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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년전, 게티즈버그에서의 링컨.
우리는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경험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러한 정부를 선사해줄 수 있는자는 누구인가?
- 순 서 -
109년전, 1903년 11월 18일
미국과 파나마가 파나마 운하의 건설과 운영에 관한 헤이-뷔노 바리야 조약을 맺다.
149년전, 1863년 11월 19일
남북 전쟁: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게티즈버그 연설을 하다.
11월 18일과 19일의 역사
Wikipedia
1307년 - 전설에 따르면 이날 빌헬름 텔이 아들 머리 위에 올려놓은 사과를 활로 쏘아 맞추다.
1884년 - 우정총국에서 한국 최초의 우표를 발행하다.
1903년 - 미국과 파나마가 파나마 운하의 건설과 운영에 관한 헤이-뷔노 바리야 조약을 맺다.
1928년 - 미국에서 월트 디즈니가 증기선 윌리를 개봉, 미키 마우스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다.
1978년 - 가이아나에서 인민사원의 집단 자살이 벌어지다.
1987년 - 영국 킹스크로스역에서 불이 나 31명이 죽다.
1998년 - 첫 금강산 관광 유람선이 동해항을 출발하다.
2001년 - 닌텐도가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닌텐도 게임큐브를 발매하다.
2005년 -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대한민국 부산광역시에서 개최.
1095년 -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소집한 클레르몽 교회회의가 시작되다.
1863년 - 남북 전쟁: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게티즈버그 연설을 하다.
1922년 - 오스만 제국 최후의 황제 압둘 메지드 2세가 퇴위하여 제국이 해체되다.
1977년 -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아랍 세계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메나헴 베긴 총리와 면담하다.
1980년 - 대한항공 015편 착륙 사고가 일어났다.
1985년 - 냉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비에트 연방 서기장이 첫 회담을 갖다.
1999년 - 중화인민공화국이 무인우주선인 선저우 1호를 발사하다.
#. 1903년 - 미국과 파나마가 파나마 운하의 건설과 운영에 관한 헤이-뷔노 바리야 조약을 맺다.
미국은 정말 지정학적 이득을 최대한 얻기 위해 국가적 대전략에 따라 충실히 행동해온 국가다. 그렇게 행동할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어찌되었건 간에 그들의 그런 모습은 정말 존경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문명게임을 한다면 행동할 양식대로 움직였다고나 할까? 헤이뷔노 바리아 조약과 그에 따르는 역사만 봐도 그렇다.
파나마는 1510년에 세워진 스페인의 식민지였는데 1821년 독립에 성공했다. 이후 몇년 먼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국가들의 모임인 '그란 콜롬비아'(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와, 코스타리카, 페루, 브라질의 영토 일부 등으로 구성된 연합)에 합류한다.
하지만 미국은 미국 가까이에 그렇게 강력한 연합국가가 형성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베네수엘라, 에콰도르등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1800년대에 말이다. 독립주의자들을 향한 미국의 지원이 더해지면서 '그란 콜롬비아'는 분열되었고, '신 그라나다 연방'이 출범(1831)했다가 역시 분열되었으며, 이후 '그라나다 연방'(1858)이 출범했다가 또 역시 분열되었으며, 콜롬비아 합중국(1863)이 선포되기도 했지만, 역시 그 마저도 분열되어 1886년 콜롬비아 공화국에 이르게 된다.
콜롬비아 공화국은 출범 당시 오늘날의 콜롬비아와 함께 파나마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남아메리카에 단일 국가, 단일 연방이 출범하는 것을 막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파나마라는 지역을 차지하는 데에는 실패한 상태였다. 파나마라는 지역을 원했던 것은 바로 파나마 운하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파나마 운하가 건설된다면 태평양과 대서양을 기존에 방식에 비하면 정말 순식간에 오고갈 수 있었다. 미국은 그 가능성을 봤고, 일찍이 프랑스계 회사가 1879년부터 건설하다 2만여명의 노동자 사망자를 발생시키고 1889년 중단된 파나마 운하의 독점적 건설 및 운영권을 가지길 원했다.
콜롬비아 정부에게 파나마 운하의 독점적 건설 및 운영권을 제안했지만, 콜롬비아 정부는 보상이 충분하지 않고 주권 침해라 판단,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 따라 미국은 파나마의 독립을 본격 지원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콜롬비아 정부가 미국의 제안을 거절한지 10개월 만인 1903년 11월 3일, 파나마가 독립을 선언하자 그를 지지했고 미국 해군으로 콜롬비아 정부를 압박하며 그를 도왔다.
