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2월 30일과 31일의 역사 - 독재자 마르코스와 박정희

스마일루 2012. 12. 29.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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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생 동갑인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와 한국의 독재자 박정희...

그 둘은 집권과 경제발전, 재선, 개헌, 헌법중지, 정적 암살 시도등 여러면에서 비슷한 길을 걸었다.

시기적으로도 굉장히 유사하고 말이다.

 

하지만 마르코스의 필리핀은 경제성장에 있어 한계를 보였고,

박정희의 한국은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있다.

무엇이 한국과 필리핀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일까?

 

 

 

 

 

 

 

 

- 순 서 -

 

47년전, 1965년 12월 30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필리핀의 대통령이 되다.

- 마르코스와 박정희

- 한국과 필리핀의 차이, 그리고 프레이저 보고서

- 독재자의 속성

 

 

 

 

 

 

 

 

 

 

12월 30일과 31일의 역사

Wikipedia

 

12월 30일: 필리핀호세 리살의 날

39년 - 로마 제국 10대 황제 티투스 탄생.

1853년 - 개즈던 구입: 미국멕시코로부터 영토를 구입하다.

1884년 - 일본의 군인, 정치가 도조 히데키 탄생.

1917년 - 대한민국의 시인 윤동주가 태어나다.

1922년 - 제1차 전연방소비에트대회에서 소비에트 연방이 수립된 것을 선포하다.

1927년 -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하철 노선인 도쿄 지하철긴자 선이 개통되다.

1965년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필리핀의 대통령이 되다.

2006년 - 이라크사담 후세인에게 교수형이 집행되다.

 

12월 31일: 스코틀랜드호그모나니

192년 - 로마 제국 17대 황제 콤모두스 사망.

1600년 - 엘리자베스 1세의 허락에 따라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다.

1909년 - 뉴욕맨해튼브루클린을 연결하는 맨해튼 교가 개통되다.

1918년 - 베를린에서 독일공산당(KPD) 창당

1941년 - 영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알렉스 퍼거슨 탄생.

1952년 - 소련, 장춘 철도를 중국에 반환

1961년 - KBS TV (CH 9) 개국.

1962년 - 장충체육관 개관

1990년 - 대한민국 목적세인 방위세가 폐지되다.

1991년 - 소비에트 연방이 공식적으로 해체되다.

1993년 - 대한민국 정부가 천연두예방접종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1994년 - 대한뉴스가 마지막 방송을 하다.

1999년 - 미국파나마 운하파나마 운하 지대파나마에 반환하다.

 

 

 

 

 

#. 1965년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필리핀의 대통령이 되다.

 

   1965년 12월 30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필리핀의 대통령이 된다. 박정희와 자주 비교되는 인물이다. 집권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심지어 1917년에 태어난것 까지 같다. 오늘은 마르코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동시대의 박정희 역시 함께 다뤄보고, 그를 통해 박정희에 대한 평가등을 해보고자 한다.

 

 

 

◆ 마르코스와 박정희

 

   법학을 전공한 그는,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정계에 진출했는데, 1940년대 태평양전쟁 시절에 군에 입대하여 후에 항일 게릴라군 지도자로 까지 활동한다. 1946년에는 당시 대통령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하에서 대통령 보좌관을 맡기도 한다. 이후 장관직을 거쳐 1950년에는 수도 마닐라의 시장이 된다. 그리고 1954년에는 미인대회 우승자이기도 한 이멜다 로무알데스와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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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마르코스는 대권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본래 진보주의 정당인 자유당 소속이었던 그는, 대선후보 경쟁에서 디오스다도 마카파갈(필리핀 아로요 전 대통령의 아버지)에게 밀리게 되자, 보수주의 정당인 국민당으로 당적을 바꾼다. 국민당에서 마카파갈 정부와 날선대립을 펼치던 그는 1965년 대선에 출마했고, 항일 게릴라활동으로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결국 필리핀 10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한편 한국에서는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박정희가, 야권분열로 몸살을 겪던 윤보선을 꺾고 1963년 대선에서 당선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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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된 마르코스는 필리핀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경제 발전과 사회 개혁을 내걸고 도로, 교량, 발전소, 상수도 등의 대대적 인프라 건설을 시작했고, 부패한 사법부의 개혁과 밀수 범죄 & 부정부패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필리핀의 농업, 공업, 무역, 경공업등이 발전하면서 높은 실업률이 감소하는 등, 사회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되어가는 모습을 보였고, 이후 1969년 대선에서 가볍게 재선에 성공하면서 다시 4년임기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후에 대대적인 선거부정과 표매수등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오른쪽 TIME지 표지는 1966년 10월 21일 판)

