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13일과 14일의 역사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김보은-김진관 사건

스마일루 2013. 1. 1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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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사진들을 볼 때,

아님 이런 사진을 담고 관련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글과 같은 글을 볼 때,  

 

그들의 희생에 감탄하고 역사의 아픔을 느끼기 보다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지고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잘 알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단언컨데 생각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당신의 사상이 보수든 진보든 그 사이의 어디이든간에,

민주주의는 대전제이며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떤 상황과 이유로도 부정할 수 없는 가치이다.

그들의 노력 역시 오늘날 이 시대에 자유를 누리며 사는 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언론자유, 인권침해와 관련된 논란들은 끊이지 않고 있고,

그나마도 힘들게 얻은 지금의 민주주의도 우습게 보는 사람, 세력들이 있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내가 왜 2013년이나 되어서도 이런 이야길 하고 있어야 하는가?

 

 

 

 

 

 

 

 

 

 

- 순 서 -

 

11년전, 1992년 1월 13일(?, 17일)

김보은 김진관 사건이 발생

 

27년전, 1987년 1월 14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공안분실에서 서울대학교 재학생인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하다.

 

 

 

 

 

 

 

 

 

 

 

1월 13일과 14일의 역사

Wikipedia

 

 

1월 13일

1888년 - 미국지리학회 설립

1898년 - 에밀 졸라가 문학 신문 로로르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페릭스 포레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를 발표하면서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다.

1915년 - 이탈리아 아베차노에서 강진으로 29,800여명 이상 사망하다.

1958년 - 진보당조봉암간첩 혐의로 구속됨.

1988년 - 장징궈 중화민국 총통이 사망하면서 리덩후이 부총통이 차기 총통으로 취임하다.

1992년 - 일본 정부가 위안부의 일본군 관여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다.

1992년 - 김보은 김진관 사건이 발생.

2001년 - 엘살바도르에서 강진으로 800명 이상 사망하다.

 

1월 14일

877년 - 고려 왕조 창건자 왕건 탄생.

1875년 - 독일의 의사 알베르트 슈바이처 탄생.

1900년 - 지아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가 로마 코스탄치 극장에서 초연되다.

1946년 - 국방경비대 창설.

1978년 - 대한민국의 여배우 최은희가 홍콩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치되다.

1983년 - 청량리 가스 폭발 사고가 발생하다.

1987년 - 서울 용산구 남영동 공안분실에서 서울대학교 재학생인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하다.

2005년 - 토성의 위성 티탄하위헌스 탐사선이 착륙하다.

 

 

 

 

 

 

 

 

1992년 - 김보은 김진관 사건이 발생. (정확한 사건 날짜는 1월 17일인듯?)

 

   김보은의 어머니는 7살때 김영오와 재혼했다. 하지만 재혼한 남편 김영오는 딸 김보은을 9살때부터 상습적으로 강간했다. 김보은의 어머니 역시 남편 김영오에게 강간당했고, 김영오는 집에 칼과 쥐약을 가져다 놓고 사실을 알릴경우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해왔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김보은은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김보은은 대학생이 되었고, 김보은은 남자친구 김진관에서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에 남자친구 김진관은 김영오에게 강간을 그만둘 것을 요구하였지만, 당시 충주지방검찰청 총무과장으로 근무하던 김영오는 "다 잡아넣겠다"며 오히려 협박을 했다. 그의 파렴치함에 분노한 김보은과 남자친구 김진관은 결국 강도로 위장해 김영오를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992년 1월 17일, 남자친구 김진관이 김보은에 집에 몰래 침입하여 식칼로 김영오를 살해하였다. 이후 강도를 당한 것 처럼 위장한 뒤 집을 나갔으며, 김보은은 강도를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이틀만인 1월 19일, 김보은과 김진관은 체포되고 만다.

