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2월 9일과 10일의 역사 - UN세계인권선언, 최초의신호등, 에드워드8세 퇴위 등

스마일루 2012. 12. 8.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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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즈벨트와 UN 세계 인권 선언문.

 

"오늘날 보통 사람들이 바라는 지고지순의 염원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제 제발 모든 인간이 언론의 자유, 신념의 자유,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라고 모두가 한목소리로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이리라.

 

 

인간이 폭정과 탄압을 견디다 못해

최후의 수단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될 정도까지 몰리지 않게 하려면,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법치를 통해 인권을 보호해야만 할 것이다."

 

- UN 세계 인권 선언문 중.

 

 

 

 

 

 

 

 

 

 

 

- 순 서 -

 

160년전, 1852년 12월 9일

폴란드계 미국의 물리학자 앨버트 마이켈슨 탄생.

 

144년전, 1868년 12월 10일

영국 런던에 세계 최초로 신호등이 설치되다.

 

76년전, 1936년 12월 10일

영국의 에드워드 8세가 재위 1년도 안되어 왕위를 포기하다.

 

64년전, 1948년 12월 10일

국제 연합 총회에서 세계 인권 선언이 채택되다.

 

 

 

 

 

 

 

 

 

 

 

 

 

 

12월 9일과 10일의 역사

Wikipedia 

 

12월 9일: 탄자니아독립기념일

536년 - 비잔티움 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동고트 왕국로마에 입성하다.

1636년 - 청나라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이 발발하다.

1852년 - 폴란드계 미국의 물리학자 앨버트 마이켈슨 탄생.

1867년 - 일본 왕정이 복귀함을 선언함으로써 메이지 유신을 실행하다.

1931년 - 스페인 제2공화국: 스페인 국회에서 신헌법이 성립되다.

1941년 - 대한민국 임시정부추축국에 선전포고하였다.

1948년 - 집단 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이 체결되다.

1950년 - 대한민국원산 철수 작전.

1959년 - 북조선 무장간첩의 희생자 이승복 탄생.

1968년 - 북조선 무장간첩의 희생자 이승복 사망.

1987년 -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윈도 2.0를 출시하다.

1991년 - 대한민국의 민영 방송사인 SBS가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다.

2011년 - 인도 콜카타의 AMRI 병원(en:AMRI Hospitals)에서 화재가 발생, 89명 사망함. 

 

12월 10일

1848년 -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

1868년 - 영국 런던에 세계 최초로 신호등이 설치되다.

1896년 - 알프레드 노벨 사망.

1901년 - 알프레드 노벨1896년에 사망한 날을 기려 첫번째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다.

1932년 - 타이 왕국에서 헌법을 채택해 입헌군주제로 이행하게 되었다.

1936년 - 영국의 에드워드 8세가 재위 1년도 안되어 왕위를 포기하다.

1948년 - 국제 연합 총회에서 세계 인권 선언이 채택되다.

 

 

#. 1896년 - 알프레드 노벨 사망

#. 1901년 - 알프레드 노벨1896년에 사망한 날을 기려 첫번째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다.

 

참고글 : 10월 21일과 22일의 역사 - 인류를 발전시킨 노벨상, http://blog.daum.net/smileru/8888121

 

 

 

 

 

 

 

 

#. 1852년 - 폴란드계 미국의 물리학자 앨버트 마이켈슨 탄생.

 

  폴란드(당시 프러시아) 유대인 집안에서 1852년 12월 9일 테어난 앨버트 마이켈슨... 그는 2살에 미국으로 이주해온다. 그는 18살에 해군 사관학교에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광학, 기후학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졸업 후 해군에서 복무하던 그는 이후 물리학과 화학 강사가 되기 위해 해군 사관학교로 다시 들어가게 되고, 1879년부터는 해군관측소에 들어가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다 1881년 해군을 떠나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다.