 

   한국에서는 박정희가 1967년에 다시한번 윤보선을 꺾고 재선에 성공한다. 독도와 과거사문제로 논란이 된 한일밀약과 베트남전 파병과 같은 논란거리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언론의 뒷받침 속에서 경제성장의 업적을 내걸고 농촌지역에서 큰 지지를 얻어 당선될 수 있었다. 반면 지식인층과 도시에서는 윤보선을 지지했으며 이 때 부터 경상도와 전라도가 정치적 성향에 있어 방향을 달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르코스가 재선하던 1969년에는 3선 개헌안이 국회에서 변칙통과되고 국민투표로 결국 최종 통과된다. 1967년 박정희의 재선과 1969년 삼선개현 국민투표에서는 무더기표가 발견되는 등 부정선거 논란이 굉장히 거셌고, 군인들은 비밀 투표를 보장받지 못하기도 했었다. 정말 심각한 문제가 있었지만, 이미 5.16 직후 부터 고압적이었던 정부에 의해 그를 뒤집지는 못했고, 그대로 박정희의 독재의 길이 열리게 된다. 마르코스의 재선이 그랬던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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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마르코스의 재선 이후, 박정희의 3선개헌 이후부터 양국의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한국은 5~10%이상의 기존의 경제성장률 추세를 이어가 필리핀을 추월한 반면, 필리핀의 경제 개발은 마르코스 집권 1기와 다르게 한계에 달 더 이상의 큰 발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경제 성장률이 예전에 비해 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한국보다 훨씬 잘 살던 필리핀의 경제 성장률이 5%내외에서 고착화 되면서, 한국등 다른 나라에게 뒤쳐지는 모습이 보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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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마르코스가 재선 이후 경제적 측면에서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자, 공산주의자들과 이슬람 세력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목소리만 조금 높였을 뿐 뭔가 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마르코스는 위기를 과장하여 재선3년만인 1972년 9월 21일 덜컥 계엄령을 선포한다. 헌법을 정지시키고, 언론과 야당을 탄압해 정치인들을 투옥했으며, 1973년에는 헌법까지 멋대로 고쳐 연임제한을 폐기하기에 이른다.

 

   한편 한국에서는, 마르코스가 계엄령을 선포했던 1972년 9월에서 한달이 지난 1972년 10월,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해 마르코스와 마찬가지로 헌법을 정지 시키고 연임제한을 폐지하며, 각종 권력을 손에 넣어 독재자가 된다. 1969년 3선 개헌을 통해 1971년 대통령 선거에 "마지막으로 대통령을 하겠다"며 출마,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면 헌법을 고쳐 독재자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던 김대중을 부정선거로 누르고 1971년 3선에 성공한지 1년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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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9월 계엄령 이후 마르코스는 대통령의 권한을 지속적으로 확대해가면서 필리핀이 아닌 자신에게 모든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한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체포하고 무력으로 진압하여 사형에 처하는등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했고, 친척과 측근들만으로 정부를 구성했으며, 심지어 1978년에는 자신의 아내를 주택환경부 장관에 앉히기도 했다. 국가의 재산을 스위스 계좌로 빼돌렸고,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오른쪽 사진, 2007)는 수천켤레의 명품구두를 사는 등 사치에 빠지기 시작했다. 대통령과 정부가 그런 마당에 국가 자체가, 기업들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리가 없었다. 그렇게 한 때 일본보다도 잘 살았던 필리핀은, 5%성장률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크게 뒤쳐져 갔다.

 