파나마는 독립에 성공했는데, 그 대가로 파나마는 운하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영구히 미국에게 양도했다. 미국은 그 지역을 요새화 할 수 있는 권한도 얻었다. 군사적 목적도 분명히 한 것이다. 대신 파나마는 일시불로 당시 1000만 달러를, 9년 후 부터는 연간 25만 달러를 지급 받았다. 이것이 바로 헤이뷔노 바리아 조약이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미국은 1914년 파나마 운하를 완공했고 관리에 들어갔다. 그것은 미국에게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득은 군사적 측면이었다. 급성장하던 미국은 동쪽의 유럽 쪽도 신경 써야 했지만 서쪽의 아시아 역시 영향권 안에 두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를 위해서는 태평양, 대서양이라는 넓은 바다에 강력한 해군이 배치되어야 했는데, 해군력이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쪼개진다면 그는 여간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는 그를 커버할 수 있는 훌륭한 대안이었다. 그런식으로 미국은 대전략을 현실화 해갔다. 하와이를 편입한것도 1898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왼쪽 사진은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는 미해군 군함, 1919)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파나마 운하가 없었다면 미군의 태평양 함대는 비중이 높을 수 밖에 없는 유럽쪽의 대서양 함대보다 취약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일본이 의미 없는 해군력이 주둔했을 진주만에 대한 폭격 계획을 세우지 않았거나, 또는 태평양 전쟁에 미국이 참전하거나 참천해서 이기기 더욱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뭐 역사야 모르는 거라지만 굳이 이야기해보자면 그렇다.
1999년 미국은, 파나마의 끈질긴 요구에 따라 70년대에 약속한대로 파나마 운하를 파나마에 반환했다. 하지만 이도 해군 기술이 발전하여 함정의 이동속도가 증가할 것을 예상했고 실제로 그랬기에, 즉 파나마 운하의 중요성이 전보다 떨어질 것이라는걸 예측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미 미국이 굉장한 강대국으로 성장한 상태이기도 하고... 참으로 파나마 운하에 대한 역사는 흥미롭고, 대전략과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인 듯 하다.
참고글
문명4BTS-(#7-2) 대전략 : 매킨더 이론, http://blog.daum.net/smileru/8887845
문명4BTS-(#7-에필로그) 대전략을 넘어서 -정리, http://blog.daum.net/smileru/8887936
1863년 - 남북 전쟁: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게티즈버그 연설을 하다.
오늘은 미국이야기만 하게 되는 듯?
미국 북부 사람들이 착해서라기 보다는, 주로 남부 쪽에서 노예상태로 독점하고 있는 흑인들을 값싸게라도 쓰고 싶은 북부의 바램에 의해 시작된 노예제 폐지 운동,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국 남북전쟁... (1861~1865)
남군을 패퇴시키면서 남북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이 된 게티즈버그 전투(1863.7.1~3)이후, 인구가 2400명 밖에 되지 않았던 마을 게티즈버그에는 7500명의 병사와 5000마리의 말의 시체가 썩어가며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체들을 절차에 맞게 처리하여 매장하는 것이 이 마을의 큰 문제가 되었는데, 결국 국립묘지를 지어 그곳에 시체들을 매장하기로 결정했다. (오른쪽 사진은 게티즈버그의 시신들, 1863)
국립묘지의 완공이후 장례 준비 위원회는 국립묘지 장례식 행사를 열기로 했다. 그에 따라 밴드와 군악대를 초대했고, 연설가로 미국 국무장관이었고, 상원 의원이었고, 하원 의원이었고, 메사추세츠주 주지사였고, 하버드 대학 총장이었고, 미국 부통령 후보이기도 했던 에드워드 에버레트를 초빙한다. 에버레트는 당시 연설가로 매우 유명했는데, 연설 준비가 필요하다며 국립묘지 장례식 일정을 연기해줄 것을 요구했고, 결국 10월 23일의 행사는 11월 19일로 한달 가까이 연기된다.
이후 11월 2일, 장례 준비 위원회는 링컨 대통령에게 와서 간단히 한마디 해주어 자리를 빛내줄 것을 요청했다. 보름 정도 남은 상황에서 대통령을, 그것도 전시에 초대하는 것은 결례일 수도 있었으나 링컨 대통령은 그를 승낙한다.
행사 당일, 게티즈버그 전투의 시체는 절반도 국립묘지에 이장되지 않았지만 행사는 정상적으로 시작되었다.
행사에서 한달가까이 행사를 미루며 연설을 준비한, 미국 국무장관이었고, 상원 의원이었고, 하원 의원이었고, 메사추세츠주 주지사였고, 하버드 대학 총장이었고, 미국 부통령 후보이기도 했던 에드워드 에버레트는 무려 2시간에 걸친 연설을 한다. 2시간! 엄~~ 청나게 지겨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미국 국무장관이었고, 상원 의원이었고, 하원 의원이었고, 메사추세츠주 주지사였고, 하버드 대학 총장이었고, 미국 부통령 후보이기도 했던 에드워드 에버레트에게, 당시 2400명이 사는 마을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무려 15000명의 유명인사와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끝나서 좋았던 거겠지?)
