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 혁명(벨벳 혁명)의 한 순간, 프라하]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지식인들의 움직임도 중요하지만,
중요한건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조직, 단체에 동참하여
실제로 많이 그들을 따라주는 것을 통해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국민이 정부권력에 이길 수는 없다.
12월 28일과 29일의 역사
Wikipedia
1885년 -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인도 국민 회의가 결성되다.
1895년 -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를 써서 찍은 최초의 상업적 활동 사진을 공개하다.
1990년 - 서울 지하철 7호선 착공.
1912년 - 샌프란시스코 시영 철도가 발족되다.
1926년 -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다.
1945년 - 모스크바 3상회의, 한국에 대해 5년간 신탁통치 결정. 삼상결정 참조.
1955년 - 중국의 반체제 인사, 인권 운동가 류샤오보 탄생.
1972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전날 제정된 헌법에 근거하여 김일성이 국가 주석으로 취임하다.
1991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 선포.
2011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영결식이 평양에서 엄수됨.
1170년 - 잉글랜드 켄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켓 살해.
1845년 - 텍사스 공화국이 미국에 병합되어 텍사스 주가 되다.
1890년 - 운디드니 학살: 수족 인디언 400명이 미군에게 살해되다.
1911년 - 쑨원이 남경혁명정부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되다.
1937년 - 아일랜드 자유국이 새 헌법을 비준하면서 아일랜드가 되다.
1929년 - 독일의 기술인 빌헬름 마이바흐 사망.
참고글 : 12월 29일과 30일의 역사 - 마이바흐에 대하여, http://blog.daum.net/smileru/8888397
◈ 1955년 - 중국의 반체제 인사, 인권 운동가 류샤오보.
류샤오보, 몇 번 들어봤는데 잘 모르는 인물이라서 한번 다뤄보고자 한다. 1955년 12월 28일 태어나 지린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베이징 사범대학교 중문과에서 석사&박사학위를 취득한 류샤오보는, 졸업 후 베이징 사범대에서 시간강사로 강의를 하다가 1988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 요청으로 그곳에서 중국 현대문학 강사를 지낸다. 그리고 같은 해 말에 미국 하와이 대학교로 옮겨가 중국 철학 및 중국현대정치에 대해 강의하는데,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발생하자 바로 귀국해 시위에 참여했으며 시위대 대표로 중국 정부와 협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하튼 1989년 6월 4일의 끔찍한 유혈사태로 마무리된 천안문 사태... 곧바로 체포된 류샤오보는 1991년 1월까지 투옥생활을 하게 되고, 이후 글을 쓰며 인권 & 민주화 운동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결국 1995년에 체포된 류샤오보는 1996년 1월 석방되자마자 다시 인권 & 민주화 운동을 재개하고, 그러다 또다시 체포되어 1996년부터 1999년까지 '노동개조' 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게 된다.
이후에도 활발히 활동하던 그는 결정적으로 2008년에 중국 정부에게 제대로 밉보이게 되는데, 바로 '08헌장' 때문이다. 중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지식인 300여명이 모여 중국헌법 100주년을 맞이하여 작성하고 공표한 08헌장에는, 입법민주주의,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등 민주국가가 되기 위하여 채택해야 할 헌법 및 요구사항들이 담겨있는데, 이를 주도한 류샤오보는 당연히 중국 정부입장에서 좋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재판 끝에 2009년 6월, '국가 권력 전복 선동 혐의'로 징역 11년형을 선고 받게 된다. 류샤오보는 항소했지만 기각되었고 말이다. (참고로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은 2심에서 내란음모 무죄, 내란선동 유죄로 징역 9년형을 선고 받은 상태다)
그렇게 류샤오보가 감옥에 있던 2010년, 재미있는 소식이 들려오니 바로 류샤오보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었다. 그의 꾸준한 민주화를 위한 노력, 특히 그를 비폭력으로 진행해왔다는 점이 노벨 위원회에게 높게 평가받은 것이었다. 아웅 산 수 치 여사,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의 노벨 평화상 수상도 그러한 이유에서 였고 말이다.
