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한 회의실 현장 사진]
죽어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히틀러와 같은 사람이 그에 포함될 수 있다는 걸 완전히 부인하진 못하겠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인들에게 학살에 가까운 공격을 가하면서
'그래서 히틀러가 유대인들 청소하려 했나보다', '유대인들이 그 때 학살되었어야 했다'라는 말도 나오더라.
뭐 농담반 진담반의 이야기들이지만 참으로 섬뜩한 이야기들이 아닐 수 없다.
지워져야 하는 것은 사람 또는 민족이 아닌, 삐뚤어진 생각이라고 본다.
그것이 히틀러를 낳았고, 지금의 무자비한 이스라엘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근본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다음번 파국을 막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 링 크 -
7월 21일과 22일의 역사
북대서양조약기구, 원숭이 재판
http://blog.daum.net/smileru/8888307
- 순 서 -
82년전, 1932년 7월 20일
한국계 미국인 현대미술가 백남준 탄생.
70년전,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다.
7월 20일과 21일의 역사
Wikipedia
1822년 - 오스트리아 식물학자 그레고어 멘델 탄생. ('멘델의 법칙')
1907년 -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일본이 군대를 동원하여 고종 양위 사건이 발생하다.
1937년 - 이탈리아 과학자, 발명가 굴리엘모 마르코니 사망.
1944년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다.
1948년 -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이시영이 부통령으로 당선되다.
1960년 -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가 스리랑카의 총리로 당선됨으로써 최초의 여성 국가원수가 되다.
1969년 - 아폴로 11호 착륙선이 달에 내려앉아 닐 암스트롱은 달 표면을 걸은 최초의 인간이 되다.
1976년 - 바이킹 1호가 처음으로 화성에 착륙하다.
2002년 - 북한 고려항공, 양양공항(南) - 선덕공항(北) 남북직항로 첫 시험비행.
1798년 - 나폴레옹이 피라미드 전투 승리로 이집트를 점령하다.
1861년 - 미국 남북 전쟁: 불런 전투가 시작되다.
1925년 - 미국 테네시 주에서 진화론 교육문제로 원숭이 재판이라고 불리는 재판이 열렸다.
1944년 - 남태평양의 괌 섬이 일본군 점령 하에 3년간 있다가 미국령으로 다시 돌아오다.
1949년 -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미국 의회에서 승인되다.
1948년 -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이시영이 부통령으로 당선되다.
참고글 : 5월 25일과 26일의 역사 - 부산정치파동과 이승만
1989년 - 미얀마 아웅산 수지 여사 가택연금
참고글 : 문명4BTS-(#8-2) 인도차이나반도 국가들의 역사 : (1) 베트남, 미얀마
1932년 7월 20일
한국계 미국인 현대미술가 백남준 탄생.
백남준...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잘 모르는 인물인 것이 사실이다. 솔직히 나도 왜 대단한지는 잘 모르고 있고... 그래서 오늘은 한번 백남준에 대해 알아볼까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이던 1932년 7월 20일,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백남준은, 아버지의 섬유업 경영으로 부유하던 집안탓인지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1949년부터는 홍콩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가족 전체가 일본으로 이주했을때 도쿄대학교에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미술사학과 음악사학을 전공했다.
1956년에는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대학교, 쾰른대학교를 다니며 서양의 건축, 철학, 음악사를 배우는데, 1958년 뮌헨대학교에서 자유분방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의 작품활동에서 많은 영감을 얻은 백남준은, 작품활동을 시작하면서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라고 불리며 독창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외'라는 퍼포먼스 작품에서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1960년에는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에서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퍼포먼스를, 1962년 '바이올린 솔로'에서는 바이올린을 순식간에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백남준 초기의 작품활동은 음악적 이벤트와 퍼포먼스에 집중되었는데, 그러다가 레이더와 TV작업을 주로 했던 '칼 오토 괴츠'의 영향을 받으면서 TV를 통한 작품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1963년에 첫번째 개인 전시회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서 13대의 TV를 통해 '비디오 아트'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1965년 세계 최초의 비디오카메라인 소니의 '포타백'으로 미국 뉴욕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해 곧바로 작품을 만들어 방영했는데, 이것이 미술 역사 속 최초의 '비디오 아트'로 기록되고 있다 한다.
그와 동시에 퍼포먼스 활동에도 열심이었던 그는, 1967년 음악에 성적인 코드를 집어 넣은 '오페라 섹스트로니트'에서 누드 상태로 첼로를 연주하는 퍼포먼스를 시도했는데, 웃옷을 벗은 백남준을 첼로삼아 연주하뎐 첼리스트가 옷을 벗자 뉴욕경찰에 체포되어 사회적인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한다. 하지만 이는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법 개정으로 이어졌다고...
