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0월 14일과 15일의 역사 - 유신체제: 박정희가 계속 집권했다면..., 마타하리 총살형, 니체 탄생 등

스마일루 2012. 10. 1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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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헌법 공포 장면.

박정희의 마지막 발악이었고, 그렇게 박정희 스스로는 물론 대한민국 모두가 불행해졌다.

 

유신체제로 영구집권을 시도했던 박정희... 계속 박정희가 집권했다면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그는 반드시 죽었어야 했다. 쫓겨나는 것도 안된다. 그가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역사는

박정희를 인류 최악의 독재자중 한 사람으로 기억했을 것이며,

그가 그나마 가진 경제 발전이라는 성과도 그렇게 죽었기에 빛을 발할 뿐,

박정희가 대한민국 경제의 기반을 다졌다지만 그 기반 상태의 수준 그대로,

수많은 독재국가들이 그렇듯, 대한민국도 빈국 상태에서 영원히 머무르게 되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정말 그렇게 박정희에 의해 망해버릴 대한민국을, 전두환에 의해, 노태우에 의해 또 다시 휘청거린 대한민국을 바로잡은건,

우리 국민들이었다. 이 민주화 역사를 찬양해야지, 그 영광 사이에 영구집권을 하려다 실패한 인물이 비집고 들어올 자리는 없다.

 

 

 

 

 

 

 

 

 

 

- 순 서 -

 

41년전, 1971년 10월 15일

유신체제: 서울특별시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10개 대학에 무장군인이 진주하다.

 

38년전, 1974년 10월 14일

유신체제: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 긴급조치 제3호 선포

 

168년전, 1844년 10월 15일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탄생.

 

95년전, 1917년 10월 15일

제1차 세계 대전: 네덜란드 출신 무용수로 독일 간첩 혐의를 받은 마타하리가 파리에서 처형당하다.

 

 

 

 

 

 

 

 

 

 

 

10월 14일과 15일의 역사

Wikipedia

 

 

10월 14일

1806년 -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다.

1942년 - 일본, 조선군사령 공포

1943년 - 제2차 세계 대전: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나치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성명 발표

1944년 - 제2차 세계 대전: 에르빈 롬멜 나치 독일 육군 원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관여한 의혹으로 히틀러에게 자살 강요를 받아 음독 자살

1947년 - 시험 비행사 척 예거벨 X-1기로 초음속 비행에 성공하다.

1953년 - 키비아 학살: 아리엘 샤론이 지휘하는 이스라엘 군이 웨스트뱅크를 공격, 50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1962년 - 쿠바 미사일 위기: U-2 정찰기가 쿠바 상공을 정찰하여 소련의 미사일 기지를 찾아내다.

1964년 -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 겸 공산당 서기장인 니키타 흐루쇼프가 실각되다.

1967년 - 여객선 한일호, 해군의 충남함과 충돌로 침몰하여 94명 사망함.

1969년 - 미국 원자력 항공모함 CVN-65 엔터프라이즈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하여, 25명이 사망하고 85명이 부상당함

1974년 - 유신체제: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 긴급조치 제3호 선포

1975년 - 대한민국 정부, '부처님오신 날'과 '어린이날' 공휴일로 제정

1980년 - 국제연합 특별총회,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철수결의안 가결

1996년 - 대한민국 통신위성 무궁화 2호, 미국 케이프커내버럴 공군 기지에서 발사되다

2000년 -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교 연구팀, 첫 영장류 복제원숭이 ‘테트라’ 탄생시킴

2006년 - 반기문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이 제8대 국제 연합 사무총장으로 선출되다. 

 

10월 15일

533년 - 비잔티움 제국벨리사리우스 장군이 반달족의 수도 카르타고로 진격하기 시작하다.

1552년 - 카잔 한국이반 그로즈니의 군대를 패배시키다.

1582년 - 율리우스력 대신 그레고리력이 사용되기 시작하다.

1608년 -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 탄생.

1815년 -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하다.

1844년 -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탄생.

1863년 - 미국 남북전쟁: 최초의 잠수함 CSS 헌리가 시험 도중 침몰했고, 이 사건으로 개발자인 호레이스 H. 헌리가 죽었다.

1878년 - 미국 에디슨 전기 회사(현재의 제네럴 일렉트릭)가 영업을 시작하다.

