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프랑스 혁명 그 수십년간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보았다. 연표도 있으니 한번 보시길. #. 항공기 사고로 자주 언급되고 있는 보잉사의 역사도 다뤄봤다. 은근히 신경썼다. #. '강남스타일'이 출시된지 벌써 1년이 되었다. 이미 역사가 되어버렸다.
- 링 크 -
{'12. 7월 셋째주} 7월 15일의 역사
렘브란트, 로제사석, 닌텐도 페미컴
http://blog.daum.net/smileru/8888074
- 순 서 -
1년전, 2012년 7월 15일
싸이의 6갑 발매, 강남스타일 공개
224년전,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 :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다.
97년전, 1916년 7월 15일
보잉사를 설립하다.
추천? 손가락 클릭!
7월 14일과 15일의 역사
Wikipedia
1789년 - 프랑스 혁명 :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다.
1867년 - 알프레드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다.
1933년 - 독일에서 나치 당을 제외한 정당이 법으로 금지되다.
1998년 - 조치훈이 혼인보전에서 10연패를 달성하다.
2010년 - 지구 온난화로 인해 지구 평균 기온이 기상 관측 역사상 최고를 기록하다.
1764년 -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5번째 군주 이반 6세 사망.
1799년 - 로제타석발견. 이로써 고대 이집트 상형 문자 해독의 열쇠가 제공됨.
1867년 - 베니토 후아레스가 멕시코 공화제 복귀를 선언하다.
1983년 - 닌텐도가 가정용 게임기 패밀리 컴퓨터를 발매하다.
벌써 1년전이다. 강남스타일 열풍이 시작된 것이... 정확히 말하면, 7월 11일에 싸이는 6집 홍보를 시작했고 그날 티져 영상을 올렸었다. 그리고 7월 15일,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 전체가 공개되고 6집이 발매된다. 물론 출시 당시에는 열풍은 없었었다. '싸이스러운' 음악이 하나 또 나왔구나 했다. 확실히 재미있는 노래이긴 했고 뮤직비디오도 흥겨웠었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선 7월 15일에 YG엔터테인먼트의 걸그룹인 '2NE1'의 팬이었던 한 트위터리안(@WeLoveDara, 산다라박 팬들의 공동 트윗계정인듯?)이 YG의 싸이 6집 뮤직비디오를 트윗했는데, 그 팬의 팔로워는 무려 3만명이었고, 서서히 확산이 시작되었다.
그러다 7월 31일에 세계적인 팝스타 '저스틴 비버'를 발굴한 프로듀서 '스쿠터 브라운'이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를 역시 트윗하면서 관심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결정타였다. 이후 스타크래프트2 제작자,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이 트윗을 하면서 그렇게 열풍이 시작되었다.
지금 싸이는 후속곡 '젠틀맨'의 활동도 접은 상태... 앞으로 또 잘 될지 모르겠다. 그건 전적으로 싸이에게 달린일... 초심만 잃지 않는다면, 동시에 새로운 시도를 한다면,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중요한건, 2012년 7월 15일은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1789년 - 프랑스 혁명 :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다.
사실 '프랑스 혁명'하면 책 한권이다. 역사적으로 상당히 중대한 사건이기에 당연한 것일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진행 과정 자체가 길다. 그 결과 정리도 안되고 갑자기 나폴레옹이 왜 튀어나오는 건지 이상하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은 위키피디아에 있는 프랑스 혁명 연표를 가져와 보고자 한다. 분명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오늘날의 이 세상도 뭔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사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쓰려다가, 많은 사람들이 명료하게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프랑스 혁명의 연표를 누가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 하면서 찾다보니 아예 위키피디아에 연표가 있더라. 개인적으로 여기저기 수정했다. 원본 링크는 아래쪽에...
