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전쟁 당시 핀란드군의 스키부대]
강대국 소련을 상대로 핀란드는 굴복하지 않았고,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떠나, 결과적으로 많은 역사가 바뀌었다.
11월 30일과 12월 1일의 역사
Wikipedia
11월 30일: 바베이도스의 독립기념일, 스코틀랜드의 성 앤드류의 날, 필리핀의 보니파시오의 날
1783년 - 미국과 영국이 미국 독립 전쟁의 강화 조약인 파리 조약을 체결.
1786년 - 토스카나의 페터 레오폴트 요세프가 역사상 처음으로 사형제의 폐지를 선언하다.
1905년 - 고종의 시종무관장 민영환, 을사보호 조약 체결을 개탄하며 자결.
1905년 - 주한 영국공사관 철수
1936년 - 만국박람회 때 지어진 런던의 수정궁이 화재로 소실되다.
1939년 - 제2차 세계 대전: 소련이 핀란드를 공격하는 겨울 전쟁을 벌이다.
1962년 - 우 탄트가 국제 연합 사무총장으로 선출되다.
1980년 - 언론 통폐합 단행. TBC 동양방송, DBS 동아방송 고별방송.
2009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구 100원을 신 1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 실시.
12월 1일: 세계 에이즈의 날, 포르투갈의 독립부활기념일
1821년 - 도미니카 공화국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다.
1913년 - 포드 자동차 회사가 최초의 일괄 조립 라인을 도입, 공개하다.
1918년 - 덴마크 국왕과의 동군연합으로 아이슬란드가 독립국이 됨.
1943년 - 제2차 세계 대전: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다.
1950년 - 중화인민공화국 군대가 티베트 수도 라싸를 침공.
1959년 - 12개 나라가 모여 남극의 평화적 이용을 규정한 남극 조약을 맺다.
1975년 - 현대자동차에서 첫 국산승용차인 포니의 생산을 시작하다.
1988년 -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가 이슬람 최초의 여성 총리로 당선됨.
1990년 -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채널 터널이 연결되다.
1999년 - 미국의 두 정유회사인 엑슨사와 모빌사가 합병하여 지구상 최대의 회사 엑슨모빌이 출범하였다.
2009년 - 동대문운동장역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으로 역명을 변경하다.
1943년 - 제2차 세계 대전: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다.
참고글 : 12월 1일과 2일의 역사 - 센카쿠열도 문제 : 카이로선언 70주년
◈ 1835년 -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 탄생.
마크 트웨인! 할 이야기는 별로 없지만 그냥 유명한 사람이라 꼽아봤다. 마크 트웨인은 필명이고, 본명은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라고... 그는 어린시절 미시시피강 주변에서 살았는데, 그 때의 인상이 그의 훗날 작품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 작품이란 바로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다.
또한 그는 기독교 근본주의와 노예제도의 잘못을 비판하는것을 주저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관련된 작품들도 있지만 위키에 있는 그의 명언들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노예제도가 하나님이 인정한 신성한 제도라 가르쳤고 의심이 들어 확신하고 싶다면 성서를 들여다보라", "예수께서 지금 여기 계시다면, 그 분께서는 기독교인이 되려 하지 않으실 것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허클베리 핀은, 미시시피강 주변에서 만난 흑인 노예 '짐'과 모험을 떠나게 되고 결과적으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교훈을 얻게 되는데, 그의 일생과 주관이 모두 녹아있는 그런 소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마크 트웨인 최고의 작품이며, 미국 문학사는 물론 세계 문학사 적으로도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의 학생들은 금서로 분류되어 읽을 수 없었다고 하지만 말이다.
◈ 1939년 - 제2차 세계 대전: 소련이 핀란드를 공격하는 겨울 전쟁을 벌이다.
전쟁 자체도 문제지만, 그 전쟁을 겨울에, 북유럽에서 한다는 것은 정말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아무튼...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2차세계대전 직전 독일과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서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그를 바탕으로 독일은 유럽을 마음 편히 침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조약에는 다른 조약들도 딸려있었다. 바로 소련과 독일 사이에 있는 동유럽, 북유럽 국가들을 서로 나눠갖는다는 비밀 조약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2차세계대전의 발발)하자 소련은 동쪽에서 밀고들어와 폴란드를 분할해가지게 되었고, 이에 주변국가들은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결국 무서움에 떨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경우는 소련이 강요한 불평등 상호방위조약으로 사실상 소련에게 군사적으로 장악되어 버리는데, 그러한 소련의 압박을 거절한 국가가 바로 핀란드다. 일부 영토를 넘기고 항구를 개방하라는 요구를 거절한 것이었다.
그러자 소련은 핀란드가 먼저 발포했다는 것을 핑계로 46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핀란드를 침공한다. (마이닐라 발포사건, 후에 발견된 소련문건을 통해 조작되었던 것으로 확인됨) 핀란드군도 34만명 정도가 되었는데 사용할 수 있는 전차가 소련이 동원한 전차 3200대의 100분의 1밖에 되지 않았었다. 그마저도 너무 낡은 구형전차여서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생각보다 핀란드 군은 잘 버텼다고 한다. 눈덮인 산을 잘 활용한 핀란드의 스키부대는 매우 효율적이었으며, 앞서 겨울에 벌이는 전쟁은 잔인하다고 했었지만 영하 40도의 날씨는 핀란드군보다는 소련군에게 훨씬 더 잔인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사에서 최고의 저격수로 알려지고 있는 겨울전쟁 당시의 핀란드 병사 '시모 하이하'.
