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0월 21일과 22일의 역사 - 인류를 발전시킨 노벨상, 트라팔가 해전, 야신, 임보단 탄생 등

스마일루 2012. 10. 19.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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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3년 10월 21일, 훗날 노벨상을 만든 알프레드 노벨이 태어난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와, 가족과, 학교와 직장, 국가를 넘어,

인류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 보았는가?

노벨은 원래 그랬는지 아니면 죽을때가 되서야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인류'를 생각한 인물이었고, 그가 만든 노벨상은 수 많은 과학자들에게 '명예'라는 것을 안겨 주었으며

수 많은 학생들과 연구자들에게 꿈을 심어주면서, 눈에 띄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류 문명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정말 멋지지 않나?

 

 

 

 

 

 

 

 

- 순 서 -

 

207년전, 1805년 10월 21일

영국의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군을 물리치다.

 

179년전,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 탄생.

 

83년전, 1929년 10월 22일

소비에트 연방의 전 축구 선수 레프 야신 탄생.

 

71년전, 1941년 10월 22일

임보단이 세워졌다.

 

 

 

 

 

 

 

 

 

10월 21일과 22일의 역사

Wikipedia

 

10월 21일

1600년 - 세키가하라 전투 발발(음력 9월 15일).

1805년 - 영국넬슨 제독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의 연합군을 물리치다.

1833년 -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 탄생.

1854년 - 영국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38명의 간호사크림 전쟁 전장으로 가다.

1878년 - 비스마르크, 사회주의자 탄압법 의회 통과.

1943년 - 수바스 찬드라 보스를 중심으로 한 자유 인도 임시 정부가 수립되다.

1949년 - "국제 연합 총회 결의 293 (IV) 한국의 독립 문제"에서 대한민국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선언하였다. 결의 원문 참조.

1967년 - 아일라트호 격침 사건 발생.

1986년 - 마셜 제도가 독립했다.

1994년 - 성수대교 붕괴 참사: 성수대교 상판이 붕괴하여 32명이 목숨을 잃다.

2003년 - 청량산 버스 추락 사고 발생.

2010년 - 미얀마의 국기가 새로 제정되다. 

 

10월 22일

1797년 - 프랑스앙드레 자크 가르느랭파리 1000 m 상공에서 최초로 낙하산 강하를 선보이다.

1913년 - 헝가리유태인, 미국인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 탄생.

1924년 - 펑위샹, 베이징 정변을 일으키다.

1929년 - 소비에트 연방의 전 축구 선수 레프 야신 탄생.

1941년 - 임보단이 세워졌다.

1962년 - 쿠바 미사일 위기: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쿠바에서 핵무기가 발견되었다는 사실과 쿠바를 봉쇄한다는 내용을 텔레비전으로 발표하다.

1973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최종전에서 한신 타이거스를 누르고 9년 연속 센트럴 리그 우승을 달성하다.

1980년 - 대한민국의 제8차 헌법 개정안인 제5공화국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다.

2006년 -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최규하가 서거하였다.

 

 

 

#. 1994년 - 성수대교 붕괴 참사: 성수대교 상판이 붕괴하여 32명이 목숨을 잃다.

 

   성수대교 사건에 대하여... {10월 셋째주} 성수대교 준공, http://blog.daum.net/smileru/8887956

 

 

 

 

 

 

 

 

#. 1805년 - 영국넬슨 제독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의 연합군을 물리치다.

 

   당시 서부유럽의 상당수는 1804년 12월 프랑스 황제자리에 오른, 그 유명한 '나폴레옹'(오른쪽 그림, 1801년 작)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에 의해 격파된지 200년이 지난 바다는 영국의 차지였고, 나폴레옹은 감히 영국대륙을 넘볼 수 없었다. 육지는 최강이었지만 바다를 건널 수 없는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프랑스-스페인 해군을 통해 영국 함대를 다른 쪽으로 유인해 영국 본토에 15만명의 지상군을 상륙시킬 시간을 벌고자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명을 받은 프랑스 빌뇌브 제독은 영국 함대를 어느 정도 유인하는데는 성공했으나 끝까지 영국함대를 유인하는데 실패했고(1805.4~7), 결국 상륙하는데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포기하면서 영국 상륙 계획은 싱겁게 무산 되었다.

