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1월 11일과 12일의 역사 - 열린우리당과 안철수, 일본 전범 처리 결과는? 이리역 폭발사고

스마일루 2012. 11. 10.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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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은 정치개혁과 지역주의 타파를 내건 정당으로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틈새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와 함께 등장했다.

이후 탄핵 정국속에서 과반의석을 차지하는데 성공하게 되지만,

개혁법안들을 처리하는데 실패하며 한계를 보여줬고

결국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 합당되고 만다.

 

안철수는 1년전부터 제3정당 창당 가능성은 없다고 선을 그어왔다.

아마도 열린우리당의 선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민주당 스스로 바뀌고자 하는 민주당의 정치개혁을 원하는 것이고 말이다.

내가 볼 땐 그 길이 맞다. 열린우리당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 순 서 -

 

64년전 1948년 11월 12일 

도쿄에서 열린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도조 히데키 등 7명의 전범에게 교수형을 선고하다.

 

35년전, 1977년 11월 11일

전라북도 이리시의 이리역에서 열차 폭발 사고가 발생하다.

 

9년전, 2003년 11월 11일

열린우리당이 창당하다.

 

 

 

 

 

 

 

 

11월 11일과 12일의 역사

Wikipedia

 

11월 11일: 폴란드·앙골라독립기념일, 네덜란드성 마틴의 날, 영국 연방·유럽영령 기념일, 미국재향군인의 날, 대한민국농업인의 날

1821년 - 러시아의 문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나다.

1885년 - 미국의 장군 조지 S. 패튼 탄생.

1911년 - 가나의 축구 클럽인 하츠 오브 오크가 창단되다.

1918년 -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다.

1942년 - 독일 및 이탈리아군 안톤 작전 개시. 비시 프랑스를 무력으로 점령.

1945년 - 대한민국 해군의 모태가 되는 해방병단이 결성되다.

1962년 - 교황 요한 23세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다.

1977년 - 전라북도 이리시이리역에서 열차 폭발 사고가 발생하다.

1981년 - 앤티가 바부다국제연합에 회원국으로 가입하다.

2003년 - 열린우리당이 창당하다.

2004년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가 사망하다.. ,

2010년 - 제5차 서울 G-20 정상회의가 개최됨.

 

 

11월 12일

1755년 - 프로이센의 장군, 군사이론가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 탄생.

1866년 - 중국의 항일 운동가 쑨원 탄생.

1918년 -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발족되다.

1900년 - 조선의 한의학자 이제마 사망.

1927년 - 레온 트로츠키공산당에서 축출되고, 이오시프 스탈린소비에트 연방의 전권을 장악하다.

1948년 - 도쿄에서 열린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도조 히데키 등 7명의 전범에게 교수형을 선고하다.

1980년 - 보이저 1호, 토성에 접근. 8개의 위성을 추가로 발견함.

2001년 - 아프가니스탄 전쟁: 탈레반아프가니스탄카불을 포기하고 도주하다.

2010년 - 포항 요양원 화재 사고가 일어났다.

 

 

 

 

 

 

 

 

1948년 - 도쿄에서 열린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도조 히데키 등 7명의 전범에게 교수형을 선고하다.

 

 

   1945년 7월 26일,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때, 미국, 영국, 소련은 독일 포츠담에서 회담을 갖고 '포츠담 선언'을 발표한다. 일본의 항복을 촉구했고 항복이후 일본에 대해서 논의했는데, 그럼에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자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결국 8월 14일 일본은 항복한다.

 

   포츠담 선언에 따라 일본은 연합군의 일시적 지배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그를 수행하기 위한 '연합군총사령부'가 들어서 일본을 지배하기 시작하는데, 그러면서 전범들에 대한 체포와 재판이 시작되게 된다. 우선 1945년 9월 11일,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전범들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리게 되고 결국 1000여명의 전범들이 체포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은 1946년 1월 19일, 이들의 재판을 위한 '극동군사재판소설립 명령'을 내렸으며, 5월 3일부터 일본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승전국들의 재판관들이 참가해 재판이 진행되었고, 2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걸려 1948년 11월 12일 A급 전범 28명중 판결전 병사한 2명과 정신이상 1명을 제외한 25명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는데, 일본의 40대 총리이자 일본을 태평양 전쟁으로 몰고간 도조 히데키를 비롯해 7명이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또 16명이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교수형은 한달 뒤인 12월 23일 0시에 진행되었다. 교수형 순간까지도 도조 히데키는 반성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교수형 당한 전범들의 시신은 유족들에게 반환되지 않고 화장되어 항공기에 의해 태평양에 투하되었다. (오른쪽 사진에서 안경을 쓰고 두명의 병사 사이에 앉아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이 도조 히데키)

