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0월 28일과 29일의 역사 - 무솔리니와 한국정치, 미디어법 3년, 다미선교회, 밤비노의 저주, 밀비우스 다리전투

스마일루 2012. 10. 26.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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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나치독일의 히틀러. 1940

 

극좌파와 극우파는 서로가 서로를 밟으며 함께 성장한다.

이탈리아는 극좌파의 급성장이 오히려 극우파의 폭력을 불러왔고 그들이 쿠데타로 집권하기까지 했다.

이렇듯 사상의 극단화는 국가를 분열시키고, 정치를 회복불가능한 수준으로 파탄시킨다.

 

어차피 영원히 진보세력만 정권을 잡을 수는 없고, 영원히 보수세력만 정권을 잡을 수는 없다.

중요한건 우리 정치가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이다.

북유럽같은 진보 보수가 융합된 연합정부가 이뤄질 수 있는 국가로 가고 있냐는 말이다.

일단 아직까지는 방향상 그렇다고 생각되지만,

어떻게 될지 모를 과도기, 변곡점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이겠다.

우리의 미래는 어떨까?

 

 

 

 

 

 

 

 

 

- 순 서 -

 

1700년전, 312년 10월 28일

밀비우스 다리 전투가 일어나다.

 

90년전, 1922년 10월 28일

무솔리니가 이끄는 검은 셔츠단이 로마로 진군하여 이탈리아 정권을 빼앗다.

 

20년전, 1992년 10월 28일

대한민국에서 다미선교회 시한부종말론 사건이 발생했다.

 

8년전, 2004년 10월 28일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보스턴 레드삭스가 86년 만에 우승하다.

 

3년전, 2009년 10월 28일

헌법재판소가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의원들이 신청한 미디어법 권한쟁의 심판에 대해 판결을 내렸다.

 

 

 

 

 

 

 

 

10월 28일과 29일의 역사

Wikipedia

 

10월 28일

312년 - 밀비우스 다리 전투가 일어나다.

1886년 - 프랑스미국에 기증한 자유의 여신상 제막식이 뉴욕에서 열리다.

1918년 - 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독립을 선언하다.

1922년 - 무솔리니가 이끄는 검은 셔츠단로마로 진군하여 이탈리아 정권을 빼앗다.

1958년 - 교황 요한 23세, 261대 로마 교황 취임.

1982년 - 스페인 총선거에서 사회노동당이 압승해 38년 만의 혁신 정권이 탄생하게 되었다.

1992년 - 대한민국에서 다미선교회 시한부종말론 사건이 발생했다. 다미선교회는 이날 자정에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불발했다.

1993년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가까스로 1994년 미국 월드컵 진출 티켓을 획득하다. (도하의 기적)

2000년 - 강원도 정선군에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카지노가 개장하다.

2004년 -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보스턴 레드삭스가 86년 만에 우승하다.

2011년 - 신분당선이 개통하였다.

 

 

10월 29일

1675년 - 라이프니츠가 처음 적분 기호로 긴 s (∫)를 사용하다.

1785년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지오반니프라하에서 초연되다.

1897년 -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 탄생.

1923년 - 케말 아타튀르크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다.

1933년 -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다.

1956년 - 제2차 중동 전쟁: 이스라엘이집트시나이 반도를 침략하여 수에즈 운하 너머로 이집트군을 몰아내다.

1969년 - 아파넷에서 컴퓨터 사이의 첫 연결이 이뤄지다.

1980년 - 김대중에게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이 구형되다.

1999년 - '고문 기술자'로 악명이 높던 이근안, 경찰에 자수하고 수감됨.

1999년 - 대한민국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한화 이글스가 창단 첫 우승을 달성.

2007년 - 대한민국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SK 와이번스가 창단 첫 우승을 달성.

2009년 -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의원들이 신청한 미디어법 권한쟁의 심판에 대하여 야당 의원들의 심의표결권이 침해되어 위헌이라고 하였으나, 미디어법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서는 기각하였다.

 

 

 

 

 

 

 

 

 

 

 

#. 312년 - 밀비우스 다리 전투가 일어나다.

 

   312년 10월 28일, 2명의 정제(Augustus, 아우구스투스)와 2명의 부제(Caesar, 카이사르, 정제의 아들), 총 4명이 로마를 다스리던 사두정치체제 상태의 로마는, 최후의 승자를 가릴 마지막 전투를 앞두게 된다. 로마 근교에서 벌어진 밀비우스 다리 전투가 그것이다. 이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막센티우스'가 대결을 하게 되는데, 역사를 몰라도 찍어서 맞출 수 있듯, 뭔가 한번은 들어본듯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바로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 병력이 훨씬 적었음에도 이긴 멋진 승리였다.