 

   1881년 그가 유학을 떠날 당시에는 '빛'이라는 것은 물결과 같은 '파동'으로 생각되었고, 물결이 '물', 소리가 '공기 및 물질들'을 통해 전파되는 것 처럼 빛도 어떤 '매질'을 통해 전파된다고 생각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매질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었고, 우주와 공간을 꽉 채우고 있는 알 수 없는 그 빛의 매질의 이름을 '에테르'라고만 정해놓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에테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적지 않았다.

 

   그에 마이켈슨은 빛의 속도를 측정할 수 있다면 에테르의 존재여부, 빛의 파동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파도가 치는 방향으로 이동하면 파도가 더 자주, 즉 빠르게 치는 것 처럼 느껴지듯,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으니 공전 방향으로 빛의 속도를 측정하면, 공전 방향이 아닌 방향에 비해 빛의 속도가 빨리 측정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이켈슨은 빛의 속도를 측정하는 장치(마이켈슨 간섭계)를 개발하여 빛의 속도를 측정했는데, 어느 방향으로 광속을 측정하든 광속은 일정하게 측정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마이켈슨 스스로도 처음에 이 결과를 믿지 않았고, 반박도 상당했으나 후속 연구들을 통해 그의 발견이 옳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것은 빛이 에테르와 같은 매질을 통해 전달되는 파동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였다. 이 발견으로 1907년 그는 미국인 처음으로 과학분야에서 노벨상을 타게 된다.

 

   이런 발견을 지금 보면, '내가 저 때 태어났으면 나도 그런걸 생각해 낼 수 있었을텐데!' 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만이고 말이다. 그런 것을 본다면 한 시대의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하게되는 생각은, 그 범위 역시 얼마나 제한적인가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를 넘어서는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고 말이다.

 

 

 

 

 

 

 

 

#. 1868년 - 영국 런던에 세계 최초로 신호등이 설치되다.

 

   1868년 12월 10일, 런던에 세계 최초의 신호등이 설치된다. 이 신호등은 기차를 위한 신호등이었다. 승용차가 널리 보급되기 전이기도 했다. 신호등의 불빛은 가스램프에 의해 점등되었는데, 수동으로 빨간색과 초록색 앞면(아마도 유리일듯?)이 바뀌는 방식으로 색깔을 바꿨다. 그러나 설치된지 1달만인 1869년 1월 2일에 가스 램프가 폭발하면서 옆에서 이를 수동 조작하던 경찰관들이 죽거나 다치는 사건이 일어나자 안전성 문제가 대두된다. 이후에도 사고가 계속되자 촛불, 석유로 램프를 키는 신호등이 등장하게 된다.

 

   전기로 작동하는 신호등은 1912년에 미국에서 발명된다. 1879년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것이 그에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신호등은 사람에 의해 수동으로 작동되었는데(오른쪽 사진이 그러한 수동 전기 신호등), 1920년대에 들어서야 미국과 영국에서 자동으로 시간에 따라 신호가 바뀌는 신호등이 등장했다. 허나 이것 역시 물리적인 수동 스위치를 사람 대신 기계가 작동시킨 것에 불과했다. 결국 1967년이 되서야 전자회로에 의해 시간에 따라 신호가 바뀌는 신호등이 미국에 등장한다.

 

   음... 그랬단다. 신호등에 대한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다.

 

 

 

 

 

 

 

 

 

#. 1936년 - 영국의 에드워드 8세가 재위 1년도 안되어 왕위를 포기하다.

 

   에드워드 앨버트 크리스천 앤드루 패트릭 데이비드 윈저, 줄여서 에드워드 8세는 대영제국의 왕위 계승 1순위 왕세자였다. 1936년 1월 20일 왕이 되는데, 1936년 12월 11일, 왕위를 포기하고 만다.

