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2월 17일과 18일의 역사 - 신자유주의의 시작 : 빚을 통한 성장의 한계, 제로니모, 조르다노 부르노의 지동설

스마일루 2013. 2. 17.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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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금정책을 설명하는 레이건 대통령.

 

빚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속가능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항상 적정 수준이 필요하다. 금융업자들이 오버하지 못하게 할 규제들,

전체적인 가계의 생활의 질을 유지시켜주기 위한 복지정책과 최저임금,

정부의 건전한 부채수준을 유지하게 하기 위한 세금 정책까지...

 

복지만 되돌리기 어려울까? 감세도 되돌리기 어렵다.

 

당연한 말인데, 가끔 모두는 비이성적이 되어

성장을 외치고 빚을 통한 성장에 취해 빚더미에 오르곤 한다.

미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그랬다.

성장에 대한 갈망, 그 말초적 본능을 절제시켜야만 한다.

그래야만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 순 서 -

 

 

413년전, 1600년 2월 17일

이탈리아의 사상가 조르다노 부르노가 화형에 처해지다.

 

104년전, 1909년 2월 17일

인디언 최후의 전사 제로니모 사망.

 

32년전, 1981년 2월 18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신경제 정책인 레이거노믹스를 발표하다.

 

 

 

 

 

 

 

2월 17일과 18일의 역사

Wikipedia

 

2월 17일

1600년 - 이탈리아의 사상가 조르다노 부르노가 화형에 처해지다.

1854년 - 영국오렌지 자유국의 독립을 승인하다.

1904년 - 이탈리아의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의 《나비 부인》이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하다.

1909년 - 인디언 최후의 전사 제로니모 사망.

1923년 - 북한 정치인 출신으로 대한민국에 귀화한 황장엽 탄생.

1963년 - 미국의 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 탄생.

2006년 - 필리핀 남부 레이테 지방에서 일어난 산사태로 1,000명 이상이 사망하다.

2008년 - 코소보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다.

 

2월 18일: 감비아(1965년)의 독립기념일

1910년 -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인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하다.

1930년 - 미국의 천문학자 클라이드 톰보명왕성을 발견하다.

1981년 -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신경제 정책인 레이거노믹스를 발표하다.

1986년 - 현대 자동차포니Ⅱ 자동차 1천 대가 미국 로스앤젤레스 항에 첫 상륙하다.

2003년 -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발생하다.

 

 

 

 

 

 

 

 

   1600년 - 이탈리아의 사상가 조르다노 부르노가 화형에 처해지다. 

 

 

   1548년 태어난 이탈리아의 사상가 조르다노 부르노는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금서'라고 불리는 책을 보게된 그는 당시의 종교관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다른 생각'을 주변에서 알게되자 그는 금새 교회의 감시대상이 되고 만다. 종교재판의 위협이 닥치자 그는 1576년 수도회를 떠나 종교생활을 끝내고 주변국가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생각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그는 1584년에 책을 쓰게 된다. 책의 제목은 '우주와 세계들의 무한성에 관하여' 였다. 그렇다. 교회에서 주장하는 천동설이 아닌,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에 관련된 책이었다. 그것이 그가 가진 '다른 생각'이었다. (참고로 지동설을 처음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부터 1543년까지 살았다.)

 

   하지만 알아둬야 할 사실은, 조르다노 부르노는 우리가 흔히 하는 '지동설'과는 별개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갔다는 점이다. 천동설은 신이 창조한 생명체가 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을 비롯한 다른 천체들이 지구를 돈다는 것이었고, 지동설은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이고 다른 천체들이 태양을 돈다는 것이었으며, 하늘의 별들은 천동설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우주의 껍데기(천구)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형태였다.

 

   반면 조르다노 부르노는 지동설을 넘어, 우주는 무한하며, 태양은 무한히 많은 여러 별중 하나일 뿐인거고, 그런 별을 도는 행성에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했다. 엄청나지 않은가? 이건 뭐 거의 400년을 앞선 스포일러 행위였다. 또 다른 우주에 대해서도 오늘날에조차 조르다노 부르노 수준으로 그 가능성이 의심되고 있을 뿐이다. (LHC와 같은 가속기 실험으로 밝혀질 가능성도 있다)

 

   사실 당시의 과학적 수준을 객관적으로 봤을때, 천동설이 틀리다는 것을 입증할 수는 있었지만(교회가 그를 막아서고 있었던거고) 우주가 무한하다거나 아니면 그에 준할 만큼 크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관측 결과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조르다노 부르노는 지동설에 대한 '금서'들을 보다가 우주가 무한하고, 별이 무한하게 있을 가능성을 깨우치게 된 것이었다. 우주가 천동설이나 지동설에서와 같은 원형의 구체가 아니라 무한하다는 걸 생각하게 되는 순간, 태양도 무한히 많고 그 태양마다 지구가 있고 지구마다 생명체가 있을 수 있다라는 쪽으로 무섭게 생각이 흘러갔을 것이다. 생각이 그 쯤 이르자 종교에 대한 반발도 커져갔고, 그의 활동은 더욱 열정적으로 변해갔다.