하지만 중국은 발끈했다. 의도적인 체제 공격이라 주장하면서 노벨상 수상에 반대함은 물론, 국내외의 석방 요구도 당연히 거절했다. 이 일로 중국 내에서 반정부집회가 거세지자 중국 내의 문자메세지에서 '류샤오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게 했으며(그런게 가능했나보다...), 관련 소식을 다룬 해외 언론들의 보도가 중국내에 송출되지 못하게 방해했다. 또 노르웨이에서 열리는 노벨 평화상 시상식에 다른 국가 대사들이 참가할 수 없도록 압력을 넣어, 노르웨이 주재 러시아, 카자흐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란, 베트남, 쿠바, 아르헨티나 등의 대사들이 노벨 평화상 수상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특히 가족들이 노벨 평화상을 대리 수상하지도 못하도록 친인척들 모두의 출국을 금지해 결국 시상식에는 아무도 참여하지 못했는데, 이는 1935년 나치가 나치당에 반대하고 1차세계대전때부터 반전운동을 해온 '카를 폰 오시에츠키'의 노벨상 수상을 막은 이후로 처음이라고 한다. (카를 폰 오시에츠키는 1938년에 강제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난다)
결국 노벨 위원회는 빈 자리를 만들어 그를 대신했다.
참 중국... 물론 북한과 같은 상상초월의 공산국가는 아니다만, 역시나 민주주의와의 간극은 너무나도 큰 것 같다.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언제쯤 결정적인 순간이 올지... 여튼 중국내의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 1989년 - 신사 혁명이 끝났다.
바로 이어서 비슷한 이야기다. 음, 신사 혁명은 다른 말로 '벨벳 혁명'이라고 부른다.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혁명을 지창하는 말인데, 벨벳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옷감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영어로 '조용한' 뭐 그런 뜻이라고 한다. 몰랐는데 찾아보니 정말 velvet에 그런 뜻이 있더라.
아무튼 전후 상황을 좀 살펴보면... 현재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된 체코슬로바키아는, 2차세계대전때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다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게 된다. 독일 동쪽에 있었으니 동쪽에서 밀고 온 소련에 의해 해방된 것이었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도 공산화되고 만다. 그러다가 1968년 초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민주화운동이 일어나 큰 성과를 거두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프라하의 봄'이다. (요즘 '아랍의 봄' 등으로 응용되어 사용되는 그 사건이다.) 당시 완전한 민주화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노보트니 당 제1서기가 물러나고 개혁파들이 집권하면서, 언론사전검열이 폐지되면서 언론-출판-집회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해외여행 및 이주가 자유로워졌으며, 근본적으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의 길을 가기로 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민주적이고 탈스탈린적인 체제로의 변화를 본격적으로 시도하게 된다. 그게 1968년 4월이다.
하지만 소련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그런 움직임이 다른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로 퍼질 것을 우려한 소련은, 소련-동독-폴란드-헝가리-불가리아 등의 군대로 이뤄진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 20만명을 동원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고 개혁파와 당원들을 숙청해버렸고, 그렇게 프라하의 봄은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지식인들이 움직이면서 1977년에는 훗날 중국 류샤오보의 '08헌장'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77헌장이 작성되었는데, 그에 참가한 저항주의 작가 '바츨라프 하벨' 등이 투옥되면서 탄압당하고 만다.
그러던 1988년, 다들 잘 알고계시는 것처럼 소련의 개혁이 시작되면서 움츠리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세력들도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그 때 아주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77헌장 기초작업에 참여했다 투옥된 '바츨라프 하벨'이다. 1989년 11월에는 반체체연합인 '시민포럼'을 조직하여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였는데, 평화적인 학생시위가 경찰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면서 시위 규모가 폭증, 11월 19일의 시위자 20만명에서 11월 20일의 시위자는 50만명으로 불어나게 되며, 11월 25~27일에는 80만명의 시위대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 총인구의 75%가 파업에 나서면서 시위는 정점에 달한다.
결국 11월 29일, 의회는 헌법에서 공산주의와 관련된 내용을 삭제하게 되며, 12월 10일, 구스 타우 후 사크 대통령이 물러나고 12월 29일 열린 선거에서 '시민포럼'을 조직한 '바츨라프 하벨'이 임시대통령으로 당선(의회 간접선거)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완전히 민주화 된다. 하벨은 연설에서 "우리는 평화적으로 혁명을 이루어냈다. 이는 벨벳혁명이다" 라고 말했는데, 이게 이 혁명의 이름이 되었다. 여담으로 바츨라프 하벨이 작가출신이고 경험도 없기에 국가 운영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박식하고 사상적으로도 균형잡혀서 국가를 잘 이끌었고 훗날 재선도 되었고, 실업률도 유럽 최저수준으로 끌어내리는데 성공해 퇴임 후에도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역시 잘못된 것(공산주의 독재)를 지적하는 마인드와 국가를 운영하는 마인드는 확실히 다를 수 있는 듯.
