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7월 28일과 29일의 역사 - 페루 후지모리, 다이애나와 '로열베이비', 가쓰라-태프트 밀약

스마일루 2013. 7. 26.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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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받고 있는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은 경제적인 면에서는 국가를 올바르게 이끌었지만,

도청, 살인, 매수, 부정선거, 쿠데타, 불법개헌 등으로 재선과 3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재선과 3선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경제문제 해결을 높게 평가한 국민들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각종 부정이 본격적으로 밝혀지자 결국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결국 일본으로 도주하고 만다.

 

:

 

국정원 부정선거고 NLL 논란이고, 그것의 시시비비를 넘어,

정치권의 갈등이 극심해지고 있다는 그 자체가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정말 내가 우려하는 '전쟁'이 시작되어 집권세력의 정치폭력이 자행되고 반대세력이 과격화 되기 시작하면,

대한민국은 겉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질 것이고, 이후 수십년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절대 안 그럴 것 같나? 수도 없이 많은 나라들이 그러했다는 것 모르나?

우리의 이 정치혼란이 빨리 해결되어야 할텐데 걱정이다.

 

정말 요즘엔 잠이 안 올 지경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 링 크 -

 

지난 7월 29일의 역사 없음.

(1년전 결간)

 

 

- 순 서 -

 

107년전, 1905년 7월 29일

일본과 미국 간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지다.

 

32년전, 1981년 7월 29일

다이애나 스펜서가 찰스 왕세자와 결혼하여 왕세자빈이 되다.

 

25년전, 1990년 7월 28일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페루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동아시아계로서는

처음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국가 원수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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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8일과 29일의 역사

Wikipedia

 

7월 28일: 페루독립기념일(1821년)

1794년 -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기요틴으로 처형되다.

1914년 - 오스트리아-헝가리세르비아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다.

1922년 - 아일랜드 내전이 시작됐다.

1946년 - 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되고, 김일성이 위원장으로 취임

1954년 -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우고 차베스 탄생.

1961년 -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혁명정부가 혁명재판을 개정

1976년 - 중국탕산 지진일어남 사망자 24만 4천명의 강진

1989년 -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가 95%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당선되다.

1990년 - 알베르토 후지모리페루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동아시아계로서는 처음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국가 원수가 되다.

1993년 - 안도라국제 연합에 가입하다.

 

7월 29일

1856년 - 독일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 사망.

1883년 - 이탈리아의 정치가 베니토 무솔리니 탄생.

1890년 -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사망.

1905년 - 미국일본 간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지다.

1947년 - 최초의 전자계산기에니악이 동작을 시작하다.

1954년 - 반지의 제왕의 첫 책인 《반지 원정대》가 영국에서 출간되다.

1957년 - 국제 원자력 기구가 창설되다.

1981년 - 다이애나 스펜서찰스 왕세자와 결혼하여 왕세자빈이 되다.

2009년 - 삼성 특검: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 저가 배정 사건으로 기소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6년에 벌금 3000억원이 구형됐다.

 

 

1883년 - 이탈리아의 정치가 베니토 무솔리니 탄생.

 

   참고글 : 10월 28일과 29일의 역사 - 무솔리니와 한국정치, http://blog.daum.net/smileru/8888124

 

 

1794년 -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기요틴으로 처형되다.

 

   참고글 : 7월 14일과 15일의 역사 - 프랑스혁명 정리, http://blog.daum.net/smileru/8888303

 

 

 

 

 

 

 

 

 

   1905년 - 일본미국 간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지다.

 

   1800년대 말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본격화 한 뒤 서구열강들을 따라잡으면서 동시에 따라하기로 결심한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을 일으켜 승리로 마무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나라가 조선을 포기하게 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1904년에는 러시아를 기습공격, 러일전쟁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조선을 발판으로 대륙으로 진출한다는 확고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고, 조선을 이유로 일본의 대륙진출을 방해하려는 세력들을 기회가 있을 때 거침없이 공격한 것이었다.

 

   그런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하다 한반도의 전략적 이용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대한제국의 항구를 일본해군기지로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과거 '아관파천'에서도 보였듯, 상대적으로 러시아의 편을 드는 상황이었다. 그에 일본은 일본의 대한제국 항구 사용을 반대하는 왕실 대신들을 돈으로 매수하거나 협박해, 1904년에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한다. 그를 보면 일본이 한국의 독립과 왕실의 안전을 보호해준다, 뭐 그런 내용도 있긴 하지만, 결국 '니네 나라는 이제 내꺼니까 지키는 거다' 뭐 그런 의미였다. 아무튼 일본은 대한제국을 군사기지로 활용했고, 결국 1905년 5월 일본은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침몰시켜 사실상 러일전쟁의 승리를 확실시 하게 된다.