   박정희 역시 1972년 10월 유신이후 권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한다. 1973년에는 일본에 있던 김대중을 납치해 바다에 수장시키려다가 실패하고 이후 가택연금을 시키는 사건이 발생하고, 1975년에는 유신에 반대했던 장준하 선생이 등산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1974년부터는 '긴급조치'를 발동해 언론과 반대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더욱 높여갔다. 한편 경제성장은 지속적으로 5~10%대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런 경제성장에도 유신 헌법에 반대하는 기세는 식지 않아서, 1974년에는 문세광이 박정희를 저격하려다가 실패하는 사건이 벌어졌고(육영수 여사가 피격당함), 1979년에는 부산과 마산에서 박정희에 저항하는 부마항쟁이 발생, 이 사태 진압을 지휘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진압 후 마음을 돌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를 술자리에서 총으로 살해해 박정희의 집권은 끝이 나게 된다. 이 사태를 조사하던 전두환이 그해 12월 12일 다시 집권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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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한국에서는 박정희의 독재가 끝이 났지만 필리핀에서는 독재가 계속되었다. 1983년에는 미국으로 망명했던 마르코스의 정적, '베니그노 아키노'가 귀국하자마자 공항에서 총을 맞고 암살당한다. 마르코스는 자신의 소행이 아니라고 했지만 국민들은 믿지 않았고, 논란끝에 마르코스가 재신임을 묻겠다며 진행한 198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을 통해 88%의 득표율로 당선되자 민중들은 폭발하고 만다. 민중들은 비폭력주의 집회를 벌였는데, 마르코스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지만 군부는 그를 거부했고, 필리핀에서 철저히 버림받은 마르코스는 결국 미국의 설득 끝에 1986년 2월 25일,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하와이로 망명했으며 1989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 한국과 필리핀의 차이, 그리고 프레이저 보고서

 

   읽어보셨다면 느끼셨겠지만, 박정희와 마르코스는 상당히 비슷하다. 재미있는 것은 마르코스는 필리핀 경제를 성장시키는데 실패했고, 박정희는 성공했다는 것이다. 무슨 차이가 있었던걸까?

 

   박정희와 마르코스를 떠나, 한국은 성공했고 필리핀은 왜 실패했느냐, 라는 것에 대해 정말 다양한 분석들이 있다. 심지어 어디서는 '북한' 때문에 한국이 더욱 단결할 수 있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원인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도 이에 대한 다양한 고민을 해보았고 자료도 찾아보았는데, 정말로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국민성이다. 박정희가 경제성장의 방향을 잘 잡긴 했지만, 한국전쟁 이후 이미 한국은 박정희 집권 직전까지 필리핀 보다 높은 성장률 추세를 유지해 왔다. 그 자체로 이미 놀라우며, 필리핀과 한국 모두 유사한 정부가 들어서서 큰 격변이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한국이 필리핀을 역전하는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또한 박정희 이후라고 해서 한국 정부의 경제성장률이 떨어진 것도 아니며, 마르코스 이후라고 해서 필리핀의 경제성장률이 확 올라간 것도 아니었다. 지도자를 떠나 국민성 차이, 한국인의 근면성을 무시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그 당시 근면함의 배경에는 정말 북한이 있었을지도 모르겠고? 더불어 한국인들은 10월 유신으로 독재를 선언한 박정희를 7년만에 축출해 냈지만, 마르코스는 계엄령 선포 이후 14년간 독재를 지속했고, 마르코스는 정권말기에 어마어마한 국부를 유출시켜 국가에 큰 타격을 줬다.

 

 

 

 

한국과 필리핀의 경제 성장률.

한국은 50~70년대 사이의 자료가 없는데, 그 시기에 5~10% 사이의 성장을 유지해왔다.

한국은 지도자를 떠나 사회가 선진화 됨에 따라 성장률이 둔화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필리핀은 5%대에서 계속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다.

 

 

 

   둘째는 사회구조의 차이다. 꽤 많은 전문가들이 이 부분을 지적하더라.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때 철저히 수탈 당했고, 한국전쟁으로 경제기반이 완전히 파괴당한 상황이었다. 또한 공산세력과의 전쟁으로 사상대립은 억제된 상황이었고 말이다. 그래서 한국은 전 국민이 상대적인 평등속에서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함께 바라보는 편이 강했던 반면, 1년간만 일본에게 지배당했던 필리핀은 광복 이후부터 이미 엘리트 계층이 다수 존재하는 상태여서, 마르코스가 민주적으로 집권해 개혁을 단행 할 때부터 이후 독재로 변질되었을때까지, 그를 따르지 않던 집단들이 다수 있었다. 사리사욕을 챙기는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았고 사회구조가 발전하기 어려웠던 이유다. 있는 것들이 더하다고나 할까?