 

   이 전투가 유명한 이유는, 일단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제국의 단독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던 사건이어서도 그렇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전투 전날밤 꿈에, 그렇게 로마에서 탄압받던 기독교의 신, 바로 예수가 나타나 내일 전투에서 이길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는 전설 때문이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애초에 예수에게 승리를 빌었고, 그에 빛나는 십자가를 목격했다는 말도 있다. 아무튼, 그 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병사들의 방패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P와 X를 합친 '라바움'을 그리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승리하였다. 그 영광은 예수에게 돌아갔고, 단독황제로 등극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적극 장려하였으며, 후에 '밀라노 칙령' 을 반포하여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기독교를 '제국 종교'로 발전시키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와 꿈을 꾼건지 예수에게 빌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또 병사들의 사기를 반전시키고 정치적 목적으로 종교를 통해 이루기 위해 지어낸 것 일수도 있겠지만, 분명한건 만약 이 사건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아마 그대로 사장되거나, 특정 지역에 신자가 밀집된 종교로 그쳤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극적인 순간이었다.

 

 

참고글

문명5G&K-(#1-5) 종교와 인류 : (2) '밀라노 칙령' 까지, http://blog.daum.net/smileru/8888095

 

 

 

 

 

 

 

 

 

#. 1922년 - 무솔리니가 이끄는 검은 셔츠단로마로 진군하여 이탈리아 정권을 빼앗다.

 

   '파시즘'을 탄생시킨, 1883년에 태어난 무솔리니는 20대 까지는 아주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였다. 또 그에 더해 폭력적 공산주의를 선호하면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전복을 위해서는 타협은 아예 고려하지 않은채 총파업과 폭력쟁위행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는 1902년에는 병역의무를 기피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스위스로 이민했다가 1908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노동당 서기가 된 뒤 1910년부터 본국인 이탈리아로 돌아와 사회주의적 글을 쏟아내는 집필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유명세를 얻는다.

 

   하지만 1914년 그는 갑자기 사회주의자에서 파시스트로 전향한다(사실 이 때는 파시즘이라는 정의 자체가 규정되지 않았었다). 극좌에서 극우로 돌변한 것이다. 그 과정은 명확하지 않으나, 계기는 1차세계대전이었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것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무솔리니는 참전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그런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람들을 선동해 시위를 주도하고 관련된 글을 쓰다가 사회당에서 제명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완전히 파시스트로 전향했고, 결국 이탈리아도 시대의 흐름 속에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무솔리니는 역시 전쟁에 나선다. 하지만 그는 9개월간 전장에서 활동하다 수류탄에 파편 40여개가 온몸에 박히는 중상을 입은 뒤 전역하고, 1917년 복귀한다.

 

   이후 그는 재미있게도 영국 정보부 'MI5'로 부터 자금 지원을 받으며 정치활동을 시작하는데(애초에 그의 전향과 참전주장입장에 영국 정부가 영향을 미쳤을까?), 그러면서 유명한 말을 남긴다.

 

"사회주의는 죽었다. 남은 것은 원한 뿐이다."

 

   그리고 무솔리니는 곧장 '엘리트의 국가지배, 민주주의 반대, 계급 질서, 평등 반대, 국가의 병영화,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 등을 내세우며 '파시즘'을 등장시켰고, '로마 제국'의 영광의 재현을 염원하던 국가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세를 키워갔다. 그 와중에 1차세계대전 참전 예비역들을 중심으로 한 준군사조직을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검은 셔츠단'이다. 그리고 '검은 셔츠단'은 활동에 나서,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회주의자들을 가차없이 살해하거나 폭력을 가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1차세계대전에 연합국으로 참전에 승전한 국가였지만, 애초에 중립적 입장을 보이다 억지로 참가한 탓인지 다른 승전국들 처럼 대접을 받지 못했고, 그런 국가의 정치적 무능을 배경으로 각종 파업이 성행했고 사회주의자들이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매우 폭력적인, 아니, 말그대로 살인적인 '검은 셔츠단'의 등장을, 사회주의자들에게 위협받던 군부, 자본가, 그리고 정부는 환영하거나 그들의 활동에 침묵했고, 그 가운데 수백명이 살해당했다.