1894년 - 프랑스 육군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다. 드레퓌스 사건의 시작.

1904년 - 러일전쟁: 러시아 제국 해군발틱 함대러일전쟁 참전을 위해 에스토니아 탈린을 떠나 중국뤼순으로 출항하다.

1910년 - 인천에 상수도 개설.

1917년 - 제1차 세계 대전: 네덜란드 출신 무용수로 독일 간첩 혐의를 받은 마타하리가 파리에서 처형당하다.

1928년 - 독일 비행선 그라프 쩨펠린이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을 마치고 미국 뉴저지 주 레이크허스트에 착륙하다.

1934년 - 중화소비에트공화국장개석국민혁명군에 포위당해 붕괴되고, 공산주의자들장정을 시작하다.

1940년 - 인도 민족지도자 마하트마 간디, 반영 불복종 운동 개시

1946년 - 대한민국 최초의 국립대학 서울대학교가 개교하였다.

1948년 -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가 이끄는 제2차 요시다 내각이 성립되다.

1952년 - 백마고지 전투가 끝났다.

1971년 - 유신체제: 서울특별시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10개 대학에 무장군인이 진주하다.

1973년 - 소양강댐이 준공되다.

1988년 - ‘88 서울 장애인 올림픽, 65개국 4천361명 참가한 가운데 개막하다.(∼24일)

1992년 - 러시아에서 안드레이 치카틸로연쇄 살인 52건에 대해 유죄가 확정되다.

2003년 - 중화인민공화국이 첫 유인 우주선인 선저우 5호를 발사하다. 

 

 

 

   아 이게 뭔가 그냥 넘어가기엔 아깝고, 다루자니 애매한, 그런 역사들이 많은 듯 하다. 조금이라도 궁금한 것들은 꼭 클릭해서 확인해보시길. 일단 전에 다뤘던 내용들도 많은 듯 하다. 링크 참고하시길.

 

 

 

 

   #. 1944년 - 제2차 세계 대전: 에르빈 롬멜 나치 독일 육군 원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관여한 의혹으로 히틀러에게 자살 강요를 받아 음독 자살

 

   롬멜에 대해... 문명4BTS-(#5-13) 롬멜과 몽고메리, http://blog.daum.net/smileru/8887604

 

 

 

 

   #. 1962년 - 쿠바 미사일 위기: U-2 정찰기가 쿠바 상공을 정찰하여 소련의 미사일 기지를 찾아내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해... 문명5-(#1-10) 갈등의 시작, http://blog.daum.net/smileru/888779

 

 

 

 

   #. 1904년 - 러일전쟁: 러시아 제국 해군발틱 함대러일전쟁 참전을 위해 에스토니아 탈린을 떠나 중국뤼순으로 출항하다. 

 

   러일전쟁에 대해... {5월 넷째주} 러일전쟁, http://blog.daum.net/smileru/8888052

 

 

 

 

 

 

 

 

 

   #. 1971년 - 유신체제: 서울특별시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10개 대학에 무장군인이 진주하다.

   #. 1974년 - 유신체제: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 긴급조치 제3호 선포

 

 

   유신체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쭉 해보고자 한다. 박정희는 그대로 나름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었다.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즉 군사정권을 통해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하여 권력구조를 대통령제로 바꾼 그는,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때는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한후 군인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해 왔지만, 권력에 욕심이 생겨서인지 원래 계획대로인지, 전역을 한뒤 민간인 신분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리고 쿠데타로 장면 전 총리와 예전 정치인들의 활동이 법적으로 수년간 금지된 상황(1963년 3월 정치활동 금지가 해지되지만 동시에 군사정권도 기간을 연장)과 야권의 분열까지 더해져, 윤보선 후보를 1.5%차이로 아슬아슬하게 꺾고 당선되었다. 1967년 6대 대통령 선거때도 역시 야권은 분열되어 있었지만, 단순 그 덕분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51.4%의 과반 득표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그 때는 금품선거, 부정선거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었었다. 또 사실 쿠데타 이후 언론은 항상 박정희 편이었고...

