문이다. 어두컴컴한 골목 끝 쯤에 있을 법한 마약밀매상과 다를바 없다. 놀라운 건, 영국의 아편 판매가 성공해 영국이 무역 적자를 무역 흑자로 바꿔 냈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아편이 대유행했고 아편을 들여오는 대가로 청나라의 돈(당시에는 '은')이 유출되자, 결국 1839년 3월 청나라 황제인 도광제는 아편 수입을 금지해버리고 아편들을 회수에 불태워 버렸다. 그러자 영국은 '청나라가 무역의 자유를 침해했다!', '사유재산을 불태웠다!' 라며 전쟁을 선포한다. 마약을 금지시키고 회수해 폐기한 것인데... 하긴 그 때는 마약을 마약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단순 기호식품으로 생각했을 것 같고 말이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영국군은 대승했고, 그 결과인 '난징조약''을 통해 홍콩을 99년간 소유할 권리를 얻게 되었으며, 청나라의 5개 항구가 강제 개항되었고, 청나라에서의 여러 특혜를 챙기게 된다. 그게 1842년이었다.

 

   이후 영국은 무역 수지가 개선되길 바랬는데, 여전히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다른 여러 상품을 중국에 팔아보려 했지만 먹히지 않았고,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게 면제품이었는데, 그것마저도 중국 것이 품질도 좋고 값도 쌌다. 여전히 중국에 팔아먹을 것은 아편 뿐이었는데 그 마저도 더 이상 잘 팔리지 않았다.

 

   이에 영국은 중국에게 추가적인 항구개방과 내륙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중국은 그를 거절했는데, 그로 인해 영국이 내린 결론은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쟁의 명분이 없었다. 중국이 또 영국상품의 판매를 금지시키거나 회수해 불태워 버리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856년 10월, 중국인이 선장으로 있던 한 해적선이, 광저우에서 중국관리에 의해 해적선이라는 것이 적발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 사건으로 인해 선장은 도망가고 선원 13명이 체포되는데, 그 해적선에는 위장을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영국국기가 걸려있었고, 단속과정에서 그 영국국기가 바다에 던져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신성한 영국국기가 바다에 떨어지다니! 경악할 만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에 강경론자였던 영국 수상 '헨리 존 템플'은 이를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자 의회에 대중국 전쟁에 대한 안건을 올렸다. 의회에서는 이런 사소한 사건으로 전쟁까지 한다는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말이 많았고, 결국 상원에서는 통과되었으나 하원은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자 헨리 존 템플 수상은 하원을 해산시키고 총선거를 통해 재신임을 물어 하원이 새로 구성되는데, 그 새로 구성된 하원은 대중국 전쟁문제에 동의하게 된다. 

 

   결국 1857년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청나라는 다시 패배, 결국 항구를 추가 개방하고, 외국인의 중국 내륙 자유 이동을 허가하며, 막대한 배상금을 내고, 기독교를 공인하며 아편거래를 합법화 하는 등의 '텐진 조약'을 맺게 된다.

 

   이후 청나라는 복수를 시도하려 하여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크게 패배하여 이번에는 베이징까지 영국군이 진격하여 황제의 별궁과 민가를 약탈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 결국 청나라는 '베이징 조약'을 1860년에 맺게 되고, 그를 통해 추가 배상금과 함께 양쯔강의 군함 통행권 등까지 영국에 넘어가고 만다.

 

  후에 중국은 양무운동을 통해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군대를 현대화 하려 하는 노력을 하게 되지만, 권력자들의 이권다툼과 부정부패로 인해 실패하여 결국 청일전쟁에서 패배하기에 이른다. 이 일련의 역사는 청나라 건륭제 말기부터 시작된 중국 200여년간의 침체기의 정점에 있었던 사건들이었다.