 

   그렇게 거칠것이 없었던 '검은 셔츠단'은 1922년 10월 27~29일, '로마 진군'을 감행, 아무런 충돌 없이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무솔리니'를 총리로 세운다. 이후 몇년만에 정당이 해산되었음은 물론, 검은 셔츠단에 의해 반대파들은 모조리 숙청당했고, 무솔리니는 7개 부서의 장관을 겸직하는 등 독재 그 이상의 독재를 보였다. 파시즘을 적극적으로 교육&홍보 했고, 그가 내세운 로마제국의 영광을 찾기 위해 에티오피아를 침략하고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기도 했는데, 그 와중에 '히틀러'와 관계를 맺게 된다. 게르만족의 영광을 찾았던 히틀러와는 달리, 민족구분없이 로마시대처럼 다 이탈리아 제국인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진 무솔리니는 히틀러와 대립하기도 했지만, 결국 '세계정복'이라는 이상은 같았기에 이탈리아도 2차세계대전에 참전했으나 결국 독일과 함께 패전, 이후 무솔리니도 운명을 다했고, 매우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찾아보시길.

 

   이를 보면서 다시한번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건, 극좌파와 극우파는 서로가 서로를 밟으며 함께 성장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는 극좌파의 급성장이 오히려 극우파의 폭력을 불러왔고 그들이 쿠데타로 집권하기까지 했다. 이렇듯 사상의 극단화는 국가를 분열시키고, 정치를 회복불가능한 수준으로 파탄시킨다. 그렇기에 국민들이 분열되며 계급투쟁이 일어나게 되는 양극화를 우려해야 하는 것이고 말이다. 아, 양극화는 경제가 성장할 때 분배가 안될 시, 또는 경제가 침체될 때 있는 사람만 살아남을 시 모두 발생한다는 점 역시 잊어서는 안되겠는데, 우리는 어떤가? IMF전후에 채택된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 이후 2008년 금융위기 전까지는 성장시의 분배문제, 이후에는 침체시의 서민파탄 문제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우리 정치는 여기까지 왔다. 다행히 우리는 복지 문제가 화두가 되면서 정치적 관점이 비교적 수렴하고 있고, 시민사회세력의 등장으로 진보와 보수세력 모두 긴장하는 상황이다. 어차피 영원히 진보세력만 정권을 잡을 수는 없고, 영원히 보수세력만 정권을 잡을 수는 없다. 중요한건 우리 정치가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이다. 북유럽같은 진보 보수가 융합된 연합정부가 이뤄질 수 있는 국가로 가고 있냐는 말이다. 일단 아직까지는 방향상 그렇다고 생각되지만, 어떻게 될지 모를 과도기, 변곡점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이겠다. 우리의 미래는 어떨까?

 

 

 

 

 

 

 

 

 

 

 

#. 1992년 - 대한민국에서 다미선교회 시한부종말론 사건이 발생했다. 다미선교회는 이날 자정에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불발했다.

 

   이거 나도 기억난다. 우리집 근처에도 곳곳에 '휴거'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었던 것이 기억난다. 어린나이에 그를 굉장히 공포스럽게 봤던 것 같다. 9시 뉴스에서 현장을 생중계해주던 것도 기억이 난다. 

 

   신을 믿는 것은 그럴 수 있다지만, 글쎄, 그 신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무자비 하길래 세상에 종말을 선사한다는 것인가? 신이라면 '신스럽게' 전지전능한 능력을 이용해 인간들을 하루아침에 착한것 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바꿔 버리던가 하지, Save&Load도 아니고, 치트키나 '핵'을 쓰는 것도 아니고, 왜 자꾸 Restart를 하려 한단 말인가?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 신은 절대 인류에게 종말을 안기지 않으리라 난 확신한다. 신이 정말 그렇다면, 그런 속 좁고 능력없는 신은 믿을 필요가 없다.

 

 

 

 

 

 

 

 

 

 

#. 2004년 -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보스턴 레드삭스가 86년 만에 우승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위키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복사해 오고자 한다. '밤비노의 저주'라는 항목의 서문이다.

 

   == 밤비노의 저주(Curse of the Bambino)는 미국 메이저 리그의 보스턴 레드 삭스가 1920년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 시킨 후, 수십 년 동안 월드 시리즈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불운을 일컫는 말이다. 