 

   그리고 서서히 1971년의 7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 2년, 군인으로 돌아갈것을 약속했다 돌아와 대통령이 된 이후 8년, 총 10년간의 군사정권을 지켜본 많은 국민들은 박정희를 더 이상 신뢰하지 못했다. 특히 1969년 '3선개헌'을 통해 대통령을 3번 연임할 수 있게 헌법을 바꾼것만 봐도 그랬다. 3선개헌 이후 부터 본격적으로 곳곳에서 박정희가 독재를 하려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대학생들이 극렬히 반발했는데, 그러자 박정희는 '대학교의 병영화'로 대학생을 다스리겠다는 생각에 대학교에 '교련'과목을 신설하기도 했다(1970.2). 또한 1970년 4월에는 군부대를 이용해 특정 지역의 치안을 통제할 수 있는, 일종의 '국소적 계엄령'이라 할 수 있는 '위수령'이라는 제도가 대통령령에 의해 생긴다. 이 역시 독재를 우려케 하는 법안 중 하나였다.

 

   그런 상태에서 다가온 1971년...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지 10년째 되는 해였고, 동시에 7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 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정희에게 두번 패배한 윤보선과 달리, 김영삼을 누르고 화려하게 등장한 40대의 김대중은 박정희가 당선되면 독재를 시작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큰 인기를 얻으며 박정희를 위협했다. 3선 개헌까지 하여 일단 출마는 했지만 승리는 장담 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그럼에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53.2%의 득표율로 45.2%의 김대중을 압도하며 승리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중앙정보부가 깊이 개입된 불법선거가 있었다. 허위전단을 유포해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금품을 살포했다. 그 정도로 저런 결과가 나오겠냐고? 1987년 김종필은 1971년 선거에서 600억을 썼다고 말했고, 1992년 강창성 당시 보안사령관은 700억을 썼다고 말했다. 1971년 당시 국가 예산은 5240억원... 1년 국가예산의 13%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렇게 해서 박정희가 당선되자 당연히 대학생들은 들끓었다. 마치 독일 나치 '파시즘' 정책의 일환으로 보였던 교련 과목에 대한 반발도 심했다. 결국 각 학교의 대학생들은 연합하여 '대정부 투쟁'을 선언하는데, 그러자 1971년 10월 15일, 양택식 서울시장은 서울시에 1970년 4월 제정된 위수령 제도를 이용, 위수령을 처음으로 내리고, 군 병력을 동원해 대학생 1889명을 연행하고 각 대학교에 군 병력을 주둔 시킨뒤 학교를 폐쇄한다. 10.15 조치였다.

 

 

   한달뒤에서야 10.15 조치는 해제된다. 하지만 일련의 사태들에서 박정희는 개헌, 부정선거로는 더 이상 정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도 정권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거의 딱 1년 뒤인 1972년 10월 17일, 초헌법적 '유신'을 단행, 유신 체제가 시작된다. 대통령 직선제는 폐지되었다. 대통령은 간접 선거 방식으로 박정희의 꼭두각시인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하도록 했다.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무제한 연임할 수 있게 바뀌었다. 대통령은 국가 맨 꼭대기, 헌법보다 위에서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바뀌었다. 정당과 국회는 해산되었다. 언론과 출판, 방송은 모두 검열을 거쳐야만 했다. 그리고 그를 가능케하기 위해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야말로 독재 그 자체였다.

 

   그 결과는 박정희에게, 대한민국 국민에게 모두 참혹했다. 유신 체제로 가능해진 '대통령이 말이 곧 법이 되는' 긴급조치가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시작으로 각종 헌법적 가치들을 제한하기 시작한다. 1974년 4월 3일에는 최근 정치적으로도 논란이 되고 있는, 훗날 유신체제를 북한 문제로 합리화 시키기 위한 날조로 확인된 '제2차 인혁당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놓고 미국 뉴욕타임즈는 '북한과 다를바 없는 독재'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4년 8월 15일에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생중계되던 광복절 기념식 도중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박정희의 마음을 크게 동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박정희는 소수의 인물들만 만나기 시작했고, 그의 자랑이라면 자랑인 추진력은 크게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이후 있었던 일이 1974년 10월 14일에 있었던 '긴급조치 3호'다. 연금 실시 보류등의 내용도 있었지만, 세금을 낮추고, 영세상인들에게 저금리로 대출을 해줄 수 있게 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좋아보이지만 사실 민심을 돌리기 위한 방안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당연히 그 정도로 민심이 독재정권을 향해 돌아설 수는 없었다. 1978년 유신체제 상태에서의 간접민주주의 방식으로 5선에 성공하지만, 1979년 10월 16일 부산마산 민주화운동(부마항쟁)이 일어나게 되고, 계엄령을 통한 무력으로 그를 진압하는데 성공하지만, 박정희는 열흘뒤인 1979년 10월 26일, 결국 유신체제에 환멸을 느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난다. 이후 12월 12일, 전두환이 쿠데타로 등장하게 되고, 1980년 10월 27일, 헌법을 수정하면서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는 끝이 나게 된다.