 

   셋째는 바로 지도자의 차이다. 일단 리더쉽 차이가 컸다고 본다. 박정희는 군인 출신으로, 앞서 말한 뛰어난 우리 국민들과 상대적 평등으로 큰 분열이 없었던 우리나라의 좋은 상황속에서 강력한 리더쉽으로 경제성장을 강하게 추진했다. 재벌 중심 성장이 오늘날 비난 받고 있기는 하지만, 사적이익만 바라보던 필리핀 분열된 엘리트들, 그리고 그를 규합하지 못했던 마르코스와 다르게, 박정희는 재벌이 국가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지시해 몰아갔다. (오른쪽 사진은 박정희와 이병철 삼성 초대 회장) 그리고 마르코스는 1972년 계엄령 이후 집권 초기와 다르게 통치방향을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위하는 쪽으로 선회했지만,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역시 자신의 권력을 지속하기 위해 통치방향을 중시하면서도 경제성장 자체를 등한시 하지 않았다. 그 결과, 70년대 전까지만 해도 필리핀과 한국 모두 농업, 무역, 경공업등을 성장시키며 비슷한 길을 걸었는데, 70년대 이후 한국은 중화학 공업으로 넘어가면서 인프라 투자를 지속해 다음 단계로의 공업화를 이룬 반면, 필리핀은 그 자리에서 머무르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이를 정리하자면, 전후 복구 이후 농업기반을 완성, 산업화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충분했고 상황이 너무 좋았던 그 타이밍에, 박정희가 산업화 드라이브를 걸어 성장을 해냈고 그것이 한국과 필리핀의 차이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하지만 박정희가 경제성장에 역할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최근 논란이 된 동영상에서 소개된 미국의 '프레이저 보고서'를 언급하며, "박정희가 잘한 것이 아니다" 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나도 그 영상을 보고 반박자료도 여럿 찾아봤는데, 영상의 전체적 맥락, 즉 '미국이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한국을 발전시키고자 했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프레이저 보고서가 아니더라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분명 미국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고 생각되나, '박정희가 잘못된 정책만 추진하다가 결국 미국의 꼭두각시가 되었다'는 식의 결론은 과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경제개발 5개년 계획등이 미국의 압박에 의해 수정되어 성공했고, 박정희의 화폐개혁이 실패했던 것들은 결국 팩트fact이기 때문에, 따라서 '박정희가 정책이 뛰어났다', 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어 보인다. 결국 박정희가 잘한 것이라면, 자신이 정했든 미국이 정했든, 국가에 도움이 되는 정해진 방향으로 정재계 사회 고위층들을 강하게 끌고 간 것과, 끝까지 국가의 경제성장을 등한시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마르코스처럼 과도한 사리사욕을 챙기지 않은 점(상대적으로 적을 뿐, 안 챙긴 것은 분명 아니었다)이 있겠다. 그 외에 의료보험실시, 부가가치세 시행과 같은 부분도 좋게 평가 받을 수 있지만, 큰 틀에서 봤을때 난 딱 이 정도가 박정희의 경제성장에 대한 적당한 평가라고 본다. 독재자들만 놓고 볼 때는 1등감이었다고나 할까? (물론 경제분야를 떠나 박정희가 잘못한 부분도 굉장히 많다. 여기서는 논점이 아니기에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다.)

 

 

 

 

 

◆ 독재자의 속성

 

   난 지난 대선전 관련 글에서도 언급한 것 처럼, 박정희는 물론, 또 이명박도, 노무현과 문재인, 그리고 김영삼 등 모두가 국가를 발전 시켜야 한다는 마음가짐은 같았을 것이라고 보고 또 믿는다. (전두환은 솔직히 모르겠다. 그래서 걔는 문제다) 단 국가 발전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과 생각끝에 내린 결론이 저마다 달라서 사상과 방법의 차이가 생겼을 것이라 생각하고 말이다.

 

   마르코스도 그랬다. 마르코스도 정권 초기 진짜로 부정부패와 싸웠고, 진짜로 필리핀 경제를 개혁시켜나갔다. 하지만 그런 독재자들도 결국 보면, 보통 그러다가 권력에 눈을 뜨거나, '이 나라는 내가 아니면 안돼'라는 오만한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 같더라. 마르코스가 그렇게 됐고...  

 

   박정희가 만약 마르코스처럼 80년대까지 통치를 해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난 그 부분에서만큼은 굉장히 부정적이다. 1975년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터졌던 것 처럼(이 사건을 계기로 '프레이저 보고서'가 만들어 진다), 이미 박정희는 1972년 유신 이후 안정적인 권력을 위해 미국 의회에 지속적인 로비를 벌일 정도로 자신의 권력 유지에 집착하는 상태였다. 국내에서야 각종 탄압등이 말할 것도 없었고... 결국 마르코스의 길, 자기 탐욕의 길을 가지 않았을까? 박정희가 마르코스와 성향과 마음가짐 자체가 다른 부분이 분명 있었다고도 보지만, 80년대 들어 독재를 넘어 완전히 몰락했던 마르코스를 보면, 박정희도 결국 그러지 않았을까, 이미 유신 이후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던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역사를 되돌아 봤을때 독재자의 속성 아니었을까?