 

 

   그 침체기를 지난 중국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인구를 바탕으로한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강자의 귀환'이라고 문명 연재를 하면서 언급했던 것 같다. 강력한 군사력을 갖춰가고 있는 중국은, 미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위안화 절상 문제에 있어서도 미국 국채의 막대한 보유량(미국 국채 외국인 보유량의 20%이상)을 무기로 맞서고 있고 그는 미국과 빚고 있는 모든 갈등 부분에서 중국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중국은 미국 국채를 2000년 직후부터 긁어모으기 시작했는데, 글쎄, 강대국에게 휩쓸렸던 아편전쟁에서 얻은 교훈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군사력 그 이전에, 경제문제(위안화 절상)로 걸고 넘어지려는 자는 경제무기(국채보유)로 맞선다, 그래야 충돌도 막는다, 뭐 그런거랄까?

 

 

 

 

 

 

 

 

 

1969년 - 아폴로 계획: 미국 항공우주국(NASA)가

아폴로 달 착륙선을 시험할 목적으로 아폴로 9호를 발사하다.

 

   많은 사람들이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을 기억하지만, 11호라면 그 이전 1, 2, 3호도 있었을텐데 그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듯 하다. 물론 그 이전의 우주선들은 모르긴 몰라도 달착륙을 하지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기 때문에 무시되어질만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150조원이 투입된 인류 최대의 우주 탐사 프로젝트인 아폴로 계획에 대한 '모독'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우주로의 발걸음을 시작한 오늘날, 달착륙의 영광이전에 아폴로 계획이 '계획'이라고 불리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계획은 다들 알다시피 미소냉전구도에서 시작되었다.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의 우주 유인비행에 성공하자 미국도 바빠지기 시작하고,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부통령 린든 존슨에게 소련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달라고 주문한다. 이에 린든 존슨은 5, 6년 뒤인 1966년과 67년 사이에 달에 사람을 보내는 계획을 추진하는게 어떻겠냐고 답한다.

 

   그를 수용한 케네디는 1961년 5월 25일, 의회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며 아폴로 계획의 시작을 알린다. (오른쪽 사진이 당시 연설 모습)

 

"우선, 나는 인간이 달에 착륙한 후 무사히 지구로 귀환하는 이러한 계획의 성공한다면,

다른 어떠한 우주 계획도 인류에게 이보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는 또한 장기적인 우주 탐사 계획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며,

이를 위해 온갖 어려움과 막대한 비용을 감수할 것입니다."

 

   이후 아폴로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하는데, 시간 단축을 위해 달까지 갈 수있는 로켓을 개발하면서 동시에 달에 사람을 착륙시켜 귀환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완성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로켓은 1961년 10월부터 실제 발사 테스트가 시작되었는데, 달로 보내질 사령선과 착륙선은 5년이 지난 1966년에서야 비로소 실제 테스트가 시작된다. 실제 테스트에도 계획이 필요했는데,  NASA는 아폴로 계획의 최종 목표인 달 착륙을 다음과 같은 미션을 거쳐 달성하도록 계획한다.

 

A: 무인 사령선(+기계선) 테스트
B: 무인 달 착륙선 테스트
C: 지구 저 궤도에서의 유인 사령선 테스트
D: 지구 저 궤도에서의 유인 사령선 및 달 착륙선 테스트
E: 7400km 상공에서의 유인 사령선 및 달 착륙선 지구 궤도 비행
F: 유인 사령선 및 달 착륙선의 달 궤도 비행
G: 달 착륙

 

   해당 미션을 차곡차곡 밟아나가 'G'에 도달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였다. 이에 따라 1966년에 비로소 로켓발사를 통해 사령선, 달착륙선을 우주로 올려 테스트하는 아폴로 계획의 최종 실험 단계가 시작되게 된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초기 계획대로 되지만은 않았다. 대략 다음과 같은 순서를 거쳤다. 아, 추가로 해당 미션에서 촬영된 유명 사진들도 함께 있으니 그것도 함께 보시길.

