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1월 25일과 26일의 역사 - 장진호 전투, 폴란드 분할, 정주영 탄생, 국토안보부 탄생

스마일루 2012. 11. 24.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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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의 전황도를 보자면 정말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한민족의 힘과 문화를 지금의 두배이상으로 꽃피웠을 통일이 눈앞이었는데 말이다.

 

장진호 전투를 보며 트루먼 대통령이 생각했던 원자폭탄 사용이 아쉬워질 정도이니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이미 떠난 그 시대에 대한 무책임함일까?

 

 

요즘 북한 소식 뜸하지 않나?

우리가 북한에 신경을 끊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들어 북한과의 교류가 끊기며 북한은 중국에게 엄청나게 종속되었다.

결국 북한도 전략을 수정하면서 친남한파들은 완전히 숙청되었고 말이다.

북한이 중국에 흡수되는 최악의 상황이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도발방지약속등을 받아야 함에는 분명하지만,

지금 상황이 안정적 통일에 도움이 되는 상황은 아니라는게 내 입장이며,

강경파들이 바라는 북한의 붕괴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최근 북한에서 진행되고 있는 자본주의화나 남한 문물 유입은

교류가 있었다면 더 가속화되지 않았을까?

북한의 정권이양기야 말로 북한에게 얻을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봤는데 아쉽다.

 

운으로라도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기를,

끔찍한 전쟁만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순 서 - 

 

217년전, 1795년 11월 25일

폴란드의 분할: 폴란드의 마지막 왕인 스타니스와프 2세가 강제로 퇴위되어 러시아로 유배되다.

 

93년전, 1915년 11월 25일

대한민국의 사업가 정주영 탄생

 

10년전, 2002년 11월 25일

미국 국토안보부가 발족되다

 

62년전, 1950년 11월 26일

장진호 전투가 시작됐다

 

 

 

 

 

 

 

 

 

 

 

 

 

 

 

11월 25일과 26일의 역사

Wikipedia

 

11월 25일: 수리남독립기념일

1632년 -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 탄생.

1795년 - 폴란드의 분할: 폴란드의 마지막 왕인 스타니스와프 2세가 강제로 퇴위되어 러시아로 유배되다.

1915년 - 대한민국의 사업가 정주영 탄생.

1936년 - 나치 독일일본 제국, 방공 협정 체결.

1958년 - 프랑스령 수단이 자치권을 행사하는 식민지가 되다.

1986년 - 이란-콘트라 스캔들: 미국이 불법적으로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한 사실이 폭로되다.

1992년 - 체코슬로바키아 의회가 1993년 1월 1일부터 체코슬로바키아로 분리하는 안을 통과시키다.

1997년 - IMF 협의단, 대한민국 금융기관 부실상태 집중 조사

2002년 - 미국 국토안보부가 발족되다. 

 

11월 26일

1504년 - 스페인 초대 여왕 이사벨 사망.

1778년 - 제임스 쿡하와이 제도에서 두번째로 큰 마우이 섬에 도착하다.

1906년 - 이인직 신소설 '혈의 누' 발표.

1922년 - 하워드 카터이집트왕들의 계곡에서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하다.

1924년 - 몽골 인민 공화국이 성립되다.

1926년 - 남만주철도가 설립되다.

1935년 -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1인인 영계 길선주 목사 세상 떠남.

1950년 - 제2차 청천강 전투가 시작됐다.

1950년 - 장진호 전투가 시작됐다.

1955년 - 소련, TNT 100만톤급의 수소폭탄 실험 성공

1965년 - 프랑스 최초의 인공위성 'A1' 발사

1986년 -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금강산 댐 건설에 대응할 ‘평화의 댐’ 건설 발표.

1988년 - 노태우 대통령 특별담화 발표.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과 5공 비리 조사활동 연내 매듭 호소, 시국사범 석방 등 야당 주장 수용, 민주화 6개항 발표

2008년 - 인도 뭄바이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다.

 

 

 

 

 

#. 1795년 - 폴란드의 분할: 폴란드의 마지막 왕인 스타니스와프 2세가 강제로 퇴위되어 러시아로 유배되다.