 

   그런데, 돌아오던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대규모 영국 선단을 만나게 된다. 바로 3개월전 '호레이쇼 넬슨'이 이끄는, 그들이 최대한 멀리 유인하려다 실패한 영국의 주력함대였다. 영국의 함대는 전열함 27척, 프리깃 6척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프랑스의 전열함 18척과 프리깃 8척, 스페인의 전열함 15척으로 구성되어 있어, 수적으로는 영국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의 숙련도는 매우 높아, 프랑스-스페인 함대보다 두배 가까이 대포를 빠르게 쏠 수 있었다. (2분에 1발)

 

   그런데서 오는 자신감 때문이었는지, 아님 이전에도 프랑스 해군을 이겨봐서인지는 몰라도, 넬슨 제독은 선제공격을 시도, 적 함대 한 가운데를 두줄로 돌파하는 전술로 전투를 시작했고, 11:45분에 시작된 전투는 5시간도 안된 16시 30분에 프랑스-스페인함대는 1척이 격침당하고 22척의 배가 영국군에게 나포당하는 것으로 끝이났다. 프랑스-스페인 함대의 완전한 괴멸이었다. 전사자도 3000명이 넘었고, 7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반면 영국군은 한척도 침몰당하지 않았으며, 449명이 전사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안타깝게도 넬슨 제독이 전사한다. 프랑스의 '루드터블'함과 넬슨 제독이 타고 있던 '빅토리'함과 붙어 선상에서 백병전이 벌어지던 와중에, 넬슨 제독이 프랑스군의 저격병의 총에 맞았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전투가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세상을 떠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나는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Thank God. I have done my duty.)

 

   허나 이 해전의 유명세와는 다르게, 이 전투가 나폴레옹에게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영국 침공은 안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영국에 상륙시키려던 병력을 그대로 이끌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했고,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 1833년 -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 탄생.

 

   안 그래도 요즘 노벨상 시즌인데 10월 21일이 잘 걸렸다. 1833년 10월 21일, 노벨이 스웨덴 발명가의 아들로 태어난다. 학교는 1년 밖에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가정교사에게 러시아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와 함께 과학을 배웠다고. 그리고 17살때는 아버지의 권유로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으니 그야말로 '엄친아'라고 할만하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19살에 프랑스에서 한 소녀를 만나게 되고 그 소녀를 사랑하게 되는데, 어느날 그 소녀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이후 노벨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한편 노벨의 아버지는 스웨덴에서 여러번 사업에 실패하는데,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눈에 띄면서 1842년 러시아로 넘어가 군수 공장을 시작하게 된다. 허나 1855년 니콜라이 1세가 세상을 떠난 뒤 갑자기 계약이 파기 되면서 파산하고 만다. 결국 아버지는 스웨덴으로 돌아갔고, 노벨은 형과 함께 다양한 연구를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폭약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뤘다. 그리고 1866년 결국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기에 이른다. 이후 후속 발명까지 이어지면서 노벨은 엄청난 부를 얻게 되지만, 다이너마이트가 전쟁에도 적극 이용되면서 '죽음의 상인'이라는 오명도 쓰게 된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확실하지 않지만, 노벨은 1896년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을 통해 노벨상을 만든다. 그의 가족들과 안 좋게 헤어진 옛 연인까지 유산이 엉뚱한 곳에 쓰인다며 노벨상에 반대했는데, 그 속에서도 결국 노벨 재단과 노벨상이 탄생했고, 1901년 부터 노벨상 수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노벨상은 인류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상으로 성장했다. 잘은 몰라도 이 노벨상이 수 많은 과학자들을 자극하여 인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1901년 부터 지속적으로, 그리고 앞으로도 미치지 않을까?

 

 

 

 

 

 

 

 

 

 

 

#. 1929년 - 소비에트 연방의 전 축구 선수 레프 야신 탄생.

 

   1929년 10월 21일, 모스크바에서 레프 야신이 태어난다. 12살에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던 그는, 공장 축구팀에서 축구를 하다 '아르카디 체르니셰프' 감독에 눈에 띄면서 1949년에 Moscow Dinamo 팀의 축구 골키퍼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시작은 그리 좋지 못했고, 결국 같은 Moscow Dinamo의 아이스 하키팀 골키퍼를 맡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던 1953년, Moscow Dinamo 축구팀의 명 골키퍼 '알렉세이 코미치'가 팀을 떠나면서 그에게 기회가 온다. 그 때 그는 아이스하키 골키퍼가 아닌 축구 골키퍼로 방향을 정한다.

 

   이후 그의 노력과 함께 팀도 크게 성장하게 되면서(Moscow Dinamo는 야신이 주전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1954년부터 1959년까지 6년간 소련 축구리그에서 4번 우승하고 2번 준우승 한다) 1954년 소련 대표팀에 선발된 그는, 여러 경기에서 극적인 활약을 펼쳤고, 특히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골키퍼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혼자서 팀의 승리를 이끌면서 소련 당국으로 부터 '붉은 노동 훈장'을 받았으며, '유럽 올해의 선수상'에도 5위에 오른다. 이후에도 그의 활약은 계속되어 1960년 소련은 유로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야신은 '레닌 훈장'을 받는다. 그리고 은퇴 직전까지 계속 왕성하게 '야신' 소리를 들으며 활동했던 그는, 1971년에 화려했던 대략 20년간의 골키퍼 인생을 마감하고 은퇴한다.