 

   결국 그렇게 되었다면 박정희는 경제와도 결국 멀어졌을텐데, 그래도 전두환 시절 그랬던 것 처럼 88올림픽도 치르고 경제성장도 지속되었을지 모르겠다(앞서도 말했지만 박정희가 등장해서 경제성장률이 확 올라가고, 그가 죽자 확 떨어지고 그러진 않았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10년 쯤은 늦춰진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90년대까지도 민주주의 사회를 갖추지 못했을 대한민국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혼란 속에서 오늘날 러시아처럼 주저앉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그렇게 본다면 박정희가 부정선거든 뭐든, 재선에 성공한 이후 물러났다면 어땠을까 싶다. 1969년의 3선 개헌과 1971년의 3선 출마를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그래도 5.16 군사정변, 재선시의 부정선거, 여타 억압적 정책들에 대한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겠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이미지가 좋은 지도자로, 그야말로 한국의 경제성장의 태동기를 지휘한 위대한 지도자로 남지 않았을까?

 

   허나 박정희는 그러지 않았고, 1971년 3선에 출마한 뒤 1972년 유신을 선포하고 1979년 박정희 본인이 피살당하면서 불운한 결말을 맞는다. 따라서 위와 같은 생각을 종합해 본다면, 개인적으로는 박정희가 스스로 물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유신 이후 7년만에 박정희 정권이 끝이 난것은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그렇고, 박정희 개인의 이미지에도 그렇고... 장기간의 독재로 마르코스 수준으로까지 타락했다면 박정희에 대한 평가야 지금같지는 않았을테고, 설령 독재를 하는 기간 동안 잘했더라도(위 성장률 추세를 보면 알겠지만, 독재를 10년 더했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잘한 것으로 평가 받았을 것이다) 훗날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한 우리나라에게 심각한 타격을 줬을테니 말이다.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가 집권하긴 했지만, 결국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우리 국민의 승리이며 미래를 위한 최고의 선택이었다. (왼쪽 사진은 6월 항쟁 당시 사진. 이후 6.29 선언으로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을 선언한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시끄러운 시스템이지만, 애초에 그렇게 정치인들이 욕먹는 것이 목적이고 그렇게 해서 서로가 다듬어지며 국가가 꾸준히 발전하는 것인데, 그게 싫다고 독재를 추억한다면 그것은 우매한 생각이다. 대규모 인프라 사업으로 경제를 성장시킬 시기는 60~80년대 이후로 끝났다. 뭔가 국가가 빠르게 발전하는 것 처럼 보여, 독재자들이 실제로 잘 해내거나 또는 잘 하는 것 처럼 보일 수 있는 시대는 끝난 것이다. 이제는 사회 시스템을 다듬어 선순환 경제, 지속가능한 경제를 만들어야 국민의 복지수준을 끌어올리면서 꾸준한 성장을 이룰 수 있고, 그런 사회는 민주주의가 잘 갖춰진 사회속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 언론이 탄압 당하고, 인권이 무시당하고, 정부가 관치경영을 하는 상황에서는 달성할 수 없는 사회인 것이다.

 

   박정희가 잘한 부분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를 모두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와서 박정희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또 우리가 박정희의 시대를 끝내고 민주주의를 이룩해 냈기에 우리가 지금까지 또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거고 말이다. 그런데 필리핀에는 오늘날까지도 박정희 보다 못한 마르코스를 추억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이 쯤 되면 납치&유괴 피해자들이 가해자에게 느끼곤 하는 '스톡홀름 증후군' 아닐까? 독재에 침묵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침묵을 합리화 하기 위해 그 때는 그것이 옳았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혹시 우리나라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그 생각 버리시길. 단순한 논리다. 그 시대는 끝났고, 지금은 세상이 변했다. 경제든 정치든, 전혀 새로운 기준과 방법론이 필요한 때다. 독재자가 존재할 수 있는 시대도, 추억할 이유가 있는 시대도 이젠 끝났다.

 

 

 

  

 

 

 

12월 30일과 31일의 역사 

 

- fin -

 

 

  

  

  

오타 수정, 문장 어색한 부분 수정 및 보완 (2012.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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