 

   결국 조르다노 부르노는 1591년에 그의 책과 행동들로 인해 체포되어 재판을 받으며 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리고 1600년 2월 8일 사형을 선고 받게 되며, 2월 17일에 로마 광장에서 화형당한다. 교회는 그의 '다른 생각'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고자 마지막 유서까지 없애 버렸고 화형당할때 '다른 생각'을 주장할까 우려해 혀에 못을 박기까지 했다. 신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정말 참...

 

   그런 조르다노 부르노는 사형선고를 받던날 이렇게 말했다.

 

 

"말뚝에 묶여 있는 나보다 나를 묶고 불을 붙이려 하고 있는 당신들이 더 공포에 떨고 있다."

 

 

   그 말은 정확했다. 교회는 더 이상 그 물결을 막을 수 없었다. 1600년대 들어 케플러가 행성 운동의 법칙을 밝혀냈고, 갈릴레이가 등장해 교회와 다시 한번 지동설을 놓고 대립했다. 1600년대 중반에 태어난 뉴턴은 이후 과학적 방법론을 탄생시켰고 더 이상 종교적 방법론은 설자리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이에 대한 재판이 잘못 되었음을 인정했고, 2008년에는 최근 사임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갈릴레이의 연구는 신앙에 반하지 않았다'고 말해, 지동설을 사실상 인정했다.

 

 

 

 

 

 

 

 

 

 

 

 

 

 

   1909년 - 인디언 최후의 전사 제로니모 사망. 

 

 

   제로니모, 본명 고야틀레이(하품하는 자)는 1829년 6월 애리조나주의 한 계곡에서 태어난 인디언 아파치족 추장의 손자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고 다른 이가 아파치족의 추장을 맡게 되면서 제로니모는 혼자가 되었고, 그로 인해 더욱 강해졌다.

 

   제로니모가 30살이던 1858년 여름, 제로니모의 부족은 멕시코인들과 교역을 하기 위해 이동하다 중간에 천막을 치고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제로니모를 비롯한 전사들이 다른 곳에 있던 틈에 멕시코 군대가 천막을 습격해 많은 부족사람들이 죽게 된다. 제로니모의 어머니와 아내, 자식 셋도 그에 포함되어 있었다.

 

   제로니모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세상을 떠나면서 추장을 맡게 되었던 '망구스 콜로라도'와 다른 부족의 추장 '코치스', '후'는 이후 복수심에 불타는 '제로니모'에게 전투지휘를 맡겼다. 이후 제로니모는 멕시코군과의 전면전을 승리로 이끈다. 그는 1874년까지 뛰어난 지략으로 미군과 멕시코군을 괴롭혔다. '성 제로니모'의 기념일에 멕시코인 마을을 습격해 '제로니모'라는 별명을 얻게된 그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백인 사회에서는 '제로니모가 온다'라면 어린아이도 울음을 그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1874년에 이르러, 지속된 소모전으로 많은 아파치족들이 희생되어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결국 미국 사령관의 제안에 따라 항복하고 만다. 이후 제로니모는 국제박람회에서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고,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했는데, 끝내 고향 애리조나로 돌아가지 못한채, 1906년 자서전을 한편 쓰고 1909년 2월 17일에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말년은 쓸쓸했다. 하지만 이후 2차세계대전 공수부대원들은 '제로니모'를 외치며 낙하 했고, 아이들도 '제로니모'를 외치며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했으며, 공격용 헬기에도 '아파치'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제로니모는 용기의 상징이 되었다. 최근 '오사마 빈라덴'이 '제로니모'라는 암호명으로 불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로니모의 손자를 비롯해 아파치 족의 후손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제로니모는 오늘날 용기, 리더쉽 등 다양한 방면에서 인정받고 있고 아주 최근까지도 재조명 받고 있다. 

 

 

 

 

 

 

 

 

 

 

 

 

 

   1981년 -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신경제 정책인 레이거노믹스를 발표하다.

 

 

   민주당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임기말(70년대 말) 석유값 상승(오른쪽 그래프)을 비롯한 경제불황을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1980년 40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가 바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1981년부터 임기를 시작한 강경보수론자 레이건은, 새로운 시장 중심적 경제정책을 내세운다.