 

   이유는 여자 때문이었다. 당시 42세로 결혼경험이 없었던 에드워드 8세는 41살의 '윌리스 워필드 심슨'과 결혼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는 미국 출신이었고 두번의 이혼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영국 왕실에서는 극렬히 그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에드워드 8세는 결혼을 위해 왕위를 포기하고 '윈저 공'으로 신분을 바꾼다. 그야말로 세기의 로맨스였다. (오른쪽 사진이 윈저 공 부부)

 

   이후의 이야기도 계속 보자. 이후 동생 요크 공이 왕위에 오르며 '조지 6세'가 된다. 이 조지 6세가 바로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말을 더듬는 왕으로 영화화 된 그 왕이다. 조지 6세는 왕위에 오르기전 왕족이 아닌 평민, 하지만 귀족가문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결혼했다. 왕족이 아니면 평민인데, 평민과의 결혼도 영국 왕실 사상 최초였다고 한다. 형제가 닮은 구석이 없지는 않은 듯? 하지만 그 결혼에는 반대가 없었다고 한다. 일단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 귀족이기도 했고, 왕위는 1살 많은 에드워드 8세가 이을 예정이었으니 더 그랬다.

 

   아무튼 에드워드 8세의 하야로 왕이된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부부는 파시즘이 팽배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해쳐나갔다. 왕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퀸 마더'로 불리며 영국 국민들의 신임을 얻었다. 독일이 런던을 공습할 때도 궁에서 피하지 않고 국민들을 안심시키기도 했다. 그에 히틀러는 '퀸 마더'를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조지 6세는 1951년 세상을 떠난다. 왕위를 누군가 이어야 했는데, 에드워드 8세는 '윈저 공'으로 궁을 떠났고, 조지 6세에게는 두 딸만이 있었다. 그 중 첫째가 결국 왕위를 잇는다.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딸, 바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다.

 

   엘리자베스 2세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녀의 젊은시절 이야기를 또 안할 수가 없다. 2차세계대전중이던 1945년, 그녀의 나이 20살 때, 조국에 봉사하고 싶다며 아버지인 조지 6세를 졸라 영국 여자 국방군에 입대하여 군용트럭을 모는 전투업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흙바닥에서 트럭 타이어를 교체하고 보닛을 열고 수리하는 모습은 아직도 많은 사진에 남아 있다고... 대단하지 않나?

 

  그리고 세월이 흘러 현재 60년간 여왕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최장기간 왕의 자리에 있었던 빅토리아 여왕의 64년 기록을 깰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다. 잉? 에드워드 8세의 이야기로 시작해 엘리자베스 2세로 끝난듯? 뭐 사실 역사야 이후에도 계속되긴 하겠다만...

 

 

 

 

 

 

 

 

 

#. 1948년 - 국제 연합 총회에서 세계 인권 선언이 채택되다.

 

   2차세계대전 후 1946년 '인권장전 초안'이 마련된데에 이어, 1948년 12월 10일 UN 총회에서 세계 인권 선언이 채택된다. 서문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번 읽어보시길. 왜 인권, 인권 하는지에 대해 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이다.

 

   우리는 인류 가족 모두에게, 그들이 원래부터 존엄성과 남들과 똑같은 권리와 남에게 빼앗길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어야만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평화적인 세상의 밑바탕이 마련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최근에 일어났던 전쟁에서 보았듯이 인권을 무시하고 경멸했던 것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왔던가를 기억해 보라. 인류의 양심을 분노케 했던 야만적인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오늘날 보통 사람들이 바라는 지고지순의 염원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제 제발 모든 인간이 언론의 자유, 신념의 자유,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라고 모두가 한목소리로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이이라.

 

   인간이 폭정과 탄압을 견디다 못해 최후의 수단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될 정도까지 몰리지 않게 하려면,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법치를 통해 인권을 보호해야만 할 것이다.