 

   이후 남자친구 김진관의 아버지가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상담을 의뢰하면서 사건의 배경이 알려져 이슈화 되었고, 전국에서 이들을 구명하기 위한 구명활동이 벌어졌다. 22명의 무료 변호인단이 구성되었고, 성폭력 특별법 제정이 촉구되기도 했다. 변호인단은 김보은과 김진관이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4월 4일 1심에서 재판부는 남자친구 김진관에게 징역 7년, 김보은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10월 2일 항소심에서는 형량이 조금 낮아져, 김진관에게 징역 5년, 김보은에게는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였다. 이후에도 변호인단은 상고를 하려 했지만 대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하였고, 부모를 살해한 사건에서의 집행유예만 해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지만 결국 항소심의 내용이 확정되고 만다.

 

    허나 그렇게 끝은 아니었다. 항소심 당일, 판사는 판사직권으로 집행유예 형을 받은 김보은을 석방했고,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김진관의 형을 절반으로 감면해주었으며 김보은을 사면복권(전과 삭제)해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성폭력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1993년 12월, '성폭력특별볍'이 통과된다. 이 사건이 성폭력특별법의 추진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20년전의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뭔가 달라진게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1987년 - 서울 용산구 남영동 공안분실에서 서울대학교 재학생인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하다.

 

   1983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해 이후 언어학과 학생회장이 되었던 박종철은, 당시 전두환 집권 시절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운동에 투신해 다양한 집회에 참가했고, 그 때문에 경찰에 붙잡혀 집행유예로 풀려나곤 했던 인물이다.

 

   그러던 중 박종철의 선배 박종운이 '민주화추진위원회'라는 서울대 학생 조직의 강력한 지도위원 후보가 되자, 경찰은 박종운을 수배하여 체포하려 한다. 그를 위해 경찰은 후배 박종철을 하숙집에서 체포하였고,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로 끌고가 박종운의 소재를 묻는 취조를 시작한다.

 

   하지만 단순한 취조가 아니었다. 끔찍한 물고문과 전기고문등이 가해졌고, 결국 1987년 1월 13일 자정무렵 연행된 박종철은 12시간도 안되어 사망한다. 14일 오전 11시 45분에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이미 숨진 상태였다.

 

   공식발표 이전 경찰은 사건 은폐를 위해 14일 밤에 박종철군의 시신을 화장하려 했다. 하지만 사건을 담당한 최환 부장 검사는 사체보존명령을 내렸다. ('보온병 포탄'발언으로 유명한 안상수 당시 검사는 해당 사건의 지휘를 맡았다. 별 역할은 하지 못했다고도 전해진다. 당시에는 '강직한 검사'로 살짝 유명해졌었다고.)

 

   한편 아직까지는 세상이 모르던 이 사건을 중앙일보의 신성호 기자가 특종으로 보도한다. 신성호 기자는 법조 담당 기자였고, 15일날 서소문동 검찰청사에 들어섰다. 평소처럼 기사거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오전 10시에 친하게 지내던 이홍규 공안4과장과 만났다. 이홍규 공안4과장은 쇼파에 앉자마자 불쑥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경찰들 큰일났어" 이에 신성호 기자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무슨일이냐고 묻기 전에 맞장구를 쳐줬다고 한다.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경찰들 너무 기세등등했어요." 그러자 이홍규 과장은 "그 친구 대학생이라지? 서울대생이라며?" 라고 말했고, 그렇게 말을 이어간 끝에 특종을 보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저녁에 발행되던 석간신문인 중앙일보는 그를 특종으로 보도했다. 

 

   그러자 15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박종철군 친구의 소재를 물으며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져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겼으나 14일 12시에 사망했다." 라고 공식 발표했다.