아무튼, 그래서 이 1989년의 시위와 공산정권의 붕괴과정이 벨벳 혁명, 신사 혁명인 것인데, 어떻게 이 혁명이 무혈로 달성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시민포럼'이 조직될 때 그들을 충분히 체포할 수 있었음에도 비밀경찰들이 움직이지 않았고, 또 당시 군대들, 경찰들이 시위무력진압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진압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인데... 가장 유력한 설명은 당시 공산당 지도부에서 무력진압 여부를 놓고 내분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소련도 침묵했다는 것이 중요한데, 소련 스스로도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던 것이, 프라하의 봄 때와 같이 소련이 단호한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거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메세지를 보내지 못한 원인이었지 않을까 싶다.
이 신사 혁명은 아주 큰 전환점이 되었다. 우선 1989년 12월, 미국과 소련은 냉전 종료를 선언한다. 사실 1989년 중반부터 폴란드, 슬로베니아 등의 공산주의 붕괴가 시작되었었는데, 이 신사 혁명이 공산주의에 제대로 마침표를 찍은 셈이었다. 무혈혁명이었다는 점 역시 공산주의 정권이 그만큼 무력해졌다는 점을 시사했고, 이 신사 혁명, '벨벳 혁명'은 무혈혁명을 일컫는 대명사가 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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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생각해볼만한 것은, 앞서 언급한 중국 류샤오보의 움직임과 함께 생각해봐야 할 것 같은데, 중국정부가 폭력적 탄압을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당보다 잘 사용하고는 있다지만, 가장 큰 양국의 차이는 바츨라프 하벨이 조직한 '시민포럼'과 같은 조직적 집단행동이 중국에서 없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도 지식인층이 움직이고는 있지만 지식인들의 행동만으로는 결과적으로 바뀌는 것이 없다고나 할까?
두 달전 리뷰를 올렸던 유시민의 책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유시민은 국민이 정부를 상대로 승리하려면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가 필요하다고 말했었는데 참 맞는말인 것 같다. 역사를 살펴봐도 어느나라나 그렇지 않은가 싶다. 흥미로운 부분은 수도에서 열린 집회의 규모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 인구 1000만 수준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프라하에 최대 80만명이, 1987년 6월 항쟁 당시 인구 4000만 수준이었던 한국에서는 서울에 최대 150만명이 모였으니 말이다. 전국적인 참여인원은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물리적으로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정도, 또 그를 막아낼 공권력이 집결될 수 있는 정도에 한계가 있어 그러한 결과가 나오지 않나 싶은데, 사회학적으로 재미있는 연구주제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어느나라든 한 100만명 정도만 한 곳에 모일 수 있다면, 그 규모만으로도 정권을 뒤엎을 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 유시민의 말처럼 전국적인 움직임도 동반되어야 하고, 그 규모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함은 물론이겠다.
(참고글 : [책] '나의 한국현대사' ★★★★☆ 똘똘한 유시민의 역사이야기~, http://blog.daum.net/smileru/8888563)
그래, 아무쪼록 전세계에 민주주의가 잘 정착했으면 좋겠다. 아랍의 봄은 피로 얼룩지고 있고, 러시아처럼 겉으로만 민주주의 국가인 곳들도 많다. 미국 등은 민주주의 정치가 돈의 영향을 너무 크게 받고 있어서 논란이 계속되는 등, 기존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퇴보하는 경우도 너무 많이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분명 예외는 아니고 말이다. 사람들이 정치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져서 전문적이지 않아도 정신이 바로 잡힌, 이를테면 '바츨라프 하벨'과 같은 사람만 지도자 자리에 앉혀놔도 나라는 잘 될 수 있을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다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민주주의가 붕괴되는 것에 무뎌져 가는게 아닐까 싶다. 그걸 아는 사람들만이라도 정신차리고 문제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주 글은 여기까지다.
12월 28일과 29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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