 

   그는 812경기에 출장해 480경기를 무실점으로 막았고, 150회의 패널티킥을 막아냈다. 엄청난 수가 아닐 수 없다. 골을 막아내는 능력 자체가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에 더불어 그의 남과 다른 플레이 스타일도 상당히 주목을 받았었다. 당시에는 골키퍼는 말그대로 골대 근처에서 골만 지킬 뿐이었다. 하지만 야신은 수비수의 위치를 조정하고, 볼이 흐르면 과감하게 골대에서 나와 볼을 걷어내기도 했으니, 현대의 골키퍼를 만든 장본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를 기린 FIFA는 1994년 월드컵때부터 '야신상'(지금은 '골든 글러브 상')을 수상하고 있다.

 

 

 

 

 

 

 

 

 

#. 1941년 - 임보단이 세워졌다.

 

   일본이 아시아 곳곳을 점령하면서 전장을 확대해 진주만을 폭격하기 2개월 전이었던 1941년 10월 21일, 조선임전보국단, 줄여서 '임보단'이 세워졌다. 이는 친일단체였다. 당시에는 '윤치호'가 주도한 친일단체인 '흥아보국단'과, 최린, 김동환이 주도한 '임전대책협의회'가 막 탄생하려하고 있었는데, 이를 지켜본 일본 당국은 친일세력의 분열을 우려, '총력연맹' 사무국장 '가와사키'가 이 둘을 합병시키고, 그러면서 '임보단'이 탄생하게 된다. 이들의 구호와 강령 등을 살펴보자.

 

 

구호 - 나라를 위해 한 몸을 바치자


강령
① 아등은 황국신민으로서 황도정신을 선양하고 사상통일을 기한다.
② 아등은 전시체제에 즉하고 국민생활의 쇄신을 기한다.
③ 아등은 근로보국의 정신에 기해서 국민개로의 실을 거두기를 기한다
④ 아등은 국가우선의 정신에 기해서 국채의 소화, 저축의 여행, 물자의 공출, 생산의 확중에 매진하기를 기한다.
⑤ 아등은 국방사상의 보급을 하는 동시에 일조유사지추에 의용 방위의 실을 거두기를 기한다.


설립취지서
아국은 현금 유사 이래 가장 중대한 시국에 직면하고 있는 동시에 또한 가장 숭고존엄한 동아공영권의 확립의 성업완수의 도상에 있다. 차제 황국에 향생한 자는 누구임을 불문하고 각자의 분에 응하여 그 성을 알 하고 국운의 진전에 기여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차시를 당하여 아등 반도민중은 과연 현재의 태세 그대로 나가도 좋을는지 설령 아등은 특별지원병위에 일반적으로 병역에 복하는 명예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나 적성을 가지고 정신적 물질적 또는 노무적으로 전력을 기울여 총후봉공에 일충 철저하여 출렬한 장병의 분투에 대응하고 무한한 황은의 만일에 봉보하는 방도가 열리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해서 반도가 물심 공히 병참기지됨의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이 기회를 놓치고서는 재차 얻지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후략)

 

선서문
우리들은 임전체제하에서 일체의 사심을 버리고 과거에 구애 받지 않고 개개의 입장에 구애없이 2천4백만 반도민 모두 일치결속하여 성전완수로써 황국의 흉융을 기하며 성은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할 것을 맹세한다.

 

출처 : 민족정기구현회, http://www.koreakjh.com

 

 

 

   '과거에 구애 받지 말자'는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그렇지 않나? 또 '임보단'의 창설에 참여한 '윤치호' '최린' 등은 독립운동을 열성적으로 진행하다가 자포자기한 인물들이다. 한번씩 클릭해서 보시길. 참 안타깝다. 친일파들을 비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당신은 잔인한 탄압앞에 변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지 생각해 보았나? (물론 변절자들이 꼭 탄압을 받다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친일파에 대한 처벌을 넘어, 그를 이겨낸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들에게 넘치다 싶을 정도의 보상이 있어야 할텐데 안타깝기 그지 없다.

 

 

 

 

 

 

 

10월 21일과 22일의 역사

Wikipedia

 

 

- fin - 

 

 

 

 

 

 

현재까지 수정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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