아무튼 정리하면 이렇다. 프랑스의 국가적 파탄 상황에서 세금인상에 대한 국민적 조율이 필요했던 왕은 삼부회를 소집하려 한다. 그에 1789년에 삼부회가 175년만에 소집되어 각 계층이 모여 세금 인상을 어느 계층에 할 것 인지를 놓고 싸우다, 이미 자유주의 사상이 퍼진 상황에서 제3신분인 서민층이 소외받는다고 느끼게 되자 불만이 폭발하게 되었다. 그러자 왕정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군대를 소집했고, 그에 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해 무기를 획득하였으며, 결국 진압은 실패하고 왕은 실각해 처형되고 만다. 이에 위협을 느낀 주변 왕정 국가들은 프랑스를 압박하고 이에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며, 프랑스 국내적으로는 혁명에 반대하는 인원들을 탄압하는 공포정치가 시작된다. 그 결과 프랑스 내부에서는 공포정치를 우려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결국 프랑스 인권선언문을 계승하지만 공포정치에는 반대하는 상대적인 중도세력이 쿠데타로 집권하고 총재정부를 수립한다. 총재 정부는 공포정치가 아닌 강력한 제도 및 헌법과 중앙집권정부를 통해 왕정으로 돌아가려는 세력과 공포정치를 원하는 세력을 모두 차단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지만 각종 반란이 계속되었고, 외적으로는 프랑스를 압박해 온 타국을 프랑스 군대가 몰아내기 시작하면서 더 큰 욕심을 부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혁명세력에서 군사측면의 역할을 충실히 해온 나폴레옹이 전장 상황이 좋지 않았던 이집트에서 돌연 귀국,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결국 1805년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재미있지 않나? 여기에서 굉장히 생각해 볼 점이 많아야 한다. 우리도 군사독재와 민주화 과정을 거쳐왔기에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 국가적 파탄의 원인과 원인에 따른 수습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 책임 소지를 떠나, 실질적으로 누가,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가?
- 무력 진압은 무력 반발을 낳는 것인가?
- 지도자를 끌어내리는 옳은 방법은 무엇일까?
- '레닌'적인 숙청을 내세운 혁명은 지속가능한가?
- 중도좌파적 혁명은 지속가능한가?
- 절대왕정, 중앙집권정부, 민주주의 기반세력이 없는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군부에 있는가?
- 결국 민주사회의 분열과 혼란은 유일하게 민주화 되지 않아 기본적인 조직의 힘을 가지고 있는 군부의 군사독재 야심으로 이어지는가?
- 그는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 이 모든 질문과 질문의 답은 현재에도 유효한가?
이에 대한 답은 연표에서 한번 찾아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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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전후 : 전쟁으로 인한 프랑스 재정위기의 심화, 자유주의 싹 틈
17세기 후반 ~ 18세기 : 계몽주의 시대의 개막. 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족주의 의식의 고양.
(참고글 : 5월 19일과 20일의 역사 - 인류역사 전환의 대흐름 : 앤 볼린, 잉글랜드 공화국)
1756년 : 7년 전쟁 발발.
(참고글 : 6월 23일과 24일의 역사 - 7년전쟁과 유럽)
1774년 : 루이 16세 즉위.
1776년 : 재무 총장 튀르고 파면.
1776년 : 미국 독립 전쟁 시작. 7월 4일 미국 독립 선언.
(참고글 : 문명4COL-(#1-8) 독립선언문)
1778년 : 프랑스, 영국에 대항하여 미국 식민지를 지원하기로 선언. 이후 재정 상황은 더욱 악화.
1783년 : 파리 조약 체결. 미국 독립 전쟁 종결, 프랑스 국내에서도 자유를 열망하는 기조가 강해짐
1785년 : 목걸이 사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 불신이 생김
1786년 : 재정파탄, 해결 노력의 시작
8월 20일 : 재무 총장 칼론, 왕가의 재정 파탄을 선언.
12월 29일 : 명사회가 소집된다.
1787년
2월 22일 : 최초의 명사회가 개최. 재정난을 배경으로 한 귀족에 대한 과세에 반대.
7월 : 파리고등법원이 삼부회 소집을 요구.
1788년 : 세금 인상을 위한 삼부회의 소집 시작.
성직자와 귀족, 그리고 도시 대표자(제3신분인 '서민' 대표) 집결
6월 7일 : 지붕의 기와일. 그르노블에서 국왕의 군대에 민중들이 기와나 돌을 던진다.
8월 8일 : 국왕 루이 16세에 의해 전국 삼부회를 소집이 선포된다.
8월 25일 : 네케르 다시 재무 총장에 취임.