저격 라이플로 최소 510명, 최대 602명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도 소련군은 끝내 핀란드의 방어선을 뚫는데 성공했다. '겨울전쟁'이 시작된 뒤 3개월이 지난 1940년 2월의 일이었다. 그 때쯤 핀란드 군의 탄약도 바닥났는데, 원래같았으면 탄약이 떨어진 핀란드군에게 분노한 소련군의 대학살이 시작되었겠지만, 소련군은 이미 최소 12만7천명이나 전사한 상황이어서 진작부터 평화협상을 고려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핀란드군의 사망자는 2만7천명이었다고... 결국 3월에 양국은 평화협정을 맺었는데, 훌륭히 저항했던 핀란드였지만 탄약이 떨어졌던 핀란드는 평화협상과정에서 적지 않은 영토를 소련에게 넘기고 만다. 실질적으로 빼앗겼던 영토는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소련이 애초에 핀란드에게 요구했던 것들을 상당수 얻어내게 된 셈이 되었다.
전쟁은 그렇게 끝났지만 파장은 굉장히 컸다. 첫째로, 히틀러는 소련을 굉장히 우습게 보게 되었다. 이는 후에 히틀러가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공격하는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둘째로, 핀란드인들이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사실 핀란드에는 소련에서 활동했고 또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자가 굉장히 많았는데, 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스탈린의 숙청과 소련의 침공으로 인해 돌아선 그들은 겨울전쟁에서 핀란드를 위해 싸웠다. 이는 다른 핀란드 국민들이나 소련 역시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이는 훗날 핀란드가 한국과 다르게 이념대립을 최소화하고 좌우파가 정치적으로 협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소련이 차지한 영토. 실제 전쟁으로 소련이 차지했던 영토는
'Karelia'라고 쓰여있는 알파벳 K 쪽의 형광색 표시 부분 정도다.
셋째로, 핀란드인들이 분노하게 되었다. 전쟁으로는 영토를 잘 지켰는데 평화협정을 하니 영토가 왕창 떨어져 나가게 되었고, 결국 분노한 핀란드인들은 후에 나치독일의 지원을 받아 소련을 공격한다. 겨울전쟁 종전 1년 3개월 뒤에 발발한 1941년 6월의 '계속 전쟁'(Continuation War) 또는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이 그것이다. 독일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할 때 핀란드인들이 함께 소련을 공격해 잃었던 영토를 되찾은 것이었는데, 1944년에 독일이 패망수순에 접어들자 핀란드는 반대로 소련과 협력해 독일을 공격하게 된다. 이 역사로 인해 핀란드와 러시아는 아직도 사이가 '나름' 좋은 편이지만, 핀란드는 서구사회와도 친한, 그런 중간에 놓이게 되었다.
◈ 1999년 - 미국의 두 정유회사인 엑슨사와 모빌사가 합병하여 지구상 최대의 회사 엑슨모빌이 출범하였다.
엑슨이 모빌을 1999년에 835억달러에 흡수합병하여 탄생한 것이 엑슨모빌이다. 록펠러가 설립해 미국 석유시장의 88%를 차지하였다가 반독점법으로 1911년에 분해된 스탠더드 오일의 후손 중 '엑슨'과 '모빌'이 다시 합쳐진 것이었다. 이 엑슨모빌은 미국 주식시장에서 MS, GE, IBM등이 1위를 주고받던 시가총액에서 2005년에 1위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2011년 애플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그냥 이제는 위키와 달리 '지구상 최대의 회사'가 아니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 2002년 - 여중생 추모 촛불 집회 시작.
2002년 6월 13일, 여자 중학생 2명이 길을 걷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당시 2000년 전후의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 논란과 2001년의 아프간 침공등으로 좋지 않던 반미감정을 더욱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오바마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는 표면적인 반미감정은 사라진 듯한데, 참 조지 부시때가 반미감정이 심각하긴 했었던 듯 하다. 하긴 뭐 전 세계적으로 그랬으니까...)
위로금 100만원도 논란이 되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후 등장한 '촛불 집회'였다.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곤 하던 한 시민기자가 제안하여 시작된 것이 그것이었다. 과거에도 촛불 집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는 굉장히 확산되어 오늘날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이다. (오른쪽은 당시 사진)
생각해보면 이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반대집회때부터 언급되기 시작한 '민주주의 2.0'이라는 것의 시작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설립된 인터넷언론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던 시민기자가 제안한 운동이 인터넷을 통해 퍼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인터넷이 가져온 새로운 언론과 새롭게 반응하는 국민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 사건이었다고나 할까? 후에 스마트폰, SNS, 커뮤니티 사이트등으로 사람간의 연결성이 당시보다 더욱 확장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상황...
이러한 추세의 미래는 무엇일까? 더욱 활발한 정치참여로 이어질까, 아니면 세세한 정보와 행동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존재까지 자세히 알게되어, 정작 자기 자신까지 행동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정치참여외면으로 이어지게 될까? 실질적 정치참여가 줄어들더라도 인터넷 여론 자체가 굉장히 중요해져, 오프라인 운동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될까? 민주주의의 미래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주는 여기까지다.
11월 30일과 12월 1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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