 

   15일 오후 6시에는 한양대 병원에서 박종철군의 부검이 있었다. 부검결과 온몸에서 피멍이 발견되었고, 엄지와 검지사이의 출혈흔적도 확인되었으며, 사타구니와 폐등이 훼손되어 있었고, 복부가 부풀어오른 상태였다. 다양한 증거가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암시했다. 경찰은 당시 부검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순 박사를 협박하고 회유했지만, 황적순 박사는 10개월 뒤인 11월에 끝내 보고서를 완성했고, 경찰로부터 회유와 협박을 받은 내용을 공개하여,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공식 발표를 한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구속되었다.

 

   더불어 동아일보는 당시 처음으로 박종철군의 시신을 보고 남영동 분실 509호(옆 사진)에도 갔었던 중앙대 용산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의 증언을 확보한다. 오연상 의사는 사건현장에 물이 흥건했다고 증언해 물고문 가능성을 시사했고, 결국 경찰은 고문치사를 부인할 수 없게된다.

 

   이에 경찰은 특정 2명이 박종철군을 물고문해 살해했다고 밝혔고, 그들을 처벌함과 함께 끝내 박종철 군의 시신을 화장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짓는다.

 

   결국 이 사건으로 전국적인 시위가 시작된다. 서울대학교 학부모들도 시위에 동참하게 되고, 각종 사건들이 맞물리면서 시위는 커져갔다. 5월에는 박종철 고문치사에 가담한 5명 중 2명이 총대를 매고 대신 처벌받았으며, 그 2명에게 치안본부 차원에서 거액의 돈이 건내졌음이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에 의해 폭로된다. 이후 시위는 더욱 불붙어, 사회 각층 원로들까지 그에 동참하게 되었고, 6월 10일 열리기로 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하루 앞둔 6월 9일, 연세대학교 이한열 학생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부상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아래 사진, 결국 이한열 학생은 7월 5일에 사망한다)

 

   그리고 6월 10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관련된 전국적 시위를 계기로 6월 항쟁이 시작된다. 전국에서 수십만명이 참가하는 시위가 열려 경찰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를 놓고 전두환 대통령은 6월 19일 오전 10시에 군 투입 준비 지시를 내렸다. 7년전 1980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의 참상이 재현되려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그에 반대하고, 전두환 주변에서도 그를 만류하면서, 오후 4시에 군 투입 준비 지시는 유보되게 된다.

 

   결국 6월 항쟁은 지속되어 6.29 선언으로 이어졌으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게 된다. 전두환이 임기를 88년에 마친 뒤 그의 아랫사람이었던 노태우가 대통령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사실상 군사적 독재정치가 끝난 것이었으며, 민주화의 완성이었다.

 

   한편, 박종철이 끝내 소재를 실토하지 않았던 선배 박종운은, 1991년에는 박종철 기념사업회 운영위원을 맡기도 했었지만 2000년에 한나라당에 돌연 입당, 국회의원에 출마하지만 2000년, 2004년 모두 낙선한다. 이후 한나라당 부천 오정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을 맡다가, 한나라당 의원들이 만든 국가발전전략연구회에서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특별히 덧붙일 말이라면... 지금은 보수언론이라는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활약, 박종철 사건을 맡으며 '강직한 검사'로 떠오른 '보온병 포탄'발언의 안상수 검사, 박종철이 목숨을 걸고 지켜줬던 박종운까지... 확실히 당시에는 사상이 제각각이기 이전에, 민주화가 우선이었던 것 같다. 물론 후에는 제각각이었는데, 그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을 거다. 보수나 진보 모두 민주주의는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거니까... 하지만 민주주의를 업신여기는 보수세력,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진보세력 등이 있으니 그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다시한번 주장하건데,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세력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철저히 도려내져야 한다. 그런 자들이 누구인지 모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자. 지금도 있다 그런 사람, 세력들... 제발 민주주의를 위해 죽어가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사람들을 기억하길. 그들은 보수나 진보이기 이전에, 민주주의를 원했던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1월 13일과 14일의 역사

 

- fin -

 

 

 

 

 

오타 수정 (201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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