1789년 : 삼부회 개회, 대립 속 갈등 폭발, '국회'라는 단어 등장,
루이 16세는 장관 파면으로 국회에 저항
1월 : 세이에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출판. 베스트셀러로 등극
5월 5일 : 베르사유에서 삼부회가 개회. (1614년 이후 175년만)
6월 10일: 의결 방법을 둘러싸고 분규를 거듭한 삼부회에 대해 “때는 왔다. 닻줄을 잘라라!”라는 시에예스 연설로 제3신분은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것을 선언.
6월 17일: 오노레 가브리엘 미라보가 이끄는 제3신분이 스스로 집회를 열고,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국민의회, National Assembly)라고 칭함. 독자적으로 심의를 진행시킨 제3신분의 행동에 개명파의 성직자들과 일부 귀족들도 점차적으로 합류.
삼부회
6월 19일: 격론 끝에 마침내 제1신분 의원이 제3신분의 심의에 합류하기로 결정했지만, 이에 위협을 느낀 왕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 등 강경파가 국왕을 재촉하여 한밤 중에 제3신분 회의장을 폐쇄.
6월 20일: 국민의회는 회의장을 베르사유 궁전의 테니스코트 건물로 옮기고, 자신들의 요구가 승인되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이 의회를 해산하지 않는다고 선서.
6월 24일: 이 국민의회에 제3신분에 가까운 많은 로마 가톨릭 사제와 자유주의적 귀족 47명도 합류.
6월 27일 : 국왕이 제1신분, 제2신분(성직자, 귀족)으로 국민의회에 합류를 권고.
7월 6일 : 헌법제정위원회의 설치.
7월 9일 : 국민의회, 제헌국민의회로 개칭.
7월 11일 : 루이 16세, 네케르 장관 파면 (삼부회 실패 책임)
7월 12일 : 네케르가 파면되자 팔레 루아얄에서 데뮬랭이 이 시민에게 “무기를 들어라!”고 연설. 파리 민중이 앵발리드(보훈병원)를 습격.
혁명 발발
7월 14일 : 무력진압 움직임이 포착되자 시민들이 무기를 얻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 습격 (프랑스 혁명 발발)
7월 16일 : 네케르 복직.
7월 17일 : 혁명이 지방에 파급. 대공포(그랑 풀)가 시작된다.
8월 4일 : 봉건적 특권의 유상 폐지가 결의된다.
8월 26일 : 《인간과 시민의 제 권리 선언》(프랑스 인권 선언)이 채택된다.
(참고글 : 엠파이어토탈워-|#1-26| 트리콜로레 - 마지막회)
10월 5일 : 파리 민중의 베르사유 행진.
10월 12일 : 국왕과 함께 의회도 파리로 이동하기로 결정.
11월 2일 : 교회 재산의 국유화를 선언.
12월 14일 : 아시냐 지폐 발행.
1790년
7월 14일 : 제1회 《파리영화제》. 샹 드 마르스 전국 연맹 축제.
8월 11일 : 십일조의 무상 폐지를 결정.
9월 6일 : 고등법원의 폐지.
10월 21일 : 삼색기를 프랑스 국기로 제정.
(참고글 : 엠파이어토탈워-|#1-26| 트리콜로레 - 마지막회)
1791년 : 왕가의 도주 실패, 입헌군주제로의 전환, 주변국 움직이기 시작
6월 20일 : 국왕일가 국외 탈출을 꾀한다.
6월 21일 : 국왕일가, 바렌느에서 사로잡혀 25일 파리로 귀환(바렌느 사건). 이후 국왕에 대한 지지가 급속히 감소.
탈출실패 후 돌아오는 국왕일가
7월 16일 : 푀양 클럽 창설.
7월 17일 : 샹 드 마르스의 학살. (평화 시위대에 발포)
8월 27일 :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필니츠 선언을 발표, 혁명을 견제.
9월 3일 : 1791년 헌법 제정. 입헌군주제로 전환.
9월 14일 : 국왕이 새 헌법에 선서.
9월 30일 : 헌법제정국민의회가 해산.
10월 1일 : 입법 의회 소집.
1792년 : 마리 앙트와네트의 친오빠, 레오폴드 2세가 국왕인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움직이자 전쟁발발
1월 25일 : 입법부, 오스트리아 황제 《필니츠 선언》 탈환을 요구하는 여러 국왕에게 추천.
3월 10일 : 지롱드파 내각 탄생.
4월 4일 : 입법부, 뮬라토와 흑인을 포함한 모든 자유인의 평등을 결의.