 

   요즘 보면 사회 일부에서 당시 독재가 필요했다는 시각이 있는 듯 하다. 그 말이 설령 맞다면 반드시 그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박정희는 반드시 비극적으로 총을 맞고 딱 그 때쯤, 아니 좀 더 일찍 죽었어야 했다. 쫓겨나는 것도 안된다.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 유신체제로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시도했다. 계속 박정희가 집권했다면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박정희가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역사는 박정희를 인류 최악의 독재자중 한 사람으로 기억했을 것이며, 그가 그나마 가진 경제 발전이라는 성과도 그렇게 죽었기에 빛을 발할 뿐, 박정희가 대한민국 경제의 기반을 다졌다지만 그 기반 상태의 수준 그대로, 수많은 독재국가들이 그렇듯, 대한민국도 빈국 상태에서 영원히 머무르게 되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정말 그렇게 박정희에 의해 망해버릴 대한민국을, 전두환에 의해, 노태우에 의해 또 다시 휘청거린 대한민국을 바로잡은건, 우리 국민들이었다. 이 민주화 역사를 찬양해야지, 그 영광 사이에 영구집권을 하려다 실패한 인물이 비집고 들어올 자리는 없다.

 

 

참고글

{9월 첫째주} 유신옹호발언, http://blog.daum.net/smileru/8888096

 

 

 

 

 

 

 

 

 

   #. 1844년 -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탄생.

 

 

   1844년 10월 15일, 위대한 철학자 '니체'가 오늘날의 독일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다. 음악과 언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그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슐포르타' 김나지움(고등학교)에 입학해 시와 음악을 짓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학등을 배웠으며, 1864년에는 '본' 대학에 입학해 개신교 집안의 방향을 따라 신학을 공부했고 동시에 철학에 대해서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다비드 슈트라우스'가 쓴 '예수의 생애'라는 책을 읽은 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학에 대한 공부를 중단 한뒤 철학 공부에 집중하게 된다. 이후 그는 1867년 군대에 자원입대 하지만 1868년 말을 타다 사고를 당해 결국 다시 학업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단순 학업이 아니었다. 그가 철학을 배웠던 '리츨' 교수의 도움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고전 문학 교수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다 1870년에 1년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한 뒤 학교로 돌아온 그는, 본격적으로 그의 생각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는 당시의 사상과 정반대되는 주장을 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삶을 파괴한다고 봤고 그를 넘어서야 한다고 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 결과 굉장한 반대에 시달려야 했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사상을 주장했고 그를 문학작품으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1879년, 35세의 나이로 바젤 대학을 퇴직하고 집필에 전념하게 되는데, 10년뒤인 1889년 산책중 쓰러져 진 뒤 정신 발작을 일으켰고, 그 결과 정신병원에서 10년을 보낸뒤 1900년 8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 1917년 - 제1차 세계 대전: 네덜란드 출신 무용수로 독일 간첩 혐의를 받은 마타하리가 파리에서 처형당하다.

 

    마타하리가 1917년 10월 15일, 총살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타하리는 1876년 8월 7일에 네덜란드의 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태어날때부터 미모가 뛰어났고, 유럽인 같지 않은 이국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사업가였던 그의 아버지덕에 어렸을때는 유복한 삶을 살았지만, 13세 무렵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순식간에 가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녀는, 1895년 19살때 인도네시아에서 근무하던 네덜란드 군인 장교가 낸 구혼 광고를 보고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자 그와 결혼하여 자바섬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남편의 외도로 1901년 결국 이혼하고 만다. 