 

 

   SA-1~5, AS-001~004, A-101~105 : 1961년 10월 ~ 1965년 7월, 새턴 I로켓 테스트, 우주선 지상 테스트.

 

   AS-201(아폴로 1A호), [미션 A] : 1966년 2월 26일 발사, 사령선 정전, 회로이상, 기계선의 배관 파손 문제.

 

   AS-203(아폴로 2호), [로켓 실험] : AS-202에 사용될 사령선이 늦게 도착해 먼저 AS-203을 테스트. 새턴 IB로켓 테스트, 우주 공간에서 엔진 on/Off 테스트, 우주 공간에서 고의로 연료 압력을 높여 한계테스트, 결국 폭발.

 

   AS-202(아폴로 3호), [미션 A] : 우주공간에서 기계선 엔진 On/Off 테스트. 사령선 지구 귀환 위치 크게 벗어남.

 

   아폴로 1호(AS-204), [미션 C] : 아폴로 계획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 시도, 그래서 이름이 아폴로 1호임. 하지만 발사전 사령선에 불남. 우주인 3명 전원 사망. 발사 실패. 미션 C연기됨.

 

   아폴로 4호 [미션 A, 로켓 실험] : 아폴로 1호의 사고 이후, 지난 미션에 1A, 2, 3호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번 발사를 아폴로 4호라고 명명하면서 '아폴로 X호'라는 명칭이 본격 사용됨. 달까지 갈 수 있는 새턴 V로켓 최초 발사 테스트가 진행. 사령선, 기계선, 달착륙선 최초로 모두 장착, 지구에서 최대한 멀리 갔다가 돌아오며 달에서 귀환하듯 모의 귀환 실험. 로켓 발사시 로켓 화염에 물 분사 방식 최초 사용. 전체적으로 모두 정상 작동했고, 사령선 지구 귀환 위치도 비교적 정확.

 

새턴 V로켓의 사진으로 유명한 아폴로 4호의 사진

 

 

 

   아폴로 5호 [미션 B] : 새턴 IB로켓으로 달 착륙선을 우주에 올려 엔진 점화 테스트, 정상 작동.

 

새턴 IB로켓

 

 

 

   아폴로 6호 [미션 A, B, 로켓 실험] : 새턴 V로켓 두번째 테스트, 발사과정에서 진동 등 문제 발생, 정상 궤도에 오르지 못해 궤도를 수정하느라 일부 실험 못함. 사령선 지구 귀환 위치 다소 벗어남.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새턴V로켓 분리 영상은 대부분 아폴로 4호와 6호의 것이라고.

 

 

 

 

   아폴로 7호 [미션 C] : 새턴 IB로켓으로 아폴로 계획 최초로 지구 궤도 유인 비행. 미션 성공.

 

   아폴로 8호 [미션 C-Prime] : CIA에서 소련 신형로켓&달궤도선을 포착하여, 미션 D에서 미션 F로 변경. 하지만 달착륙선 제조문제로 사령선과 기계선만 달로 감(따라서 미션은 F가 아니고 C-Prime으로 불림). 달 궤도 돌고 돌아오는데 성공. 미션이 성공하자 "70년대 전까지 달에 사람을 착륙시키겠다"고 케네디가 유명한 연설을 통해 공표. 한편 CIA가 포착한 12일 먼저 계획되어 있었던 소련의 달궤도선 발사 계획은 취소.

 

아폴로 8호에서 촬영된 인류 최초의 지구 전체 사진. 비로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아폴로 9호 [미션 D] : 1969년 3월 3일 발사, 아폴로 8호에서 테스트 하지 못한 달 착륙선을 지구궤도에서 테스트. 사령선과 착륙선간의 도킹 테스트. 미션 성공.

 

도킹 테스트 중인 아폴로 9호의 기계선, 사령선, 달 착륙선, 그리고 데이빗 스콧 비행사.