4월 20일 : 입법부, 오스트리아에 대해 선전 포고 결의 (프랑스 혁명 전쟁 개전).
4월 25일 : 《라 마르세예즈》가 작곡된다.
6월 13일 : 국왕이 지롱드파의 장관을 파면. 푀양파 내각 성립.
6월 20일 : 민중이 튈르리 궁에 밀려 국왕 앞에서 시위 행진.
7월 11일 : 입법부, "조국의 위기"를 호소, 비상사태 선언을 결의. 의용병의 호소.
7월 25일 : 프로이센 군인의 브라운 슈바이크 공작이 "국왕 일가를 위해하면 파리를 괴멸시킬 것"이라고 성명. (브라운 선언) (참고글 : 엠파이어토탈워-|#1-19| 왕위계승전쟁)
입헌군주제도 아닌 아예 왕정 폐지, 프랑스 혁명군 전쟁에서 승전
8월 10일 : 《8월 10일 사건》. 민중이 튈르리 궁전을 습격.
8월 11일 : 국왕 일가를 떵플 탑에 유폐하고 왕권을 정지. 지롱드 파 내각이 부활. 당통, 사법 장관에 취임.
9월 2일 - 9월 7일 : 《9월 학살》. 몇 군데의 감옥에서 반혁명 용의자를 민중이 학살.
9월 20일 : 발미 전투에서 프랑스 혁명군이 승리(발미 승리). 이혼법이 성립. 입법부는 최근 의사가 종료. 보통선거에 의한 국민 공회 소집.
발미전투
9월 21일 : 왕정 폐지를 결의.
10월 2일 : 국민 공회, 보안위원회를 설치.
11월 19일 : 벨기에를 합병.
1793년 : 국왕 처형, 위협느낀 왕정국가들 프랑스 압박
1월 1일 : 국방위원회 (공안위원회의 전신) 설치.
1월 21일 : 국왕 루이 16세 처형 .
2월 1일 : 국민 공회, 영국, 네덜란드에 선전 포고.
2월 13일 :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등에 의한 《제1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3월 3일 : 리옹에서 반혁명 폭동. 《리옹의 반란》 시작된다.
3월 7일 : 국민 공회, 스페인에 선전 포고.
3월 10일 : 혁명재판소 설치. 《방데 반란》 시작된다.
혁명 반대파에 대한 탄압 시작 (공포정치 시작, 자코뱅파 주도, '좌파'의 어원이 된 단체, 공산주의의 씨앗)
4월 6일 : 공안위원회 발족.
5월 4일 : 작물의 최고 가격법 제정. 가격 통제가 시작된다.
6월 2일 : 6월 2일 혁명. 국민위병과 파리 민중이 국민 공회를 포위. 지롱드파의 체포.
6월 24일 : 1793년 헌법 (자코뱅 헌법) 제정. (실제로는 실시되지 않음)
7월 12일 : 툴롱에서 왕당파의 반란 발생.
7월 13일 : 마라, 샤를로트 코르데에 의해 암살된다.
7월 17일 : 봉건적 특권의 무상 폐지를 결의. 샤를로트 코르데를 처형.
7월 27일 : 로베스피에르가 공안위원회에 참가.
8월 23일 : 총동원법에 의한 국민개병제가 시작된다.
8월 29일 : 상 도밍그에 파견된 국민 공회 의원 레제 페리시테 손토냐 독단적으로 모든 흑인 노예 해방을 선언.
9월 29일 : 최고가격령 제정.
10월 10일 : 생 쥐스트가 국민공회에 건의 "평화가 도래하기 전까지 혁명적인 정부"의 수립을 선언(혁명 정부 선언)
10월 16일 :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처형.
마리 앙투아네트의 참수
10월 31일 : 브리소 등 지롱드파 의원 21명이 처형.
11월 8일 : 롤랑 부인 처형.
11월 24일 : 프랑스 혁명력의 채용이 결정. (사용은 10월 5일부터) 프리메르 14일 법률 통과. 중앙집권화를 가속.
12월 4일 : 파견 의원 조제프 푸셰, 코로 데르브와 하에 리옹 대학살이 시작된다.