 

   마타하리는 이혼후 무작정 파리로 떠났다. 그곳에서 프랑스 외교관 '앙리 드 마게리'와 동거를 하게 되는데, 그때부터 마타하리는 시골출신이고 이혼녀인 자신의 과거를 속이고자, 이국적 외모를 이용해 자바섬 공주 출신, 인도의 사제라는 등의 다양한 소문을 퍼트렸고, 동시에 동양적인 춤(밸리 댄스 등)으로 수많은 남자들을 휘어잡기 시작했다. 그러다 1905년 눈에 띄어 정식 댄서가 된 그녀는, 프랑스 '물랑 루즈'에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때 '마르가레타 게르트뤼다 젤러'라는 본명을 인도네시아어로 '새벽의 눈'이라는 뜻의 '마타하리'로 바꿔 활동하기 시작한다. 

 

   밸리 댄스 보단 사실상의 스트립쇼로 수많은 남성들을 사로잡은 마타하리는 서서히 고위층에 접근하면서 상류사회에서 유명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은행가를 '물주', 요즘 말로 치면 '스폰서'로 뒀던 마타하리는, 그 은행이 파산하자 독일 베를린으로 넘어가게 되지만 베를린에서도 좋은 스폰서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베를린에서 프랑스군 장교 블라디미르(러시아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여기서 사건이 발생한다. 독일이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1차세계대전이 확전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블라디미르를 만나고자 프랑스 파리로 돌아가려 했고, 한 독일 관리의 말을 따라 영국을 경유해 프랑스로 돌아가고자 했는데, 그곳에서 1915년 12월 영국 정보기관 요원들에게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다. 프랑스와 독일 상류층에 손을 뻗치고 있는 그녀의 인맥과 프랑스와 독일을 오고간 행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체포이후 모든 질문에 필요이상으로까지 성실히 답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혐의점을 찾지 못했고, 결국 그녀를 풀어주기에 이른다. 물론 감시는 계속되었지만...

 

   하지만 여기에서 부터 미스터리에 빠지게 되는데, 그녀가 정말 스파이 였냐, 아니었냐라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독일로 넘어갈 때부터 독일로 부터 돈을 받았으며, 이후 그녀의 인맥을 바탕으로 프랑스 고위층을 상대로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설이 있고, 하나는 모든 것은 댄서로의 성공과 재기를 위해, 금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위층에도 접근하고 돈도 받았던 것이지 스파이 노릇은 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아무튼 그녀는 그녀의 인맥과 매력 덕분에 실제 스파이 요청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으로부터 전쟁 전부터 받아왔었던 것이 사실이고, 공식적으로 받은 돈인지 마타하리에게 반한 고위층에 의해 빼돌려진 돈을 개인적으로 받은 것이 공식적으로 받은 돈으로 보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돈을 받기도 했다.

 

   허나 혐의점은 여전히 없는 상태였는데, 그렇게 각국 정보기관에 의해 감시를 받던 그녀는, 1917년 2월 17일 파리에서 프랑스 당국에 의해 다시 체포된다. 이후 조사가 시작되자 그녀에게 돈을 주며 스트립쇼를 감상하고 하룻밤을 보냈던 프랑스 고위층들은 제 살길을 찾기에 바빴다. 그 덕에 더 죄를 얻은 것인지, 결국 그녀는 8개월 뒤, '마타하리가 빼낸 정보는 연합군 병사 5만명을 죽일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라는 선언과 함께 총살형을 선고 받는다. 그녀는 자신이 스파이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소용은 없었다. 결국 1917년 10월 15일, 그녀의 요구로 기둥에 묶이지도 않고 눈도 가리지 않은채, 가만히 서서 12발의 총을 맞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1차세계대전은 물론 2차세계대전까지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1999년, '007'로 유명한 영국의 첩보기관 'MI5'는 제1차 세계대전 관련 문서에 마타하리가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물론 그것만으로 그녀의 혐의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고위층과의 인맥, 독일에서 사랑에 빠진 블라디미르를 만나기 위해 전쟁 이후 프랑스로 귀국하려 노력한 점들이 그녀에게 누명을 씌우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MBC 서프라이즈' 같은 결말이지만, 아무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10월 14일과 15일의 역사

Wikipedia

 

 

 

- fin -

 

 

 

 

 

 

현재까지 수정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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