 

   그러나, 종신형을 선고받은 A급 전범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사와 화장터 근처 절의 스님이 화장터 직원의 안내로 화장터로 잠입, 화장하고 남은 잔회를 두는 곳에 버려진 7명의 A급 전범 유골 조각들을 회수하여 숨기게 되고, 이후 1958년부터 무덤을 만들자는 계획이 진행되어(그렇게나 빨리!) 1978년, 바로 그 유명한 '야스쿠니 신사'로 옮겨지게 된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16명의 전범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이없게도, 복역중 금새 감옥에서 병사한 2, 3명을 제외하고는 50년대에 모두 가석방 되었다. 그 중 몇몇은 또 금새 병사하기도 했지만, '가야 오키노리' 같은 경우 1955년에 가석방 되어 1958년에 사면을 받은 뒤 정계에 진출,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5회 연속 당선되었고, 강경 우파 정치인으로 활발히 활동하면서 전범들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에 깊이 개입하기도 하였다. 나머지 전범들은 70~80년대까지 생존하면서 약간의 정치-경제계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조용히 살아가는 편을 택했다.

 

   또 이 극동군사재판에서 전혀 기소받지 않은 전범들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 중국인들을 상대로 인류역사상 가장 잔인한 생체실험을 벌였던 731부대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전쟁 이후 체포되었던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오른쪽 사진)를 비롯한 731부대원들은 미국에게 생체실험 데이터를 넘겨주는 것을 조건으로 기소받지 않고 풀려나 의료계에 종사하며 당시 생체실험 데이터들을 사용했다고 하니 정말 통탄할 노릇이다.

 

   정말 끔찍하고, 비정상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일본에 대한 이야기는 쓰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찾아볼수록 화가나고 짜증나는 것들 뿐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잊혀져 가는 역사들이 너무 걱정스럽다.

 

 

 

 

 

 

 

 

 

 

1977년 - 전라북도 이리시이리역에서 열차 폭발 사고가 발생하다.

 

   1977년 11월 11일, 오늘날 한화그룹의 전신인 '한국화약'(줄여서 한화)의 화물열차가 밤 9시 15분에 이리역에서 폭발한다. 그 화물열차에는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40톤의 고성능 폭발물이 있었고 따라서 폭발은 엄청났다. 이리역에는 지름 30미터, 깊이 10미터의 구덩이가 파였고, 기차 100여대가 파괴되었으며, 무려 반경 500미터, 지름으로는 1km안의 건물 1600여채가 주거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어 9973명이 집을 잃었다. 59명이 사망했고, 1343명이 부상해 인명피해도 컸다. 8km 떨어진 곳의 건물 유리창이 깨졌고, 30km 떨어진 전주에서 소리가 들렸다고 하니 그 폭발력이 짐작이 간다.

 

   이런 폭발이 발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단 화약같은 위험화물을 실은 기관차는 당시 법으로도 역에서 멈추지 말고 바로 통과해야 했으나 그것이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당시 해당 열차의 담당관이던 36세 신무일씨는 열차를 통과시켜 줄 것을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벌써 사고의 느낌이 오는 그런 익숙한 패턴이지 않나? 그런데 여기서, 조명도 없고 위에서 깜깜하고 춥기까지 한 열차 안에서 열차의 통과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화가 난 신씨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춥기도 하고 화도 나니까. 또 어두워서 촛불을 켰다고 한다. 그런데 그 촛불이 다이너마이트 쪽으로 넘어진 것이 화근이었다. 주변에 불이 붙었고, 놀란 신씨가 도망치기 무섭게 곧 폭발이 일어났다. 2차, 3차 폭발이 이어졌다고...

 

   놀라운 일이지만 신씨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곧바로 체포되어 과실을 이유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아야 했다. 또 당시 삼남극장에서 '하춘화 쇼'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천장이 무너져 내리면서 하춘화씨가 부상을 당하자 당시 무명이던 개그맨 이주일 씨가 그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고, 후에 하춘화씨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성공하게 된다. 이런게 '나비효과'일까?

 

   근래에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충격적인 사건 사고들은 많았다. 보면 사고의 패턴은 대부분 뻔하다. 이번 구미 불산가스 누출 사고도 그렇고... 맨날 매뉴얼이 부실하네 어쩌네 하지만, 그나마 있는 매뉴얼, 원칙이라도 지키면 생각보다 많은 사고들을 막을 수 있다. 안전불감증이 바로 그것이다. 안일한 생각이 큰 사고를 낳는다. 제발 안전수칙과 원칙을 지켜, 앞으로도 그런 큰 사고들, 그로 인한 피해들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2003년 - 열린우리당이 창당하다.