 

 

 

   아폴로 10호 [미션 F] : 아폴로 11호 착륙지점 탐사, 착륙선으로 달표면 15.6km까지 접근했지만 착륙은 안함. 자세제어 시스템 문제 발생하여 우주인들이 자체 수리. 컬러TV중계 성공.

 

아폴로 10호에서 촬영된 달과 지구

 

 

 

   아폴로 11호 [미션 G] : 1969년 7월 16일 발사, 20일 달착륙, 24일 지구도착. 미션 성공함. 달에서 이륙하기 위한 스위치가 '버즈 올드린'에 의해 부숴졌었지만 볼펜으로 작동시킴. 사령선 지구 귀환 위치는 아폴로 4호때 만큼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정확.

 

아폴로 11호 미션에서 촬영된 사진. 사진 속 인물은 버즈 올드린이고, 인류 최초 달착륙인인 닐 암스트롱이 촬영.

 

 

 

 

   이렇게 해서 아폴로 계획은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공표된지 8년여만에 목표를 달성하게 되었다. 애초의 계획이 문제없이 정확하게 진행되지는 않았고, 유인 우주비행도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완벽한 안전함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전반적으로 계획의 변화없이 꿈틀꿈틀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이 8년여의 과정과 이후 아폴로 17호까지의 3년을 추가해 11년간의 과정이 바로 아폴로 계획이다.

 

   우리 정부는 8년 후인 2021년에 달탐사선을 보낸다는 계획을 2018년으로 앞당긴 상태다. 5년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예산이 부족하다는 말도 많고, 무리한 추진이라는 이야기도 많다. 우리는 목표를 향해 잘 나아가고 있는 걸까? 우리의 계획은 어떠한가?

 

 

 

 

 

 

 

 

1990년 - 대한민국에서 제 4땅굴 발견.

 

   1990년 3월 3일, 제 3땅굴이 발견된지 12년만에 제 4땅굴이 발견된다. 북한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헷길리게 하는 이 땅굴은, 1960년대 북한이 재래식 전력으로 적화통일이 어렵다는 생각에, "1개의 땅굴은 10개의 핵폭탄보다 효과적"이라는 김일성의 말에 따라 베트남에서의 땅굴전술에 착안해 땅굴 굴착을 시작하면서 건설 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땅굴은 총 4개다. 1시간만에 2, 3만명의 병력이 땅굴을 통해 이동할 수 있어 기습남침시 휴전선 부대에 대한 기습공격이 가능하고, 김신조 사건때 처럼 서울로 그 병력들이 내달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김신조 사건때도 그런 것 처럼 그런게 쉬운 것이 아니고, 확실히 걱정되긴 하지만 우리 군도 그리 허술하진 않기 때문에 지뢰밭을 겨우 넘는 그런 땅굴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지금까지 발견된 땅굴은 고의로 노출시킨 짧은 땅굴들이고, 실제 공격용 땅굴들은 지하철 보다 더 깊은 곳에서 서울 시내까지 이미 이어져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50~70km이상을 땅굴로 연결했다는 것인데, 차량용 터널이 아닌 서너사람이 이동할 정도의 땅굴이라면 꼭 불가능하다고 할 수만도 없지만, 내부에서 인원들의 산소공급문제나 이동문제 등 제한요소도 분명 많을 것이다.

 

   뭐 음모론 같아 보이긴 해도, 개인적으로는 확실히 과학적인 방법으로 탐사해 볼 만 하다고는 생각된다. 내가 김일성이고 김정일이었다면, 분명히 수십km의 긴 땅굴을 파라고 지시했을 것 같긴 하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왠지 이미 국방부에서 탐사를 하고 있거나 해 놓았을 것 같기도... 

 

   참 글을 쓰고보니 어이가 없다. 2013년에 땅굴걱정을 해야 한다니!

 

 

 

 

 

 

3월 3일과 4일의 역사

 

- fin - 

 

 

 

 

 

 

문장어색한 부분, 오타 수정 (20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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