 

   이 속설에 따르면 레드 삭스가 1919-1920 시즌오프 시기에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트레이드 시킨 이후부터 레드 삭스의 불운이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그 이전까지 레드 삭스는 1903년 첫 우승을 시작으로 월드 시리즈에서 총 5회 우승한 매우 성공적인 팀이었다. 그러나 베이브 루스를 트레이드 시킨 이후로는 2004년이 될 때까지 수십 년간 월드 시리즈 우승에 실패했다. 반면, 이전까지 한 번도 우승을 한 적이 없었던 양키스는 베이브 루스를 사들인 후 1920년 홈런왕이 된 그의 활약에 힘입어 명문 구단으로 발돋움, 2002년까지 월드 시리즈에서 총 26회의 우승을 달성하였다. 결과적으로 레드 삭스는 최악의 트레이드를 단행한 셈이었으며, 이렇게 레드 삭스가 오랜 기간동안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것을 언론이 ‘밤비노의 저주’라고 지칭한 데에서 이러한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밤비노는 베이브 루스의 애칭이다.
 
   레드 삭스는 2004년 월드 시리즈에서 86년만에 우승을 거두면서 비로소 오랜 저주의 속설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당시 레드 삭스는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에서 양키스를 상대로 3연패를 당한 뒤 내리 4승을 따내며 리그 우승을 거두었으며, 이어서 벌어진 월드 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꺾으면서 우승했다.
 
   이 저주의 이야기는 보스턴 지역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 일례로, 보스턴을 가로지르는 주고속도로인 스토로우 드라이브(Storrow Drive)에서 흔히 발견되는 ‘Reverse Curve’라고 쓰인 표지판은 낙서를 덧써서 ‘Reverse The Curse’라고 고쳐써지는 사례가 자주 발생했다. 관리 당국은 2004년 레드 삭스가 우승할 때까지 이렇게 훼손된 표지판들을 수리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었다. ==

 

 

 

 

 

 

 

 

#. 2009년 -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의원들이 신청한 미디어법 권한쟁의 심판에 대하여 야당 의원들의 심의표결권이 침해되어 위헌이라고 하였으나, 미디어법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서는 기각하였다.

 

   미디어법...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는지? 이미 기억속에서 잊혀진지 오래인가? 그래서 그렇게들 일단 통과시키려고 하는건데...

 

   미디어법 관련된 논란의 진행과정은 위의 '미디어법' 링크를 클릭하여 확인하면 될 듯 하다. 대리투표등의 절차상 문제가 심각했었는데,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지만 여기서는 간단하게 그 때 그렇게 난리였던 미디어법 통과이후 현재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2011년 12월 1일, 미디어법 통과에 따른 종합편성채널의 방송이 시작된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종편의 시청률은 무려 두배로 증가해서 무려 1%가 안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그 종편중 시청률 1위라는 MBN은, 보도채널에서 종편으로 전환된 이후 바닥을 친 시청률이 다시 이전 수준을 회복한 것이기에, 이 정도 되면 앞으로 두고보긴 해야 겠다만 망했다고 보면 되겠다.

 

   재미있게도, 종합편성채널이 시청률에서 처참하게 패한, 즉 망한덕에 우려했던 종합편성채널로 인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은 것 같다. 모두 보수성향인 4채널의 등장으로 언론의 우경화가 우려되었으나 분명 굉장히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고는 있으나 시청률이 안나오니 아직까지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이고, 또 종편채널과 공중파의 대립이 심화됨에 따라 선정적 프로그램들이 넘치지 않을까 우려되었지만, 좀 그런면이 없지 않아 보이긴 해도 역시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다. 확실히 종편 프로그램들이 선정적이고 자극적이어서 참 문제라고 생각되긴 한다만...

 

   또 TV채널이 4개가 생겼으니 일자리 창출은 절대적인 값으로 분명히 되었다고는 생각하나, 나경원 의원등이 주장했던 것 처럼 신성장동력이라는 말은 아무리봐도 말이 안되는 것 같다. 우리나라 인구수가 작기 때문에 애초에 4개의 채널을 늘린다는 자체가 한계가 있는 말이라는 반론이 오히려 맞는 듯 하다. 또 세계적 방송사들이 국내에 들어와 국내 언론을 잠식하기전에 언론사를 늘려 상호 경쟁하게 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도,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도대체 어디서 그런 헛소리가 나온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외국 방송의 국내 진출은 커녕 시장 개방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조차도 없는 상황이다. 언젠가 발생할 일에 대한 선제조치라기 보다는, 만들어낸 억지 명분이다.

 

   결과적으로 지금 미디어법으로 얻은 것은 무엇인가? 미디어법으로 우려되었던 문제들은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종편채널이 존재하는 이상 상존하고 있고, 미디어법으로 얻을 것이라던 이익들은 보이지 않는다. 종편채널을 통한 언론의 우경화를 달성하지 못해서인지, MBC는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고 지금은 누더기가 되었다. 역사는 미디어법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10월 28일과 29일의 역사

Wikipedia

 

- fin -

 

 

 

 

 

 

현재까지 수정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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