 

   이것만 봐도 폴란드가 왜 미국 MD 기지를 건설하며 러시아와 맞서는지 알 수 있다. 흉노족, 스웨덴과의 전쟁으로 국력이 쇠락한 폴란드는 1772년 주변국의 침입을 받는다. 1차 분할이었다. 국토의 3분의 1이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무력으로 분할당하고 만다. 재미를 본 그들은, 1793년 2차 분할을 시도하여 폴란드의 영토를 다시 빼앗았으며, 폴란드인들의 독립운동에도 불구하고 1795년에 무력으로 스타니스와프 2세를 퇴위시키고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남은 폴란드를 완전히 나눠먹는다. 한 나라를 피자 나눠먹듯 나눠먹었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하지만 러시아, 프로이센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던 폴란드의 장군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는, 적장이지만 그의 뛰어남에 반해 막대한 선물로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드려던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각종 구애에도 불구하고 그를 거절, 훗날 프랑스 나폴레옹군에 합류하여 신임을 얻은 뒤 나폴레옹과 함께 폴란드 영토를 상당히 회복하게 된다. (바르샤바 공국, 1807~1815) 하지만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다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로 들어가 1918년의 독립을 기다려야 했다.

 

 

 

 

 

 

 

#. 1915년 - 대한민국의 사업가 정주영 탄생.

 

   안철수, 이명박, 문국현 이전에 기업가 출신 정치인이 있었으니 바로 정주영이다. 소학교(초등학교)만 졸업한 그는, 돈이 없어 중학교에 가지 못하자 지긋지긋한 가난을 피해 수차례 가출하였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차례 가출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그는, 1934년 쌀가게에서 배달일을 하게 되는데, 장부를 쓸줄 아는 그를 쌀집 주인은 신임했고, 쌀집 주인은 여자에 빠진 아들 대신에 1938년에 정주영에게 쌀집을 물려주기에 이른다. 하지만 1940년 중일전쟁으로 일제가 쌀을 배급제로 바꾸면서 가게를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2천평의 땅을 사드리고 결혼을 한다. 

 

   이 때의 자금으로 1941년 인수한 자동차 수리공장은 일제의 기업정리령에 의해 1942년 다시 처분하게 되는데, 다행히 그 동안 벌어 놓은 돈으로 20평짜리 집에서 스무가족이 1946년까지 살아간다. 그러다 광복이후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1947년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는데, 1950년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을 뻔 했지만, 휴전이후 전후 복구사업을 통해 미군과 정부사업을 통해 큰 돈을 번다.

 

   이후에는 승승 장구였다. 1972년 지폐 한장으로 '프리미어리그' 스폰서로 유명한 영국 바클레이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빌린 현대조선소 건설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전반적으로 한국의 성장을 이끌고 따라가면서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크게 성장해왔다. 

 

 

   그러다 1977년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했고, 88서울올림픽 유치에 참가하면서, 1987년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명예회장으로 물러나 대신 정계에 진출한다. 당내에서 활동하던 그는 1992년 14대 총선을 통해 지역구에 출마하지 않고 전국구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바로 그 해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하지만 김영삼 42%, 김대중 34%, 정주영 16%로, 3위로 패한다.

 

   이후 그는 정계에서 은퇴한다. 다시 기업으로 돌아간 그는 기업활동에만 전념하는데,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주영은 북한 지원과 함께 대북협력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다 2000년 들어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고, 2001년 3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2001년 1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는 것을 정주영은 볼 수 있었고, 이 역시 어쩌면 다행히도, 2008년 7월 금강산 피격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전면 중단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가 있었다면 피격사건이 일어났을까?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 2002년 - 미국 국토안보부가 발족되다.

 

 

 

   2001년 9월 11일의 9.11테러는 그 자체로도 충격적이었지만, 그를 예측할 수 있었던 수많은 정보가 있었음에도 그를 막지 못했다는 것에도 국가적 충격이 컸다. 그에 따라 1년뒤인 2002년 11월, 국토 안보부가 설립된다. 22개의 조직을 통합해 미국 국방부에 버금가는 거대 조직을 만들어낸 것이다.