그리고 음악 한 곡을 듣고 난 뒤 링컨 대통령이 헌정사를 위해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겨우 2분짜리 연설을 한다. 마침표가 9개밖에 안된다.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 we can not consecrate, we can not hallow 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여든 하고도 일곱해 전, 우리의 선조들은 자유속에 잉태된 나라,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믿음에 바쳐진 새 나라를 이 대륙에 낳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나라, 혹은 그같이 태어나고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진 나라들이 오래도록 버틸수가 있는가 시험받는 내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전쟁의 거대한 격전지가 되었던 싸움터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그 땅의 일부를, 그 나라를 살리기 위하여 이 곳에서 생명을 바친 이들에게 마지막 안식처로서 바치고자 모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해 줘야 마땅하고 옳은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이 땅을 헌정하거나, 봉헌 하거나, 신성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싸운 죽은, 혹은 살아남은 용사들이 이미 이 땅을 신성하게 하였으며, 우리의 미약한 힘으로는 더 이상 보탤 수도, 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는 것을 세상은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용사들이 이곳에서 한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살아남은 이에게 남겨진 일은 오히려, 이곳에서 싸운 이들이 오래도록 고결하게 추진해온, 끝나지 않은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남은 일은 오히려, 명예로이 죽은 이들의 뜻을 받들어, 그분들이 마지막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그 대의에 더욱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고, 신의 가호아래, 이땅에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키며, 그리고 사람들을 위한, 사람들에 의한, 사람들의 정부가 지구상에서 죽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1863년 11월 19일,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당시 이에 대한 평가는 뭐랄까, 혼란스러웠다. 링컨의 연설 당시 19세였던 Sarah A. Cooke Myers는 훗날 회고록에서, "저는 당시 대통령이 있는 자리에서 가까이 있었고, 연설을 전부 들었습니다, 조금 짧은 듯 했죠. 연설이 끝난 이후에는 종교행사처럼 위엄있는 침묵이 흘렀고, 박수갈채는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역사가 Shelby Foote는, 링컨의 연설 이후 박수는 약간 지연되었고, 분산되었으며 겨우 무례하지 않을 정도 였다고 말했다. 공화당인 링컨에 반대되는 민주당에 우호적이었던 시카고 타임즈는 "모든 미국인의 뺨은 대통령의 멍청하고 평범한 일용잡부들이나 할 만한 연설이 외국의 지성들에게 발표된 것때문에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라며 원색적으로 그 연설을 비꼬았다. 링컨 역시 연설이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자신의 경호원에게 "그들의 마음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 며 자책했다. 이후 "이 연설을 세상은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미국 국무장관이었고, 상원 의원이었고, 하원 의원이었고, 메사추세츠주 주지사였고, 하버드 대학 총장이었고, 미국 부통령 후보이기도 했던 에드워드 에버레트의 주 연설은 잊혀졌고,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로 대표되는 링컨 대통령의 연설문은 미국의 모든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서 암기하는 연설문이 되었으며, 미국 문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서는 물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이 되었으며, 미국에서 두번째로 유명한 연설문이라는 마틴 루터 킹의 'I Have a Dream' 조차 링컨 기념관 계단 앞에서 열리면서 이 연설을 인용하였으니, 이 연설의 위대함은 더 말할 것이 없겠다.
왜 이 연설은 위대해진 것이었을까? 절제된 언어의 미학과 간결함에 더불어 링컨은 이 2분짜리 연설에서, 미국 국무장관이었고, 상원 의원이었고, 하원 의원이었고, 메사추세츠주 주지사였고, 하버드 대학 총장이었고, 미국 부통령 후보이기도 했던 에드워드 에버레트가 2시간에 걸친 연설에서 담지 못한 미국의 절대가치, 전쟁의 의미와 희생자들의 의미, 남은자들의 할 일, 바로 궁극의 민주주의 국가에 목표까지 모든 것을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미국 국무장관, 상원 의원, 하원 의원, 메사추세츠주 주지사, 하버드 대학 총장, 미국 부통령 후보를 합친것 보다 대통령이 역시 '짱' 인걸까?
여튼 그 연설의 위대함과 함께 링컨도 위대한 지도자로 남았다. 우리 대선 후보들도 길지 않은, 하지만 감동적이고 자신의 본심을 또렷하게 드러낼 수 있는 연설을 한번쯤 해줬으면 좋겠다. 또한 동시에 그에 걸맞는 지도자가 되었으면 한다. 이번에야 말로 우리에게도 위대한 지도자가 등장하기를 빌어보자.
11월 18일과 19일의 역사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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