 

   또한 오늘날 국가들 사이에서 친선 관계를 발전시키도록 장려하는 일도 참으로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국제 연합의 여러 인민은 3년 전에 만들어진 '유엔 헌장' 속에서 기본 인권에 대한 신념, 인간의 존엄 및 가치에 대한 신념, 남자와 여자의 동등한 권리에 대한 신념을 다시금 확인하였으며, 더욱 폭넓은 자유 속에서 사회 진보를 촉진하고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자고 서로 다짐했었다. 또한, 국제 연합 회원국들은 국제 연합과 협력하여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모두 함께 존중하고 그것을 준수하도록 노력하자고 공약한 바도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을 온전히 구현하려면 도대체 인권이 무엇인지, 그리고 도대체 자유가 무엇인지에 관해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이제, 국제 연합 총회는 사회 속에 사는 모든 개인과 모든 조직이 본 선언을 언제나 마음속 깊이 간직하면서,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 이미 독립해 있는 국제 연합 회원국들의 인민들뿐만 아니라 국제 연합 회원국들의 법적 관할 아래 있는 '식민지 영토'의 피식민 인민들에게도, 이러한 권리와 자유를 보편적이고 효과적으로 인정해 주고 지켜 주게하려고, 모든 인민과 모든 국가가 '다함께 달성해야 할 하나의 공통적인 기준'으로서 이 '세계 인권 선언'을 선포하는 바이다.

 

   이 문건은 360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UN 문건 중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세계 인권 선언은 말그대로 '선언'으로 법적인 구속력이 있지는 않지만, 많은 국가들이 헌법과 기본법을 작성할 때 이 선언을 기초로 하였으며, 1966년 국제인권규약이라는 국제법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추가로, 최근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해 '남의 인권을 지키지 않은 사람의 인권을 왜 지켜줘야 하느냐' 라는 말들이 굉장히 자주, 많은 일반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데 그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특히 최근의 강력범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도 '사회계약설'을 언급하며 주장했던 것 처럼 이에 상당부분 동감하고 따라서 감형없는 종신형이나 화학적 거세, 경우에 따라 사형까지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긴 한다. 너무 좋은 수형시설 같은 것도 문제고...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생각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UN인권선언에서도 알 수 있듯, 인권이라는 것은 남에게 절대 빼앗길 수 없는 권리이다. 형벌도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된다. 자,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하지만 그 속에서 성범죄자가 나오고 연쇄살인마가 등장한다. 유전자에 문제가 있어서 일까? 싸이코패스의 경우 그런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최근 증가하고 있는 강력범죄들을 보라. 이는 분명 유전질환 같은 생물학적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에 의해 발생하는 사회문제에 몹시 가깝다. 가정환경이 불우하지 않았던 강력범죄자는 근래에 거의 없었다. 유명 범죄자(?)들의 경우 더욱 그랬다. 이런 '문제가 있는 사람'의 증가는 사회의 책임도 굉장히 큰 것이다.

 

   바꿔 말하면, 태어날 때 부터 범죄자이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 즉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런 성장과정을 밟아 그런 범죄자가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신의 아들과 딸이, 잘 살던 옆집 아들과 딸이, 이 힘든 사회속에서 갑작스런 가정파탄으로 불우한 환경속에서 자라게 되어 그런 범죄자로 키워질지는 정말 말 그대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범죄자를 범죄자라는 이유로 인권을 탄압하는 것은, 좀 과장이 있지만 비유를 하자면, 전 국민이 주사위를 던져 1이 나오는 사람의 인권을 탄압하기로 하고 실제 탄압하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지금 상황이다. 무슨말이겠나? 누가 범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그런 운명을 가진채 태어날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으며 우리가 이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범죄자의 인권을 탄압할 명분 자체가 갈수록 사라져 가는 것이며, 범죄자에 대한 인권 탄압이 범죄를 막기위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고 처벌을 줄이자, 그런말은 아니다. 측은하게 보자는 것도 아니다. 앞서 말한것 처럼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렇게 강력한 처벌을 생각하면서도 근본적인 이런 부분에 대한 생각도 다들 한번쯤은 꼭 가져봤으면 하는 바램에서 한번 말해봤다.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보자.

 

 

 

 

 

 

12월 9일과 10일의 역사

- fin -

 

 

 

 

 

오타 수정 (2012.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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