일본인과 결혼했고, 미국과 한국 국적을 가지고 뉴욕에서 활동했지만 독일에서 예술을 배웠던 그... 그는 90년대를 전후로 하여 한국 예술계를 위해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그의 작품 '다다익선'은 1988년 88올림픽을 기념해 만들어진 것으로 그의 작품중 가장 큰데, 개천절날(10월 3일) 공개되었고 그래서 사용된 TV의 개수는 1003개이다. 1995년에는 제1회 광주비엔날레 INFO art 전에 크게 기여했다하고, 베니스 비엔날레에서의 한국관 설치에 결정적 역할을 해 한국 미술이 세계로 진출하는 큰 기회가 되었다.
1996년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다시 일어섰고, 2000년에는 그의 주무대였던 뉴욕시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세계'라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고 한다. 그리고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 자택에서 노환으로 75세에 별세했다. 화장된 그의 유해는 한국, 미국, 독일에 나뉘어서 안치되었다가, 후에 국내로 들어와 안장되었다.
내가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 이렇게 국제적으로 유명한 예술인이 있었나 싶다. 조수미씨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딱히 없다. 한 장르를 창시하기까지 한 백남준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잘 평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또 현재 그의 작품 '다다익선'은 브라운관 TV가 없어 고장나는 모니터들을 어찌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하더라. 근래에 브라운관 업체인 삼성SDI등의 지원이 있기도 했지만 이젠 완전히 단종된 상황이라고... LCD 교체설이 나오고 있다는데, 평면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모양새와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글쎄, 요즘 커브드 TV도 나오고 있고, 잘 휘는 OLED 디스플레이도 있는데, 그것으로 브라운관을 유사하게 흉내낼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뭐 그의 작품관리부터 시작해서 여러모로 생각보다 우리가 그를 너무 잊는 것 같아 아쉽다. 다양한 스포츠 스타들이 많이 등장하긴 했지만, 세계적인 예술가는 우리나라에서 언제쯤 또 등장하게 될까?
참고링크 : 백남준 - 네이버캐스트 (그의 작품들의 사진과 영상들을 볼 수 있음)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영화 '작전명 발키리'로도 잘 알려져 있는 사건인데, 영화 이전부터 이 사건은 '발키리 작전'으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실제 작전명이 '발키리'였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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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했지만, 1차세계대전 시절 공을 세웠던 노장들과는 여전히 대립각이 있었다. 히틀러는 군을 장악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했던 상황... 결국 히틀러는 헛소문을 내어 노장들을 비방하여 몰아내고 측근을 심어 군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분노한 노장들은 '반나치' 세력의 중심이 되었는데, 곧 히틀러가 장악한 군으로 2차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승승장구하자 반나치 세력들은 별다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년의 시간이 흘러 독일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끝내 패하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독일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노장들은 히틀러를 암살하고 군을 장악, 나치를 몰아내고 연합군과 협상을 하여 전쟁을 끝낼 계획을 세운다.
그를 위해 사용한 작전이 바로 '발키리 작전'이다. 발키리 작전은 우리로치면 '동원령 선포', '향방작계'(향토방위작전계획)와 비슷한 것으로, 전쟁중인 독일 내부에서 폭동이나 반란이 일어났을 때, 후방지역에서 보급이나 훈련을 담당하던 병력과 신병과 같은 예비전력들이 그를 진압하는 작전이 바로 발키리 작전이었다. 따라서 반나치 세력들은 일단 히틀러를 암살한 뒤, 아직 반나치 가담을 결정하지 않은 예비군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프롬'이 발키리 작전을 발동, 반란세력을 나치로 규정하여 나치를 체포한 뒤, 반나치 세력인 전 육군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를 대통령으로 세우고 연합군과 협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루트비히 베크는 초기에는 반나치 세력이 아니었으나, 전쟁 발발 직후 독일군이 폴란드에서 저지른 만행을 보고 반나치로 돌아섰다)
반나치세력은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해 철통보안의 총통 사령부 '볼프샨체'에 폭탄가방을 반입하는데 성공한다. 폭탄을 터트리는 역할을 담당한 인물은 전쟁에서 한 쪽 눈을 잃고 예비군 참모로 지내던 '슈타우펜베르크'(왼쪽 사진)였는데, 폭탄 내부의 캡슐을 깨뜨리면 그 안에서 나온 액체가 신관을 녹여 10분뒤에 폭탄이 폭발하는 방식의 폭탄가방을 문제없이 작동시키고 그 가방을 회의실 테이블 히틀러 자리 옆에 놓는데 성공한다. 베를린으로 전화가 올것이라는 '떡밥'도 미리 던져 놓고 히틀러가 있던 회의실에서 의심없이 빠져나오는데에도 성공했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이윽고 10분이 흐르고, 육군참모총장 '호이징거'가 히틀러 앞에서 브리핑을 하며 "소련군은 막강한 병력으로 주나의 서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선봉은 이미 주나부르크 남서 지구에 도달했으며 페이푸스호 주위의 아군을 즉각 후퇴시키지 않으면 파국이..." 라는 말을 하는 순간 폭탄이 폭발했다. 회의실 창문은 모두 깨지고 천장에는 구멍이 뚫렸다. 1944년 7월 20일 12시 42분이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죽지 않았다! 슈타우펜베르크가 놓고 나간 폭탄가방이, 호이징거의 부관인 '브란트' 대령의 발에 우연히 걸렸고, 그를 본 브란트 대령이 히틀러가 불편해 할까 가방의 위치를 자기쪽으로 한칸 옮겨 놓았던 것... 결국 브란트 대령을 비롯해 공군 참모총장 코르텐, 히틀러 수석 부관 슈문트 등 4명이 현장에서 즉사했으며, 히틀러는 얼굴이 불길에 그을림과 동시에 다리에 화상과 고막파열, 팔에 나무 파편이 박힌 부상을 입고 불타는 회의실에서 기절해 있다가 구출되었다.