 

   산하에는 연방 긴급 사태 관리국(FEMA), 해안경비대(Coast Guard), 이민 세관 집행국(ICE), 연방 보호 경찰(FPS), 이민국(USCIS), 관세청(CBP), 연방 사법 연수원(FLETC), 비밀검찰국(Secret Service), 교통보안청(TSA) 등이 있다. 직원수는 20만명인데, 100만명 내외 수준인 대한민국 공무원의 5분의 1에 달하며, 예산은 2009년 기준으로 5천2백억달러, 560조원으로 대한민국 1년 예산의 1.6배 이상이다.

 

 

 

 

 

 

 

 

 

#. 1950년 - 장진호 전투가 시작됐다.

 

   맥아더 장군은 고민 끝에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하여 거의 남지 않은 북한군 잔존세력에 대한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자 했다. 한국전쟁을 끝내기 위한 최후의 일격에 미해병1사단이 가장 북쪽 전선을 맡았다. 하지만 11월 초, 중공군은 개입을 시작했고, 순식간에 한미 연합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 다시 남하할 수는 없었다. 한미연합군은 방어를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저기에서 중공군에 밀린 한국군과 미군 부대들은 퇴각하기 시작했고, 미해병1사단 12000명의 병력은 장진호 부근에서 60000명의 중공군에게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1950년 11월 26일, 낮에도 영하 20도에 달했던 해발 1000m 개마고원 부근에서의 장진호 전투(Battle of Chosin Reservoir)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상황은 심각했다. 27일 밤부터 본격화된 중공군의 공격으로 중공군은 많은 고지를 탈취했고, 미해병1사단은 수적으로도 크게 불리한 상황에서 세조각으로 쪼개지며 포위되고 말았다. 결국 이에 필사적 철수작전이 진행되었다. 포위망을 뚫고 부대가 부대를 구출하고 그를 통해 탈출하여 퇴각함과 동시에, 중공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공격을 펼치기도 하는 등 필사의 작전들이 반복되었다.  

 

   크게 봤을때는 결국 퇴각이라고 밖에 표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장진호 전투의 '필사의 작전' 속에서 수많은 피해가 불가피 했다. 결국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장진호 전투의 상황을 지켜보다 맥아더가 원자폭탄을 쓸 수 있게 허락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12월 1일에 장진호 남쪽에 야전활주로가 완성되어 항공기를 통한 퇴각도 시작되면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활주로를 지킴과 동시에 고립된 부대를 구출해와 퇴각시키기를 반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12월 6일에는 평양이 북한군에게 다시 넘어갔다. 결국 더 남쪽으로 철수하기 위해 야전활주로는 폐쇄되었고, 공중으로 철수 하지 못한 모든 부대는 흥남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철수 과정에서도 그를 저지하는 중공군과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그를 뚫고 흥남으로의 철수를 완료한 끝에 흥남부두를 통한 해상 철수 작전, '흥남 철수 작전'이 시작되었다. 무기를 버리고 민간인을 구해 유명했던 그 작전 말이다. 아주 유명한 작전이니 위키를 통해 확인해 보시길.

 

   아무튼 그렇게 장진호 전투는 12월 13일 막을 내렸다. 12000명의 미해병1사단중 2500명이 전사했다. 중공군은 60000명중 25000명이 전사했다. 당시 미국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평가했고, 역사적으로도 "미국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그렇게 미군은 큰 피해를 보았지만 전술적으로는 승리했다고 볼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에서의 미해병1사단의 노력으로 중공군의 남하가 저지되었고, 덕분에 흥남을 통한 철수가 가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고 할 수 있겠다. 장진호 전투는 세계 3대 동계전투중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그리하여 미국에서 나오는 한국전쟁 관련 책에는 장진호 전투가 빠지지 않고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장진호 전투만을 다룬 책도 3권이 있다고. 또 20여척 정도 되는 미해군 이지스함 중에도 '장진함'이 있으니, 한국전쟁에서의 장진호 전투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 장진호 전투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한 한미연합군의 당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때 미해군1사단이 중공군을 압도했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하는건 정말 망상인 것이겠지?

 

 

 

 

 

 

 

 

11월 25일과 26일의 역사

 

- fin -

 

 

 

 

 

 

현재까지 수정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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