 

   1. 정부지출의 축소

   2. 노동과 자본에 대한 소득세 한계세율(최고 세율)을 낮춤

   3. 정부 규제의 축소

   4. 인플레이션을 줄이기 위한 화폐 공급량의 조절

 

   이러한 내용을 라디오 방송자 폴 하비가 '레이건'과 '이코노믹스'(economics, 경제학)를 합쳐 '레이거노믹스'라고 부르면서 그 말이 계속 사용되게 된다. 그리고 훗날 이 레이거노믹스는 '신자유주의'라고도 불린다. 대공황시기의 '자유주의'의 재림이라는 의미에서다. (물론 내용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작은 정부'라는 것에서 동일하다)

 

   이후 취임한 해인 1981년 8월에는 항공 관제사 노조가 파업을 하자 11300명을 해고해 버렸고, 노조를 와해시키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했다. 그 결과 노조 조직율이 떨어졌고, 최저임금도 상당히 감소하게 된다.

 

   그러한 레이거노믹스의 결과가 위키피디아에 있는 다음의 지표들이다.

 

 

 

 

 

상위 0.01%, 0.1% 고소득자의 세금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40%대를 유지하던 고소득자 세금은

1981년 레이건 대통령 취임과 함께 20%대로 떨어진다.

클린턴 때 다소 증가했지만 이후 다시 줄어든다.

 

 

 

 

 

포드 정부에 들어서 베트남 전쟁 종전(1975)이후의 충격으로

물가가 급등하고 실업률이 증가하고 경제 불황이 닥치자 정부 지출이 크게 증가한다.

지미 카터때는 70년대 후반 석유값 폭등의 여파가 이어진다.

레이건 정부에서는 석유값이 지속 하락했지만 감세 등의 이유로 재정적자가 크게 늘어난다.

조지HW부시때는 레이건 정부의 정책이 유지됨과 동시에 걸프전이 있었다.

 

 

 

 

 

70년대의 경기침체로 상승세가 주춤했던 시간당 평균 임금은

80년대 레이건 정부에 들어서 침체가 해소 되었음에도 전혀 개선되지 못했다.

 

 

 

 

 

   위의 데이터들은 레이거노믹스의 '결과'라기 보다는 레이거노믹스 그 자체이다. 결과는 어떠했을까? 결과적으로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이 안정적인 수준으로 떨어졌다. 또한 레이거노믹스로 인한 부자와 대기업 감세 정책, 노동 유연성 확보(노조를 없애고 노동자를 쉽게 해고하고 고용할 수 있도록 한 것) 등이 훗날 클린턴 정부에서의 미국 호황으로 이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다소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노동자의 임금이 싸지니 기업들이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게 되면서 실업률이 떨어진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고용의 질이 질적으론 하락했다는 거다. 실제로 레이건 정부에서 위에서 보듯 임금이 하락했고 가계 저축률도 하락했다. 훗날 클린턴 정부의 호황은 금융산업의 성장으로 설명되는데, 레이거노믹스 이후 고액 자산가와 대형자본이 증가하고 각종 규제가 사라진 덕분이라고 본다면, 이는 바로 2007년 금융위기의 원흉이다. 레이건 정부에서부터 시작된 재정적자와 되돌리기 어려운 세금정책은, 미국이 법적 디폴트 상황에까지 몰리고 늦게라도 경제방향을 전환하기 어렵게 된 원인이다. 복지만 되돌리기 어려울까? 감세도 되돌리기 어렵다.

 

 

 

 

 

 

 

90년대말 끝난 클린턴 정부의 경제활황조차도 면밀히 볼 필요가 있다.

그 이득은 누가 봤을까?

 

 

   물론 레이거노믹스의 기본인 자유주의, 즉 시장기반경제정책 전체를 나쁘다 매도 할 수는 없다. 결국 레이거노믹스에 대한 고민은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빚, 부채를 통한 성장이 지속가능한가' 라는게 그것이다. 답은 나와있다. 모든 사업들이 그렇듯 정부도 마찬가지다. 부채를 통한 성장은 지속가능할 수 없음이 분명하지만 부채는 성장에 있어 필요하기도 하며, 적정 부채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현금흐름(국가라면 세금정책)을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레이거노믹스에도 정도가 있었어야 했다.

 

   신나서 막 질러대는 경제정책은 지속가능하지 못하다. 우리도 성장을 위해서든 복지를 위해서든 지출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2월 17일과 18일의 역사

 

- fin -

 

 

 

 

현재까지 수정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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