처음에 슈타우펜베르크가 범인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폭발의 원인도 몰랐다. 오래전에 설치된 폭탄이거나, 심지어 정밀 폭격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다. 하지만 슈타우펜베르트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걸 알게되면서 그는 유력한 용의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반나치들이 통신선을 절단한 탓에 총통 사령부 '볼프샨체'는 외부에 통신을 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슈타우펜베르트가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반나치 세력들은 바로 '발키리 작전'을 시작하려 했다. 앞서 말한대로 반나치 가담을 망설이던 예비군 총사령관 프리트리히 프롬(오른쪽 사진)은 반나치세력들이 발키리 작전 발동을 요구하자 히틀러가 죽었는지 되물었고, 사건 후 3시간 정도가 지난 4시에 볼프샨체의 통신선이 복구되면서 히틀러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프롬은 반나치 가담과 발키리 작전 발동을 거부한다.
결국 반나치 세력들은 별도로 움직이기 시작, 베를린의 나치, 친위대들을 체포하는데 성공하지만, 오후 6시 28분에 히틀러가 라디오에 등장하면서 자신이 살아있고 음모론자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면서 반나치 내부에서는 동요가 시작된다. 그리하여 반나치 내부에서 배신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특히 반나치세력과 접촉했던 예비군 총사령관 프롬은 접촉 사실을 들키지 않고자 다음날 슈타우펜베르트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체포해 바로 총살시켜 버린다. 슈타우펜베르트는 "위대한 독일이여 영원하라!"라고 외치고 처형당했다고...
나치에게 점령당했던 파리에서도 반나치세력 주도의 반란이 시작되어 1200여명의 나치 게슈타포, 친위대, 보안대 직원들이 체포되지만, 히틀러가 살아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그들의 반란도 흐지부지 되어버렸고, 나치와 반란세력간의 유혈충돌 직전 양측이 서로 합의하면서 파리에서의 반란은 없었던 일처럼 원상태로 돌아가버린다.
아무튼 당연히 불같이 화가난 히틀러는 관련자들을 모두 체포해 처형해버릴 것을 지시했고, 결국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 포함해 7000명이 체포, 4980명이 처형당했는데, 예비군 총사령관 프롬도 후에 그가 반란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건 8개월 뒤인 1945년 3월 12일에 처형당하고 만다. 죽기전 그는 발키리 작전을 발동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고...
여하튼 1945년 4월 30일, 사실상 독일이 전쟁에서 패하자 히틀러는 자살했고 그렇게 전쟁은 끝났다. 그래도 히틀러가 진작에 죽었다면 전쟁 말기 진행된 많은 학살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꼭 그게 아니어도 모든 전쟁은 일찍 끝날 수록 좋은 것이니... 물론 역사라는게 히틀러가 빨리 죽었다고 해서 좋은 쪽으로 흘러갔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더불어 직접 가방을 가져다 놓았던 슈타우펜베르크는 반나치 운동의 대표인물로 독일 국민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고, 그를 비롯하여 히틀러 암살 작전에 참여한 주요 인사들의 기념비가 베를린 국방성 자리에 세워졌으며, 예비군 사령부가 있던 길거리는 '슈타우펜베르크 거리'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분명 한 때나마 나치에 광분했던 독일 국민들이, 빠르게 나치즘의 잘못을 깨닫고 정상적인 생각으로 되돌아와 반나치세력들을 추모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확실히 우리 옆 나라와 다르긴 다르지? 이번 글은 여기까지다.
7월 20일과 21일의 역사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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