(참고글 : {'12. 5월 넷째주} 러일전쟁 : 쓰시마 해전, http://blog.daum.net/smileru/8888052)

 

   이젠 누구도 일본이 동아시아의 패권국가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에 따라, 동아시아에서의 이권에 관심이 많았고 애초에 일본을 개항시켰던 미국은, 일본이 발틱함대를 침몰시킨지 2개월이 지난 1905년 7월에 미국 육군장관 '월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일본 도쿄로 보내, 일본 수상이었던 '가쓰라 다로'와 비밀회담을 가지게 된다. 이 비밀회담의 내용은 1924년까지 미국의 외교사학자 '테일러 데넷'이 미국 국회도서관에서 비밀회담의 대화록을 우연히 발견해 공개할 때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위키에서 그대로 가져와 봤다.

 

 

   1. 동아시아 전반에 관한 논의 : 가쓰라는 동아시아의 평화가 일본 외교의 근본적인 원칙이며, 이러한 동아시아의 평화는 일본, 미국, 영국 간의 협조가 있을 때에 가장 잘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2. 필리핀에 관한 논의 : 태프트는 미국과 같이 강력하고 일본에 우호적인 나라가 필리핀을 점령하는 것이 일본에 최선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가쓰라는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어떠한 공격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3. 대한제국에 관한 논의 : 가쓰라는 러일전쟁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것은 대한제국이었다며,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대한제국은 또 다시 다른 세력과 조약이나 협정을 맺어 러일전쟁을 일으켰던 것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경솔한 모습을 보일 것이므로, 대한제국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해결책을 도출하는 것이야말로 러일 전쟁의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주장했다. 가쓰라는 대한제국이 일본과 다른 나라 사이에 전쟁을 하도록 만드는 상황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이는 일본에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태프트는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권을 갖는 것이 동아시아의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동의했다.

 

 

   정리하면, 일본은 대한제국이 러시아, 중국등과 친하게 지낸 것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고 동아시아 안정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을 것이라는 입장이었고,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는 데 대한 일본의 양해를 구한 대화였다. 이는 특별한 조약으로 만들어져 서명되지는 않았지만 각서로 만들어졌고, 이는 그대로 러일전쟁 종결 후의 조약인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이어진다. 다시 2개월 뒤인 1905년 9월,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일본과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맺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군사·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또 조선에 대해 지도·보호·감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2) 러·일 양군은 랴오둥 반도 이외의 만주 지역에서 철수하며 만주에서 청나라의 주권과 기회균등 원칙을 준수한다.
 
  (3) 러시아 정부는 청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 랴오둥 반도(뤼순, 다롄) 조차권, 창춘-뤼순 간의 철도, 그 지선, 그리고 이와 관련된 모든 권리와 특권을 일본에 양도한다.
 
  (4) 양국은 만주의 철도들을 비군사적인 목적으로 경영한다. 단 랴오둥 반도 지역은 예외로 한다.

  (5) 일본이 배상금을 청구 하지 않는 대신, 북위 50° 이남의 사할린 섬, 그 부속도서를 일본에 할양한다. 그러나 이 지역은 비무장지역으로 하며, 소오야(宗谷), 타타르(Tatar) 해협의 자유 항행을 보장한다.

 

 

   결국 미국은 한국의 주권 자체를 부정하고 일본의 지배를 인정한 셈이었다. 또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받은데 이어 만주 진출을 위한 발판까지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2개월 뒤인 1905년 11월, 일본은 대한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했고, 미국은 그를 용인했으며, 조선의 외교권은 박탈당하고 만다.

 

   보면 미국은 일본을 동북아시아에 한정시키려 했던 것 같다. 지리적으로 너무 멀어 쉽게 제어하기 힘든 일본에게, 또 이미 힘이 강대해졌음이 분명해진 일본에게, 대륙진출발판을 마련하려는 시도를 용인하고, 대신 미국은 어차피 바닷길이 중요한 것이기에, 인도양으로의 접근성을 가진 동남아시아에 발판을 마련하려 했던 게 아닐까? 하와이, 괌, 필리핀... 그 다음 생각이 있었을지도?

 

   나름의 계산이었던 것이겠지만, 강대해지고 자신감이 넘쳐진 일본은 진주만을 폭격했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전부터 참 궁금했던 것이, 일본이 동남아시아에는 신경쓰지 않고 중국만 계속 몰아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중국을 완전히 패망시켰을까? 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깨지 않고 유럽에만 전념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뭐 결과적으로 일본, 독일이 다 패망해서 다행이지만, 어찌되었건 우리는 식민지배를 받으며 그 많은 고통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1981년 - 다이애나 스펜서찰스 왕세자와 결혼하여 왕세자빈이 되다.