12월 5일 : 《르 비외 코르들리에》(Le Vieux Cordelier) 지를 발행, 카미유 데뮬랭
12월 19일 : 영국군, 툴롱 철수. (24세의 장교 나폴레옹의 전략이 프랑스군 승리에 도움을 줌)
1794년 : 노예제 폐지와 함께 역설적으로 혁명 반대파 탄압 거세짐, 혁명세력 분열
1월 19일 영국군, 코르시카에 상륙.
2월 4일 : 프뤼비오즈 16일 법률 통과. 전 프랑스 식민지에서 흑인 노예제도 폐지가 결정.
2월 26일 : 방토즈 법 통과. 반혁명 용의자의 전 재산을 몰수 당하고 빈곤에게 배분된다.
3월 24일 : 에베르 일파 (자코뱅 좌파) 처형.
4월 2일 : 당통의 재판이 시작된다.
4월 5일 : 당통, 데뮬랭 등의 자코뱅 우파 처형.
5월 8일 :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 처형.
6월 8일 : 샹 드 마르스에서 최고 존재 축제가 개최.
6월 10일 : 프레리알 22일 법률 제정. 공포 정치에 박차.
분열된 혁명세력 중 공포정치에 반대한 테르미도르의 쿠데타 성공.
나폴레옹이 테르미도르에 합류.
7월 27일 : 테르미도르의 쿠데타 발발. 국민 공회가 로베스피에르 일파 비난 결의를 채택.
7월 28일 : 로베스피에르, 생 쥐스트, 쿠통, 르 바 등 22 명이 처형. 방토즈 법, 《프레리알 22일 법률》, 사실상 소멸.
시청에서 습격당하는 로베스피에르 파
좁은 의미로는, 프랑스 혁명은 테르미도르의 쿠데타를 기점으로 끝난다.
혁명세력 분열과 혁명에 대한 반발시작
11월 12일 : 자코뱅 클럽이 폐쇄된다.
12월 : 지롱드파가 의회에 복귀.
12월 24일 : 최고가격령을 철폐. 아시냐 지폐의 가치가 급락했다. 물가 상승.
1795년 : 공포정치가 아닌 상대적 중도노선 총재정부의 수립
4월 1일 : 자코뱅 잔당의 제르미나르의 봉기. 1793년 헌법의 실시와 식량을 요구하는 민중이 공회에 난입, 군대에 의해 진압된다.
5월 20일 : 프레리아르의 봉기 . 파리 민중이 빵 부족에 항의, 강제 진압.
5월 31일 : 혁명 재판소의 폐지.
8월 22일 : 1795년 헌법의 제정. 직접 세금을 내는 21세 이상의 남자에게 선거권이 인정된다.
10월 5일 : 왕당파의 방데미에르의 반란. 나폴레옹이 진압.
10월 26일 : 국민 공회가 해산. 폴 바라스 등을 복수 총재로 총재 정부가 성립.
1796년 : 승승장구하는 프랑스 군대의 야망 표면화
3월 11일 :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시작.
1797년
5월 10일 : 바뵈프 음모 발각. 바뵈프를 비롯해 음모에 관련된 몇 명은 체포.
9월 14일 :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
10월 17일 : 캄포포르미오 조약 체결. 오스트리아와 강화.
1798년 : 전쟁 승리로 인기를 얻은 나폴레옹을 총재 정부가 먼 이집트로 원정 보냄.
5월 11일 : 플로레알 22일 쿠데타.
5월 19일 :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시작된다.
12월 24일 : 제2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스핑크스 앞의 나폴레옹 (1868년 작)
1799년
6월 18일 : 프레리아르 30일의 쿠데타.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가 실권을 쟁취함
나폴레옹 시대의 개막
8월 22일 : 나폴레옹, 이집트에서 원정도중 군대를 버리고 도주.
9월 9일 : 나폴레옹, 프랑스로 귀국.
11월 9일 : 안개달 18일의 쿠데타. 총재 정부가 전복되고, 통령 정부가 성립. 나폴레옹이 제1통령 등극.