 

   2003년 11월 11일, 열린우리당이 창당한다. 2002년 말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어 2003년 2월에 임기를 시작한지 9개월만이었다. 열린우리당은 '정치개혁'을 전면에 내걸고 있었다. 요즘에도 말이 많은 바로 그 '정치개혁' 말이다. 그리하여 새천년민주당 탈당파 40명, 한나라당 5명, 유시민과 문성근등이 만들었던 '개혁국민정당' 2명으로 등장했다. 새천년민주당 탈당파가 절대 다수였지만 사실상 '개혁국민정당'의 뜻을 이은것이 열린우리당이었다.

 

   열린우리당의 창당 배경은 사실 위키에도 설명이 없고 인터넷상에서도 여기저기에 다양한 주장들이 있으나, 종합적으로 봤을때 그 동안 우리 정치를 사로잡고 있던 지역구도에 있었다고 보는게 맞을 듯 하다. 대한민국을 반으로 갈라 자리잡고 있던 한나라당과 민주당내의 기득권 세력에 뭍혀 정치 전면에 등장하지 못하던 신흥 세력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으로 시기적으로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의 '3김정치'가 막을 내린 새로운 바람이 불던 순간에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튀어나오게 되었다, 라고 보면 맞을 듯 하다.

 

   처음엔 노무현 대통령도 민주당 출신으로 당선되었기에 열린우리당에 동참하는걸 망설였다고 하는데, 당선 되자마자 국회의원 특별교부금을 폐지하려 했던 것들이 실패하는등 원하는 개혁정책이 잘 이뤄지지 않자 자신을 따를 정당을 가져야 겠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그에 동참, 2003년 9월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2003년 11월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돕는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당에게마저 배신자로 낙인찍이며 민주당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고, 결국 2004년 3월 12일에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직무수행이 정지된다. 허나 그는 거센 역풍을 불러오게 되는데, 그 와중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4월 5일에 열린우리당에 입당하게 되며, 이어 4월 15일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과반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새천년민주당은 고작 9석을 얻는데 그쳤고 말이다.

 

   그렇게 정치혁신을 내건 열린우리당은 과반수 집권여당이 되는데 성공하였지만, 4대개혁법안이라 불리는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진상 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 개혁법' 등을 처리하는데 있어 한나라당의 육탄저지등으로 인해 그를 원하는 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선거제도 개편을 조건으로 한나라당이 총리 임명권등을 가지는 '대연정(대연합정부)'을 제안하지만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그를 거부하면서 그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시끄럽기만 하고 얻은 것은 없다' 라는 평가 속에서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과 함께 추락했으며, 일부 의원들이 민주당(대통합민주신당)으로 넘어간 것을 시작으로, 열린우리당은 2007년 8월 18일 결국 민주당에 흡수 합당 된다. 그리고 2007년 12월 진행된 대선에서 민주당의 정동영 후보는 이명박 후보에게 패하게 된다. (왼쪽 이미지는 열린우리당 과반붕괴 당시 경향신문 만평)

 

   어찌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당시 '발목잡기', '반대를 위한 반대'라 불렸던 한나라당의 강한 반대속에서,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대통령은 하고 싶었던 많은 일들을 추진하지 못했다. 그러한 갈등은 사실상 필연이었다. 1년만에 정치판이 뒤엎어질 수는 없었던게 사실이고 말이다. 

 

   이를 보면 최근 안철수 후보와 함께 불고 있는 신당 창당, 제3정당 창당이야기가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안철수도 그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제3정당이 기존 정당들에게 어떤 공격을 받게 될 것인지, 따라서 제3정당이 오히려 그가 하려는 일에 독이 될수도 있는 것를 말이다. 열린우리당이 등장할 때 처럼 새누리당이 현재 다수당이기도 하고 말이다. 따라서 안철수도 여러번 언급한것 처럼 신당창당은 생각하지 않은 듯 하고, 결국 민주당의 정치개혁을 통해 민주당 자체를 제3정당수준으로 바꾸는 방안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맞는 방향이 아닐까? 열린우리당의 역사를 알고 있다면, 방법은 분명 그것이 맞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지?

 

 

 

 

 

 

 

 

11월 11일과 12일의 역사

 

- fin -

 

 

 

 

 

 

오타 수정 (201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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