 

   다이애나 스펜서는 유서깊은 귀족인 스펜서 가문에서 1961년 태어났다. 16살이 되던 1977년에 스위스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는데, 그곳에서 처음 29살의 찰스 왕세자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의 언니인 '사라'와 사귀고 있었다. 스위스에서 학교를 다닌 이후 다이애나는 요리사 수업을 받고 무용학원에서 일하였으며, 청소부 일도 하고 칵테일바에서 일하기도 했었는데, 결혼 직전까지는 잉글랜드 유치원에서 보조교육사로 일하게 된다.

 

   그러던 다이애나 스펜서는 언니 사라와 찰스 왕세자의 인연 덕분에 찰스와 만나게 되는데, '성공회나 개신교 신자이고, 결혼한 적이 없어야 하며, 왕족이거나 귀족가문 출신이어야 한다' 라는 영국 왕세자의 왕세자빈 조건에 맞아들어간 그녀는 결국 1981년 7월 29일에 찰스 왕세자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후 다이애나는 자선활동을 하며 지내는데, 80년대말부터 찰스 왕세자와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다. 찰스가 결혼전에 만났던 여자인 '카밀라 파커볼스'가 불화의 씨앗이었는데, 관계가 틀어진 이후 찰스는 그 여자를, 다이애나도 결국 다른 남자를 만났으며, 끝내 1992년부터 별거에 들어가 1996년에 이혼하게 된다. 애초에 소극적인 성격의 다이애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으로 인해 왕실생활 자체를 애초에 힘들어 했었다고...

 

   이혼 후에도 자선활동을 많이 했던 그녀는, 이집트 출신의 백만장자 모하메드 알파예드의 아들인 도디 알파예드를 만난다. 관계는 명확하지 않지만, 연인관계가 의심될 정도로 상당히 친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997년 8월 31일, 알파예드와 호텔에서 식사를 함께한 다이애나는 호텔에서 나와 차를 타고 이동하게 되는데, 파파라치가 따라붙자 속도를 올리다 터널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당시 다이애나가 즉사하지는 않았으나, 파파라치들은 사진을 찍기에 급급했고 누구도 탑승자를 구조하려하지 않았었다. 결국 다이애나는 이후 수술을 받았으나 사망했고, 도디 알파예드와 운전자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파파라치가 찍은 다이애나의 처참한 사고 직후 사진까지 공개된 상황에서, 음모론은 들끓었다. 파파라치의 차량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설, 파파라치의 플래쉬 때문에 운전자가 사고를 냈다는 설, 의문의 차량을 들이 받았으나 그 차량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설, 영국이나 프랑스의 정보기관이 개입했다는 설 등이 그것이었다. 일단 운전자의 음주운전으로 결론난 상황이지만, 저마다 나름의 근거를 조금씩은 가지고 있더라. 흠... 아무튼 다이애나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녀가 왕실생활을 힘들어 했다는 것과 찰스와의 이혼등이 겹치면서 영국인들의 가슴속에 아련하게 남게 되었다.

 

   아무튼... 최근 영국에서는 '로열 베이비'의 탄생으로 축제분위기더라. 그 주인공은 다이애나의 아들이자 영국 왕위계승 서열 3순위인 윌리엄 왕자의 아들이다. '로열 베이비'의 어머니인 케이트는 다이애나와는 달리 평범한 가문의 출신으로, 윌리엄 왕자와 결혼할 때 큰 화제를 낳았었다. 또 윌리엄 왕자와는 동갑내기 캠퍼스 커플이었는데... 흠, 이것만으로는 알 수 없지만, 나이 차이가 13살이나 았던 찰스와 다이애나 보다는 사이가 좋지 않을까 싶다. 여튼 영국이 뭔가 동화같은 이야기로 들썩이는 걸 보면 좀 부러운게 사실이다. 다이애나의 비극까지도 그들에겐 길이 회자되고 마음속에 남을 역사가 될 것이다.

 

 

 

  

 

 

 

 

 

 

 

   1990년 - 알베르토 후지모리페루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동아시아계로서는 처음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국가 원수가 되다.

 

   블로그 오늘의 역사에서 '독재자'에 대해서 참 많이 다뤘던 것 같다. 후지모리도 그 축에 속한다. 이야기하자면 또 길어지니 간단하게만 해볼까? 앞 이야기들도 꽤 길었고 하니...