프랑스 혁명 연표,
http://ko.wikipedia.org/wiki/%ED%94%84%EB%9E%91%EC%8A%A4_%ED%98%81%EB%AA%85_%EC%97%B0%ED%91%9C
나폴레옹 (1801년 작)
뭐 근래에 비행기 사고도 있고 해서 보잉사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보잉사는 1916년 '윌리엄 보잉'에 의해 설립된 회사다. 보잉은 목재업계에서 일하면서 배운 목재와 목재구조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보잉사를 설립, 나무를 기본으로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옆 사진이 보잉이 처음 만든 비행기 'B&W'(보잉모델1, 보잉과 그를 도운 해군 엔지니어 Westervelt의 이름을 땀)인데, 보면 수상이착륙기임을 알 수 있다. 때마침 1차세계대전으로 인해 해군훈련용 수상이착륙기가 필요했던 미해군은 보잉의 비행기를 구입했고 보잉사는 그렇게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18년에 1차세계대전이 종전되자, 전쟁에 쓰이던 항공기들이 값싸게 민간 항공기용으로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상당한 항공기제조업체들이 파산했고 보잉사도 큰 위협을 받게 된다. 결국 보잉사는 당분간 새로운 비행기를 팔지 못하고 나무보트나 파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리고 1919년부터 보잉사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한다. B-1항공기(보잉모델6)가 미국과 영국을 오고가는 항공우편배송에 사용되었고, 1920년의 '보잉모델8' 항공기는 미국 서부 레이니어산(4392m)을 넘는 최초의 항공기가 된다. 1923년 부터는 보잉사와 같은해에 설립된 '커티스'(Curtiss, 당연히 커티스가 설립)사와 정부납품경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데, 1925년 '보잉모델40' 항공기가 미국 정부 우편 배송 비행기로 채택되는데 성공하고 이후로도 보잉사가 커티스사를 압도했다.
그러던 1930년, 보잉은 획기적인 비행기를 내 놓는다. '보잉모델200', 보잉 Monomail이라는 비행기가 그것이었다(왼쪽 사진). 일단 전체가 금속으로 되어 있었고, 공기역학적이면서도 미적으로 아름다운 유선형의 디자인, 접을 수 있는 랜딩기어, 낮은 위치에 달린 한쌍의 날개(두쌍의 날개가 보편적이었고 한쌍의 날개가 달려도 동체 윗쪽에 달려있곤 했다)까지... 이후 보잉은 6명이 탑승가능하도록 객실도 추가하고, 각도가 변할 수 있는 프로펠러엔진 등을 담아 단점을 개선한 '보잉모델221'(1930), '보잉모델247'(1933)을 내놓아 여객기 시대를 활짝 열게 된다.
이렇게 보잉은 말그대로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는데, 그러자 문제가 생겼다. 보잉이 시장을 독점하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보잉은 비행기 제조 뿐만이 아니라 항공우편과 항공여객 분야를 두루 독점하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미국정부의 자유경쟁을 추구한 취지에 맞지 않는 것이었고, 결국 1934년 항공우편법이 제정됨에 따라 보잉사은 보잉사(비행기개발), 유나이티드비행기회사(엔진개발), 유나이티드항공(여객물류수송)으로 쪼개지고 만다.
하지만 그것이 보잉사의 발전을 멈추게하진 못했다. 수익의 극대화를 막았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항공기 제작업체에서의 보잉을 더욱 노력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1936년에 '보잉 2 공장'을 건설한 보잉사는, 결국 1938년에 '보잉모델307'(오른쪽 사진)을 완성한다. 이는 최초의 가압여객기로, 대부분의 기상현상을 피할 수 있는 6000미터 이상의 고고도 비행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이 300모델은 바로 미공군의 B-17과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 B-29 폭격기로 그대로 이용되게 된다.
이후 40~50년대에 군용 대형 항공기를 개발하던 보잉은 1957년에 프로펠러 비행기가 아닌 1세대 제트 여객기 '보잉707'(왼쪽 사진)을 선보인다. 동시에 군과의 협력도 더욱 긴밀히 하기 시작해,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 등도 시작한다. 1960년대에 보잉사는 '치누크'헬기로 유명한 'Vertol'사를 합병하고, 달착륙에 사용된 '새턴V'로켓 개발에 참여한다. 그리고 1966년, 미래 꿈의 항공기라는 '보잉747'의 개발을 발표하게 되고, 그를 위한 축구장 40개 크기의 공장을 건설, 1968년 '보잉747-100'을 개발하여 1970년에 상용화에 성공한다. 보잉 747은 이후 37년간 세계 최대 비행기의 자리를 유지했다. 또한 아직도 계속 개발되고 있어 2013년에 '보잉 747-8'이 개발된 상태다.