 

   후지모리는 1938년 일본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장소는 페루... 하지만 조작되었다는 말이 있다. 페루 대통령은 페루에서 태어나야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는 페루 농업대학교를 나와,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교를 거친후, 페루 농업대학교의 총장이 된다. 1988~1989년에는 환경-농업 문제를 다룬 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런 그는 1989년 신당을 창당, 정치에 본격 뛰어들어, 1990년 7월 28일에 페루 대통령에 당선된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기존 페루 정치인들과 무관한 일본계 출신이라는 점이 부각되었다. 이후 그는 극심한 국가부채와 만연한 마약거래, 정치세력간의 정치폭력 등을 아주 빠르게 청산하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국회와는 큰 마찰을 빚었는데, 결국 1992년 군부세력을 통한 쿠데타로 의회를 해산시켜버리고 1993년에는 개헌을 하여 재선의 발판을 마련한다. 1995년에는 에콰도르와의 국경지역 충돌로 전쟁까지 벌이는데, 그의 공이 크긴 컸던 것인지, 의회를 해산시키고 자신을 위한 개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995년에는 64%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하게 된다.

 

   이후에도 그는 국가를 잘 통치했다. 페루의 민주주의는 무너졌을지 몰라도, 외자유치를 크게 늘렸고, 수천%에 달하던 물가상승률을 정상화 시켰으며, 30년 넘게 활동하던 페루 반정부 게릴라 조직을 소탕시켰다. 하지만 그는 권력에 도취되어 갔고, 3선이 가능한 쪽으로 헌법을 해석하는 '헌법 해석법'을 1996년에 스스로 통과시켜 3선을 준비하며, 지속적인 부정으로 정권연장에 힘썼다.

 

   국민들도 서서히 문제를 인식했지만, 2000년 대통령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는 과반수를 얻지 못했어도 2차 투표에서 과반을 얻는데 성공, 3선에 성공하게 된다. 취임식 당일에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페루 국립은행 경비원 6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아무튼 3선은 성공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부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3선에 성공한지 얼마 되지 않아, 1995년 선거에서 야당 후보를 도청한 일, 2000년 선거에서 유권자선거 명부를 조작하고 투표권이 없는 군인과 경찰이 투표를 할 수 있도록 위조 신분증을 발급한 일 등, 지난 재선과 3선 선거에서 불법적인 행동을 한 사실이 드러났고,  2000년 11월에는 페루 국가정보부장이 야당 의원을 돈으로 매수하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가 폭로되면서,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결국 후지모리는 실각, 일본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5년이 지난 2005년에는 다시 재기를 하고자 칠레를 통해 페루로 입국하려다 칠레 당국에 의해 구속되었고, 이후 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가택연금 되었으며, 2007년에 페루로 결국 신병이 언도되어, 2010년에 징역 25년형을 선고받고 현재 페루 교도소에서 수감중에 있다.

 

 

   난 우리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생각한다. 이건 정치 성향의 문제가 아니다. Weekly Voice에서 말했던 것 처럼 국정원 정치개입이 잘못되었다, 뭐 그런말을 하려는게 아니다. 문제는 정치적 대립이 극에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름 할말이 있지만,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을 떠나, 우리 정치권이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이런 극한대립이 계속된 국가들이 항상 그랬던 것 처럼, 곧 있으면 상대적으로 권력을 가진 집권세력에서의 정치폭력이 시작될지 모른다. 야권은 가만히 있을까? 아마도 난리가 날테고 국가는 극심한 혼란상태에 빠져들 것이다. 집권세력은 더욱 권력을 장악하려 들테고 민주선거를 가만두려 하지 않을 것이며, 야권은 더욱 폭력적인 대응책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악순환은 극한의 대립을 더욱 극단으로 치닫게 하고, 집권세력이 승리하게 되면 민주주의가 말살되고 엘리트만이 잘먹고 잘사는 독재가, 반대하는 세력이 승리하게 되면 또 다른 독재 또는 이후 최악의 정치혼란이 수십년간 국가를 어지럽히게 될 지 모른다. 게다가 우리 머리 위에는 우리끼리의 갈등을 바라는 북한이 있지 않은가? 정말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국민들이 생각보다 훨씬 깨어있기를, 그리하여 여론의 힘으로 정치인들을 옳은 방향으로 갈 수 있게끔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앞으로 지금의 혼란을 해결하는데 어떤일이 발생하더라도, 5년 후, 10년 후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헌법적 가치가 퇴보하지 않고 발전해 있기를 바랄 뿐이다.

 

 

 

 

 

 

7월 28일과 29일의 역사

 

- fin -

  

 

 

 

 

 

오타수정 (2013.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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