그렇게 군사 협력과 함께 잠수함까지 만들며 성장하던 보잉은, 70년대에 접어들어 베트남 전쟁(1955-1975) 이후, 동시에 달착륙 프로그램이 종료된 이후 큰 위기를 겪는다. 보잉 747이 완성되던 1968년 8만명을 넘던 직원은 1971년에 2만명으로 줄어든다. 미국 경제 자체가 위기였다. 그러다 80년대부터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보잉사도 활기를 되찾는다. '보잉 757', '보잉 767' 등을 개발했고, 국제우주정거장(ISS) 프로그램에 참가했으며, 대형 스텔스폭격기인 'B-2' 프로젝트에도 참가했다. 또 기존에 미군에 납품한 항공기나 미사일 등의 제품들의 업그레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NASA와 함께 풍력장비도 개발했다.
당분간 군사 협력이 계속되었고 90년대 세계 경제 호황기를 맞아 보잉의 성장도 계속되었다. 1990년대에는 '록히드 마틴'사의 디자인인 F-22의 생산에 참가했다. 이번에 활주로에 충돌한 아시아나 항공기의 기종인 '보잉 777'도 1994년에 개발되었다. 또 1995년에는 본사 건물을 신축 계획을 발표했다(2001년에 이전한다). 1996년에는 보잉사가 '로크웰'사의 우주항공 및 방위산업 부분을 합병했고, '맥도널 더글러스'사와 합병하기도 하면서 덩치를 키웠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보잉사는 주춤하기 시작한다. F-22때도 그랬던 것 처럼, 새로운 전투기의 개발에서 F-32를 제안했던 보잉사는 또다시 록히드 마틴사에 져서, 결국 F-35가 미군의 차세대 전투기로 결정되게 되고, 무엇보다 강력한 경쟁자를 만나 밀리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니, 그 경쟁사가 바로 1970년에 창립된 유럽국가들이 모여 만든 항공회사, '에어버스'였다. 2003년 보잉사는 에어버스사에게 시장점유율 1위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어버스사는 1980년대부터 비밀리에 개발한 세계 최대의 항공기 'A380'을 선보이는데, 이에 보잉사는 '보잉 747-400'의 후속모델인 '보잉 747-8'과 '보잉 787 드림라이너'를 선보이지만, 확실히 대중의 이목은 인류 최대의 항공기라는 A380으로 쏠린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도 A380의 개발완료가 다소 지연된 것이 불행중 다행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현재 에어버스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것이 보잉사이다. 현재 달착륙 이후, 그리고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이 종료된 이후 미국의 우주개발을 담당하기 위한 새로운 고효율의 우주발사체 '아레스 로켓' 개발에 보잉사는 참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어쩌면 '보잉 800' 급 모델을 개발하고 있을지도?
보면 보잉사는 결국 미국정부와 함께 성장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히 미국에 항공회사가 몇없어서가 아니다. 물론 록히드 마틴 같은 미국의 다른 첨단 항공우주 업체들도 있지만, 보잉사는 역사적으로도 그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기술면에서도 그럴만 했다. 또한 민간항공기를 이렇게까지 제작하는데 방산업체에게 굉장히 밀접한 연관성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면 특이 케이스라고도 할 수 있을 듯? 아무튼 그렇다보니 미국 정부는 아무래도 보잉사의 편을 들어 줄 수 밖에 없다. 에어버스사와의 경쟁 때문에도 그렇고... 보니까 요즘 아시아나 항공 사고에 대해 자꾸 조종사 과실을 주장하던데, '오토 스로틀' 기능의 결함가능성도 있고, 장님에 벙어리가 된 관제사의 책임도 있어보이건만, 아무리 보잉사를 감싸주려 한다해도 너무 티나는 것 같아 좀 그렇긴 하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IMF때 위기에 빠진 항공산업 업체들을 모아 만든 KAI(한국항공우주산업)를 매각하네 어쩌네 하고 있으니... 보잉도 분명 민영회사이기는 하나, KAI의 경우 여러 업체들이 대주주로 모여있어 정부가 빠지면 그 미래가 걱정되는 상황... 정부의 현명한 결단을 기대해봐야 겠다. 보잉과 같은 훌륭한 회사로 성장해야 할텐데...
7월 14일과 15일의 역사
- fin -
'마르크스 -> 레닌'으로 수정 (201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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